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節齋 김종서

 

  우리는 그를 대호라고도 부른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의미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서 북방에 4군 6진을 개척한 인물로 고려의 윤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우리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그의 별명 때문에 그를 거친 무장으로 오해하지만 당대의 석학이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세종 실록을 편판할 정도로 인정받는 사학자이다. 또한 맡겨진 직책이 무엇이든지 충실하게 해내는 뛰어난 관료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느날 갑자기 정승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 비하여 꽤 많은 직책들을 그것도 하급 직책에서부터 정승이라는 최상급 지책까지 두루 섭렵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다음 백과 사전에 나오는 김종서 항목을 살펴보면 이렇다.

 

  1390(공양왕 2)~ 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장군.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도총제(都摠制) 추(錘)의 아들이다.

 

  육진개척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상서원 직장(直長), 행대감찰(行臺監察)을 거쳐, 1419년(세종 1)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이어 광주판관(廣州判官)·봉상판관(奉常判官)·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을 지냈으며, 1426년 이조정랑, 1427년 사헌부집의·황해도경차관 등에 올랐다. 1433년(세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으로서 이부지선(吏部之選)을 맡았다. 이 무렵 북쪽 변경에서 우디거[兀狄哈]족을 비롯한 여진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는 대책 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북변 강화의 필요성을 강경하게 주장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북방 경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했다. 마침 1433년 우디거족과 오도리[斡朶里]족이 서로 다투는 등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국토 확장에 뜻을 두고 있던 조정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에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어 7,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비변책(備邊策)을 올리는 등 6진(六鎭: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하여 국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1416~43년에 걸쳐 개척된 압록강 방면의 사군(四郡: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토가 두만강·압록강 상류까지 넓어졌다(→ 색인 : 4군6진). 1440년 서울로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그뒤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를 거쳐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1449년 8월에 달달(達達: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지자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사서편찬

  그는 6진을 개척한 용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사 高麗史〉·〈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세종실록〉의 편찬작업을 책임지는 등 학자·관료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1451(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편찬한 〈고려사〉는 본래 1392년(태조 1)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것을 세종 때 몇 차례(1421, 1424, 1442) 개수한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고려사〉의 편찬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정도전 등 몇몇 개인의 가문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등 공정치 못하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김종서·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薺)·정창손(鄭昌孫) 등이 1449년부터 개찬에 착수하여, 1451년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의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 〈고려사〉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우의정으로 승진, 편년체(編年體)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여, 이듬해인 1452년(단종 즉위년)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癸酉靖難:세조의 왕위찬탈사건)으로 위의 사서들에서 그의 이름은 모두 삭제되었다.

 

  계유정난

  그는 세종 때부터 임금의 신임을 받는 관료로서 성장했다. 문종도 죽음을 앞두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등과 함께 우의정인 그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그러나 세종의 여러 왕자들이 다투어 세력 확장을 도모하는 가운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로 그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색인 : 세조찬위). 수양대군은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 등의 모사(謀士)를 얻은 뒤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유수(柳洙) 등 무사들을 규합, 1453년(단종 1) 10월 13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이날 우선 서대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양정·임운(林芸) 등이 김종서와 아들 승규(承珪)를 살해했다. 뒤이어 이들은 단종에게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기에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우선 죽였다고 아뢰고,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소집한 다음 홍윤성(洪允成) 등을 시켜 황보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을 죽였으며, 정분(鄭)·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 보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1680년(숙종 6) 강화유수 이손(李巽)이 김종서의 억울함을 논하였으며, 1719년(숙종 45)부터 후손들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다. 종성의 행영사우(行營祠宇)에 제향되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등의 시조가 전한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태종 시대에 관료로 첫 출발을 하여 세종, 문종, 단종 4대를 섬긴 충신이다. 세종이 한글 창제와 문치라는 소프트웨어를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했다면 북방 영토 개척이라는 하드웨어를 함께 한 사람은 김종서이다. 세종이 세손 단종을 부탁한 인물들이 집현전 학사들과 김종서를 필두로 하는 대신들이었는데 전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후자는 한명의 이탈도 없이 단종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 구심점에 선 사람이 김종서이다. 개인적인 성품이면 성품, 벼슬이면 벼슬, 배경이면 배경, 신념이면 신념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김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황희 정승이 김종서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쥐잡듯이 잡은 것이 아니다. 수양대군의 야심을 저지시킬 수 있는 대항마로 그가 지목된 것도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것이 그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가 한편 도 없다는 것이다. 세종과 단종 시대를 다루는 여러 드라마에 그가 비중있는 조역으로 출연하기는 하지만 단 한번도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없다. 혹 있다면 나에게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만약 있다면 꽤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원래 나는 김종서에 대한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사람, 조선이라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려는 야심가, 혹은 단종이란 구체제를 옹호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했었다. 이덕일씨가 들으면 미치고 팔짝 뛸만한 시각인데 이러한 시각을 나에게 심어준 것은 고등학교 때 접했던 한질의 소설이다. 드라마 작가 신봉승씨가 썼던 "소설 한명회"인데 나중에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이덕화가 한명회 배역을 맡기도 했다. 그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철저하게 한명회의 시각에서, 그리고 수양의 입장에서 사건을 풀어나간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소설 한명회"도 구해서읽어보길 바란다. 꽤 오래전 책이라 지금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법 규모가 있는 도서관이라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명회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도 있다. 수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도 있다. 단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도 있고, 태종을 주인공으로 했던 드라마도 있다. 물론 얼마전 종영한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서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는 찾아보기 어렵다. 매우 비중있는 조연 정도로 등장할 뿐이다. 쉽게 말해 김종서는 이름 값에 비하여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결론은 그의 인생이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임팩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권 통치와 권력이라는 맥락에서 김종서를 보자면 태종이나 수양에 비하여 임팩트가 없다. 자식에게 안정적인 왕권을 물려주기 위하여 개국 공신을 비롯하여 처남은 물론 사돈까지 처형하면서 태조와 대립각을 세웠던 태종! 권력에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자기 동생은 물론 조카까지도 죽이고 일가친척을 노비로 만든 수양! 두 사람에 비하면 김종서가 가지는 무인이나 장군, 권력자로서의 임팩트가 약하다. 문치와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측면으로 이해하자면 그의 임금이었던 세종에게 밀린다. 비극적인 죽음이라면 단종에게 밀리고, 충성이라는 측면으로 해석하자면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에게 밀린다. 수양이 김종서를 너무 전격적으로, 전광석화처럼 처리했기 때문이다. 출세라는 면에서 보자면 권모술수의 대명사 한명회에게 밀린다.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 비해 드라마 제작자들의 입맛을 당길만한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가 잘못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의 특성상 어느 한면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럴만한 임팩트가 그에게 없다는 의미다. 물론 이러한 이유는 그가 너무 자신의 삶과 신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세종의 파트너로서 오랜 세월 북방에 나가 맡겨진 일에 충실하였기에 중앙 정계에서 빗겨나 있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철저하게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으며, 그의 존재감 때문에 수양에 의해서 가장 먼저 살해당한 덕이다. 그의 인생 자체가 주인공으로 부각될만한 포인트가 없으며,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꾸며내기에는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 뚜렷하다. 결국 그는 왠만해서는 주연을 맡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수대비를 보지는 않았지만 김종서에 대한 배역이 결코 조연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단 한번도 주인공이 될만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김종서가 추구한 삶의 가치라는 것이 철저하게 조연이기 때문이다. 그가 수양처럼 왕이 되려는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니요, 한명회처럼 권력에의 의지를 불사른 것도 아니요, 세종의 아들 수양을 선제공격할 정도로 냉정한 것도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태종, 세종, 문종, 단종의 신하로 남기를 원했다. 만약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싶었다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節齋라는 그의 호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이요,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큰 것이다. 김종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한 것이 결코 후회가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이덕일의 책은 역사책답지 않게 읽기가 쉽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같아서 술술 넘어간다. 그렇다고 그의 책이 여타 소설책처럼 역사적인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사료 중심으로 이만한 책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존경할만한 하다. 다만 이덕일의 책은 중간중간에 저자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인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열정이요 장점으로 비춰지겠지만, 나에겐 플러스 요인보다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김종서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수양과 공신의 등장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표출하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시각이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소설 한명회"를 같이 읽어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곳곳에 김종서의 죽음과 공신의 등장은 헌정질서의 파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에서 헌정질서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 차라리 명분이라든지, 유교적인 가치관, 혹은 정당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수긍이 가겠지만 왕조국가 그것도 입헌 군주제가 아닌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조선에서 헌정질서 운운한다는 것은 잘못된 태도가 아니겠는가? 저자에게 약간의 자제심이 동반된다면 그의 책은 더 재미있고, 설득력을 갖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따르는 공신들을 책길 수밖에 없는 수양의 꼼꼼함에 어느 한 분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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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2011-12-25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이덕일의 또 다른 책... 성공한 혁명과 실패한 혁명, 역사에게 길을 묻다...
를 보면... 이덕일이 왜 수양과 공신들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는지...그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saint236 2011-12-25 10:15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한번 구해서 봐야겠네요.

차트랑 2012-01-01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정성의 들여 리뷰를 작성하시다니...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정성은 늘 감동을 동반하게됩니다. saint님의 글을 정성이 가득합니다. 감동받고 돌아갑니다.

saint236 2012-01-01 22:59   좋아요 0 | URL
조선 역사상 안타까운 인물 중의 하나가 김종서인지라 적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조선 역사중 가장 관심이 가는 시대가 김종서의 시대와 정조의 시대입니다. 그 시대의 책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네요.

차트랑 2012-01-0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서의 시대도 매우 마음아픈 역사이고 정조의 정치사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에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