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연설 - 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를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
김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인문학=돈 안 되는 학문”

  “그거 해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가장 깊이 하게 되는 고민이요,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스티브 잡스 때문에 인문학이 재조명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순수한 인문학자로 남는 것은 가난하게 살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는 선언이다. 순수한 인문학자로 남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재정적으로 뒷받침이 되던지, 혹은 교사나 교수와 같은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가지고 있었던 교사라는 직업마저 포기해 버린다. 그것도 더 좋은 직업을 위해서 학위를 따겠다는 그런 현실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냥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라고 한다. 참 현실감각 제로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고대 아테네의 10대 연설가를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 이 또한 현실감각 제로인 선택이다. 

  그래도 연설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면 오바마의 연설이라든지, 혹은 카이사르, 링컨, 케네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이들의 연설을 묶는 것이 훨씬 책을 팔아 먹기에는 좋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도 아니고 이름도 생소한 안티폰, 뤼시아스, 안도키데스, 이소크라테스, 이사이오스, 뤼쿠르고스, 데모스테네스, 아이스키네스, 휘페레이데스, 데이나르코스의 연설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니 책을 팔기는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사고 방식이 이미 서구화된 우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각 연설가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서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10명의 연설가를 다루기에는 책의 분량이 부족했기에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연설가는 정치인이다. 고대 그리스의 10대 연설가라는 말은 곧 그들은 고대 그리스도의 10대 정치인 혹은 정치인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가령 이사이오스는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발휘하지 않았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선생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10대 연설가들은 자신들의 연설 기술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특정한 결단을 하도록 요구한다. 바로 여기에서 연설과 정치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책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만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공격하기에 바쁘다. FTA는 끝장 토론까지 갔지만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참을 만큼 참았으니 강경 처리하겠다는 의사를, 야당에서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만간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예견된다. 오죽하면 국회의원은 국 K-1이라 국민들이 조롱까지 하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난 그 이유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5일 국회를 찾아가 했던 말에서 찾는다.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말은 이렇다. 

  나도 자존심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요구하면 응하게 돼 있는 FTA 합의문 조항이 있는데, 왜 미국에 허락해 달라고 하느냐. 주권국가로서 맞지 않다. 대통령이 그렇게 약속한다. 왜 오바마 (대통령) 말을 믿나. 대한민국 대통령 말을 믿어야지. 나도 1년 3개월 지나면 대통령 그만둔다. 그런데 이렇게 합의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깥세상에 나가 보니 세계가 지금 먹고살려고 혈안이 돼 싸우고 있다. 내가 나라를 망치려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동아일보 기사 인용 http://news.donga.com/3/all/20111116/41908778/1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자존심 운운하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왜 자신을 안 믿는냐 제발 믿어달라고 한다. 국회의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에게 이 말은 농담 따먹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말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말이 틀려서인가? 내용이 어떻든 간에 대통령의 말을 믿어달라는 그의 호소는 절대로 잘못된 호소가 아니다. 다만 그의 호소 이전에 그 호소가 담고 있는 진실성에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국민 담화와 언론을 통하여 보여왔던 대통령의 행위들이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못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뤼쿠르고스에 대해서 이 책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그의 연설의 힘, 수사적 설득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쩌면 그의 말이라면 “작은 것도 큰 것으로, 큰 것도 작은 것으로” 믿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신뢰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신뢰감은 12년간, 아니 남아 있는 기록의 바깥에서 짐작할 수 있는 더 긴 시간 동안 공인으로서 그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던 품성과 실천이 빚어낸 것이겠다.
  국가의 기강을 위협하고도 국가의 신뢰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도 슬쩍 넘어갈 수 있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초연하게 사심을 버리고 종교적인 경건성과 도덕적인 정직성, 윤리적 정의와 공평무사의 정신으로 오로지 아테네의 재건과 아테네 시민의 참살이만을 위해 노력했던 정치 연설가 뤼쿠르고스의 모습이 희망처럼 떠오른다. 지금 우리 곁에는 그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능력과 품성을 가지고 용감하게 정의를 실천할 사람은 정녕 없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몹시도 아쉽고 그리운 시절이다.(p224~225) 

  우리는 흔히 고대 아테네 연설가들의 특징을 말장난으로 이해했다. 삶이 받쳐주든,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교묘한 말기술을 통하여 대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연설가들, 혹은 소피스트들이라고 오해했다. 동양의 귀곡자와 소피스트들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교묘한 말장난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해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말에 힘이 실리지가 않는다. 뤼쿠르고스가 민회 앞에서 나를 제발 믿어달라고 애원하지 않아도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은 이미 그를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그의 품성과 실천이 그의 말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자존심이 있다 믿어달라 하는데도 왜 믿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한다. 뤼쿠르고스의 경우와 반대대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公約을 空約으로 바꾸시는 분들을, 언행일치가 안되는 분들을 국민들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C급 정치인은 권력으로 지지를 이끌어내고, B급 정치인은 말로 지지를 이끌어내지만 A급 정치인은 삶으로 지지를 이끌어 낸다. 

  ps.표지에 이소크라테스의 이름 중에서 "I"가 빠져서 소크라테스가 되어 버렸다. 같이 읽어보면 좋을 책: 귀곡자 교양강의(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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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2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FTA 날치기 가결 소식듣고,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가 답답하니 딱 막혀옵니다.

제발 신뢰할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합니다, 간절하게요.

saint236 2011-11-23 01:05   좋아요 0 | URL
믿어달라는 것이 결국은 이것이네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데 누가 믿어 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젠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