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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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도 알고 있다. 내가 단골로 애용하는 서점에 가면 항상 빠지지 않고 꽂혀 있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촌스러운 표지 때문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촌스럽고 아동틱한 이름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책이라는 점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자 청년이 나에게 이 책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책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하는 나의 말에 정말 좋은 책이라고 강추를 하더라. 원체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인지라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저러나 싶었다. 혹시 내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다 읽으면 빌려 달라 부탁을 해놓았다. 이미 사놓은 책들이 한 가득이요, 그 덕에 대폭 얇아진 지갑 때문이다. 일단 빌려 달라 부탁을 해 놓고 다음날 알라딘을 하던 중 대폭 세일하는 도서 명단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렇게 사지 않으려고 애썼건만 할인 중인 책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주문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 책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까지 이것저것 포함해서 말이다. 꼭 5만원을 넘겨서 주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라딘의 상술에 넘어간 것인지 몰라도 이 책 한권 때문에 5만원 어치의 책을 주문한 것이다.

  빌려 읽으려던 책을 산 것이기 때문에 안 읽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책을 열일 제쳐두고 읽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린 왕자와 같다고 할까? 그렇지만 어린 왕자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어린 왕자가 여러 가지 챕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모자이크와 같다면 이 책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기승전결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읽기 시작한지 몇 시간만에 뚝딱 읽었지만 그 여운은 정말 오래 갔다. 이 책을 권해준 사람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시간을 아껴 미래를 대비하라는 회색 양복의 세일즈맨들. 그들의 삶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들의 삶이 꼭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살면서 시간을 아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다. 온갖 자기 계발서에서도 시간 관리가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친다. 그토록 중요한 시간 관리를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 잠시 쉬는 시간, 이웃들과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들이 대부분 불필요한 것들로 간주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빙하기가 시작된다. 온갖 삭막함과 쌀쌀함, 그리고 고독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과거에 비해 우리 사는 삶이 팍팍해졌다면 물질적인 빈곤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빈곤, 시간의 빈곤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도 보듯이 그렇게 아끼고 아낀 시간이 무엇을 보장해주는가? 그렇게 아낀 시간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가? 아니다. 그렇게 아낀 시간은 결국 회색 양복의 세일즈맨들의 삶을 배불리듯이 다른 헛된 곳으로 조용히 사라져 버릴 뿐이다. 모모와 함께 하는 여행이 나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소진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소진이 얼마나 값진 것이냐 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것과는 다른 의미로 모모는 나에게 또 한 가지 즐거움을 주었다. 모모가 가진 그 특별한 재능이 정말 부럽다.

  하지만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P.22 ~ 23)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 정말 비상한 재주가 아닐 수 없다. 모두 제 할 말만 쏟아 놓는 시대에 모모의 이러한 재능은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재능이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말하다가 주먹다툼을 하는 여의도의 금배지를 단 높으신 분들을 보면서 어린 모모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끌끌 혀를 찬다. 국회 예산 가운데 조금만 전용해서라도 그 분들 모두에게 이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말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이것이 모모의 재능이다. 그렇지만 그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것일까? 국민의 의견을 귀담아 듣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왜 모모의 모습을 닮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혹 동화라고 무시해서일까?  

  어찌되었든 그 분들의 모습이 아니라 모모의 모습을 닮아보려고 노력한다. 모모와 함께한 짧은 몇 시간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얻게 해준 정말 귀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아마 이 책도 젊은이들에게 선물해주는 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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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1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모 읽으면서,
미카엘 엔데는 천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동화 속에 숨겨진 수많은 은유들.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를 가볍게 아름답게 소화해낸
그 책을 무척 좋아해여. 그리고... 세인트님의 리뷰도 참 좋네요.

추운날이예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셔염.

saint236 2010-12-15 14:49   좋아요 0 | URL
여러가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