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생명윤리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배아복제 문제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날 것이다. 황우석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생명윤리에 대하여 진지하고 깊은 토론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 학계와 종교계에서는 진지하게 논의를 거쳤는지 몰라도 이 논의가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생명의 가치와 존중으로 깊이 고민하는 생명윤리라는 말보다는 생명공학, 또는 돈 되는 생명기술, 막대한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신산업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것이 이쪽 분야의 현실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어려운 용어와, 인간의 영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비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와 개념이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말보다는 이 기술이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지, 장애로,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낙관적인 말들이 우리의 귀를 사로잡아 왔다. 그런 현실에서 “생명윤리를 말한다”는 책이 과연 팔릴까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많이 팔렸다. 아마도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후광 효과를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팔렸는지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이 책대로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생명윤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야기하는 드문 책이기에 생명 윤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지금까지 생명윤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영혼, 종교적인 전통 등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에서 논의가 되었다. 그 논의는 대부분 생명을 기술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의는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불치병을 가진 사람들의 희망을 깨어버린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비난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생명공학에서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찬반입장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어떻게 책임있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가깝다. 일단 생명기술을 연구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찬성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들어간 후에 그 기술들을 어떻게 공동체에 책임있고 평등하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한다.  

  일견 어려운 논의같지만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스포츠계에서는 생명 공학을 사용하여 선수들의 근육을 강화하고 능력을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전공학 기술을 사용하여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샌델이 갖고 있는 생명윤리에 대한 기본 입장이다. 

  과연 유전공학을 사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가 한번쯤은 꿈꿔봤던 것들이다. 약하나만 먹으면 키가 크고, 혹은 다이어트가 되고, 유전 형질을 개선하여 보다 똑똑하고 우월한 후손을 만드는 것, 혹은 슈퍼맨이 되는 것 등을 한번은 꿈꿔봤을 것이다. 이런 종류는 아니더라도 유전공학이 발달하면 많은 불치의 병들을 고쳐 인류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꿈은 한번은 꾸었을 것이다. 이러한 꿈에 대하여 윤리적인 잣대로 판단을 내려본 적이 있는가?  

  샌델은 이러한 꿈들이 결국은 우생학이었다고 말한다. 유전공학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을 강하하는 것은 결국 열성인은 제거하고 우성인만 대우하는 새로운 게르만주의, 우생학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나아가 유전공학이란 사회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하여, 병을 치유하는 등 최소한의 범위에서 사용되어야지, 그것을 성형이나, 우성인자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거부한다. 만약 이러한 것을 허용할 시에는 겸손과 책임과 연대하는 공동체 윤리가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더 큰 위험은 유전학적 강화가 일상화 되었을 때, 사회연대에 필요한 도덕 감정을 키우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잘 나가는 사람들은 사회의 최저 수혜자들에게 무엇을 빚졌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어진 선물'이라는 생각에 크게 좌우된다. 잘나가는 사람들이 잘나갈 수 있도록 해준 자연적인 재능은 사실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른바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다. 우리의 유전적 재능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라 주어진 선물이라면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그렇다면 시장경제에서 거둬들인 모든 것에 우리 각자가 전권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잘못이고 자만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남들만한 재능이 없는 사람들과 이익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
  여기서 연대와 '주어진 선물'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겼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성공이 전적으로 자기 노력 때문이 아니라는 의식은 능력주의 사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준다. 능력주의 사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란 우쭐거림과 의기양양함이 밴 기정이다. 즉 성공은 덕에 씌워지는 왕관인데,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가난한 자보다 더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는 가정이다.(P.137 ~ 138) 

  샌델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비단 유전공학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내가 잘나서 얻었다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 재능과 재산에 대한 책임의식이 희박해진다. 그 결과 사회에의 기여라든지, 환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사라져버리고 불법과 불의를 통해서라도 성공하기만 한다면 장땡이라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진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가 아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나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을 게으르다 정죄하고, 무식하며 개인적인 부덕으로 가난하다고 가르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그것 때문에 국민들이 서로 괴리감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끼며 원인 모를 분노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샌델의 책은 분명 생명윤리를 주제로 하여 씌여졌지만 공동체의 시각에서 생명윤리를 논하기 때문에 다른 시각으로도 읽혀질 수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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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열성유전이 우성이죠.
근데 거기서 열성인자를 제거하는 게 우성학이고,
여기서 우리는 돌연변이를 간과할 수 없고...

아직 관심만 갖고 시작도 못했는데,'정의란 무엇인가'부터 찾아 읽어야 겠네요,불끈~^^

saint236 2010-10-13 22:32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 보세요.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