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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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과 과학과 신화가 만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조합이다. 조합 자체가 불가사의하고, 절대 불가능할 것 같다. 책의 표지에 적힌 각각의 특징은 이렇다.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서 과연 어떤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저 그렇고 그런 따로 국밥이 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재료가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비빔밥이 될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금찍한 키메라를 만들어 낼 것인지?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책을 폈다. 기대는 상상이상이다. 정말 재미있다. 만화책처럼 술술 넘어가는 철학책이 있을 줄이야. 첫페이지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가쁘게 달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철학과 신화, 그리고 과학이 각자의 특징을 지키면서 상대방에 대하여 열린 태도로 임하게 될 때 세가지 모두가 풍성해 진다는 저자의 관점 때문이다. 저자는 머릿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화-과학-철학의 연기는 각 분야의 개성을 전제한다는 점만 은유적으로 짚고 넘어간다. 신화는 즐겨 진리의 놀이를 하고, 과학은 아직 천진난만하게 자연의 거울이기를 바라며, 철학은 현실의 베일을 끊임없이 벗겼다 덮었다 한다.(P.5) 

  진리를 놀이로 말하는 신화, 자연을 비춰보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 현실의 베일을 끊임없이 벗겼다 덮었다 하는 철학. 세가지가 상대방을 무시하고 갂아내리지 않고 용납할 때, 각자의 개성을 존중할 때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책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은 철저하게 이 관점으로 씌여졌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화와 과학을 접목했다는 구성뿐만이 아니라 주제 자체도 결국은 상대방을 용납하는 열린 자세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 서평의 제목이 되는 슬픈 미노타우로스는 이 책의 7장의 제목이다.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전설은 이렇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이 왕이 되기 전에 포세이돈 신에게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신들의 가호를 받는다는 증거로 바다에서 황소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포세이돈 신이 황소를 보내주었지만 그 황소가 너무 멋이 있어서 차마 잡을 수 가 없었던 미노스 왕은 다른 황소로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 화가 난 포세이돈 신이 벌을 내려 그의 아내 파시파에스는 황소에게 욕정을 느끼게 되고 다이달로스의 부탁을 받아 황소와 관계를 갖고 미노타우로스라는 반인반수를 낳게 된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를 시켜 미로를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었고 크레타의 침공을 받은 아테네는 9년마다 남녀 7명식을 제물로 바치게 된다. 어느날 아테네 왕의 숨겨진 아들 테세우스가 자처하여 크레타의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게 된다. 이때 테세우스에게 반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는 실 한뭉치를 주었고 그 실 때문에 테세우스는 무사하게 미궁에서 빠져 나온다.  

  저자는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영웅 테세우스가 아닌 미노타우로스에게 맞춘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신의 벌을 받아 왕비와 황소 사이에서 태어나 미노스 왕에 의하여 미궁에 갇히고, 테세우스에 의하여 죽임당한 슬픈 존재 미노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는 철저하게 타인에 의하여 타자화된 대상일 뿐이다. 인간과 황소 사이에서 태어난 키메라, 왕의 치부를 드러내는 존재, 인간이 아닌 몬스터, 흉폭한 괴물 등 온갖 악한 존재로 타자화 되었다. 그 결과 테세우스라는 영웅에 의하여 미노타우로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만약 이 신화를 미노타우로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자신과 다른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가두어 버리는 미노스 왕의 옹졸함과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해 버리는 테세우스의 과격함에 촛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아마도 조지 프레드릭 와츠라는 화가는 이런 생각을 했나 보다.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작품 미노타우로스는 너무나 슬프고 처연하다. 128p에도 이 그림이 실려 있다. 

 

  너무나 슬픈 미노타우로스의 눈망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왜 나를 이곳에 가두었는가? 내가 당신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데 용납하기 어려운 일인가? 나를 당신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고 당신들의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 수는 없는 것인가?" 물론 외모라는 말을 입장이나 태도, 정치적인 견해 등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저자는 슬픈 미노타우로스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공상 과학의 수준으로까지 생각을 넓히지 않더라도, 별난 개체들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생명체의 공존 능력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명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며, 그것이 곧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는 '있음은 있다'라는 동일성 논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함께 있을 수 있음이 곧 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동일자의 존재론이 아니라 차이로서 공존론이다. 개체와 개체들의 사이가 곧 차이라면, 각 가치는 차이들 사이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 중심주의를 체념해야 한다.(P.129 ~ 130)  

  결론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편가르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미노타우로스라는 존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미노타우로스는 신화 속에 나오는 황소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가 아니라 나와 입장을 달리하는 상대편이다. 미노타우로스를 만들어낸 우리는 용맹스러운 테세우스가 되어서 가꺼이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테세우스들이 존재하는가? 자유주의라는 테세우스, 민주주의라는 테세우스, 시장주의라는 테세우스, 민족주의라는 테세우스, 지역주의라는 테세우스, 조중동이라는 테세우스 등등등. 이 많은 테세우스들은 기꺼이 미노타우로스를 만들어 낸다. 빨갱이라는 미노타우로스를 시작으로 하여 좌파 미노타우로스, 민노당 미노타우로스, 반기업 미노타우로스, 호남 미노타우로스 등등등. 사회 곳곳에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타자화 된 미노타우로스들이 넘쳐 난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려는 용맹한 테세우스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배제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끊임없이 미노타우로스를 만들어 내는 체제. 이것이 바로 메두사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사회 곳곳에서 느껴지는 메두사의 전투적인 시선 때문에 미노타우로스는 오늘도 슬프다. 그리고 오늘도 두려움에 떨며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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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2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석 선생님의 <일상의 발견>이었나. 그걸 '진중문고'로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 이후로 도통 못 읽었는데..반가운 리뷰 잘 읽었습니다.^^

saint236 2010-05-12 09:51   좋아요 0 | URL
일상의 발견이라. 땡기는데요.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님 아이디를 예전부터 보면서 궁금했던 것인데 혹시 얼그레이가 홍차 얼그레이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