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0788182193

 

오늘이 내가 페이스북 개설한지 8년됐다고 써프라이즈를 해 준다.

그런데 그게 넘 마음에 든다.

그냥 개설만하고 거의 방치해 둔 상탠데

이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애정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알라딘은 뭐 좀 안 해주나?

그럼 좀 더 애정해 줄 텐데...

알라딘 개설한지 언젠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하다.ㅠ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3-18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9 13:3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점점 더하는 것 같아요.ㅠ

psyche 2018-03-1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큰 아이 감시?용으로 계정을 만든 후 제가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몇년 전 오늘 그거 저도 맘에 들더라구요. 네이버 블로그에도 나중에 그 기능을 만들었어요. 알라딘 서재는 기능도 별로 없고 사용하기도 불편한데 서재 이웃님들이 좋아서 이렇게 쓰게 되네요.

stella.K 2018-03-19 13:38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스북이 선전 도배가 많고
알 수도 있는 사람해서 다닥다닥 붙는게 많아서
좀 어지럽더라구요.
이 사람을 아는 척 해 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되구요. 그래서 안 쓰는데 최근 아는 분이
그곳에 계셔서 소통하느라 자주 가 보는 편이에요.
나름 장점도 있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끈끈하기로는 여기만한 곳이 없긴하죠.^^

서니데이 2018-03-1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stella.K님의 페이스북 가서 보고 왔어요. ^^
오늘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서늘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2018-03-19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9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역시 스웨덴 영화는 낮설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많이 접하게 되는 영화는 우리 영화를 비롯해 허리우드와 아시아 메이져 영화, 서유럽 몇 개국으로 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볼 영화들이 너무 많아 권역을 넓히지도 못하겠다. 그나마 스웨덴 영화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 수년 전 <렛 미 인>의 선전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렇게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권 영화를 낮설어 하는 건 그것이 주는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배우들 역시 특별히 아는 바가 없어서는 아닐지? 그나마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미카엘 니크비스트란 배우는 다소 풍채도 있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친근감마저 준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노미 라파스란 배우는 코에 피어싱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한 것이 전사 같은 모습을 했다. 좋게 말해 전사지 세상에 대해 잔뜩 적대감을 품은 모습이다. 이런 역을 맡은 배우를 단번에 좋아하기란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긴 2009년도 영화를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게 시대에 뒤쳐진 느낌이긴 하다. 그동안 스웨덴을 비롯한 동유럽권 영화가 우리나라에 나름 꽤 소개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제와 낮서니 어쩌니 하는 건 내가 게을렀음을 자인하는 것 밖엔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뒤늦게 나마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했던 건 문학동네에서 최근 다시 복간된 <밀레니엄> 시리즈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와 원작이 다소 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했을 테고, 영화를 보고 책으로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던가.

 

총 4부작이라지만 한 부, 한 부에 붙힌 제목도 범상친 않아보인다. 그에 따라 영화는 현재 3부작만 나온 모양인데 네*버 평가에 따르면 1부를 제외하곤 이렇다할 흥행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뭐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은 하다. 내가 또 스릴러라지만 퇴폐적인 요소는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마냥 좋아라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만했다는 건 잘 만들었단 말과도 같은 말이다.

 

앞서 여자 주인공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이 여자 확실히 좀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의 삶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막 사는 것 같다.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적 취향도 양성애를 보이는 것도 같고, 나중에 남자 주인공과 섹스 후 다음 날 남자가 해 준 음식을 먹는데 토마토 케첩을 얼마나 많이 뿌려 먹던지. 병의 반 이상이 앉은 자리에서 없어졌다. 그것도 알고 보면 설탕 덩어리라던데. 그뿐인가? 기회있을 때마다 담배를 피워댔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이야 젊어서 모른다지. 늙으면 다 독되고 병 된다.

 

그런데 난 이 영화에서 딱 두 장면에 꽂혔다. 하나는 여자가 어디를 가는데 하필 한 패거리의 건달들한테 걸렸다. 그것도 무슨 지하 횡단보도를 지나가는데 부딪친게 화근이었다. 건달들  4명과 싸우는데 남자 4명은 여자 17명과 맞먹는다. 즉 17대 1과의 싸움. 그런데 여자 주인공 리스베트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한다. 물론 여기저기 다 터졌지. 남자 장정 넷이 휘두르는데 멀쩡하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터지는데도 끝까지 악랄하게 싸워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 그건 비교적 영화 초반에 흘렀는데 순간 이 영화 끝까지 봐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생기더라. 세상 보기 좋은 구경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지 않던가? 싸움은 역시 백중세로 이기는 것 보다 힘들게 이길 것 같지 않은데 이기는 게 보는 맛은 더 있다. 측은하기도 하고 어째쓰가 하는 짠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구나 남자들이다. 아무리 건달이라지만 쪼잔하게 여자와 지나가는 문제로 시비가 붙어 싸울 생각을 하다니. 몇 마디 하고 지나가도 되겠더만. 그래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 더 있지. 똥파리라고.

 

그런데 이 리스베트 갈수록 더 매력적이다. 스스로 문제해결을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실 그녀는 범죄자로 교도소는 나왔지만 보호관찰 대상이다. 근데 그녀를 보호관찰하는 관찰사가 천하에 다시없는 변태 시정잡배다. 리스베트의 약점을 노려 돈을 갈취하고 성상납을 요구한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처음엔 순순히 당해주는 척하지만 역으로 헛점을 노려 다시는 나쁜 짓 못하도록 철저한 응징을 한다. 오죽하면 그의 살에 나는 변태라고 문신을 다해줬을까? 당연 아프다고 난리 부르스를 추는데 보는 나도 처음엔 어머머머 얼마나 아플까 하다가 이내 쾌재를 부르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또 그런 나를 보고 스스로 놀랐다. 아니 내가 남의 고통을 보고 이토록 쾌재를 부르다니. 착각이겠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모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죽이는 차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의 고통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걸 보면 그렇게 회개를 해도 미쳐 다 쫓아내지 못한 악마의 본성이 남아 있음이다. 어떻게...ㅠ 

 

물론 같은 여자라면 아무리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어도 그렇게까지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필 내가 이 영화를 본 때가 모든 것은 깔떼기로 통한다는 미투운동이 한창인 요근래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어땠겠는가. 마침 이 영화 전편에 깔린 내용 역시 성폭력이다. 아무튼 리스베트가 자신의 보호관찰사에게 나는 변태다란 문신을 새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는 못할망정 앞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전기충격기 착용 의무화를 법으로 지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여자들은 어떻게 그 많은 세월을 남자들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무런 법적 대응도 보호도 못 받고 살아왔던 걸까? 지금이야 미투운동 때문에 성폭력이 얼마나 줄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또 한풀 꺽이면 언제 어디서 고개를 들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도 세상이 달라졌겠거니 하고 맘놓고 살아도 되는 걸까? 알다시피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한테 당한다. 남성들의 짐승 같은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쳐도 거기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이 영화의 리스베트처럼 전사가 되야하는 걸까? 그럴 수 없다. 그럴 때 전기충격기 하나 정도는 몸에 품고 달려드는 짐승의 모가지나 거시기에 전기충격을 가해 자기 몸 하나 정도는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더 노련하면 신고 시간까지 확보하면 더 좋고. 아무튼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구.

 

영화 속 리스베트를 보면서 여성도 강해질 필요는 있겠다 싶다. 지금 남자들 중엔 미투운동을 꽤나 못 마땅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소 때 뭐하고 이제와 미투운동한다니까 생난리냐고. 글쎄,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 여자들도 이렇게 해 보는 것이 이번 생엔 처음이라. 확실히 영화속 리스베트처럼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되야할 것 같다. 정말 그런 세상이 왔을 때도 그런 말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영화는 퇴폐적이면서도 우아하고, 뭔가 묵시적이도 한 것이 보는 맛이 남다르다. 책으로 볼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 그런데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긴 하다. 리스베트라니. 뭔가 리스펙트의 이미테이션 고유 명사 같기도 하고. 우린 앞으로 이런 전사 같은 여자를 존경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03-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레니엄이 영화가 2개이라고 알고 있는데, 누미 라파스 나오는 스웨덴 영화 보셨나봐요.
저는 책은 보고 영화는 안 봤는데, 페이퍼 읽으면서 영화는 책보다 무서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북유럽 책들은 인명과 지명이 낯설어서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읽다가 한번 더 찾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밀레니엄도 그렇고, 요 네스뵈나 다른 북유럽 작가들도요.
stella.K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3-18 14:00   좋아요 1 | URL
앗, 네이버에 보니 3부작까지만 나와있네요.
미국판도 있긴 하지만 평은 스웨덴 것만 못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4부작은 안 만들었을까요?
아무래도 흥행이 저조해서 4부작까지는 만들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걸까요?

영화를 보면 책으로는 잘 안 보게되는 것 같아요.
책이 훨씬 좋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맞아요. 북유럽이 지명이나 인명이 낮설어서.
그래서 저도 <렛 미 인>을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어요.
요 네스뵈 좋다고 하던데 저도 읽기는 좀...

cyrus 2018-03-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 성추행의 가해자 대부분이 피해자의 지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아요. 이렇다보니 가족 내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해요.

stella.K 2018-03-18 14: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미투운동을 타고 가정내 성폭력도 곧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끔찍할 것 같다.ㅠ

저어니 2018-03-18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성년자 라면 몰라도 성폭력을 당한 장소가 호텔 또는 여관등 폐쇄된 공간이라면 이미 그건

성폭력이 아니라고 본다. 상관이 부른다고 상관 혼자있는 호텔방으로 업무거리를 들고 보고하러

갔다? 상관이라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하부직원은 철저히 계산했을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내 인생은 지금부터 탄탄대로야 했겠지.

그런데 왜 미투했나? 계산에 차질이 생긴것이다. 공식이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고. . .

위에 올라온 배우의 검고 깊은 동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아닌 <밀레니엄>을 읽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정규웅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대는 나에게 왠지 모를 원죄의식이 있다.

어려서부터 작가가 꿈이었던 내가 그 꿈을 버렸던 건 순전히 80년대를 잘못 인식한 때문이었다. 즉 당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단 말이다. 80년대 하면 군사독재로 대비되던 시절이었다. 민주화와 최루탄(또는 화염병), 주사파, 전두환의 정권 탈환 등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문학만이라도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청정지역으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참여문학이었으니. 숨이 막혔다. 더구나 그 시절엔 민주화 하면 빨갱이 공산당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문학 역시 오염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정말 머리가 크긴 커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건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남는 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읽고 말 책. 그나마 거들떠라도 보면 다행이다. 쳐다도 보지 않을 책이 쳐다라도 보는 책 보다 훨씬 많은 세상에서 내 책이 후자에 들 가능성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독자로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데 그럴 때 작가는 어떤 마음이겠는가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 참담함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우연찮게도 90년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 모처에서 작가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땐 그나마 또 그렇게 되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야 되겠나 그런 마음으로 다시 작가의 꿈이 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원했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가는 작가였다. 그땐 정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신춘문예 따위는 가볍게 제치고, 우리나라 대표문학상 이를테면 이상이나 동인 문학상 수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쉽게 얻은 기회는 또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나락에도 길은 있더라.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은 내가 다시 일어나 찾아간 곳은 시인 김정환 선생이 하시는 창작 학원이었다. 창작은 학교에서나 배우는 건줄 알았는데 이런 학원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거길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어찌 보면 신선이 사는 곳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참여문학을 했던 작가들이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내심 놀라웠다. 그토록 거부했던 내가 참여문학의 당사자들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그들은 하나 같이 강의 도중 지나간 세월을 얘기했다. 하긴, 그때가 90년 대 중반으로 그들 가슴속엔 그 뜨거웠던 80년대를 아직 잊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빨리 그 시절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 또 그 때문에 내 눈엔 그들이 더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를 견뎠던 그들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신선같이 앉아 수강생들에게 글쓰기나 가르친단 말인가. 물론 그들의 하는 일이 원래 글을 쓰고 그렇게 필요하면 후학도 가르치고 하는 일이겠지만 뭔가 모를 낮선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또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시절 문학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저 엄혹한 80년대 참여문학을 해서 내가 숨이 막혀 문학을 멀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참여문학이 나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난 현실인식을 전혀 하지 못하는 미욱한 독자였던 것이다.

 

책은 앞부분에서 한수산 작가의 필화사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아는 지인과 술자리에서 몇 마디 시국을 논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지 않는가. 그 앞에 자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나라에서 비판 좀 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게 빨갱이 공산주의와 다를 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박완서 작가는 문학의 효용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을 주고 힘이 돼주는 것(195p)이라고 했다. 어느 시대고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었겠지만 이 시대의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4, 50년대에 태어나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시대다. 그 시절 그들의 나이는 대략 3, 40대의 나이었을 것이다. 가장 혈기가 왕성하고 그들의 붓끝이 가장 날카로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민중을 대변하고 대신 울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보는 시각이 전혀 틀리지마는 않은 것이 얼마 전 읽은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에서 그런 말을 한다.    

 작가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낸다. 우리 전통 장례 풍습으로 치자면 유족과 함께, 유족들을 대신해 곡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문학은 민주화를 통해 ‘5월 광주에 대한 막중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빠르게 현실에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중략)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도록 가르친 문학이 1990년대 이후 위기에 직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설 보다 현실이 더 극적인데 누가 문학 작품을 사서 읽겠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자세마저 보기 어려워진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183p). 

 

그렇다면 내가 그 창작 학원에서 본 80년대 작가들이 90년대가 되면서 신선 같아 보였던 것은 아주 잘못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의 이슈가 주어졌을 때 전력투구하다 그것을 달성하거나 사라져버리면 그 순간 노쇠해져 버리는 것이다. 80년 대 참여 문학을 했던 그 쟁쟁했던 작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하는 건, 그 시절 문학이 정말로 참여문학 일색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대세였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참여문학을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또 이것을 두고 작가들 간에 파가 나뉘어졌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1982년부터 내가 어떤 책을 읽어왔나 소위 완독 리스트를 기록해 왔는데 그해의 베스트셀러를 읽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별로 참여문학의 성격을 띠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참여문학 일색은 좀 과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80년대에 문학 활동을 했던 작가들은 80년대 주류문학이 해체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미리 앞서 내다보고 활동을 했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 시대의 문학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작가 보단 평론가나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우린 또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작가가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활동상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책이 나와 줘서 얼마나 반갑던지. 무엇보다 저자가 신문사 문화부 기자 출신이다. 난 이런 문화부 기자들이 쓴 책을 좋아한다. 그들이 직접 발로 뛰고 간결한 문장으로 써낸 책들이 좋은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가와 작품의 이면은 잘 모를 수 있다. 그럴 때 기자들은 그런 걸 취재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가 있다. 작가는 너무 힘들다. 물론 세상에 힘들지 않은 직업이 몇이나 되겠냐만 난 다음에도 생이 있다면 그땐 작가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책은 80년대 활동했던 문인들을 다룬 만큼 물론 민주화를 비껴가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당대 문학이 참여문학만을 의미하지 않듯 한 작가, 한 작가 그들 문학의 특징과 삶을 잘도 포착해냈다. 읽다보면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자기 색깔을 내며 활동할 때 나는 너무 우리나라 문학을 과소평가하고 홀대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70년대는 나도 한창 자라느라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80년대는 뭔가 사고 체계도 얼마만큼 자리를 잡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난 우리 문학을 보는 안목을 키우지 못했다.

 

지금도 난 우리나라 문학이 재미없는 줄 안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어느 점에선 틀린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들이 문학을 생산하면 독자는 소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사이를 연결시켜고 유통시키는 중간자들(평론가, 기자, 서평가 등)의 역할이 너무 미약했던 건 아닌가 한다. 뭔가 여기저기서 얻어 들리는 말이 있어야 사 볼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엔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 소리가 높다. 작가(가 되려는 자)와 심사위원간의 유착이 어느 정돈지 나 같은 독자는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것에 대한 좋고 나쁨의 평가의 몫을 독자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나 평론가를 포함한 서평자들은 어디에 뭐가 있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좀 더 충실히 해줘야 하지 않을까?

 

특이한 건 저자는 현존하는 작가 몇몇을 빼놓고 매번 그 작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쟁쟁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나 개인으론 이청준과 박완서, 박경리 이 세 작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저자가 옛 사람이긴 한가 보다. 간혹 읽다보며 여류라는 말을 여과 없이 쓰고 있어 눈에 거슬렸다. 이건 교열 과정에서라도 뺏어야 했던 건 아닐까? 모처럼 선물 같은 책에 이것 하나가 오점으로 남았다. 다음엔 출판사의 좀 더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3-17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박완서, 박경리 같은 원로작가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쭉정이 작가들이 설치는 문단을 비판했을 거예요.

stella.K 2018-03-17 12:26   좋아요 0 | URL
그나마 조정래나 황석영 작가가 아직은 건재하잖아.ㅋ
정말 80년대 작가는 읊을만한 작가가 있는데
90년대부턴 과연 30년 뒤에도 기억될만한 작가가
얼마나 있을지 몰라. 기껏해야 김영하나 은희경
김연수 정도가 될 것 같은데 80년대 작가에 비하면
현저하지. 문학의 위상을 키우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ㅠ

2018-03-17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7 12:31   좋아요 0 | URL
와우, 아직도 신춘문예 응모! 대단하네요.
사실 우리나라는 등단 나이를 설정해 놓는 경향이 있죠.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말 정도로 잡고 있잖아요.
그 나잇대 등단하면 거의 천재죠.
등단한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신춘문예도 신춘문예지만 일반인도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창구가 많이 열려야 할 텐데
우리나라는 참 그런 게 많지 않아 아쉬워요.ㅠ
 

미투 운동이 불일듯 일어나는 과정에서

한 탤런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말이 많은 것 같다.
누구는 마녀사냥이라고 했다가 삭제했고,

누구는 미투 운동이 음해 세력이 있다고도 하고.
미투 운동을 오히려 지지할 것 같은 사람들이 그러고 나오니까
좀 실망이다.

또 누구는 죽은 자가 비겁하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비난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섣부른 동정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가장 상처 받았을 사람은 유가족들, 특별히 그의 아내와 딸일 것이다.
그들도 여자다.  

 

앞으로 이 보다 더한 일이 생기더라도 미투 운동은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받던)가 죽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피해를 입고 죽어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처럼 기도가 간절해지는 때도 없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3-1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2 18:18   좋아요 1 | URL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한참 뒷걸음질 치게 될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남성주의 벽이 두텁다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고.
선진국일수록 여성이 대우 받잖아요.
상처 받은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ㅉ
 
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알라딘이 서재라고 하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한 초창기 때였다. 지금이야 개인 블로그 하나쯤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때는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도, 누구와 인사를 하고 친구를 맺어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수줍게 내 서재에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었다.

 

그는 지금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긴 제목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2000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 홈피를 운영하면서 알라딘 서재가 생기자 함께 운영을 한 것인데, 저자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평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쓰기도 많이 쓰지만 다방면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황해문화> 편집장이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글은 직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서재에 먼저 다가와 인사해줬다는 건 나에게 꽤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내 허접한 서재에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성격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나 덥석덥석 아는 척 하는 성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먼저 손내밀어줬으니 고마울 밖에.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인연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을 같은 알라디너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이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나는 사람을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그 토록이나 많은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홈피를 근거지로 또 어디선가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나의 성격이란 늘 다니는 경로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어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에게 정말 촉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도 그랬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문득 생각이 나곤했는데 그의 책이 예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겠거니 했더니 세상에 나오려고 이렇게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하면서도 각잡힌 글을. 그의 글은 감히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고 서평의 좋은 모범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보고 싶으면 그의 서재로 가 살짝 보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주인 없는 서재에 가기란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기운과 손이 닿지 않는 집이 흉가가 되듯 서재 또한 주인이 없어 소통하지 못하면 그저 방기될 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좋은 글은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터넷에서 야금거리고 있는 건성에 차지 않는다. 책은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맛도 있고.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만큼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마음에만 있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책중에 내가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읽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책도 나에게 그런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평소 저자가 덕을 많이 쌓았거나 아니면 알라딘에서 내게 먼저 아는 채 해 준 공덕 때문일 것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마침 어느 고마운 알라디너가 책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지목해 덥석 받아버리고 야금야금 읽었다.

 

뭔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건 오랜 친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는 느낌과 맘먹는다. 전기도 전신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절 편지는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주효한 매체였을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 한 통을 받으려면 평균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책은 어느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사내의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분명 서평 집이면서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다니. 그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틀리지 않다면, 사람이 인생을 4, 50년쯤 살면 뭔가 갈무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어느 집 자식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를 만나왔는지 어떤 형식으로든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고, 설혹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삶을 들여다 볼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나도 2년 전 책을 낼 기회가 있었을 때 호기롭게 이참에 나의 독서 경험을 빙자한 일종의 자서전을 모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 가장 오래 해 왔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 겸 편집장이 그냥 여태까지 써왔던 서평을 다듬으면 좋겠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모의를 접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얼굴 붉혀지는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이미 난 내 책에서 내 지나 온 삶을 언뜻언뜻 얘기했으니 아쉬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고 본격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써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그는 <황해문화>를 벌써 20년째 편집 일을 하고 있다. 매번 그것을 발행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10년 내에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우리가 책을 읽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독서를 그저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 아직 자신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가 되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며 깨줄 책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믿기에 우린 꾸준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독서는 부단한 축적물이기에 그런 책을 못 만났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오만일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었던 크게든 작게든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뭔가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정짓게 만든다.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커서는 노동을 하다 대학을 갔으며 거기서 운동(데모)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 편집장이 됐다고. 그게 과연 책없이 가능했을까?

 

젊었을 땐 책을 전투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책을 무조건 빨리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드니 그것이 좀 달라졌다. 저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읽은 책에 나의 지나간 삶을 조금 조금씩 묻어 놓는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가 되고, 그가 쓰는 문장은 제물이 된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갈수록 그의 글은 더 깊어지고, 비문이 적어지며, 신중해진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카프카의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또한 그건 정확히 자서전이 아닌 고백록이나 참회록쯤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자기 삶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이 책처럼 책속에 넌지시 묻어놓는 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이미 쓴 적이 있긴 하지만)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두 번째 에세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세이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다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속 얘기는 웬만치 친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책에 썼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독자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또 그것은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정말 지적이고 매끄럽긴 한데 삶이 드러나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책을 썼을 텐데 삶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독서의 재생산물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쓰는 것으로서(독후감이 됐건 서평이 됐건) 어떻게 나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감동하는 책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말했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314p) 이것은 책을 읽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마침내 그만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그만의 세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자기 블로그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블로그에 이름 하나 제대로 붙여줄 생각을 못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었던 것 같다. 닉네임의 뜻이 뭐냐고. 그런데 그에게 만큼은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바람구두야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따온 것일 테고, 그 긴 블로그 이름은 뭘 뜻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물어봤을까? 거기에 나의 궁금증까지 더하기가 뭐했다. 그의 블로그를 탈탈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서평 글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려면 너무도 익숙한 기존의(자본주의적) 문화와 결별하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문화망명이라고 불렀다.(290p) 다른 설명이 뒤에 나오지만 이것만 읽어도 그의 서재명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글엔 그다운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사람 저마다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훨씬 의미 있고 읽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이런 서평집이 요긴해지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편집의 달인(?)답게 읽은 책을 요약을 잘 해 놓고 있어 굳이 그 책을 힘들 게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독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대로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며 읽어 볼 마음이 비로소 생기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서평집은 유용하다. 사실 저자와 나는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르다(물론 저자가 한 수 위다). 다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몇몇 책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이었을 텐데 보관함에 넣어 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서평집은 지은이의 독서와 삶이 녹아져 있어 읽는 맛이 다르다. 우리가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다면 뭣 때문에 서평집을 읽겠는가? 이 책은 특히나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촉을 곤두세우며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또 어디선가 변함없이 열심히 책을 편집하며 왕성히 글을 쓰며 부단히 소통을 꽤하고 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에게 말없는 응원과 우정 어린 관심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3-11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하루에 백권 이상이 출간된다는 말을 듣고(요즘은 하루에 몇 권 출간되는지 모르겠고.) 책의 홍수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꼭 책을 낼 만한 역량 있는 사람만이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요.
모두가 한 번씩 책을 내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 뭐가 반성할 점이고 뭐가 후회할 점인지 아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만 해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ㅡ그런데 이게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성추행 사건이 있던 누구가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책들을 수거해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출판사의 결정 소식을 들었어요. 그의 글쓰기는 그를 조금도 성숙시키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가짜였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헷갈리게 되었어요.

stella.K 2018-03-11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분명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죠.
그런데 책이라는 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참 그렇더라구요.
결론은 모두가 내되 역량있는 사람이 되서 내야되는 것 같았요.ㅋ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멋진 집을 지어놓고 막상 자신은 그집에서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쓴 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인 거죠.
그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상누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거죠.
이번 미투 운동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2018-03-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