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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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알라딘이 서재라고 하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한 초창기 때였다. 지금이야 개인 블로그 하나쯤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때는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도, 누구와 인사를 하고 친구를 맺어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수줍게 내 서재에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었다.

 

그는 지금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긴 제목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2000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 홈피를 운영하면서 알라딘 서재가 생기자 함께 운영을 한 것인데, 저자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평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쓰기도 많이 쓰지만 다방면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황해문화> 편집장이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글은 직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서재에 먼저 다가와 인사해줬다는 건 나에게 꽤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내 허접한 서재에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성격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나 덥석덥석 아는 척 하는 성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먼저 손내밀어줬으니 고마울 밖에.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인연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을 같은 알라디너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이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나는 사람을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그 토록이나 많은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홈피를 근거지로 또 어디선가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나의 성격이란 늘 다니는 경로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어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에게 정말 촉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도 그랬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문득 생각이 나곤했는데 그의 책이 예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겠거니 했더니 세상에 나오려고 이렇게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하면서도 각잡힌 글을. 그의 글은 감히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고 서평의 좋은 모범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보고 싶으면 그의 서재로 가 살짝 보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주인 없는 서재에 가기란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기운과 손이 닿지 않는 집이 흉가가 되듯 서재 또한 주인이 없어 소통하지 못하면 그저 방기될 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좋은 글은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터넷에서 야금거리고 있는 건성에 차지 않는다. 책은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맛도 있고.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만큼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마음에만 있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책중에 내가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읽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책도 나에게 그런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평소 저자가 덕을 많이 쌓았거나 아니면 알라딘에서 내게 먼저 아는 채 해 준 공덕 때문일 것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마침 어느 고마운 알라디너가 책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지목해 덥석 받아버리고 야금야금 읽었다.

 

뭔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건 오랜 친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는 느낌과 맘먹는다. 전기도 전신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절 편지는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주효한 매체였을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 한 통을 받으려면 평균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책은 어느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사내의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분명 서평 집이면서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다니. 그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틀리지 않다면, 사람이 인생을 4, 50년쯤 살면 뭔가 갈무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어느 집 자식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를 만나왔는지 어떤 형식으로든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고, 설혹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삶을 들여다 볼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나도 2년 전 책을 낼 기회가 있었을 때 호기롭게 이참에 나의 독서 경험을 빙자한 일종의 자서전을 모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 가장 오래 해 왔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 겸 편집장이 그냥 여태까지 써왔던 서평을 다듬으면 좋겠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모의를 접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얼굴 붉혀지는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이미 난 내 책에서 내 지나 온 삶을 언뜻언뜻 얘기했으니 아쉬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고 본격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써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그는 <황해문화>를 벌써 20년째 편집 일을 하고 있다. 매번 그것을 발행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10년 내에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우리가 책을 읽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독서를 그저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 아직 자신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가 되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며 깨줄 책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믿기에 우린 꾸준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독서는 부단한 축적물이기에 그런 책을 못 만났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오만일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었던 크게든 작게든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뭔가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정짓게 만든다.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커서는 노동을 하다 대학을 갔으며 거기서 운동(데모)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 편집장이 됐다고. 그게 과연 책없이 가능했을까?

 

젊었을 땐 책을 전투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책을 무조건 빨리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드니 그것이 좀 달라졌다. 저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읽은 책에 나의 지나간 삶을 조금 조금씩 묻어 놓는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가 되고, 그가 쓰는 문장은 제물이 된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갈수록 그의 글은 더 깊어지고, 비문이 적어지며, 신중해진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카프카의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또한 그건 정확히 자서전이 아닌 고백록이나 참회록쯤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자기 삶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이 책처럼 책속에 넌지시 묻어놓는 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이미 쓴 적이 있긴 하지만)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두 번째 에세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세이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다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속 얘기는 웬만치 친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책에 썼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독자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또 그것은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정말 지적이고 매끄럽긴 한데 삶이 드러나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책을 썼을 텐데 삶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독서의 재생산물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쓰는 것으로서(독후감이 됐건 서평이 됐건) 어떻게 나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감동하는 책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말했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314p) 이것은 책을 읽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마침내 그만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그만의 세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자기 블로그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블로그에 이름 하나 제대로 붙여줄 생각을 못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었던 것 같다. 닉네임의 뜻이 뭐냐고. 그런데 그에게 만큼은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바람구두야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따온 것일 테고, 그 긴 블로그 이름은 뭘 뜻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물어봤을까? 거기에 나의 궁금증까지 더하기가 뭐했다. 그의 블로그를 탈탈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서평 글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려면 너무도 익숙한 기존의(자본주의적) 문화와 결별하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문화망명이라고 불렀다.(290p) 다른 설명이 뒤에 나오지만 이것만 읽어도 그의 서재명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글엔 그다운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사람 저마다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훨씬 의미 있고 읽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이런 서평집이 요긴해지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편집의 달인(?)답게 읽은 책을 요약을 잘 해 놓고 있어 굳이 그 책을 힘들 게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독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대로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며 읽어 볼 마음이 비로소 생기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서평집은 유용하다. 사실 저자와 나는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르다(물론 저자가 한 수 위다). 다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몇몇 책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이었을 텐데 보관함에 넣어 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서평집은 지은이의 독서와 삶이 녹아져 있어 읽는 맛이 다르다. 우리가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다면 뭣 때문에 서평집을 읽겠는가? 이 책은 특히나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촉을 곤두세우며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또 어디선가 변함없이 열심히 책을 편집하며 왕성히 글을 쓰며 부단히 소통을 꽤하고 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에게 말없는 응원과 우정 어린 관심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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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11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하루에 백권 이상이 출간된다는 말을 듣고(요즘은 하루에 몇 권 출간되는지 모르겠고.) 책의 홍수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꼭 책을 낼 만한 역량 있는 사람만이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요.
모두가 한 번씩 책을 내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 뭐가 반성할 점이고 뭐가 후회할 점인지 아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만 해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ㅡ그런데 이게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성추행 사건이 있던 누구가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책들을 수거해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출판사의 결정 소식을 들었어요. 그의 글쓰기는 그를 조금도 성숙시키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가짜였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헷갈리게 되었어요.

stella.K 2018-03-11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분명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죠.
그런데 책이라는 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참 그렇더라구요.
결론은 모두가 내되 역량있는 사람이 되서 내야되는 것 같았요.ㅋ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멋진 집을 지어놓고 막상 자신은 그집에서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쓴 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인 거죠.
그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상누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거죠.
이번 미투 운동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2018-03-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