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장승욱 지음/ 하늘연못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 사전/ 박남일 지음/ 서해문집
성석제 소설가
 


 

해마다 한글날이면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자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왕이면 깔깔거리며 무릎을 탁 치는 재미를 즐기면서 한글의 맛과 멋에 취하고 싶은 책벌레들을 위한 책들이 여기 있다.

소설가인 전중거사(前中居士) 김성동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그의 거처인 양평의 비사난야(非寺蘭若)에서 벌어지는 제1기 김인(金寅)배 문예국수전에 오라는 것이다.

“찰랑한 하늘입니다. 모둔오월 보내고 미끈유월 지나 어정칠월 넘기고 보면 동동팔월이니, 가을입니다”라며 편지는 시작된다. 도리 없이 사전을 가져다 놓고 편지를 다시 편다.

“뼘들이로 높아져만 가는 하늘 아래 물결소리 고요한데, 뒤란에 잣송이 떨어지는가. 퍼들껑 날아오르는 멧새 소리에 놀라 저만치 솔언덕 높드리로 뱝뛰어가는 고라니입니다.”

장승욱의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161쪽에 높드리에 대한 풀이가 있으니 ‘높고 메말라서 물기가 적은 논’을 가리킨다.

표준국어사전에선 골짜기의 높은 곳이라고도 한다. 깡충깡충 뛰어가는 고라니의 살찐 궁둥이가 연상되면서 전중거사가 이따금 쓰는 표현대로 ‘몰록’(갑자기), 이건 선어(禪語)가 아닌가 싶어 재미있어진다.

지금 내 책상에 펼쳐져 있는 우리 토박이말 사전을 쓴 두 사람 가운데 장승욱은 국문학과를 나왔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쓴 박남일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말을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의무를 진 사람들은 아니다. 직업상·윤리상으로 의무를 진 사람들이란 국어학자나 나와 같은 소설가, 시인 같은 문예인일 터이다(전중거사는 그의 의무를 백분 다해 왔다. 그것도 전위에서 즐겁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리말에 대한 열렬한 애착이다. 내가 보기에는 집념에 가까운 사랑이다. 무엇이든 하다하다 보면 빠지게 되고 무섭게 재미가 들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데 두 사람 다 그 지경에 간 것 같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의 ‘도사리’는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 곧 낙과라고 한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1997년부터 근래까지 ‘팥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남북한 수십 권의 국어사전을 독파하며 채집한 우리 토박이말 4793가지가 들어있는데 이게 낙과라는 말일까.

당장 아파트 밖으로 나가 빌딩 숲의 간판을 보면 우리말이 도사리 처지가 된 지는 한참 된 것 같다.


▲ 인간 육체를 통해 한글을 형상화한 밀물 현대 무용단의 공연 모습. 한글 '큐'를 무용수들의 몸짓 언어로 표현했다. 조선일보 DB사진

인터넷을 가득 채운 이상한 문자들을 보며 글을 업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지은이의 말처럼 새벽 과수원에 가서 도사리라도 한 광주리 주워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은 촌부의 심정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무조건 좋다, 토박이 말을 지켜야 한다, 우리말만 쓰라고 언중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우선 우리말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맛을 들이게 해야 한다. 맛을 들이면 쓰지 말라고 해도 쓸 것이다. 우리말이 맛있다는 것의 예는 이렇다.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이슬비, 이슬비보다 더 굵게 내리는 비가 가랑비. 노드리듯 오는 날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작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을 올림말(표제어)로 하고 그의 어원과 상세한 풀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예문을 담고 있다.

갈래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여느 사전과 달리 건조하고 가치중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은이 자신이 창작한 문장을 예문으로 쓰고 있다.

땀 냄새가 느껴지는 반면 술술 잘 읽힌다. 지하철에서 읽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다. 사전은 사전인데 재미가 있는 사전이다. 어떤 재미인가.

“금성이 저녁 때 서쪽 하늘에 보일 때에는 이를 개밥바라기, 태백성, 어둠별, 장경성 등으로 부른다. 또한 새벽 하늘에 보일 때에는 샛별, 명성, 계명성 따위로 부른다. 그런데 바라기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따라서 개밥바라기는 개의 밥그릇이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가 흥미롭다면, 이 책은 진진하다. 이 두 책을 보면서 우리말의 맛과 재미를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 충분히 공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류 때문인지 전에 없이 외국인들의 한국어 공부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을 잘 알고 잘 써야 제대로 대접 받는 시대가 될 때도 되었다.

그러니 제발이지 이런 책들이 한글날 직전에 한꺼번에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전중거사의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난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끄기 위하여 헤벙제벙 갓방 인두 달듯 하고 있는 오늘, 우리 하늘 밑에 벌레들은 짜장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판 앞에서 그 생각들을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성석제 소설가

비사난야는 큰길에서 이십 리가량 들어가 만나는 흙길가 가풀막에 있다. 이 어정잡이 바둑꾼에게 우승이 돌아올 턱 없으니, 해전치기 뒤 전나무 우듬지에 개밥바라기 떠오를 적 나올 막걸리 사발과 냠냠이나 기다리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자투고]

김유정

지난주 댄 브라운 특집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출세작 ‘다 빈치 코드’를 읽으며 “어쩌면 저렇게 허구를 진실처럼 꾸밀 수 있을까” 감탄했던 터라 기사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흥행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우리 소설들에 대한 아쉬움이 일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라든가 ‘반지의 제왕’ 등 세계를 들썩인 작품들을 보면 모두 소설들이다. 책의 대형 히트작품은 모두 소설에서 나오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소설의 위기라느니 소설이 안 팔린다느니 하는 푸념만 들릴 뿐이다.

국내 소설은 왜 읽지 않을까? 독자는 괜히 소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읽고 싶어하는 이야기, 그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볼 수 없다면 독자가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의 위기 속에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파울로 코엘료니 댄 브라운,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외국 작가가 몽땅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댄 브라운에게 문학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적어도 재미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종교와 역사 분야에서 상당히 치밀한 취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우리 소설들은 지나치게 개인의 사적인 관심, 삶의 일상적인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구효서의 ‘비밀의 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처럼 취재해서 쓰는 작가, 허구를 생생한 현실의 세계로 끌어들일 줄 알았던 작가를 요즘은 볼 수 없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4-10-09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겨 볼만한 글이다. 구효서의 <비밀의 문>이라.

 기억해 둬야겠군.


물만두 2004-10-0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아들을 읽고 뒤로 가면서 실망했는데... 비밀의 문은 어떨지...

진/우맘 2004-10-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지나치게 일상, 심리에 침잠하는 경향이 있지요..

니르바나 2004-10-0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 만권이 성에 차지 않고 백 만권이 넘어야 베스트쎌러라 하던 호시절이 있었지요.
이나저나 왜들 국내소설을 외면하나요.
하긴 우리의 일상이 소설보다 스릴있지요.
저는 한참 읽었던 작가들을 지금껏 외면하지 않고 있지만
90년대 이후 쭉 소설을 안 읽어서 잘 모르겠어요.

urblue 2004-10-0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 초반 이후로는 국내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 요즘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 읽었던 소설들을 읽고서 실망한 건, 거의 일기 쓰기와 다를 바 없는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저 분 지적하신 대로 취재도 없고, 깊은 고민도 없는 듯한, 비슷한 소설들이 넘쳐났던 게 현재 국내 소설이 독자로부터 외면받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stella.K 2004-10-1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비밀의 문> 한번 기대해 보자구요.^^
진우맘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앞으로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더 많이 고민해야 하는데, 너무 모험들을 안하는가 봅니다.
니르바나님/ 저도 국내소설은 왠지 외면하게 되더라구요. 별것 아니어도 얘기를 풀어내는 솜씨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을텐데...
유아불루님/ 저의 서재에서 뵙기는 처음인 것 같은데,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님의 생각에 동감입니다.^^

mira95 2004-10-1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국내 소설을 더 좋아하는데요.. 외국의 고전이라고 말하는 작품들은 솔직히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하긴 몇몇 작가들은 너무 사적인 일들을 쓰는 경향이 있긴 해요.. 그것도 비슷한 내용으로만.. 다들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stella.K 2004-10-1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서적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 보다 국내 소설이 아무래도 맞겠죠. 하지만 작품도 좋으면서 정서적으로도 맞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권 무게 50㎏ 나가는 책 보셨어요?”

세계 희귀본 모아 책박물관 여는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 여승구씨가 책 박물관에 전시된 세계에서 가장 큰 책 ‘부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5m 길이에 책 무게만 50kg이 나가는 초대형 책이다. / 황정은기자 fortis@chosun.com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고서(古書) 수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여승구(?丞九·68) 화봉문고 대표가 그간 모아온 13만여점의 고서와 그림들을 모아 화봉 책 박물관을 개관한다. 서울 세종로사거리에서 신문로를 따라 걷다 서울역사박물관과 구세군 빌딩 사이 길로 꺾어 50m쯤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반듯한 2층 양옥이 박물관이다.

“그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전시했는데 마침내 상설 전시관을 갖게 돼 감개가 무량합니다.”

여씨는 1982년 고서 수집을 시작한 이래 희귀본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일본과 유럽 출장도 마다하지 않으며 책을 모았다. ‘천로역정’의 일본 초간본을 들여오다 밀수꾼으로 몰리는 등 수집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23년간 모은 책들 중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판본을 비롯, 1568년 발간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고사촬요’, 1763년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목판화로 만든 ‘조선인대행렬기대전’ 등의 귀중본이 포함돼 있다.

최근까지 출판무역업을 해온 그는 회사 서고에 이 책들을 보관하며 틈이 날 때마다 전시해 왔다. 올해는 국립도서관에서 ‘고구려 발해 1000년전’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책과 역사’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어 고서 애호가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82년부터 지금까지 연 전시회가 50여회. 1989~1996년엔 한국고서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1990년부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고서 정보를 나누고 전시기획도 할 만큼 그의 책 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그러나 “전시를 하면 할수록 제대로 된 상설전시관을 갖고 싶은 욕심이 커졌다”고 했다. “독일은 마인츠에 있는 구텐베르크 인쇄 박물관 하나만으로도 인쇄 선진국 이미지를 잘 선전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면서도 문화홍보를 제대로 못해 핵이나 분단국가 이미지 등으로만 알려지고 있어요.”

여씨는 오는 15일부터 내년 2월 말까지 ‘세상에서 제일 큰 책, 세상에서 제일 작은 책’이란 제목 아래 책 박물관 개관 기념전을 열고 940여권의 책을 전시한다. 가로 1m 세로 1.5m인 ‘부탄’ 화보집과,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에 불과한 스코틀랜드 지역 자장가 모음집 ‘올드 킹 코울’을 함께 전시한다.

낡은 서권기(書卷氣·오래된 책의 향기)가 물씬 나는 고서들에서부터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집 ‘산타페’와 마돈나의 화보집인 ‘나, 마돈나’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간되는 책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그는 “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책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나 국립 책 박물관이 생겼으면 하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02)735-54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심사위원 18명… 수상자·후보추천위원이 추천자격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노벨문학상은 어떻게 결정하나

노벨문학상을 결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들은 18명이다. 추측은 무성하지만 그들의 결정 과정은 ‘공식적으로’ 비밀이다. 직업은 대개 문학평론가, 언어학자, 소설가, 시인, 번역가이지만 역사학자와 법률가도 끼어 있다. 금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들의 나이는 51~86세로 장년과 원로들이다.

이들은 발표 일주일 전 모임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그리고 침묵을 지켰다가 발표 당일(목요일) 오전에 이 결정을 재확인한 다음, 현지 시각으로 오후 1시(한국시각 오후 8시) 언론에 공개한다. 여러 나라에는 기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포함한 후보추천 위원들이 있기 때문에 언론들은 이들을 취재해서 ‘올해의 노벨문학상 후보들’을 보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추정일 뿐이다. 한국에도 평론가 P씨를 비롯한 후보추천 위원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은 안 된다.

◆후보의 조건(?)과 미스터리

프랑스 평론가인 파스칼 카사노바는 “세계문학의 중심인 불어권에서 널리 알려지는 것이 수상 가능성이 있는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최소한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을 몇 권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지는 중국의 가오싱젠(2000),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2002)의 수상 케이스를 들고 있다. 특히 가오싱젠의 경우엔 심사위원 가운데 중국문학을 전공한 스톡홀름 대학교수가 끼어 있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정반대로 어떤 한 심사위원이 특정 작가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파괴자’ ‘권력과 영광’을 쓴 대작가 그레이엄 그린(1904~1991)은 고(故) 아서 룬드비스트라는 심사위원이 매번 반대해 수상자가 되지 못했다. 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항상 제외됐다.

1901년에 시작된 노벨문학상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왜 세계문학사의 20세기 거장들인 카프카, 헨리 제임스, 콘래드, D H 로렌스, 조지 오웰,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같은 문호에게 상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구두 2004-10-0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은데... 카프카는 왜 들어가 있는 건지... 고흐와 카프카는 살아 생전엔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김광일 기자는 이게 미스터리인가 보네요. 흐흐.

stella.K 2004-10-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흐흐.

니르바나 2004-10-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에 목메는 한국사회가 문제라고 봅니다.
특히 한국 문단에 지각있는 분들은 후보에 올랐다고 흥분하지 않지요.
지난 번 박경리선생과의 대담을 보았는데 선생은 자신의 작품중에 디테일한 부분을
외국어로 옮기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셨지요.
일본의 경우도 국력이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렇게 빠른 수상이 가능하지 않았다는게
노벨문학상 수상과정에 대한 후일담입니다.
공공연한 수상 대책 본부가 존재했다는군요.
문학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참 재미있네요.

stella.K 2004-10-09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점에서 전 박경리 선생을 대단하다고 봅니다. 외국어로 옮기기 쉽게 하려고 우리말을 제한하거나 그 과정에서 질을 떨어 뜨리는 그런 값싼 행동은 작가라면 안 했으면...그렇지 않아도 우리말이 오염이 됐다고 말이 많은데...
 
 전출처 : 밥헬퍼 > 얼음과 물의 경계에서 만난 나희덕과 기형도 시인

                               얼음과 물의 경계

                                                                 나 희 덕


  메멘트모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수도원에선가는 이 말로 인사말을 대신한다고 한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녕을 기원하는 세간의 풍속과는 달리 부재의 확인을 통해 존재를 성찰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세간의 인사에 길들어 살아가는 나에게도 누군가 그런 인사를 건네는 날이 이따금 있기는 하다. 매년 삼월 첫째 주말, 기형도 시인의 묘소에 갈 때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가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메멘트모리.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못했다. 나는 2학년 때 연세문학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이미 졸업을 한 뒤라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1989년에 그는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였지만, 그 후 석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중앙일보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며 창밖의 희부연 풍경을 바라보던 모습이 내가 가장 가까이 본 모습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조금씩 엇갈린 인연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십년 동안 그의 주기 때마다 묘소에 가는 것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스럽기도 하다. 나는 그에 대해 추억할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내가 유별난 의리의 소유자인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그것은 마치 신년을 맞이하며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하게, 봄이 오기 직전 어떤 죽음 하나를 만나러 가는 습관화된 의식 같은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왠지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죽음은 결국 살아 잇는 자에 의해 유추되고 해석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은 해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묘소에 가려면 늘 지나치는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그 무렵이 되면 얼었던 물도 다 풀리고 나무마다 새싹이 돋아나곤 한다. 그런데 막상 그가 묻힌 산언덕에 이르면 왜 그리도 춥고 음산하던지 그의 죽음에 온통 살얼음이 박혀 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도 시린 느낌은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아마 그의 시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얼음과 눈(雪) 이미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게는 안개나 구름조차도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이나 “희고 딱딱한 액체”(「안개」)와 다름없었다.

  “밤에 깨어 있음, 방안에 물이 얼어 있음. 손(手)은 영하 1도”(「새벽이 오는 방법」)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살았던 방의 윗목, 아니 늘 윗목인 삶을 떠올린다. 거기서 그는 시린 손으로 ‘겨울 판화’를 새기듯 시를 써나갔으리라. “내 몸은 얼음으로 꽉 찬 모양이다”(「聖誕木」)중얼거리며 성냥을 그어대기도 하고, 눈길 위에 떨어진 서류봉투를 주우며 “나는 불행하다/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그때 그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얼음과 진눈깨비는 실은 그의 눈물이 응결된 것이다. 세상을 너무 축복하였기에 거꾸로 매달려 외로운 천형을 견디고 있는 고드름처럼, 부단히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정신으로 말미암아 그는 오래도록 고통 받아야 했다.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노래하면서. 그는 녹아 흐르고 싶어 했으며,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삶 속에 얼음처럼 박인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힘겹게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러나 그가 지핀 불은 대체로 작은 성냥개비나 창백한 초 또는 램프에 붙여진 불이어서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10월」)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빈 병 또는 빈 방은 결국 그의 육체를 가두고 말았지만, 그의 시만은 오히려 결빙된 절망으로 빛나는 날을 가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범상치 않은 죽음의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신비화가 없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의 시는 일정한 부가가치를 얻은 대신 문학으로서는 갇힌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의 죽음 자체가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란 모든 대상을 빛바래게 하는 대신 적절한 거리를 베풀어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한다.

  십년 만에 전집으로 새롭게 묶인 그의 시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얼음과 물의 경계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이십대의 나에게 그의 시는 결코 녹을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얼음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게는 간절히 녹고자 한 영혼, 이미 녹기 시작한 영혼의 일렁임 같은 게 만져진다. 이것이 세월을 거슬러 흘러갈 수 있는 시의 고유한 힘인지, 젊음의 팽팽한 긴장에서 어느 정도 놓여난 내 마음의 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란 물과 얼음의 경계처럼 단호한 듯하지만 끊임없이 삼투하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인사가 마침내 일상이 될 때까지 우리는 언 물과 얼지 않은 물 사이에서 오래 출렁거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기억하는 일이 더 이상 죽음의 성채를 쌓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죽음을 녹여내는 일이 될 때, 그와 그의 시는 무연한 강물처럼 자유스러워 질 것이다. 그 역시 「잎․눈(雪)․ 바람 속에서」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살아 있다. 해빙의 강과 얼음산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나희덕, 반통의 물, 창작과 비평사, 1999>

........................................................


                             잎. 눈[雪]. 바람 속에서

                                                              기 형 도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 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나무가 우수수 웃을 채비를 한다. 천천히 피부를 닦는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살아 있다. 解氷의 江과 얼음山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은빛 바늘 꼽으며 분다. 기쁨에 겨워 나무는 목이 메인다. 갈증으로 병든 잎을 떨군다. 기쁨에 겨워 와그르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자유에 겨워 혼자 춤춘다. 폭포처럼 웃는다. 이파리들이 물고기처럼 꼬리치며 떨어진다. 흰 배를 뒤집으며 헤엄친다. 바람이 빛깔 고운 웃음을 쓸어간다. 淸潔한 겨울이 서 있다.


겨울 숲 깊숙이 첫눈 뿌리며 하늘이 조용히 安心한다.

 

 

 

 

 

 

 


 

 

 

 

 

 

 

 

 

제임스 콜만, Country Road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