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장승욱 지음/ 하늘연못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 사전/ 박남일 지음/ 서해문집
성석제 소설가
 


 

해마다 한글날이면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자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왕이면 깔깔거리며 무릎을 탁 치는 재미를 즐기면서 한글의 맛과 멋에 취하고 싶은 책벌레들을 위한 책들이 여기 있다.

소설가인 전중거사(前中居士) 김성동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그의 거처인 양평의 비사난야(非寺蘭若)에서 벌어지는 제1기 김인(金寅)배 문예국수전에 오라는 것이다.

“찰랑한 하늘입니다. 모둔오월 보내고 미끈유월 지나 어정칠월 넘기고 보면 동동팔월이니, 가을입니다”라며 편지는 시작된다. 도리 없이 사전을 가져다 놓고 편지를 다시 편다.

“뼘들이로 높아져만 가는 하늘 아래 물결소리 고요한데, 뒤란에 잣송이 떨어지는가. 퍼들껑 날아오르는 멧새 소리에 놀라 저만치 솔언덕 높드리로 뱝뛰어가는 고라니입니다.”

장승욱의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161쪽에 높드리에 대한 풀이가 있으니 ‘높고 메말라서 물기가 적은 논’을 가리킨다.

표준국어사전에선 골짜기의 높은 곳이라고도 한다. 깡충깡충 뛰어가는 고라니의 살찐 궁둥이가 연상되면서 전중거사가 이따금 쓰는 표현대로 ‘몰록’(갑자기), 이건 선어(禪語)가 아닌가 싶어 재미있어진다.

지금 내 책상에 펼쳐져 있는 우리 토박이말 사전을 쓴 두 사람 가운데 장승욱은 국문학과를 나왔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쓴 박남일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말을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의무를 진 사람들은 아니다. 직업상·윤리상으로 의무를 진 사람들이란 국어학자나 나와 같은 소설가, 시인 같은 문예인일 터이다(전중거사는 그의 의무를 백분 다해 왔다. 그것도 전위에서 즐겁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리말에 대한 열렬한 애착이다. 내가 보기에는 집념에 가까운 사랑이다. 무엇이든 하다하다 보면 빠지게 되고 무섭게 재미가 들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데 두 사람 다 그 지경에 간 것 같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의 ‘도사리’는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 곧 낙과라고 한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1997년부터 근래까지 ‘팥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남북한 수십 권의 국어사전을 독파하며 채집한 우리 토박이말 4793가지가 들어있는데 이게 낙과라는 말일까.

당장 아파트 밖으로 나가 빌딩 숲의 간판을 보면 우리말이 도사리 처지가 된 지는 한참 된 것 같다.


▲ 인간 육체를 통해 한글을 형상화한 밀물 현대 무용단의 공연 모습. 한글 '큐'를 무용수들의 몸짓 언어로 표현했다. 조선일보 DB사진

인터넷을 가득 채운 이상한 문자들을 보며 글을 업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지은이의 말처럼 새벽 과수원에 가서 도사리라도 한 광주리 주워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은 촌부의 심정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무조건 좋다, 토박이 말을 지켜야 한다, 우리말만 쓰라고 언중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우선 우리말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맛을 들이게 해야 한다. 맛을 들이면 쓰지 말라고 해도 쓸 것이다. 우리말이 맛있다는 것의 예는 이렇다.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이슬비, 이슬비보다 더 굵게 내리는 비가 가랑비. 노드리듯 오는 날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작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말을 올림말(표제어)로 하고 그의 어원과 상세한 풀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예문을 담고 있다.

갈래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여느 사전과 달리 건조하고 가치중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은이 자신이 창작한 문장을 예문으로 쓰고 있다.

땀 냄새가 느껴지는 반면 술술 잘 읽힌다. 지하철에서 읽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다. 사전은 사전인데 재미가 있는 사전이다. 어떤 재미인가.

“금성이 저녁 때 서쪽 하늘에 보일 때에는 이를 개밥바라기, 태백성, 어둠별, 장경성 등으로 부른다. 또한 새벽 하늘에 보일 때에는 샛별, 명성, 계명성 따위로 부른다. 그런데 바라기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따라서 개밥바라기는 개의 밥그릇이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가 흥미롭다면, 이 책은 진진하다. 이 두 책을 보면서 우리말의 맛과 재미를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 충분히 공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류 때문인지 전에 없이 외국인들의 한국어 공부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을 잘 알고 잘 써야 제대로 대접 받는 시대가 될 때도 되었다.

그러니 제발이지 이런 책들이 한글날 직전에 한꺼번에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전중거사의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난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끄기 위하여 헤벙제벙 갓방 인두 달듯 하고 있는 오늘, 우리 하늘 밑에 벌레들은 짜장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판 앞에서 그 생각들을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성석제 소설가

비사난야는 큰길에서 이십 리가량 들어가 만나는 흙길가 가풀막에 있다. 이 어정잡이 바둑꾼에게 우승이 돌아올 턱 없으니, 해전치기 뒤 전나무 우듬지에 개밥바라기 떠오를 적 나올 막걸리 사발과 냠냠이나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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