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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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소설가들이 독자를 웃기기 시작했다. 웃기는 소설가가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웃기는 수준이 전과는 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예전엔 웃기는 쪽에선, 나는 전혀 웃기지 않은 척 눙치고 있는데 상대가 웃어주면 좋은 일이지 하며 엄숙을 가장한 그런 것이었다면, 요즘의 작가들은 아예 작정하고 나도 웃고, 너도 웃고 우리 다 같이 웃자는 식인 것 같다.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 모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지. 내가 먼저 재미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어찌보면 작가는 자기 글의 제1의 독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재밌게 느끼지 않는데 남 보고 재밌게 읽어달라고 하면 그건 어불성설일게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재밌다. 웃긴다. 나름 톡톡 튀는 재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읽으면서 살짝 걱정되는 건, 작가가 독자를 웃겨서 나쁠 건 없지만, 모든 작가가 이것을 들고 나온다면 '웃음 강박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웃는 것이 좋다고 하니 웃긴 웃는다만,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웃길거냐에 경도된 나머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걸 놓치거나 부각시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앞지른 걱정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얘기 하자면 나는 이 작품에서 개그적 요소를 발견했고(이를테면 소설 어디엔가 보면 스파이들이 보는 책목록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거 보고 정말 웃겼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이 웃겼다) 그래서 웃긴 했지만, 앞으로 한동안 우리 소설에 이런 개극적 요소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콜럼버스의 달걀' 같과 같은 소설이다. 누구든 한번쯤 다루어 봄직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생각 못하고, 안 다루었는지 모르겠다. 아는대로, 007 영화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제임스 본드는 승리를 의미하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매번 바뀌는 본드걸과의 달콤하고도 야스러운 포즈로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걸고 넘어지는 것은, 정말 보여지는 짜릿한 엔딩이 과연 실생활에서도 이어지고 있느냐라는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거 얘기라면 찾아보면 더 나오지 않을까? 나의 경우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렇던데. '그래 좋아.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왕자님과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됐어. 그런데  삶은 현실이거든. 그 이후의 삶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신데렐라 이야기의 속편을 쓰는 사람이 없다. 이 기회에 내가 한번 써 봐?'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많은 가능성과 참신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대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걸까? 못한 걸까? 정말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이 책에서 007은 해피엔딩과 달리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간단하게 미미양을 배신하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한다. 이에 미미는 복수를 위해 스파이 교육을 받는다. 그랬으면 당연 끝까지 복수를 해야하지 않는가?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슬쩍 비껴간다. 작전 한번 실패해 봤더니 사람이 보이더라는 식이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떠한 깨달음이었는지 사람이 저 모습이 되기까지는 나름의 많은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려고 했겠구나. 그러니 어쩌겠니? 서로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인류애를 좀 발휘해 줘도 괜찮지 않겠니? 그래야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뭐 그런 식의 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의 지점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소설이 너무 짧지 안았을까? 작가가 성직자 같을 필요야 없겠지만 암시 정도에서 끝내버리면 독자가 성에 안 차한다. 특히 나 같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독자는. 아니면 설득될 때까지 더 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전개해 보던가? 뭔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지점에서 대충 뭉개고 마니 김이 빠진다. 그러니 여기에 굳이 '미미양의 모험'이란 타이틀까지 달고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그냥 '미미양의 깨달음' 정도이지 않았을까? 모험이 모험다워지려면, 뭔가 박진감이 넘치고 어려워도 목표치까지 가 보고 갔다가 그 이후에 오는 것들을 조용히 음미해 보는, 뭐 대충 그런데까지 나갔어야 '모험'이란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의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거 가지고 독자를 설득시킬 수는 없다. 독자는 인물이 변하는 것을 추적해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미미양이 나중에 무엇을 깨달았던지 간에 007을 복수하기로 했다면 해 봤어야 했다. 그리고나서 남는 건 뭐였는가를 얘기해야 완결된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복수를 위한 모험이었을텐데 재대로 해 보지도 않고 끝내 버리다니 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 책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나를 자극시켰다. 우선 앞서말한 모 작가의 재밌게 쓰기에 또 한번 좋은 사례(?)를 보여줬고, 작가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너무 성급하게 일찍 뭔가를 드러내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거야 설교가나 상담가들이 하는 거 아닌가? 그것이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독자의 가려운 부분을 충분이 긁어주고 등장인물과 충분히 놀다가 끝내줘도 늦지 않은 거 아니겠는가. 그런 여유가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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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0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보지 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stella.K 2007-03-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선택은 자유죠. 저 같은 경우 선물 받아서 읽은 거거든요.^^
 
르네상스의 비밀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01
리처드 스템프 지음, 정지인.신소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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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책이라는 게 읽기에도 편해야겠지만 휴대 하기에도 편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야 편하게 누워서도 볼 수 있으며, 가방에도 쏙들어가고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그 상식을 뛰어 넘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체형이나 구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네가 볼테면 봐라. 하며 도도하고 럭셔리하게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다소곳이 있는 것이다. 마치 황진이 본색마냥.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런 책들은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 그 분야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지 않아서라기 보단 책을 사는 것까지는 좋으나 돈을 지불할 때의 손떨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지만 보지 않으면 먹지도 않게될 금단의 열매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인터넷에 그 모습을 들어냈을 때 아, 한번쯤 가져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금단의 열매 같은 이 책을 덥썩 잡아 볼 기회를 얻었다. 웬 호사란 말인가? 그런데 쪽수가 200 페이지를 조금 넘는다. '페이지는 얼마 안 되면서 비싸기는......' 딴은 그래서도 선듯 사기를 주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받아 본 결과 헉~! 더 두꺼웠으면 클날 뻔했다. 받아 본 그날로부터 매일 정해진 페이지를 읽고 아무대나 던져놓을 수 없어 책꽂이에 세워놓아야 한다. 그거 세워놓은 것도 손목에 힘이 꽤 들어간다.  이 책은 쪽수는 얼마 안 되지만 결코 빨리 읽을 수도, 읽어서도 안될 책이다. 감상이 필수다. 도판에 꽤 신경을 썼다는 소리다.

르네상스라...! 서양의 역사 중 가장 화려하고 무궁무진했던 때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학교 졸업과 동시에 르네상스를 잊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하기사 나의 학교 때는 역사에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무식의 소치가 들어난다. 나는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의 부흥기로써 그전까지 신본주의가 팽배했고 그것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줄로 막연하게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때만큼 기독교가 역사적으로나 문화 또는 예술 방면에서 빛을 바랬던 때도 없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시기에 나타나고 활동했던 예술가들 대부분 예수나 성모를 찬양하기 위해 예술활동에 뛰어 들었다. 물론 각 예술가들마나 독특한 기법이 있겠지만, 그들의 하나 같은 테마는 '예수'와 '성모'였다. 하지만 나는 책에 나온 그림을 보면서 르네상스가 과연 서양의 기독교 융성을 위한 것이었겠는가에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하나, 그림에 나타난 성모와 아기 예수는 하나 같이 혈색이 좋고, 고고하다. 권위마저 느껴진다. 이것은어찌보면 기독교의 실제적 역사와는 조금은 다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 시대에 나타난 그림들을 보라. 시쳇말로 럭셔리 하다. 색감도 그렇고, 하나 같이 풍성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다못해 예수님 고난을 그린 그림조차 슬프다 못해 처절함이 느껴지기 보다, 어떻게 이렇게 럭셔리 할 수가 있지! 또 다른 면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예수 고난상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처절함이 느껴지려면 리얼리티어야겠지만, 그 시대는 풍부하고도 고급스런 이미지만을 강조했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그것은 그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기 보다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지고 그들의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호사가를 위한 예술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강력한 신심에 의해서 예술 또한 그러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 부러움은 있다. 르네상스 예술에 관심있는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과연 이 예술이 일반대중에게 먹힐까 싶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영원하다. 서양사에 있어서 어느 방면의 역사를 들추더라도(문화사든, 예술사든) 르네상스는 꼭 거쳐가야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 시대의 당대를 풍미했던 호사가들에 의해 전승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맞거나 틀리거나.). 어쨌거나 그렇게 보존이 되고 어느 한 나라만을 위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전 세계적 유물이 되었는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은 하면서 과연 우린 우리의 것을 전 세계에 알릴만한 재원이 있는 것일까?

왜 제목을 <르네상스의 비밀>로 했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긴 한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분명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됐지만 그것이 비밀스럽기 까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역시 예술사나 미학에 관한 책들은 좀 어렵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 이 방면의 대중을 위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나름 예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 책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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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이 좀 그랬습니다^^;;;

프레이야 2007-03-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싼 책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 그맘 이해합니다.^^
표지만 봐도 럭셔리 하네요.

은비뫼 2007-03-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목이 문제입니다. 아무튼 책장에 밀어넣기 힘든 터라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

stella.K 2007-03-0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고맙습니다, 님들. 이렇게 댓글 많이 받아 보기는 정말 오랫만이군요.^^

행인 2012-0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쓰셨네요~!이 책 사려고하는데 고민이 많이되서 리뷰를 찾아봤는데 별로 쓴사람이 없더라구요 ㅋㅋ 그래서 알라딘에 들렸는데 리뷰가 하나같이 다 길어서 도움이 많이됐어요~ 특히 첫단락 비유랑 마지막에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가 참 인상깊었네요~
 

  • “불안, 우울, 그로테스크”
  • 민족문학연구소, ‘소설 이천년대’ 펴내
  • 박해현기자 
    • “2000년대 한국 소설은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젊은 비평가 모임인 ‘민족문학연구소’가 2000년대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선집 ‘소설 이천년대’(생각의나무)를 최근 펴내 2000년대 소설에 대한 중간 평가를 시도했다. 2003년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김연수씨를 비롯 박민규 천운영 김재영 김애란 김중혁 김윤영 전성태 이명랑 편혜영 배수아 정지아 윤성희씨의 대표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2000년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정의내릴 수도 없고 평가하기도 이른 수많은 문학적 실험들이 분분하다. IMF 이후 더 가속화된 자본주의 한중간에서 때로 외로워하고 때로 연대하는 이웃들의 모습, 전망없는 청춘들이 쏘아올린 상상력의 폭죽은 우리 시대의 문학을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다”고 선정 기준을 제시한 ‘민족문학연구소’는 “문학이 위기라는 소문은 흉흉하지만 그럴수록 좋은 소설이 주는 행복을 독자와 함께 누리고 싶기도 했다”며 선집 출간 이유를 밝혔다.

    • ▲왼쪽부터 소설가 박민규씨, 소설가 김애란씨.
    •  

      앞 세대 소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2000년대 소설의 새로움이라면 ‘카스테라’의 작가 박민규, ‘달려아, 아비’의 김애란, ‘아오이가든’의 편혜영, ‘펭귄뉴스’의 김중혁씨를 먼저 꼽을 수 있다. “이 작가들의 모든 소설들이 가족의 위기 혹은 불완전한 가족을 다루고 있다”고 평론가 오창은씨는 분석했다. 어머니는 쓰러지고, 아버지는 가출하고, 아이들은 버림받거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뜬 아이들이 등장한다는 것. 그래서 불안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우주적 상상력의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이들 작가들은 ‘화성/금성’을 넘나드는가 하면(박민규), 우주로 방사되는 불꽃에 대해 이야기하고(김애란), 원초적 자연의 공포(편혜영)나 에스키모의 지혜(김중혁)를 말하는 것도 특징”이라는 얘기다.

      2000년대 작가들에 대해 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악몽이 넘쳐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다른 편에는 ‘현실에 대한 지독한 환멸을 보여주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천운영 윤성희 김윤영 소설이 대표적이다. “지금 현실이 고독한 일상을 사는 인간들의 우울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평론가 하상일씨는 평가했다.

      또 정지아 이명랑 김재영 소설은 ‘변한 듯이 보이나 변하지 않은 근대의 실루엣을 부여잡고 치열한 고투를 벌인다’(평론가 고인환)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김연수 배수아 전성태 소설은 ‘공동체의 규칙을 위반하는 일이 어떻게 다시 공동체를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경계 넘기’를 시도하고 있다(평론가 박수연)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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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으름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 게으름은 느림이 아니다 삶의 방향성을 잃고 제자리걸음하는 것
    나도 혹시 ‘바쁜 게으름뱅이’?… 자가진단 및 처방
  •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 봄이 일찍 찾아와서일까? 따스한 바람결에 온몸이 나른하다. 여건만 된다면 마냥 게으름 피우며 빈둥대기 딱 좋은 요즘. 이를 예견한 듯 서점가엔 ‘굿바이! 게으름’ ‘게으른 남편’ ‘게으른 건강법’ 등 ‘게으름’을 다룬 책들이 인기다. 그렇다고 게으름이 봄(春)과 관련 있다는 뜻은 아니다. “춘곤증은 계절적 변화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뿐 게으름의 원인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 문요한(정신과 전문의)씨는 “다만 병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대해 ‘상대적 위축감’ ‘자책감’을 느껴 더더욱 게을러질 수 있다”고 충고했다.

    • ◆눈코뜰새없이 바쁜데 게으름뱅이라고?

      일단 자신이 게으른지 아닌지 진단해보는 게 중요하다. 6가지 ‘게으름뱅이들의 단골 레퍼토리’는 이렇다. ▲첫째, 게으름을 신중함으로 미화한다. “아직 확실치가 않아. 실패하면 큰일이니 좀 더 알아보고 다음에 해야지”라며 선택과 시작을 미룬다. ▲둘째, 눈앞의 즐거움에 집착한다. ‘오늘까지만 놀고 내일부터 잘 살자!’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흔한 변명. ▲셋째, 게으름을 효율성으로 미화한다.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 하며 마감이 닥쳐야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넷째, ‘게으름은 우리 집안 내력이야’ ‘회사 일이 워낙 바빠서…’ 하며 게으름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경우. ▲다섯째, 게으름을 철학으로 미화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해!’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인생? 즐기면서 사는 거지’ 등등. ▲게으름을 여유로 위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여유와 게으름은 다르다. ‘여유’란 할 일을 하면서 충분히 쉬는 ‘능동적 선택’이지만, ‘게으름’은 할 일도 안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선택 회피’에 불과하다.

    • ◆자기 비난이 게으름의 원인…‘변화일기’ 쓰세요

      그럼 어떻게 해야 게으름에서 벗어날까? 문요한씨는 “우선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야 게으름도 떨칠 수 있다”고 충고한다. ▲세부 준비에만 급급하다 시간을 다 허비하는 완벽주의 성향이 원인. 당장 시험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꼼꼼하게 책상 정리하고 색연필로 멋진 계획표를 짜는 게으름뱅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비난도 떨쳐버려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기 때문에 망설이고 미루는 데 능하다.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것도 게으름.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잠시 하던 일을 중단하자. 변화를 위해서는 ‘이행기’ ‘혼란기’가 필수다. ▲‘변화 일기’를 쓰는 것도 한 방법. 하루 5개씩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짧게 답한다. 삶에 질서를 부여해준다. “제 환자였던 50세 남성은 알코올 중독에 벗어나기 위해 매일 성경책을 필사했어요. 1시간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엔 7~8시간씩 써내려 갔고요. 성경구절을 적든, 일기를 쓰든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에너지를 모으는 시간을 꼭 만들어보세요.”

    • “더이상 못참겠다!” 게으름뱅이 3종세트 ‘개조 프로젝트’
    • 김윤덕기자 
      • 숟가락 겨우 드는 ‘게으른 남편’ 아내들이여, 과잉 책임감을 싹둑하라

        숟가락조차 들지 않는 게으른 남편을 위해 옷에 주렁주렁 주먹밥을 달아놓고 친정에 간 아내. 보름 뒤 돌아와보니 주먹밥 먹기도 귀찮아 입가에 붙은 밥풀만 떼어먹다 죽었다는 남자 이야기를 아시는지! ‘게으른 남편’의 저자 조슈아 콜맨은 “남편을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과잉 책임감’이 남편의 게으름을 부채질한다”고 지적한다. ▲비난하지 않는 말투로 ‘더 이상 당신의 엄마 노릇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라. ▲가족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자신의 일들을 구체적인 목록으로 만들어 남편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호소하라. ▲반드시 고쳐야 할 남편의 문제를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매일 ‘반복’해서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라. ▲남편이 급하게 여기는 일에 늑장을 부리는 방법도 있다. 남편이 공과금 납부를 미루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면 일부러 늑장을 부려 그 일을 남편이 처리하게 한다. ▲남편을 집안 일에 참여시키고 싶다면 기대치를 낮춰라. 식사를 간소화하고, 적당히 지저분해도 참고, 아이를 매일 목욕시키지 마라. 남편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느껴야 청소기를 집어든다.

      • 누구 닮았니 ‘게으른 아이’ 칭찬하라, 스스로 달라질 수 있게

        “엄마 아빠는 머리도 좋고 부지런한데 아이는 왜 이렇게 게으른지 몰라.” 주위에서 종종 듣는 호소.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부모의 ‘통제’가 원인일 수 있다. 자율성을 침해하는 부모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게으름으로 표현한다는 것.

        ▲게으름을 꾸짖기보다 아이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시켜주기 위해 노력하라. ▲게으름은 천성이 아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지시하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해 선택하게 한다. ▲방임형 가정에서도 게으른 아이가 나온다. 공부와 놀이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 아이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과제를 확실히 강조하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는 부모의 라이프 사이클과 연관돼 있다. 특히 맞벌이 부모는 서로 귀가 시간을 조정해 아이의 수면 습관을 규칙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 일 못하면서 불평 가득 ‘게으른 후배’ 의사소통 구조 막혀있는지 점검하라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사건건 불평만 늘어놓는 직장 후배도 골칫거리. ▲일단 혼내는 방법이 중요하다. 후배의 삶의 태도 전반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잘못한 부분만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적한다▲후배의 행동으로 인해 느낀 선배의 감정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후배의 의견과 감정에 대해서도 물어본다▲앞으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구체적으로 요구한다▲후배가 대안에 대해 선뜻 받아들이지 않으면 후배에게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묻고 다른 대안을 마련한다. ▲동시에 조직 내 의사소통 구조가 잘 활성화돼 있는지 살핀다. 의사소통 구조가 막혀 있으면 흔히 ‘게으름’이라는 형태로 불만이 표출된다. ▲무조건적 순종과 방향성 없는 근면을 부지런함으로 여기는 것도 금물. 오히려 후배의 게으름을 야기시킨다. 문요한씨는 “마음이 실려 있지 않으면 몰입할 수도 없고 성과를 낼 수도 없다. 후배의 가슴에 에너지를 불어넣으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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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만-높이 더 높이… 부풀어 오른 자만심은 질병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인간의 7대 죄악을 논한 에세이를 조선일보에 주간 연재합니다. 일곱 가지 대죄(大罪)란 가톨릭에서 교만, 인색, 음욕, 탐욕, 질투, 분노, 나태를 가리킵니다. 유네스코의 ‘영적 집중과 상호문화교류’ 프로그램 특별자문위원이기도 한 코엘료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 유대교, 도교 등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끌어오고, 현대 문명이 범한 잘못도 지적합니다.



    7대 대죄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 도 폰토에 의해 처음 체계화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덟 가지였으며 인간이 그르치기 쉬운 부정적 성향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에바그리오가 꼽은 목록에서 가장 심각한 죄악이 탐욕(탐식)이라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악들 모두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목록에 ‘질투’를 포함시키고, 기존의 ‘교만’과 ‘허영’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17세기에 이 목록은 다시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멜랑콜리’를 더 이상 죄에 포함시키지 않는 대신 ‘나태’가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쓰게 될 일곱 편의 칼럼은 7대 대죄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7대 대죄들을 규정짓는 무수한 정의들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교만’의 고전적 의미

    첫 번째 대죄인 교만은 라틴어의 Superbia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 오만, 자만심, 거만함, 무례함을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교만’은 도를 넘어선, 신에 대한 사랑보다도 우위에 서고자 하는 자부심입니다. 이는 첫 번째 계율인 ‘너희는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에 반하는 죄악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열망이 천사들의 반란을 부추기고 루시퍼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교만의 개념은 동양의 불교 우화 속에서 이렇게 나타나기도 합니다.일본 교토에 있는 동복사(東福寺)의 선사(禪師)는 승려들이 하나같이 바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일꾼들은 누군가를 영접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선사는 궁금했습니다.

    그때, 군인 하나가 선사에게 다가오더니 패를 하나 내밀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교토의 통치자 기타가키님이 지금 곧 도착하시는데,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나는 이야기할 게 없소.” 선사가 말했습니다.

    잠시 후, 통치자가 도착했습니다.

    통치자는 선사에게 다가와서 예의를 갖춰 고개 숙이고는, 패에 쓰인 글 위에 줄을 긋고 고쳐 쓴 후 다시 선사에게 패를 내밀었습니다.

    “기타가키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환영합니다.” 동복사의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 현대의 ‘교만’

    미국의 한 항공모함에는 ‘임무 완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2003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서의 주요 군사작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했을 때 USS 링컨 호의 깃발에 새긴 문구입니다. 바로 그날, 사망한 미군 장병의 숫자는 217명에 달했는데 이 칼럼을 쓰는 지금, 사망자 수는 2700명을 넘어섰습니다.

    ◆유대교가 말하는 ‘교만’

    랍비 아딘 스타인살츠의 ‘교만’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곁다리에 불과한 비교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애쓴다면, 빈껍데기들만 발견하게 된다. 이 빈껍데기들이 그럴듯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자신을 톰의 친구, 딕의 아들, 대단한 자리에 있는 중역, 이러저러한 업무를 하는 누구로 정의 내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은 모두 우리들의 한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들은 대개 비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눈에 띄고자 하는 이들의 특성이다. 진실한 단 하나의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이루어진 다음부터 모든 것은 이치에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위대한 의미에 눈뜨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노자(老子)가 말한 ‘교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만심일 뿐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커다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경에는 ‘교만’에 관한 경구가 씌어있습니다. ‘만약 꽃병에 물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을 나르려고 하기보다는 꽃병을 가득 채우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가 칼날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아놓는다면, 칼날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금과 옥이 방에 가득하다면, 그 주인은 그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재산과 명예가 오만함으로 이어질 때, 틀림없이 악이 뒤따른다.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다해 이름을 얻기 시작할 때, 일이 완수되자마자 지혜는 미망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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