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의 눈물
장샤오쑹 외 지음, 김선자 옮김, 루셴이 외 사진 / 안티쿠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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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요즘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의 눈물 시리즈와 비슷해 보인다. 이를테면, '북극의 눈물'이니, '아마존의 눈물'이니 하는 것 말이다.  새삼 매스컴의 위력은 이런데서 발휘되지 않는가 싶다. 이런 방송이 아니면 결코 알리 없는 소수민족의 삶을 이렇게 앉아서 볼 수 있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작년에 짬짬이 보았던 '아마존의 눈물'은 확실히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책 제목도 그렇고, M 본부의 눈물 시리즈도 그렇고 왜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까? 나는 그다지 이런 제목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이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약소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 나름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괜히 '눈물'이란 제목을 붙여 저들이 마치 침략이라도 당해 운둔이라도 하는 양 동정표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 편치가 않다. 그건 확실히 그들을 모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역사는 늘 강대국만을 기억해 왔다. 강대국은 늘 약소국을 집어 삼킬려고 혈안이 돼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본 반에 의하면 별로 그런 정치구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흔이 보이지 않는 이상 '눈물'이란 표현은 좀 과한듯 싶다. 그냥 이대로만 지켜질수만 있다면, 그들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중국의 7개의 소수부족들에 대해서 다룬 책이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은둔의 부족인 셈이다. 사랑의 부족이라 할 수 있는 지눠족. 영혼을 조상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다바족. 사냥꾼들의 마을이라는 바사 먀오족. 사람이 죽으면 소를 잡아 조상의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쟈치먀오족. 아득한 옛날부터 자신들이 만든 약으로 생육을 조절했다는 잔리족. 다부다처제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나시족. 그리고 여인들의 재주가 뛰어나며 일찍 연애를 시작한다는 장각먀오 사람들까지. 어찌보면 흥미롭고, 어찌보면 으시시하기도 한 부족들이 중국내에 살고 있다. 

그중 아름답기로는 이 책 첫번째 나오는 지눠족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이 아름다운 건, 사랑을 이뤄서라기 보단 이룰 수 없어서 아름답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통혼을 금지하고 있고, 그렇다고 타마을 사람과도 결혼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확실히 시나 노래는 행복할 때보단, 불행할 때 많이 나오나 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전승되어져 온 노래들은 하나 같이 애절하다. 

다바족은 죽은 사람을 조상에게로 보낸다는 자부심으로 이어 온 부족인데, 그것도 공부를 상당히 많이해야 한단다. 최근엔 그 전통이 힘을 잃고 있어 명맥을 잇지 못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조상을 뵐 수가 있냐며 걱정과 신음이 깊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마을도 문명의 바람이 들어온 것을 보면 자식들은 어떻게 하면 도시로 나가 돈을 많이 벌고 살까를 궁리중이란다. 아버지와 자식의 바람이 이렇게 다르니 이 전통의 맥이 이어질지 미지수다. 

가장 호탕하고, 호전적이며 나름의 행복을 구가하며 사는 족속은 바사 먀오족은 아닐까? 특별히 이 민족은 남자 아이의 경우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찌보면 성경의 삼손의 부족인 나실인과도 흡사해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은 변발도 한다. 이들은 결혼 전까지는 자유롭고 거침없이 연애를 한다고 하는데, 어찌보면 건강하고 멋져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해 쟈치 먀오족은 죽은 사람을 위해 소를 잡는 다는 것이 샤머니즘적이면서도 좀 으시시하다. 그래도 좀 재밌는 건, 조상께 바친 소의 입에서 혀를 끄집어내어 날카로운 대나무 꼬챙이로 찌르는데, 그것은 그 소가 조상에게 가서 자신을 죽인 사람을 고자질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181P) 좀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소가 무슨 죄일까. 무엇보다 책 표지에 나온 저 배우 안성기를 닮은 저 아저씨가 쟈치 먀오족이란다. 특이한 건, 저 아저씨가 머리에 쓴 것이 전통 모자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굴비 같은 말린 생선을 엮어 만든 것이다.  

뭐니 뭐나해도 신기한 건 잔리족은 아닐까 싶다. 생육을 조절하다니. 중국같이 산아제한을 하는 나라에서 뭐든 예외는 있는 법인가 보다. 무엇보다 태속에서 성을 바꾸기도 한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과연 신비스럽다 못해 영험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부다처제를 한다는 나시족은 일전에 보았던 '아마존의 눈물'에서 보았던 '조에족'가 일견 닮아 보이기도 하다. 그들은 혼외정사를 해도 그것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읽어가다 보면, 그들의 문화란 우리의 기준과 관점에서 볼 때 다분히 미신적이며, 성적 방탕이 섞여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지극히 문화적이며, 윤리와 도덕을 존중하는 나라만이 강대국을 이루며 산다는 지극한 상식에 확실히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무조건 비판의 눈으로 보기 보단,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부터 그들을 알아 나가는 자세도 필요해 보인다.   

인상적인 화보와 편안한 글도 읽을만 하다.  한번쯤 일독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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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판타지 - 패션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나 샤넬에서 유니클로까지
김윤성.류미연 지음 / 레디앙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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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몇년 전, 아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 갔다가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도 사치라곤 전혀 모르고, 그냥 수수하게 하고 다녔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를 나는 거진 3년만에 만난 것인데, 미국 물도 마시고 했으니 조금은 세련되지 않았을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만났었다.  아, 근데 왠걸, 더 수수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라. 더 수수한 것을 촌스러움과 동격으로 보는 건 그 분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수수함이 조금은 신경 쓰인 건지, 아니면 이것이 '미국 컨트리 스타일'이라고 이해를 해 달라는 것인지, 대다수의 미국 사람들은 수수하게 하고 다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정말 미국 사람도 이 사람 같이 하고 살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하긴, 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달라서, 집에서 잘 입고, 밖에선 오히려 수수하게 입고 다닌다지 않는가?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집에선 후줄근해도, 밖에 나갈 땐 그야말로 '비까번쩍'하게 차려입고 나간다.  그도 그럴 것이, 나만 같아도 집 앞 편의점 조차도 집에서 입던 그대로는 잘 못 나가는 편이다. 하다못해 바지 하나라도 바꿔입고 나간다. 이 말을 꼭 비꼬아 들을 것도 아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체면치레나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이왕이면 남에게 좋게 보여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우리나라 보다 잘 사는 미국이 우리와 정반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구가하고 산다니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들의 겸손함, 절제미 뭐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멋을 부리며, 굳이 사치할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그건 개인 프라이드에 관한 것이니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우리는 과연 럭셔리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럭셔리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를 꼽으라면 바로 저<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의 오드리 헵번이 블랙 미니 드레스를 입고 햄버거(?)를 들고 쇼윈도의 명품 악세서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장면은 아닐까? 내 기억엔, 저 때가 아직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은 새벽 시간대라고 생각되는데, 보다시피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물론 멋있으라고 쓴 것일수도 있겠지만, 명품에 대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드러내주는 폼새는 아니었을까? 더구나 지극히 시민적인 음식을 들고 언감생심 명품을 정면으로 노려보겠는가?  

사실, 럭셔리의 정확한 의미는 '사치재'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에 쓰일 땐 '명품'이란 단어로 전도되어서 쓰인다. 그래서 아쉬움이 있다. 솔직히 사치한 물건에 그 단어를 쓰기엔 '명품'이란 단어가 좀 억울하지 않을까? 좀 우아하고, 가치있고, 오래되었으며, 보수적이고, 평판 좋은 물건에 '명품'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물론 샤넬이나, 아르마니, 꾸찌니 하는 패션 브랜드에열거한 말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닌데, 문제는 사치스럽고, 있는 사람만의, 즉 자본주의의 전유물 같아 조금은 편치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사치가 더덕적이지 못하다는 생각과 맞물려 그것에 대한 내밀한 열등감이 합쳐져 그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평생 길표 외엔 다른 것들을 써 본적이 없어서 일까? 명품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을 향유하고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도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질문에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명품에 대한 갈증이 없다는 건, 단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고, 그것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언젠가는 분출될지도 모르는 욕망이라는 쪽에 무게 중심이 실린다. 저 <타피니에서의 아침을>에서의 선글라스 낀 오드리 헵번처럼 말이다.  

우리가 럭셔리를 논하고자 할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름, 샤넬

우리가 패션이나, 명품을 논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건 '샤넬'이다. 이 책에서는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많이 다루고 있어, 과연 이 책이 정말 명품과 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루려고 하는 책인지, 아니면 샤넬을 설명하기 위한 책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샤넬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여성 억압의 시대에 의상 하나로 여성해방에 기여한 점은 샤넬 당대에는 '파격'이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것을 '위대한 것'으로 승격시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녀는 고정관념에 맞섰으며, 남보다 한 발 앞선 안목과 예지가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검정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된 이미지와 신발까지 고전적 패션에 과감히 가위질을 해 '검정 미니드레스'란 패션을 선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검정은 종종 저승사자나 상복에 비유됐다. 하지만 샤넬은, 검은색은 모든 색의 기본이며, 어떤 색을 넣어도 더러워지지 않으며, 다른 색 보다 일정하고, 고르게 염료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모더니즘 시대에 검정색만큼 편리한 색도 없다.(58p)고 확신했다.  확실히 창의적인 사람에게 금기란 없다. 무엇이든지 내가 가는 그곳이 길이 된다란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대에 금기는 뭘까? 나도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       

결국 그것에 대한 그녀의 예언은 적중해 보이는 듯하다. 샤넬의 시대 때, 당시 <보그>의 편집장은, '이 옷은 패션의 포드 자동차이며, 이제 대중들이 입는 표준의상이 될 것이다.'(60p)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샤넬 자신의 안목과 예지에서 한 수 배워보고 싶어진다. 그것을 사업으로 이끌어낸 그녀의 수완도 놀랍고. (솔직히 난 작년에 샤넬의 전기 영화를 본적이 있었는데,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너무 그녀에 대한 이해가 없었구나란 생각을, 이 책을 보며 새삼 깨닫기도 했다.)이 말은 경구를 남기기 좋아하는 샤넬이 한 말 중의 하나다. 그녀는, 유행은 원래 영원하지 않고 거리에서 나타나 다시 거리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킨 '실용적'인 유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남은 유행은 변화무쌍한 패션 세계에서 정식으로 시민권을 얻는다.(50p)고 했다. 확실히 새겨볼만 하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48p) 

 

모더니즘 또는 샤넬 스타일은 아직도 유효한가? 

원래 럭셔리는 신에게 바치는 재물을 담는 그릇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겠는가. 그런 것이, 왜 그런 물건은 신들만이 써야 하는가? 우리도 한번 써 보자. 그래서 부자들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르네상스나 인본주의 이념과 그 괘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쓰기 좋게 변형되고 발전하면서 지금의 럭셔리가 되었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이 역시 샤넬이었다.  

그녀가 처음 제안한 디자인과 옷 입는 법을 흔히 '샤넬 스타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샤넬에게 있어 '샤넬스타일'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곧 스타일'이라며, 스타일이란 말을 만든 사람 자체가 자신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24p) 그렇다면 럭셔리도 별것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인간의 편의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럭셔리 곧 '명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그러한 세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인간 편의를 위한 물건들. 실용성과 디자인을 무기로 인간을 유혹하며, 우리의 것으로 당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라고 유혹을 너머 강요하고 있다. 과연 명품은 진화하는 것이다.  

명품은 왜 비싼가? 

사실, 그렇게 신의 재기로나 쓸 수 있었던 물건들이 인간도 쓸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면 환골탈퇴를 해도 여러 번 했을 것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니 겸손해져도 많이 겸손해진 셈이다. 하지만 명품은 확실히 비싸다. 왜 그런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쓰는 물건은 가격이 오르면 덜 팔리고 가격이 내려가면 더 팔린다. 이것을 '수요의 법칙'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치하기 위해서 쓰는 물건들은 가격을 올릴수록 오히려 점점 더 잘 팔린다. 들인 비용과 가격과 상관없이 '얼마면 사람들이 사고 싶을까'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가격을 올리면 올릴수록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그 물건을 사간다.(268p) 이것을 좀 더 잘 설명한 사람이 경제학자 베블런이다. 그는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유명해지기 위해 돈을 쓰고, 쓸데없는 데 쓸수록 더 유명해진다."고 했다.  결국 명품이 비쌀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중은 화려한 삶을 욕하면서도 부러워하고 궁금해 한다. 대중심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화려한 결혼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좋은 집에서 사는지를 두고 목숨 걸듯 경쟁한다.(270p) 그러니 아까 말한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 선글라스 뒤에 감추어진 오드리 헵번의 눈빛이 어떨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라. 그리고 나 역시 평범하지만 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명품을 쓴다고, 명품 사회가 될까? 

너도 나도 명품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이미 명품이 아닐 것이고, 베블런이 말했던 대로 유한 계급은 반발이 거셀 것이며, 그들은 더 낳은 차별화된 물건을 사거나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사실 실재로 그렇게 해서 일반인에게도 흔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생각해 보면 많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짝퉁도 많이 생겼고.  당장 컴퓨터나 핸드폰만해도 그렇다. 불과 한 세대 전만해도 그 물건은 부자들이나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쓸 수 있고. 선택의 폭도 다양해졌다. 아직도 이 물건에 대한 정체를 모르거나, 알아도 여건상 흔하게 쓸 수 없는 나라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는 확실히 명품 사회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명품하면, 과거 정치인들의 옷로비 사건과 맞물려 그다지 좋은 이미지만도 아니다. 특히나 자본주의의 전위물이고, 중산층이 점점 사라지고 빈부의 격차로 인한 괴리감 때문에 명품은 그다지 환영 받을 물건은 못되지 싶다.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오블리주 노블리제가 중요시 되면서, (이게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도 안에서 입는 옷이나 밖에서 입는 옷이나 별 차이를 두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말해두자.  그래도, 솔직히 명품을 쓰게 됐다고 명품 사회가 됐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돈이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명품을 가지고 도덕성을 우논할 수는 없는 것 같고, 그냥 있는 사람끼리의 하나의 문화 현상이고, 유희는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것을 못 쓰게 됐다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그것을 쓰는 사람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아니할 말로, 그들이 쓰는데 우리가 도와준적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대신 샤넬이 말했던 대로 자기 삶에 있어서 '자기만의 스타일' 을 만든다면, 명품을 쓰는 것도 하나의 스타일이겠지만, 역설적으로 명품을 안 쓰는 것도 자기만의 스타일이란 말도 될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건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기만의 스타일이고, 그것이 곧 명품이란 소리도 된다는 말이다.  '내가 곧 명품 인간'이란 자부심은 어디나 통할 수 있다. 자기 삶에 자부심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명품 사회가 그리도 부럽거든 그것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나름의 스타일. 곧 우리가 명품 문화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절대 기죽지 않기를!

음...

솔직히 이 책을 읽을 때는 나름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을 덥고나자 새삼, 내가 왜 이 책을 읽었을까?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명품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 책을 읽었다고 앞으로 명품을 살 것도 아니다.  게다가  다른 다룰만한 명품도 많을텐데 (주로) 패션에(그것도 특히 샤넬에) 치중해서 다소는 산만하게 주제를 풀어나간 점은 좀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작가가 재치있게 공들여 쓴 것은 인정해 줄만하다. 사이 사이 끼어있는 삽화도 볼만하고.   

물론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볼만한 것은 있었다. 그것은, '명품, 나만의 스타일은 가능한 것인가?' 였고, 결론은 전혀 불가능하지만도 않겠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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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동안 관심 가는 책들을 정리하지 못했다(안 했다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오늘부터 매달 한 달에 한번씩만이라도 이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다시 알라딘 서평단이 되었기 때문이다(지난 2기 때 됐었다. 그땐 이런 게 없었는데...ㅜ). 그것도 예술/대중문화 분야다.  책 욕심도 부인할수는 없지만, 난 좀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 될 수 있으면 열심히 꼼꼼하게 해 볼란다. 

  집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가장 먼저 눈 길이 머물게 되는 책은 이 책이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지 모르겠는데 집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지금이야 개성 있는 집이 많아졌지만, 나 자랄 때만해도 집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중에 눈에 띄는 집이 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 해도 형태만 조금 달라졌을 뿐, 예전과 별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개성과 멋, 나아가 의식있게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들이 그렇게 지으니까 비슷하게 따라 짓는 사람이 대부분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없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좀 아쉽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집만해도, 오래된대다 그냥 공간(빈 구석이 없을 정도로 세간사리가 빽빽히 들어가고, 그냥 잠 자고, 휴식하기 위한)의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좀 삭막하다고나 할까? 집이 꼭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만은 아닐텐데, 이게 또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개선하기 따라선 얼마든지 내게 맞는 집을 꾸밀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 소개에서,  각각의 이야기 속의 8명의 거장들은 때론 자신들이 직접 거주하기 위해서, 때론 건축주들을 위해서, 때론 부모님을 위해서 지은 집들을 통해 “집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과 아이디어를 반영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집에 대한 자신들의 철학과 고민을 투영했다. 고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이 책이 과연 나의 기대를 채워줄지도 궁금하고. 

사진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사진을 찍을 줄을 몰라도 보는 것은 좋아한다. 물론 풍경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도 좋아하고, 영화배우나 모델의 멋진 포즈 위주로 찍는 사진도 좋아하지만, 인간의 삶의 한 단면을 찍은 사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좋아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로 사진을 찍어 온 필립 퍼키스가 50여 년이 넘게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강의 노트를 정리해 펴낸 책이다.  

 

 

 

  

필립 퍼키스의 작품 하나 있으면 실어볼까 했는데, 찾기가 조금은 어려운 듯도 하다. 대신 저 사진은 필립 퍼키스다.  언제 그가 한국을 방문했었나 보다. 그가 본 한국의 이미지는 어떨지 궁금하다. 저 사진은 누가 또 찍었을까? 어쩌면 사진은 진실을 담으려는 인간의 마음 한 컷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미술관에 가고 싶다. 

지난 설 때 유난히 허리가 아팠었다. 그동안 간간히 아프긴 했는데, 설을 지낸다고 쪼그리고 앉아 전을 부쳤더니 견딜만한 허리가 파스를 붙여야 하리만큼 좀 심각했다. 나이 탓이려니 하지만, 조금 서러웠다.  

그 무렵 나는 고종석의 <독고준>을 읽고 난 후였는데, 거기에 보면 화자인 독고원이, 자신은 시간이 나면 혼자 미술관에 가는 취미가 생겼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도 혼자. 그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혼자 미술관을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허리 상태론 어림없는 일이다. 이대로 앞으로 살아야 한다면...? 별 희안한 불안한 생각을 다 했었는데 다행히도 허리는 나았다. 하지만 역시 그것도 대단한 의지가 필요한 건지 아직도 미술관을 나서지 못하고 있다. 혹시 이 책 읽으면 나서지지 않을까?  

표지를 봐선 좀 가볍게 쓴 책인 것 같아 처음엔 그다지 눈 길이 머물지 않았는데, 책소개나 목차를 보니, 나름 전문성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책 같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가 요즘 즐겨보는 TV 프로 중 하나가 <명작 스캔들>이란 프로가 있는데, 미술 작품 하나 감상하는데 어쩌면 그리도 고소한 수다가 계속 연이어 나오는지, 기회가 되면 녹화하는 날 방청객으로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아무래도 방송은 편집을 하니 말이다). 아무튼 덕분에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생겼다. 이 책도 그러지 않을까? 미술관을 나오면, 먹을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도 상세히 소개한다고 하니, 혼자라고 뻘쭘해 하지 말고, 나 자신과의 데이트를 기꺼이 청해 볼 일이다.  

나는, 노희경 마니아다.

 요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똑똑해져서 연출을 누가 했느냐 보단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드라마를 보고, 안 보고를 결정하기도 한단다.  

드라마를 두루 섭렵하지 않고, 볼만한 드라마 몇 개만을 골라 보는 나도 시청 실패율을 낫게하기 위해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의 작가가 누구냐는 꽤 좀 따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좋아하는 작가 몇몇이 생겼고, 그의 작품이라면 처음부터 볼 생각을 하고 TV 앞에 달라 붙어 앉아 있다.  

노희경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시청층이 다른 타 작가에 비해 그리 넓은 건 아니라고 하지만, 노희경의 작품은 한번 보면 정말 좋아하게 된다. 그것은 특별히 웃기거나, 요즘의 감각을 한껏 살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또 어찌보면 처량 맞은 점에선 신경숙과도 약간을 닮아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대삿발하며, 기존의 드라마 문법과 달리 마치 소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가 난 참 좋다.  

저 <굿바이 솔로>도 빼놓지 않고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봤던 드라마다. 그의 작품을 영상이 아닌 문자로 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 같은 경우 정말 잘된 드라마는 DVD를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대본을 가지고 싶어진다. 그중 단연 0순위의 작품이라면 노희경은 아닐까?  그녀의 치열한 작품 쓰는 자세도 부럽고. 

오늘은 무슨 영화 볼까?              
  
 

해마다 <오늘의 소설>이 있는 것은 알았는데, <오늘의 영화>가 있는 줄을 몰랐다.   

펴낸 곳도 같다. 그래도 이것의 선정이 벌써 6회째란다. <오늘의 소설> 같은 경우, 작가의 작품이 선정되어 실리는 거지만, <오늘의 영화> 같은 경우는 좋은 영화를 뽑고 그 영화에 대한 평론이 실려있다. 나름 필진이 빵빵해 보인다.  

요즘엔 가끔, 우리가 왜 영화를 볼까?를 묻곤 한다. 바보 같은 질문이면서, 뜬금없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 한 번 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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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4-0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 분야 서평단도 인문 사회과학 분야와 비슷하게 활동하는게 쉽지 않을거 같아요,
예술이라는 장르 속에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사진, 건축들도 포함되어
있잖아요. ^^

stella.K 2011-04-04 11: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인문 보다는 낫지 싶어요.
제가 시사쪽은 좀 약한데 가끔 시사쪽의 책이 선정되기도
하더라구요.
예술 분야는 계속 관심이 가더라구요.
내친김에 서평단 다른 분야도 두루 돌아다녀 볼까봐요.
지난 번엔 소설, 이번엔 예술, 다음엔 에세이를 해 볼까요?ㅎㅎ
다 돌려면 못해도 3년은 걸리겠죠?^^
 

예상했던대로 신공항 건설이 백지화가 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작가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취재한 책인데, 작가 하나 하나마다 들려주는 삶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 수가 있어 감동하며 읽고 있는 중이다.   

읽다가 오늘 같은 날 유독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그는 바로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다. 꼭 그의 시집을 접하지 않더라도, 그가 섬진강을 지키며,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퇴임한 것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알려진 바대로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자연과 자신의 교육철학에 대해 토로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한는지가 마구 느껴진다.  

해마다 여름이면 수해로 우리나라는 몸살을 앓는다.  지난 번에 경상도 지역이 물난리가 나면, 이번엔 전라도가, 그러다 강원도가, 그러다 또 경기도 어느 지역이 돌아가면서 물난리가 난다. 그때마다 우리가 항상 들어야 하는 건, 이것이 천재냐, 인재냐를 두고 말들을 한다. 물론 십중팔구는 인재에 더 많은 혐의를 둔다. 그도 그럴 것이, 충분히 미리 방재를 하고도 수해가 났다면 그건 천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린 충분히 방재를 하지 못해  그저 눈뜨고 지켜 볼 수 밖엔 없고, 설혹 천재라 해도 그 화를 자초한 부분도 적지 않아 온전한 천재라고도 볼 수가 없다.  

원래 물길은 곡선으로 흐른다고 한다.  곡선은 자연이고, 도시는 직선이라고 한다. 섬진강만 보더라도 완만하게 또는 급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마다 일어나는 수해는 저 곡선의 물길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직선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침수되는 것은 바로 그 자리가 물이 지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이 지나가는 자리에 놓인 인위적인 것들은 모두 무너재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수해는 인재라는 것이다.  강원도에 수해가 났을 때 동네할아버지들이 둑 무너진 자리를 보고 말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저기가 물 지나가는 자리였어"   (309p)   

이 부분을 읽으니, 나 역시 황량한 그 동네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과연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 논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런지 모르겠다. 정말 개발이 우리에게 그토록 절실한 것일까? 

"강산이 저렇게 아파하는데, 시는 뭐하게 쓰냐?"  

시인의 사투리 섞인 저 말을 귀로 듣는 것도 같다.  

군청에서 그가 사는 진매마을의 섬진강가에 벤치를 놓겠다는 것을 시인은 반대했다고 한다. 군청직원들은 사람들이 다니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냥 땅바닥에 앉아서 쉬면 된다고 했단다. 그리고, 길가에 팬지꽃을 심겠다고 해도, 그는 반대했다고 한다. 봄, 가을로 얼마나 많은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는데 그런 꽃들을 심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307p)  

그것을 보면 시인의 성정이 어떨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것은 또 어찌보면 어떤 사람에겐 미움을 살 일인지도 모르겠다.  뭐 좀 하려고 하면 시인이 무조건 반대하고 나서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시인은 분명 자연주의자일 것이다.  자연적인 것을 해치는 건 도무지 용납하기 싫은 '고집쟁이'일 것이 틀림없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강산은 저렇게 아파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 고집쟁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길가에 잘 심기워진 팬지꽃은 나도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볼 때야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이 심기워 질 때까지 있었던 풀이며, 야생의 꽃들이며, 심지어 잡초까지 모조리 뽑혀져 나가야하지 않았을까?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는데, 하물며 예쁘긴해도 길가에 핀 팬지가 무슨 힘이 있어 자연을 지켜줄 수 있을까?  

기왕 말나 온 김에, 내가 주로 잘 가는 강남역 주변은 보기엔 도시적여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불과 1,2년 사이에 가로수가 파이고, 거기에 페룬가 어딘가에 있다는 모아이돌상 같이 생긴 큰 LED 전광탑이 밤길을 밝히고 있다. 뭐 나름 광고도 하면서 밤을 밝히고 있으니 나쁘진 않겠지만, 난 웬지 그게 썩 좋아보이지마는 않는다. 물론 가로수가 뽑히니 인도가 이렇게 넓었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 자리에, LED 전광탑이 설치가 되어 탁 트인 시야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왜 뭐가 좋은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가로수는 그렇게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자리를 차지하지만, 공해를 정화해 주고, 인간과 가장 친숙한 식물이었다. 또 때론 가랑비라도 오면 버스를 기다릴 때 우산을 피지 않아도 그 밑에 서면 당장의 비는 막고 설 수도 있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작은, 서울시 그것도 강남구의 정책이고, 난 그 동네에 살지도 않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다만 과연 우리나라 환경 정책이 지금 재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김용택 시인은 이 책에서 말한다.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건설교통부가 사라져야 한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건교부가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나라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일을 환경부가 한단다.  그것은 확실히 되새겨 볼만한 말이다.  

오늘 아침 뉴스를 들으니, 정부의 신공항 백지화를 놓고 다시 한 번 지역과 정치계가 들썽이고 있는가 보다. 요즘 뉴스를 잘 보지 않으니, 언제 신공항을 만든다, 만다 말들이 오고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백지화가 됐으니 오죽 들뜬 가슴이 푹 꺼졌을까? 백지화 이유가, 한 곳은 산을 깎아야 하고, 한 곳은 바다를 메워야 하는데, 그 두 곳 다 비용이 천문학적이어서 그만 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굴복할 수 없어 이들 두 곳은 독자적으로 추진을 할 것이란다.  과연 분개만 해서 될 일인가?

인위적으로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워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해마다 일어나는 허다한 인재를 지켜보면서도 그토록 개발에 목이 마른건지? 그리고 이것은 지역간의 골을 깊게 만들고, 정치권의 잇속 차리기로 몰고 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거기에 휘둘릴 필요가 과연 있는 건가?  

그런데 이상한 건, 그 가운데 환경 단체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환경 단체들은 용인하고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 신공항이라는 것도 개발을 빙자한 정치권의 커넥션일런지 알 수도 없겠다는 의심을 해 보게도 된다.  그런데 좀 의아스러운 건 이건 또, 우리나라 행정부처 중에 건교부 주관이 아니라, 해양부 주관이란다. 해양부가 주관하는 거가 맞는 건가?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모양새는 아닐지 이것 또한 의문스럽다. 이것에 대해 김용택 시인이라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라면 또 예의, " "강산이 저렇게 아파하는데, 시는 뭐하게 쓰냐?"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독 오늘 같은 날은, 김용택 시인이 많이 생각나는 날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섬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시 <섬진강 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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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4-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행으로 여겨요
그래서 처음으로
이씨가 자기 생각을 접을줄도 아는구나 생각했어요

stella.K 2011-04-01 12: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근데 그게 처음 대통령이 되면서 내세운 공약중 하나라네요.
그 공약 안 지킨다고 정치권에선 뭐라고 그러고.
특히 박 여사님. 참...
건물 하나 지어지고, 어느 한군데 개발되면
그만큼 이 나라에 Co2가 없어지는 건데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숨인들 재대로 쉬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ㅠ
 
어둠 속의 댄서 - Dancer In The dar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주연 : 비욕, 카트린느 드뇌브(2001)

어렸을 때 유럽 영화를 본다는 건 대단히 낮선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유럽 영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건 내가 이제까지 봐온 허리우드 영화 아니면 허리우드 영화 문법에 충실한 (상업)영화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유럽 영화는 다른 문법과 정서를 가지고 보게끔 만드는 뭔가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으로 와닿다가도 가끔 어느 부분, 나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과 맞닥트리기도 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억지스럽다'라는 것 외에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분히 나의 정서를 가지고 보기 때문일텐데, 저게 유럽의 정서란 말인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예를들면 이 영화에서는, 세를 들어사는 셀마가 집주인이자 경찰관인 빌을 죽이는 장면이 그렇다. 물론 셀마는 빌이 자신의 돈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받기 위해 빌의 집에 들어갔다가 뜻하지 않게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안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는 죽인다면 극도의 분노나 증오가 뒷받침이 되야한다. 하지만 죽여 달라는 빌의 말에 선량하기 그지 없는 셀마는 흐느끼며 그를 죽인다.  이해가 가는가? 난 그 부분이 참 어색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빌은 셀마에게 불리한 누명을 씌웠고, 총부리까지 겨눈데다가, 거기에 더해 살인까지 부추겼으니 더없이 위험한 상황이다.  물론 이해 못할 건 없다. 셀마가 실명 직전의 상황이고, 자신을 방어하다 죽인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둘의 대화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정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이라니? 억지스럽지 않나? 사실 그런 것만 빼면 이 영화는 꽤 괜찮은 한편의 뮤지컬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 영국의 영화감독을 제외한다면 유럽의 영화 감독치고 그래도 꽤 부지런히 우리에게 그 존재를 알려 온 감독은 아닐까 싶다. 니콜 키드만의 <도그빌>이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같은 영화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뮤지컬인데 비해 그다지 밝고 경쾌한 영화는 아니다. 대신, 그의 영화는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다.  

이 영화 같은 경우, 모르긴 해도 감독은 인간의 '성악설'을 믿는 사람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꼭 그게 아니어도 그 놈의 '돈'에 놀아나는 인간의 영혼을 생각하면, 인간은 참 어처구니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원래 셀마나 빌이나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셀마는 살인을 저지르고, 빌은 빚을 청산하고자 셀마의 돈을 훔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쓴 삶의 굴레를 셀마를 통해  벗으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셀마가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과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의 아들에게 만큼은 그 운명을 대물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모은 것인데, 빌은 셀마의 처해진 운명을 이기적으로 악용한다는 것에 있다.  

 

그랬을 때 우리가 이 영화에서 원하는 건, 셀마가 어떻게 이 위기를 풀어갈 것인가?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해피엔딩이란 감동을 선사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은 채, 셀마로 하여금 억울한 누명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며 사형대까지 몰아간다. 게다가 영화는 잔인하기까지해서, 셀마에게 어떤 선택까지 요구하게 만든다. 즉,  선택하기 따라선 사형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형 유예를 신청하고, 아들의 눈을 수술시켜주기 위해 모은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셀마는  차마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예정대로사형대에 서기로 한다. 그건 역시 모성 때문이다. 이것을 관객으로서 이해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슬프고 우울한 건, 누명을 쓰고 죽는 셀마의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아들 때문에 죽어야 하는 모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는 거의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모성 그 자체로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 앞두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셀마가 있었기에,  모성으로서의 가치가 더 강하게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많은 오해와 누명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와도 오버랩이 된다. 셀마가 사형대에서 죽기까지의 연기가 사실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모성은 원래 눈이 먼 것이며, 외눈박이'라고 말하고 싶게도 만든다. 

하지만 내가 보는 건, 모성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우린 너무 모성을 이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성은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을 죽음과 맞물려 위대하고 거룩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마도 성모 마리아의 신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좀 '그럴 것 같은'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가 아쉬운 건, 셀마의 아들의 입장이나 생각을 충분히 대변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셀마가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더라도, 과연 그 아들이 엄마없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해서 그것을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낄 것이냐는 것이다. 때론 아무리 눈 먼 어머니라도 자신 곁에 있어주는 것이 모성일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맹인들이 자신이 맹인이라고 해서 인생을 다 불행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약자로 살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을 보게되길 원해 눈을 떴지만 세상에 모순과 죄악된 모습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소아마비 지체장애자다. 그런데 그녀의 딸 역시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비장애인이 보면 안 됐다고 동정할지 모르지만, 참 묘하게도 나는 그 모녀를 보면서 오히려 같은 운명이기에 저 모녀는 일체감을 더 많이 느끼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것처럼 셀마의 아들은 오히려 엄마가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졌기에 좀 더 세상을 안정감있게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비장애자만이 사는 세상에서 혼자 장애자로 살아간다는 건 또 얼마나 외롭고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셀마의 아들이 엄마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좀 궁금했다. 엄마 없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과 비록 불편하게 살겠지만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어떤 것이 더 현명할까?  셀마가 사형을 면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모성은 무조건적이라기 보단 현명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줘야한다고 본다.  하지만 셀마의 입장에선  시간이 없다는 점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그래서 영화는 동시에 사람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영화에서 셀마를 좋아하는 제프가 묻는다. 왜 아이를 낳았냐고. 그러자 셀마가 대답했다. 아이를 품안에 안아보고 싶었다고. (셀마의) 모성은 그렇게 한 가지 이유만을 단순하게 말할 뿐이다.  

이 영화는 카메라 워크가 참 독특하다. 영화를 본다기 보다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할 땐 카메라 각도가 정교하다. 배우가 대사를 할 땐 혼란과 갈등 등을 보여 주지만, 노래를 보여줄 땐 행복과 희망을 보여주는 교차가 참 이채로운 영화란 생각이 든다.  특히 셀마 역의 비욕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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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3-2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본지 한 십년 쯤 되었나봐요. 그때는 저도 아이를 낳기 전이었는데 보고나서 어찌나 마음이 무겁던지. 지금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어도 그 느낌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stella.K 2011-03-28 11:19   좋아요 0 | URL
영화가 참 독특해요. 그죠? 우울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희망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형 장면이 참 안타깝죠?
그래서 리뷰 열심히 썼는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