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국어 교과서 - 생각을 키워 주는 10대들의 국어책
김보일.고흥준 지음, 마정원 그림 / 작은숲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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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말이 많이 가벼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털까? 적어도 내가 그걸 인식한 때는 블로그를 하면서 였던 것 같다. 갖가지 이모티콘을 비록해서, 이상한 종결 어미, 뭔지도 모를 은어들이 난무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도 처음엔 어색하고, 이런 걸 꼭 써야하는 걸까, 회의도 들었다. 물론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겠지만 그럼 괜히 나이든 거 티네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뭐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어느 새 조금씩 그것들에 물들기 시작했다.  

또한 그것이 꼭 아니더라도 옛날엔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그것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그것이 표준어인지, 외래어인지, 외국어인지 분별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확실히 언어도 진화하는구나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는 언어를 때에 맞고 뜻에 맞게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주제건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쓰기로 유명한 김보일 선생님이 고흥준 선생과 공저로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두 분이 다 교사이시고, 책을 내셔도 일관되게 청소년을 위한 책을 내오신 것을 보면, 이분들 청소년을 사랑하셔도 보통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신 것 같다. 이번에 낸 책도 거기서 조금도 비껴 나가질 않는다. 부제가 '생각을 키워 주는 10대들의 국어책'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10대 아이들만 읽어야 하는 책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때로는 나 같은 성인이 읽기에도 편하다.  너무 평이하게 써져서 자칫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걸 나는 글로 정리만 안 했을 뿐, 두 분들은 잘 풀이하고, 잘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냥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도 한다.  

하지만 초두에도 이미 밝혔다시피, 우리는 지금 난립하는 언어의 홍수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 속에서 우리 언어 습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꼭 청소년이 아니어도, 혹은 집안에 청소년이 없어도 이런 책 한 번쯤 읽어주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물론 성인을 위한 국어책이 찾어보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그런 책 한 번 읽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예전엔,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이란 표어가 있을 정도로 국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에 밀려드는 갖가지 언어의 홍수속에 과거에 그런 표어가 있었는지도 기억에 희미하다. 요즘엔 예쁜 우리 말 놔두고 오히려 이상한 은어를 구사하면 대접 받는 그런 사회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속에서 살고 있는 듯도 하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그런 말 잘 쓰면 젊어지는 느낌이고.  

하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언어를 똑바로 구사할 수 없는데, 그 사람의 생각인들 올바를 수 있을까? 때와 장소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라고 하는데, 맨 은어 같은 용어만 사용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가면 때와 장소에 맞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며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수준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의 언어 습관을 점검하지 않고 오히려 올바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구태의연하다고 매도한다면 그 사람의 언어 체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을까, 의심해 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일반적으로, 이렇게 언어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쓰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으로 쓰며 이 책을 읽어 보라고 말하겠지만, 이 책의 두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 그런 풍조 때문에 쓴 것 같긴 하지만, 무조건 비판만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이 책을 보라고 하기보다, 사람으로 하여금 왜 그럴까? 이런 말은 왜 생겨 났을까? 특히 언어와 인식의 문제를 상당히 꼼꼼하면서도 쉽게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얼마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정치나 사회 전반에 흘러 들어가 사람의 인식을 교란시키며, 변화시켜 놓는지를 흥미롭게 풀어 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꼭 사춘기 청소년만 읽어야할 책은 아니다. 물론 언어 사춘기 이전에 체계를 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새로 생성된 언어와 오염 정도를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말을 잘 사용하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읽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내내 잘 사용했던 말도 내가 잘 사용하고 있는 거야, 의심할 때도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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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6-2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도 이 책 읽어야한다고 생각되요. 대한민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제대로 아는 사림이 잘 없으니까요,, ^^;;

stella.K 2011-06-28 09: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봐야되요.
우리말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어요.^^

파란놀 2012-01-06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은 좋은 책을
잘 안 읽는 듯해요
^^;;;;;
 

 살다보면 가끔, 당시엔 깨닫지 못했던 일들을 나중에 한참 후에야 깨닫는 때가 있다. 3년 전,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맘도 공부를 손에서 놓은지가 10년을 훨씬 넘은터라 우연한 개기에 옛 선생님을 TV에서 보고, 그 선생님 계신 학원을 등록하고, 10개월간 열심히 다녔다. 그것도 웬 뜬금없는 영화 시나리오. 그 길을 가야겠다고 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제 정말 적지 않은 나이이고 보면, 더 나이들면 못할 것만 같아서(나는 엊그제 한 작가의 독자와의 만남을 다녀왔는데, 내가 이런데를 앞으로 얼마를 더 다닐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즈음 나에게도 신조가 생겼는데, 뭐든지 할 때는 앞뒤 제보지 말고 하자. 눈 감고, 덮어놓고 하자.가 그것이었다. (서글프긴 하지만) 그래야 뭐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본래 내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못되는데, 뭐든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거나,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성실해지는 것 같다. 나는 그 10개월 간은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다녔으니 말이다. 

처음 시작하면서, 또 어떤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름 기대반, 설레임반이었다. 어딘가를 잘 돌아 다니는 성미도 못되는데, 그 시기만큼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원없이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거기서 한 남자 아이(이런 말 쓰기가 어색하긴 하다. 그도 알고보면 객관적으로 적지않은 나인데. 암튼 나 보다는 어리니까)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영화쪽에 몸 담고 있었지만, 극단쪽에도 인맥을 가지고 있어 그를 통해 싸게 연극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는 연극을 보고 근처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밥을 먹다 어떤 무슨 말끝에 사귀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모인 모두가 아직은 서로 조심하느라고 그랬는지, 현재 사귀는 애인이 없거나, 김빠진 맥주 같이 시덥지않은 연애를 하고 있거나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다소 결의에 찬 어조로, 자신은 지금은 헤어진지가 얼마되지 않아 누군가를 다시 새롭게 사귈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좀 마음이 짠했지만 함부로 동정하고 나오는 것도 그렇고 해서 농담 삼아 "니가 찼냐? 아니면 채였냐?" 고 대범하게 물었(던 것 같)다. 물론 조심스럽지 않은 건 아닌데,  오빠뻘이었으면 어땠을지 몰라도 동생뻘이고, 왕누나 같은 느낌으로 묻는 건데 뭐 어떠랴 싶었다. 그럴 땐 오히려 시크하게 물어 봐 주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다행히도 내 질문이 좀 우스웠는지, 사람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자 그애도 그 웃음 뒤에, "아이, 제가 어떻게 차요? 그냥 채여 줬죠."했다. 마치 그것이 정석인 양. 나는 순간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건가? 연애하다 헤어지면 남자는 이미 마음은 떠났지만 여자가 자기를 차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가? 남자들도 많이 차지 않나? 그것도 남자의 에티켓이라면 에티켓이라는 건가? 그럼 뭐야, 남자한테 차인 여자들은? 하지만 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마침 내 맞은 편에 앉은 여자 아이가 나름 그 애와 비슷한 처지라 한숨을 쉬고 있길래 나는 "너도 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냐?"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그녀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며 나에게, "어머, 언니 저는 여자예요. 제가 왜 기다려요?" "아, 너 여자였지. 기다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린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남녀관계의 복잡성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하랴? 하지만 여자를 찰 수가 없어서 차일 때까지 기다려줬다는 그 아이는 그후 꽤 오랫동안 나에게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나는 이은조 작가의 <나를 생각해>란 작품을 읽으면서 그를 또 한 번 떠올리게 됐다.  

이 작품은, 현대 여성의 내면과 현대성을 작가 특유의 꼼꼼한 문체에 녹여낸 꽤 잘 쓴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책에 보면, 주인공 유안과 승원이 오랜 연인관계로 나온다. 연애도 오래했으니 승원은 유안과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유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그 둘의팽팽한 밀고 당김이 어느 만치 유지가 되다가, 어느 순간 관계를 놔버리는 쪽은 유안이 아니라 승원이다. 말하자면 승원이 그만 만나자고 이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팽팽히 유지됐다 무너지는 유안의 내면이 행간에서 읽혀진다.  그것은 또한 그 때 그 남자 아이가 나에게 은연중 각인시켜 놓은 뭔가의 사고체계를 무너 뜨리는 것이기도 했다.  

'뭐야? 남자도 이별을 선언하잖아? 그런데 걔는 왜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한참 뒤에 따라 온 생각은, '그렇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그 얘는 아직도 상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얘기했던 거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가끔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나중에 어느 책을 읽다가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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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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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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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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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5 1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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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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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충렬
주연 : 최원균, 이삼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다큐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노인과 소가 나온다니 얼마나 지루할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 것도 사실이다. 개봉 당시 아는 누가 이 영화는 필히 돈내고 개봉관에서 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고백컨대, 난 그의 말에 동의는 하지만 솔직히 개봉관도 가지 않았으며, 따라서 돈 내고 보지도 않았다. 지금 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때 일부러라도 돈 내고  봤더라면 이런 묵직하고도 유장한 다큐 영화 한 편 더 만드는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한마디로 놀라다 젖어드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놀라운 것은, 어쩌면 노인과 소가 이토록이나 늙었을까 하는 것이다. 너무 늙어 쓰러지면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다.  노인의 깊이 패인 주름에, 소의 느리디 느린 걸음에 피곤이 드글드글하게 매달려 있다. 이제는 둘 다 쉴만도 한데 쉬질 않는다. 노인은 다른 젊고 튼튼한 소가 있는데도 이 늙은 소에만 의지하여 일을 하고, 소는 주인이 쉬지 않으니 자신도 쉴수가 없다.   

소의 나이 40년. 인간의 나이로 쳤을 때 40이지, 소 본래의 나이로 치면 80도 더 넘었을 법도 하다. 수의사가 처음엔 좀 더 살거라고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1년. 소에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노인에게 1년은 있으나 마나한 시간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렇게 자기 생명이 1년 밖에 남지않은 소와 노인의 마지막을 찍은 영화다.  

노인의 9남매가 올망졸망 어렸을 때 와서 힘들게 농사 지으며 9남매를 키워내기까지 적어도 3분의 1은 그 소의 공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노인의 소를 칭찬한다. 아들 못지 않은 효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 소는 알 것이다. 자신이 이만큼 살  수 있기까지 노인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옛날 방식의 농법을 고집해 왔는지를. 영화 중간중간 할머니의 영감을 향한, 소를 향한 끊임없는 불만이 마치 내래이션처럼 흐른다. 남들 다 치는 농약 한 번 치지 않고 뭐 그렇게 어렵게 농사 짓느냐고 성화다.  하지만 그 소가 그렇게 오래 노인의 곁을 지키며 일할 수 있는 것이 노인의 공임을 할머니는 알까, 모를까? 때론 그런 할머니가 보는 나도 야박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다.

하긴, 이제 자식들도 다 장성해 부모를 떠나간 마당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피지 못하고 늙어버렸건만, 뭐 일할 것이 남아서 그 휘청거리는 몸으로 농사일을 한단 말인가? 이제 좀 자식들의 공양을 받으며 편히 살아도 되지 않는가? 깨어질 듯한 두통을 머리에 한 짐 얹고도, 그래서 이젠 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도  노인은 차마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다. 한마디로 소처럼 일하는 노인, 노인처럼 일하는 소. 혼연일체가 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역시 소는 서글픈 동물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누가 알아주겠는가? 지금이나, 영화를 찍었던 2006년이나 또는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소들이 평안을 누려 본 적은 없다. 당시는 FTA 때문에 우리 소 값의 하락을 우려했고, 광우병 때문에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토록이나 열심히 일하고도 인정 받지 못한 소에게 새삼 연민이 느껴졌다. 그것은 앞서 편하게 농약 써 가며 농사 짓자는 할머니의 자조 섞인 말과 뭔가 상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노인과 소와 배치된 느낌이기도 하다.  

이제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팔자는 말에 우시장에도 데리고 나오지만 노인은 끝내 소를 팔지 못한다. 그만한 가격이면 후하게 쳐 드리는 거라며 팔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몇 번이나  단호하게 "안 팔아!"를 팩팩 쏘아 붙여던 것은 돈이 적어서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노인의 중년부터 노년을 함께 했을 소를 어떻게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내칠 수 있는가 하는 인정이며 동시에, 늙은 부모 버리는 자식들에 대한 시위를 시사하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또 어찌보면 노인의 이런 고집스러운 삶의 태도가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를 찍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은 인간이고, 인간은 노동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 인간이 자연과 동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임을 감독은 간파했기에 그 느리디 느린 시간을 견디며 한 편의 다큐를 찍어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소가 죽던 그 해 12월의 추운 날의 한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소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흘렸던 한방울의 긴 눈물과 그 소를 땅에 묻고 울지도 못하고 허탈해 하는 노인 부부의 모습은, 어느 명배우의 명연기 보다 더 진한 감동을 보여줬다. 또한 툭하고 건드리면 쓰러질 것만 같은 노인과 소에게서 쓰러지지 않는 강하고도 질긴 생명력을 카메라에 담아낸 감독에게도 마음 속으로나마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뭐든지 빨리 빨리의 세풍 속에서도 느리면서도 유장한 한 편의 다큐를 완성하기까지 감독이 얼마나 많이 참고 인내하며 찍었을까 고스란히 느껴진다. 왜 스튜디오 이름이 '느림보'일지 알 것도 같다. 지금은 그로부터 5년 여의 시간이 지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사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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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2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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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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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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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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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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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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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이나 감동적인 영화였었죠.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릴 때 직접 소를 키우던 생각도 많이 나고, 소가 일할 때 풀을 뜯지 못하도록 입막음하는 장구도 몇십 년 만에 새로 보니 정말 옛 추억이 많이 떠오르더군요.

사람과 소가 저토록 한 식구처럼 서로 의지하고 살던 세월이 아마도 족히 수천년 세월은 지속되어 왔을 텐데, 이젠 더이상 '노인처럼 일하는 소'와 '소처럼 일하는 노인'은 물론이고, [노인과 소]처럼 서로 아끼고 돌봐주는 관계도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stella.K 2011-06-22 19:22   좋아요 0 | URL
정말 노인은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올 법해요.
노인처럼 신념있게 사는 사람이 그리운 세대여요.
그건 많이 배웠다고 되는 일은 아니죠.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구요.^^

2011-06-22 1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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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9: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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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사투리 쓰는 테스 

이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독특하게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테스를 비롯한 가족들, 동향인들이 하는 대사가 사투리로 표현되어 있다. 사실 이 비슷한 시도가 과거에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들면, 아주 오래 전 나는 <크래머 대 크래머>를 소설로 읽은 적이 있는데, 주인공 집에서 일을 해 주는 가정부가 사투리를 썼던 것으로 안다. 그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한국적 사투리로 번안된 것을 기억한다. 그때서야 나는 퍼뜩, '아, 미국도 사투리가 있겠지' 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작품은 거의 전면적이다 싶다.  번역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 이 작품이야 말로 번역의 토착화를 이루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것에 대해 비평이 엇갈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색하다고도 한다. 솔직히 나는 후자쪽에 가까운데, 이 작품은 과거 영화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난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킨이 분한 테스를 대사를 칠 때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는 게 영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아직 원작을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원작자인 토마스 하디도 테스를 시골처녀로 묘사하기 위해 그녀의 대사를 영국식 사투리로 썼을 것도 같다.  모르긴 해도 번역자도 토머스 하디의 그런 의도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살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을 어색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둘. 표준어, 그것도 알고 보면 패권주의의 결과물은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표준어에 대한 의혹이 생겼다. 우린 보통 서울말을 표준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말 확실할까?  

약간 황당한 영화 같기는 하지만 <황산벌>을 보면 옛날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가 싸우는데 충청도와 경상도 방언이 오고 가는데 서로 말을 못 알아 먹겠다고 난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그 시대에 그랬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영화적 장치로는 충분히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서로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면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그만 나라에서 삼등분으로 갈라져 잘 들으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서로 못 알아 듣겠다고 하는 건 그냥 자존심 대결 같은 거 아닌가?  

어쨌든, 신라의 입장에선 자기네들이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우길 것이고, 백제는 백제대로 자기네 말이 표준어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오늘 날 한국의 표준어는 서울말을 잘 구사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수도를 옮긴다 어쩐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대전이 됐다면 충청도 사투리가 득세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것도 패권주의의 결과물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쩌다 서울말이 표준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셋. 애정관에 관하여     

이 책을 읽다보면, 확실히 18세기의 사랑과 오늘 날 21세기의 사랑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해 보게 된다. 특히 클레어가 테스를 알게되고 그저 눈만 마주치고, 잠시 포옹만 했을 뿐인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오늘 날 21세기에 다소 진부하게도 느껴질 법도 하다. 솔직히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 다소의 재고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오늘 날 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누가 그만한 제스추어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서로 알 거 다 알고, 따질 것 다 따져서 최중적으로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생각하며, 결혼은 영악해졌다. 사실 너무 재고 따지고 하는 것도 결혼에 악영향일 수도 있다. 연애를 오래하고 결혼을 하는 사람들 보면 기특도 하지만, 저들은 뭐 때문에 이제 결혼하는 걸까? 약간의 권태로운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는 지나간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클레어의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나는 오히려 진부하다기 보단 진지해서 좋아 보인다. 물론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지만. 

넷. 책으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하라!

초두에 사투리 쓰는 테스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나는 문득 이것을 가지고 낭독회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 정확히는 '낭독 극장'을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테스와 같은 고향 사람들이 대사하는 부분을 눈으로가 아닌 소리로 들어보고 싶었다. 그랬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엔 다소 연극 작업과 비슷한데, 배역을 각자 정하고 그 배역에 준하는 목소리 연기를 실제로 해 보는 것이다. 마치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하듯, 라디오 극장처럼 말이다. BGM을 비롯한 효과란 효과는 다 바탕에 깔고. 그럼 대박일 텐데. ㅋ.  

우리는 독서는 혼자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최선의 방법이며, 동시에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낭독 극장'을 생각하면서 우린 왜 책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향유해 왔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책이 해 볼 수 있는 일, 책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해 보면 안 되는 걸까? 기껏 우리가 하는 일이란 작가와의 만남이나, 도서전시회 또는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는 게 전부다. 그것을 향유하는 독자들이 책을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실험실이 없다는 것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는 이의 블로그에 갔다, 모처의 북카페가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재정난이 결국 이유가 됐겠지만, 그건 한편 이해가 가면서도 그렇게 밖엔 할 수 없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왜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는 걸까? 뭔가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더라면 안타깝게 문을 닫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책은 머리에 집어넣은 것이지,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머리에 집어 넣은 일이 즐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그 카페 주인이 비록 낭낭한 목소리는 아니었어도 낭독회라도 매일했더라면  문을 닫는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옛날의 카페는 DJ가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과 소통을 하려고 했다. 그와 비슷한 형식이다. 다시 말하면 복고의 부활?ㅋ   

또 예를들면, 출판된지 좀 되긴 했는데, 조경란의 <혀>는 문학에 요리를 접목시킨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나는 그 소설이 차려주는 갖가지 요리의 성찬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궁금한 건, 작품에 나오는 송로버섯이 들어간 그 요리가 어떤 요린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것이 나왔을 당시 바로 이런 궁금증을 채워 줄 뭔가를 어디선가 했다면 쫓아 갔을지 모를 일이다. 또 그것은 책 매출에 영향을 미쳤겠지. 

<하정우, 느낌있다>도 보면, 그의 미술을 직접 감상하고, 그의 영화도 어느 카페에서 감상하고, 그가 즐겨 듣는다는 음악도 실제로 같이 공유는 뭔가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더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그거 하는데 돈이 수억 드나? 난 잘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지금도 잘 들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지구상 어디에서가는 끊임없이 그의 연극이 쉼없이 올려진다고 한다. 좋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그렇더라도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은 누구든 옆에 끼고 다닐만큼 좋아한다. 셰익스피어가 오늘날에도 그 인기 때문에 잠들 수 없는 것처럼, 책도 잠들 수 없게 해야한다. 어디 선가는 끊임없이 책 때문에 몸살이나고, 책을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책 매니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생산하는 자나 수요자나 말이다. 우린 어쩌면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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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 A Brand New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우니 르콩트
주연 : 김새론, 박도연(2009)

카메라가 한동안 한 여자 아이만을 쫓는다. 바로 앞에 아이의 아버지도 있고, 다른 잡다한 사람들도 있지만, 카메라는 거의 집요하리만큼 여자 아이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이렇게 약간은 기묘하게 시작되는 영화는, 또 기묘하리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가 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스산하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 역시 80년대 또는 그 이전을 배경으로 해 다소 퇴락한 느낌도 든다.   

여기 한 여자 이이가 이제 막 자기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으려고 한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어느 식당에서 아빠를 위해 노래를 불르며 행복한 마지막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왜 버림을 당해야 하는지에 관해선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이 아이는 한 의사와의 면담에서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말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하긴,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부모의 사정이야 굳이 말 안해도 알만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는 이 버림 받은 아이의 심경을 고아원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보여주는 것에 있다.  

서러워라, 버림 받는다는 것은! 보통의 성인도 누군가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실연을 당하면 슬픔과 아픔에 숨이 턱턱 막힐진데, 이제 세상에 태어난지 9년밖에 되지 않은 조그만 계집 아이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의 그 저항은 얼마만한 것일까?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  조그만 어깨에 지구 전체의 무게를  짊어진 무게와 같은 것이리라.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게 보는 나로 하여금 절절히 느껴지게 만드는 건, 확실히 주인공 진희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의 힘일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인정하는 몇 가지 심리적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처럼 사람이 누군가에게로 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심리적 몇 단계를 영화는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그 첫단계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리라.  누구도 자신이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 진짜 버림받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철저히 믿는 것이도 하고. 낯선 환경을 견딜 수 있는 것도 언젠가 여기서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처럼 나는 비록 비천한 고아원에 맡겨졌지만 언젠가 다시 아빠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믿음이 이 아이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외부 환경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너도 별 수 없는 고아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너희와 달라. 내 몸에 손데지 마!' 이렇게 외치며 현실을 인정하기를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아빠(구원자)에 대한 믿음이 점점 힘을 잃어간다. 영화에서는 고아원에 와서 밥도 먹지 않고 버티던 주인공 진희가 할 수 없이 어두운 부엌으로 들어가 밥솥에 눌어 붙은 누룽지를 눈물과 함께 뜯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 눈물 섞인 누룽지를 먹는다는 건 어떤 의밀까? 지금까지 먹지 않고 버틴 건 아빠에 대한 간절한 원망(願望)과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강한 저항이겠지만, 허기진 배를 누룽지로 채우는 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맞아서 고아원 아이들과도 일정 정도 마음을 열고 사귀기 시작하며, 고아원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을 평범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겪게 된다. 이를테면 고아원의 맞언니 예신의 폴폴거리는 연애 감정과 실연에 대한 아픔도 지켜보고, 입양되어 가는 친구의 모습도 봐야했으며, 처음으로 사귄 숙희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여성의 생리도 보게 되며, 새의 죽음도 보게 된다. 이것은 또 어찌보면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 가는 진희의 내면을 에피소드식으로 보여주는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흐름만을 갖지 않듯, 어린 아이의 마음 역시 천갈래, 만갈래로 나뉠 수 있고, 흩어질 수 있다. 그렇게 잘 적응할 것만 같은 진희도 사실은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몸은 고아원 철창 대문 안에 있어도, 마음은 늘 사랑하는 아빠가 오지 않는다면 찾아라도 가겠다는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탈출도 해 보고, 시위도 하며, 원장에게 떼를 써 보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원하는 것처럼 탈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철창문이 열어 있다고 해서 맘대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이니다. 그때의 절망감은 처음의 저항과는 또 달라서 거친 반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선물로 들어 온 자기 몫의 인형을 발기발기 찢는 것도 부족해, 친구의 인형도 그렇게 망가뜨려 놨으니 말이다.   그것은 극도의 분노의 표출이기도 하다.

자신은 너무 어려 고아원 철창을 나가 아버지를 찾을 수 없으니, 원장을 시켜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에 아버지가 여전히 살고 계신지, 살고 계신다면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한다. 원장은 할 수 없이 진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실제로 진희가 예전에 살았던 그 집을 갔다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단지 거기에 아버지가 살지 않으며, 이사 갔다는 말을 담담히 전한다. 그래야 또 진희가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할 테니.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아이는 땅을 미친 듯이 파기 시작한다. 정말 그 땅에 자신을 생매장이라도 할 모양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죽기 위해 판 것이 아니다. 그속에 실제로 눕긴 했지만, 진희의 그 행위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기 위한, 나아가 더 이상 부질 없는 희망에 목숨 걸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던 건, 아이들 사이에 은밀히 행해져 온 화투패 놀이에서 다음 날의 운세를 점치는 행위를 경멸하는 것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진희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도 뛰어넘게 되길 바랬던 고아원 철창 대문을, 누군가의 양녀가 됐을 때 가볍게 나갈 수 있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양녀가 되기까지는 바로 되는 것은 아니였다.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진희의 방황과 불안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양녀가 되고나서도 불행할건지, 행복할건지를 모르는 진희의 불안한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엄밀히 얘기해서 인간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너무 어린 나이에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굉장히 큰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감독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아이의 불안한 심리를 사실감있게 묘파한 수작이다. 

주인공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김새론은 확실히 연기의 감각을 아는 아이인 것 같다. 가히 연기 천재라는 다코다 페닝을 능가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배우의 연기를 주목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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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스텔라님 글 많아서 좋아요. 이 영화를 보기에 제 마음이 너무 흘러넘칠듯 차 있어서 늘 패스,패스하곤 했는데 새론양이 흙덮은 스틸컷에는 헉하고 마음이 철렁해져요. 이제 봐도 될 것 같아요. 되게 좋다고 하던데 스텔라님 리뷰는 사실적이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꼭 볼게요.^^

stella.K 2011-06-17 11:04   좋아요 0 | URL
에효..매일 글을 쓴다는 게 이토록 힘든 것인지도 몰랐어요.
잘 쓰는 것도 아니면서...ㅜ
꼭 보세요. 감독이 나름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저는 보기 좋았어요. 독특하게 찍기도 했구요.^^

hnine 2011-06-17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보고 상당히 맘에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애 이름이 진희였지 맞아, 이러면서 읽어내려 오다보니 그때 기억이 새롭네요.
제목을 '여행자'라고 붙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특별한 느낌을 영화에 입힐 줄 안 감독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면서 극장을 나왔었지요.

stella.K 2011-06-17 11:48   좋아요 0 | URL
진희가 입고 있는 옷에 눈이 많이 갔어요.
이 리뷰 쓰고 우연히 프레이야님 리뷰를 보다가
감독이 우리랑 생년이 같고, 의상을 전공했다고 하더군요.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의상이 복고적이면서도 현대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진희를 위한, 진희에 의한, 진희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그 나머지의 톤을 거의
고루 분배를 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마치 화룡정점과 같은 영환거 같습니다.
hnine님의 서재 이미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