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댓 드라마티스트 - 대한민국을 열광시킨 16인의 드라마 작가 올댓시리즈 2
스토리텔링콘텐츠연구소 지음 / 이야기공작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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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작가의 삶 또는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 관한 책을 즐겨 읽게 됐다. 아무래도 글쓰는 것에 관심을 갖다보니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 중에도 소설가에 집중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 작가가 소설가만있겠는가? 시인도 있고, 시나리오 작가도 있으며, 드라마 작가도 있다.  그래도 작가를 다룸에 있어 소설가들이 단연 많이 다루어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은 우리나라의 대표 드라마 작가 16인을 다루고 있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은근히 재밌다. 그리고 이책은 대표 작가 16인의 개인적 고백을 담은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따로 있어서 이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닥치고 드라마...이 책은 꼭 그러려고 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비교적 원로급들을 앞에 배치해 놓았다.  원로이면서 현역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드라마 작가로는 김수현 작가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난 70년 대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작품 한 두 작품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두 드라마는 너무나 유명해서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대면 수돗물 사용량이 현격히 줄어든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한 작품이 있다면, TBC가 문을 닫기 전 방송했던 <아롱이 다롱이>가 아니었나 싶다. 어찌나 드라마가 재밌고 웃기던지,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그녀의 작품을 보지 않게 됐다. 그것은 그녀의 드라마가 싫어서라기 보단 사춘기의 여파여서인지 모든 것에 시니컬해졌다. 그래서 TV드라마도 시큰둥해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랜만에 그녀의 드라마를 봤는데, 배우들의 대사가 엄청 많아졌고 속사포처럼 쏘아대는데 그만 질려버렸다.  그게 어찌나 거슬리던지, 가득이나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내가 역시 나는 드라마를 보지 말았어야 했어. 하며 여전히 다른 모든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모름지기 드라마는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김수현의 드라마는 과연 일상에서도 저런 대사를 쓸까 의문이 들 정도로 대사가 많고 경직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대사가 적어 한풀이라도 하듯, 지문조차도 구어체로 살려 배우들로 하여금 읊조리게 만들어 놨으니 얼마나 거북한가.
지금도 그런 선입견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를 말할 때 김수현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원래 소설이나 드라마나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갈 수 있는데까지 몰고 가야한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을 다루더라도 어떤 작가는 그걸 막장으로 몰고 가지만, 김수현 드라마는 '명품'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다.
특히 몇년 전에 방송됐던 <내 남자의 여자>를 보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적이 있다. 그건, 친구의 남편을 사랑하는 어찌보면 막장 드라마적 요소들이 많다. 장면도 간혹 파격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새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속사포적 대사는 마치 연극에서 보암직한 대사로 바뀌어 있었고, 고도로 등장인물에 집중하다 보니 막장적 요소들을 거둬내고 보는 내내 정말 괜찮은 연극 한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연 '김수현이다!'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모르긴 해도 그녀는 훗날 한국 드라마사(史)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작가중의 한 사람이고, 한 술 더 뜨자면 '현대의 (한국의)셰익스피어'쯤으로도 추앙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그렇게 그 작품을 통해 김수현 작가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은 늘 나를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 이후 몇 개의 작품이 더 나왔지만 건너 뛰었다. 그리고 마침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이 되었다.  정말이지 몇 년만에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작가가 김수현이라서라기 보다는, 수애라는 여배우가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지만. 

책에 보면 그녀는 굉장히 쉽게 글을 쓴다고 나와 있다. 작가라면 머리를 쮜어 뜯어가며 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머리속에선 어떻게 써야할지를 다 그려놓고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또 오래 전에 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과 비슷하다. 그는 이미 머리속에 자신이 만들 작품을 그려놓고 나머지 쓸데없는 부분을 깍아내는 것처럼 작업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까지 김수현 작가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공부해 놓은 분량은 실로 엄청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배우들이 쏟아 놓는 대사과잉이 이해가 갈 것도 같다. 그녀는 또한 쪽대본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데, 작가들의 쪽대본이 드라마의 질을 얼마나 저해하는지를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드라마는 명품 드라마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드라마를 볼 것 같으면 입 닥치고 볼 일이다.   

취재력... 소설을 쓰는 작가든 드라마를 쓰는 작가든 취재력은 거의 제1의 조건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를 빼놓고라면 말이다. 책은 비교적 초두에 김운경 작가 편을 실었다. 김운경 작가의 대표작이라면 <서울 뚝배기>나 <서울의 달>이 있고, 이것 역시 누구든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드라마가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놀라운 현장감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 그의 발빠른 취재와 꼼꼼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재밌는 건, 그가 드라마 <형>을 집필할 때 그는 실제로 거지 소굴에 들어가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실제로 걸신(乞神)의 실체를 보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거지는 그냥 가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귀신이 들려야 하는데 그게 걸리면 잘 차려진 깔끔한 (얻어 먹는) 음식 보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진 더러운 음식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런 더러운 음식을 먹어도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이 잘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신도 한번 그 육체를 떠나면 더 이상 더러운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한 번 병에 걸리면 세상을 뜬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캬~!"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김운경 작가가 아니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이렇게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 고급 취향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항상 거리와 시장에 있다. 노숙자의 이야기를 하려면 서울역으로 가서 노숙자들과 보름은 같이 뒹굴어해 한다고 말한다. 과연 작가는 그냥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렇게 김운경 작가가 서민적이거나 밑바닥의 삶에서 취재를 한다면 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발군의 취재력을 자랑하는 작가가 있다면 <종합병원>을 쓴 최완규 작가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는 그 작품을 쓸 때 아예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의사는 취재에 몰두한 저를 '짐승처럼 산다'고까지 표현했으니까. 뭔가 인생의 변화를 꿈꾸다면 어느 순간은 미친 듯이 살아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제 노하우는, 아니 저뿐만 아니라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의 노하우는 '취재'라고 말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말하지만, 더 많은 작가들이 자기 감각만 믿고 쓰지요."(124p)

그건 정말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지 그를 두고 '취재 짐승'이라 했을 정도라니 알만도 하다. 하지만 나중에 그도 고백하지만, 때론 지나치게 많은 취재가 작품을 쓰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작품에서의 취재는 빙산의 일각으로 표현하란 말이 있다. 좀 억울할 법도 할 것이다. 취재는 잔뜩인데 드러나는 건 아주 적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학적,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작가들이 결국 전체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으니(130p) 그것은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김도우 작가는 여성 작가였다...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안 것은, 우리가 그렇게도 재밌게 봤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작가가 여자였다는 것이다. 난 이름이 그래서 남성 작가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남자면서 이렇게 지극히(!) 여성적인 작품을 쓰다니. 나름 한 번 지켜봐야할 작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성 작가라니. 깜빡 속은 느낌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방송엔 여성 작가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엔 매체의 발달로 인해 그 드라마에 누가 나오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썼느냐도 중요해졌다. 이건 묘하게도 영화는 감독이 누구냐가 (배우 보다 더)중요하지만 드라마에선 연출 보다 작가가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여성 작가들이 포진해 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드라마의 절대 다수가 여성 시청자들이라는 점과, 여성의 감성, 여성의 어휘력 등이 주 강점으로 떠오르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드라마의 구성이 주로 사랑 아니면 가족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역시 남자 보단 여자가 더 강하다. 그러니 여성 작가가 중요해질 수 밖에. 
그래서 그럴까, 난 그다지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 작가의 작품이 시작한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작가가 있다. 그것은 노희경과 흔히 홍자매라고 일컬어지는 홍진아, 홍자람의 작품이다.
노희경은 초기에 우리나라 하루의 방송이 마쳐지면 애국가가 나오는데 그것의 시청률 보다 못한 시청률을 가지고 있다는 오명이 있다. 사실 나도 노희경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작가가 있는 줄도 몰랐다. 지금도 그녀는 넓은 시청자층을 확보하지 못하는 작가다. 소위 말하는 매니아들만 좋아하는 작가란 말이다. 하지만 최근 그 매니아층이 점점 두꺼워지고 다소 넓어지기도 했다. 잘된 일이다. 그녀의 작품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시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면을 바라본다는 것에서 어떤 점에선 김수현을 닮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배종옥과 서로 목을 졸라가며 싸우고, 표민수 감독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니 정말 놀랍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다. 원래 감독과 작가는 견원지간이라 할만큼 사이가 안 좋다고도 하는데, 하긴 사람이 좋고 싫은 것에 무슨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 꼭 나쁘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배우가 서로 목을 졸라가며 싸우는 것이 지금도 방송가에서 회자되고 있다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그때 노희경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소리를 질렀단다. "연기를 제대로 하란 말이야!" 이것이 배종옥이 <거짓말>을 했을 때라고 한다. 역시 요즘 작가는 배포도 있어야 하는가 보다. 옛날엔 어둠속의 좀비같기도 하고, 대인기피증에 걸린 고독한 한마리의 늑대 같지 않았던가? 오래 전, 작가 김수현이 연출에도 관여를 한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배우와 싸우는 작가도 있고, 방송가는 정말 요지경속인가 보다.
그렇지 않아도 노희경이 표민수 작가에게 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적응 안 되는 게 세 가지가 있는데 사랑과 뱀, 배종옥이라고(166p). 그 부분 읽고 그저 웃는 수 밖에. 크크. 원래 여자는 싸우면 싸울수록 멀어진다고 하는데, 확실히 작가의 유전자와 배우의 유전자는 좀 특이한데가 있는지 배종옥과 노희경은 같은 여자인데도 지금 잘 지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노희경 작품에 배종옥이 거의 빠지지 않고 출연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드라마의 미래... 내가 홍자매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것은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고 나서인데 그것이 눈에 들어왔을 때 좀 지난 작품이긴 하지만 <태능선수촌> 늦게나마 챙겨 보았다. 그것은 다른 작가들이 사랑 타령, 불륜, 막장 드라마를 쓰고 있을 때, 그녀들은 소재의 독특함으로 승부수를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소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그렇게 소재의 다양성은 있어서 좋은데 아직도 그 주제면에선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항상 사랑과 배신 아니면 주인공의 탄생 비화. 뭐 이런 것들이 주다. 그래도 이것에 변화를 주시하게 만들었던 것이 이기원 작가의 <하얀거탑>이라고 생각한다. 메디컬 드라마를 우리가 못 봤나? 그래도 항상 거기엔 청춘의 낭만과 고민, 사랑만이 있어왔을 뿐이다. 하다못해 취재 짐승이라던 최완규의 <종합병원>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소재는 다양해졌어도 주제가 그렇고 그러니 그 밥에 그나물이란 말이 나온다. 참, 내가 드라마를 안 보게된 결정적인 계기도 내가 꼭 시니컬해서만도 아니다. 그래. 그 밥의 그 나물이어서 안 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기원 작가는 흔히 다룰 법한 이야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인간이 갖는 욕망, 인간의 생명의 유한성 등을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줬다. 물론 이 작품은 원작에 힘입은 바 크지만 작가가 어떻게 각색을 하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건 달라질 수가 있다. 그때 그걸 보고 얼마나 열광했던지.  
물론 난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드라마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바라기는 그렇게 취재 짐승이란 말을 듣고, 고생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적어도 그 밥에 그 나물이란 말은 듣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좀 더 그 부분에서 노력을 해 주었으면 한다. 

                                                               *           *           *  

사실 소설이나 드라마나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에 드라마 작가들이 고민은 소설가들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조언하는 건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나 비슷하다.  하지만 워낙 이 방면의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다. 더구나 소설가는 혼자하는 작업이지만, 드라마 작가는 직접 부딪혀 가면서 해야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은 조금 더 치열해 보인다. 그것은 최순식 작가의 말처럼, 드라마 작가는 그냥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다루어야 하는 작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몇년 전, 겉멋이 들어 시나리오를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얼떨결에 시나리오 한편을 쓰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다시는 시나리오 작가를 함부로 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처럼, 같은 비주얼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드라마 작가 역시 함부로 뭐라고 일이 아니다.  
작가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란 말이 있다고 한다. 즉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 열망은 시청자 보다 작가들이 더할 것이다. 그러니 가능성 있는 작가라면 좀 더 인내를 가지고 묵묵히 지켜봐 줄 일이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릴만한 김수현도 매번 성공적인 작품만 써왔던 것은 아니다.  그렇잖아도 한류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 드라마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드라마는 더 많이 발전할 것이다. 그러니 시청자로서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뭐라고 하는 건 우리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어차피 어설프게 만든 드라마는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나는 이 책이 다룬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분량이 작다고 생각했다. 고작 271p 정도를 쓰고 있으니. 하지만 글쓴이들이 군더더기없이 자기가 다룬 작가에 대해 잘 썼다고 봐진다. 작가지망생은 물론이고 작가들의 이면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읽혀지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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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1-0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현 작의 <내 남자의 여자>를 보고 좀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 작가는 주인공 여자가 잘못을 저지른 남자를 상대로 복수하는 장면을 즐겨 쓴 것 같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확실했어요. 선악의 구도도 확실하고... 마치 남자들을 못마땅해하듯... 그런데 이 드라마에선 승자가 없는 것, 그러니까 배종옥도 그의 남편의 사랑을 차지한 김희애도 승자가 되지 않고 패자가 되어버리죠. 남편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가 되고...작가가 김희애마저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게 느껴져요. 다시 말해 악을 저지른 자도 연민의 대상으로 볼 줄 아는 넓은 아량이 김수현 작가에게 생겼다고 할까요? 그건 작가가 나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었어요.

우린 남의 남편을 빼앗은 사람은 늘 행복하고 승자의 위치에 있는 걸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완전히 빼앗는 건 불가능해서 더 고독하고 더 비참하다는 것을 김희애의 모습에서 알게 되죠. 알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존재라는 것... 사랑의 노예일 뿐이라는 것...

이 책, 재미있겠는데요. 저도 한때 노희경 작가를 좋아했어요. 대사가 외우고 싶을 정도로 끝내줘서요.

잘 읽고 갑니다. 제가 첫 추천일 것 같은데요. ㅋㅋ

stella.K 2011-11-06 20:05   좋아요 0 | URL
오, 고맙습니다.
저는 쓰기는 열심히 쓰는데 추천은 많이 못 받아요.
왜 그럴까요? 어떤 땐 과외 받고 싶더라니까요.ㅋㅋ

맞아요. 그 드라마는 그랬죠.
무조건 김희애를 옹호하지도 않고.
결국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건 말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무튼 그 드라마 정말 세 사람만 나오는 고도의 심리극을 보는 것
같아서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지금하는 '천일의 약속'은 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맛은
그닥없는 것 같지만, 수애가 연기를 정말 잘하더군요.
그에 비해 김래원은 쫌...ㅋ

아이리시스 2011-11-0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일의 약속]은 첫 회가 정말 좋았어요. 이 책은 16인의 드라마 작가에 대해 하나하나 해부하는 거예요? 저는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재밌을 것 같아요.^^

stella.K 2011-11-07 18:20   좋아요 0 | URL
첫회가 어땠죠?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원...ㅠ
그런데 이 드라마 지켜보고 싶어요.
수애 때문에라도.ㅋ
전 재밌게 읽었어요.
아이리시스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1-08 00:09   좋아요 0 | URL
음, 첫장면부터 "서연아, 나는 어떻게 하면 덜 나쁜 놈이 되면서 널 안을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야."

"어쩔 땐 내가 그 욕심만으로 다인 것 같아."
등등.

그리구요, 베드씬 뒤에 나오는 만나서 싸우다가 키스하고 약혼날짜 잡혔다는 얘기 듣는 그 씬 전부요.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까지. 뒤로가야 할 구성이 앞에 오고 회상씬이 진행되어서 신선한 구성이라고 생각됐어요. 하지만 지금도 좋아요. 스토리는 확실히 [내 남자의 여자] 때보다는 허전한 느낌이에요. 저한테만 그런가.ㅜㅜ

stella.K 2011-11-08 13:01   좋아요 0 | URL
햐아~그걸 기억하고 있다닛!
대단해요.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네요. 맞아요!
그 첫회 정말 독특했어요.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요.
그런데 아이리시스님 말씀이 맞아요.
내 남자의 여자는 정말 빈틈이 없고, 찰진 맛이 나는데
이건 수애가 나오는 장면이나 대사가 아니면 어딘가 빈틈이 느껴져요.
특히 김래원은 영 적응이 안되더만요.
어제 기사 보니까 수애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며
이 드라마에 대해 힘들다고 징징대더만, 영 좀 보기가...ㅋㅋ

 
소설 손양원 : 사랑과 용서
유현종 지음 / 홍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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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주기철 목사와 함께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있다는 것과, 순교하기 전, 두 아들을 잃었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은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기독교의 유명한 일화다.

솔직히 순교자야 워낙에 기독교 복음 선교가 척박한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어떻게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한편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입각해서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도 같다. 그를 다시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타인으로 부터 위로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보듬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건 바보 아니면 성자. 둘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건, 물론 그런 식으로의 용서도 대단한 일이겠지만, 우린 또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얼마나 많이 제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선을 거 왔던가를 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느 때고 나 자신을 원하시되 100%를 원하지 않은 때가 없으셨다. 왜? 아들을 내어 주시돼 온전히 내어 주셨으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셨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린 적이 없다. 내가 뭔데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릴 수 없단 말인가? 사랑하는 관계는 100%가 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다. 누구는 온전히 100% 아니 그 이상을 내어 줬는데, 누구는 80%만 내어 준다면 그건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며 상대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물론 그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손양원 목사의 딸 동희 양이 두 오빠를 죽인 재선을 아들로 삼으려는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에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양원 목사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렸던 것 같다.

나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장면이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름 그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성경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사건과 오버랩이 되기도 한다. 우린 그저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 나름의 고뇌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본다. 더구나 하나도 아닌 둘이고, 그것도 확인 사살로 두 번 죽인 자이다. 어찌 보면 아비로서 비참했을 것이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넘어 모멸감까지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아들로 삼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괴로움이 생략이 되어 아쉬움은 남지만, 대신 그의 딸이 울부짖는 것으로 작가는 그 부분을 대신 했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또 어쩌면 손양원 목사는 처음부터 원수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 자체가 악해서라기 보단, 시대 자체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알지도 못한 채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미쳐 날뛰는 자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탓한다면 시대를 탓하는 수밖에. 후에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서 공산당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해서 처단해야 할 때, 여느 사람 같으면 나라가 대신 원수를 갚게 해 주는구나 약간의 위로는 됐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생명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알고 죽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암울하고, 짐승 같은 세대일수록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란 걸 하나님은 친히 손양원 목사로 하여금 증명케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단순함’ 또는 ‘순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가 못하다. 솔직히 단순해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솔직히 나 자신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얼마나 의심이 많은지, 얼마나 회의가 많은지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은 단순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순전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 달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이유 갖다 붙이지 않고,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손양원 목사는 끝까지 지키며 보여줬고, 어떤 결기마저 느끼게 해 줬다. 하지만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런 사람이 오늘 날에도 존재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오늘 날은 우리는 너무나 풍요롭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너도 나도 기득권을 얻기 위해 발 버둥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목사들조차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교회, 될 수 있으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과연 손양원 목사 같은 올곧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가려져 쉬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등불을 켜서 창문 아래 두지 않고 창가 위에 둔다고 하셨다. 그런 것처럼 착한 일, 옳은 일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의 본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위기라고 말한다. 이런 때에 손양원 목사의 전기 소설을 읽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는 물론 그의 부친 손종일 장로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는 일제통치에서 해방을 맞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나라의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본의 신사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지만, 다른 우상에 무릎 꿇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앙의 선배들의 결기를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떤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되돌아 봐야할 때라고 본다.  

글이 참 막힘없이 유려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이미 역사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의 글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독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볼 수 있어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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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11-10-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양원 목사님...학교 다닐때 읽었는데...제 믿음의 얕음을 절실히 느꼈죠.
새로나온 책인가보네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1-10-31 17:46   좋아요 0 | URL
아, 메르헨님도 크리스찬이시군요.
작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현종 작가라서
마음이 가더군요.
이번 기회에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개기가
되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근대사와 그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페크pek0501 2011-11-0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 먼저 선의를 베풀면 뒤통수를 맞는 법이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말라며, 그것을 정당화하며 신념처럼 여기기도 한다" - 이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살이가 너무 살벌해요. 선의를 베풀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대가가 없으면 실망하죠. 그냥 베푸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베푸는 그 자체도 즐거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 뒤통수 치는 사람, 되지 맙시다. ^^ 남 가슴 아프게 하면 즐거운가요? 원래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괴로워 못 자는 법이죠. ^^

stella.K 2011-11-05 11:15   좋아요 0 | URL
와우, 어제 저의 서재에 오셔서 아주 훑으셨군요.
고맙습니다. 저는 오래된 서재라 그런지 옛날에
알았던 서재인들과도 서로 왕래가 뜸해졌어요.
지금 한창 활동중인 분들은 또 비슷한 시기에 서재 활동을 하신 분들
끼리만 친한 것 같고.
새롭게 누굴 사귀자니 그렇고, 옛 사람과 통하자니 그렇고.
제가 성격이 그래서 그런가, 오래된 서재인의 고충이 이런 거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님의 예방을 받으니 정말 반갑고 좋네요.
고맙습니다.^^
 
[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 얼떨결에 2기 활동을 했었다.  그때는 이만큼이나 세분화 돼 있지 못했다. 4개 분야던가?
그때 나는 소설 분야를 지원했는데, 받은 책을 미처 다 완독을 하기도 전에 새로운 책을 받으니 감당이 안 됐다. 책 받는 거야 좋지만, 책을 워낙 늦게 읽는데다가 리뷰도 그만큼 빨리 쓸수가 없으니 굉장한 부담으로 와 닿았다. 그 이후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고 이번에 9기 평가단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 보니 그때만큼의 부담이 없고, 한달에 두권을 받으니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많은 분야로 세분화가 되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책을 분류함에 있어 애매함을 보이는 책이 있는 것 같다. 예를들면, 이책은 예술 분야 책일 것 같은 책이 인문분야에 선정되기도 하고, 에세이에 있기도 한다. 하긴, 책이 워낙에 분류가 까다로운 것이라 어렵긴 할 것이다. 더구나 요즘엔 통섭이 화두인만큼 그 분류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그러니 알라딘 평가단에서 책을 선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래도 어쨌든 9기를 마무리하고 10기가 출범했으니, 나름 잘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에 대한 취향도 제 각각이라 선정할 때 어려움이 많을 것 같긴 하다. 어떤 책이 선정이 되면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울기도 한다. 나는 선정된 책의 만족도 50%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총 12권의 책중에 6,7권 정도가 마음에 들었다면 알라딘으로선 최선을 다해 책을 선정하고 보내주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물론 나도 초기에 보내 준 책 몇권은 너무 마음에 안들어 성토도 해 봤지만, 어차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견해는 같을 수가 없는 것 같다.   

각설하고,  9기의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도록 하겠다. 

-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제레미 시프먼

가장 좋았던 책은 이책이 아니었나 싶다.  
표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건 아마도 표지 색깔 때문인 것 같은데 책에 핑크색을 사용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런 것만 아니라면 보내 준 책 중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차이콥스키에 대한 평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책은 그의 평전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유용하리라고 본다. 평전이라면 대체로 두꺼운 책이 많다. 그만큼 담을 내용도 많고, 다룰 내용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책은 차이콥스키에 대해 정말 알아야 할 것만 요점만 간단히 전하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두 장의 CD와 각각의 곡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어 정말 유익하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우리 기억 속의 색>-미셸 파스투로(안그라픽스)


 이책의 리뷰를 썼을 때 나는 그 제목을, 이책에 경의를 표한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색을 가지고 에세이 썼다는 것이 놀라울지경이다. 더구나 이책은 한 권위있는 문학상 에세이 부분을 수상했다. 그러니 경의를 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공히 얘기하지만,  재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재밌다고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ㅋ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김도경(현암사)  

솔직히 이책은 어렵다. 하지만 워낙에 도판이 좋고 묵직해서 이런 책 한권쯤 서가에 놓여있으면 폼나지 않을까 한다. 뭐 꼭 그런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한옥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알고 싶어진다. 그것에 백과사전식으로 저자가 공력을 쏟았다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의 방황>-안도 다다오(오픈 하우스)

건축가란 직업이 멋있지 않은가. 더구나 건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것도 묘한 아우라를 풍긴다. 그런 저자가 무엇이 좋은 건축인가에 대한 고민 하나를 가지고 세계 곳곳을 여행한 것을 글로 썼다. 그런 용기와 부지런함이 부럽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이 난다>-손철주(현암사) 

 

이책은 한국의 사계를 우리 그림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보면 볼수록 우리 그림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고전과 어우러져 그 운치가 더한다. 그저 좋다!고 밖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정병모(다할미디어) 

우리 민화를 보고 있노라면, 새삼 우리가 얼마나 해학과 풍자가 많은 나라인가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눈이 호사를 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성실히 책을 보내 준 알라딘 평가단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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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1-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에 대한 소개, 잘 읽었어요. 여러 서재를 다녀서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책 정보인 것 같아요. 직접 발품을 팔지 않고도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요. 책을 읽지 않아도 간략한 책 정보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이랄까요...^^

stella.K 2011-11-05 11:19   좋아요 0 | URL
요즘에 '오래된 새책'이란 책을 읽고 있어요.
알라딘 평가단 에세이 부문에서 받은 건데
정말 좋아요. 책에 대한 정보를 정말 저자의 찰진 언어로
쓰고 있죠. 단 아쉬운 것이 있다면 주로 절판된 책을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좋은 책이 사라져 가고 있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긴 하지만 이 책 정말 좋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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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책 글머리에 이런 말을 했다.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다. 팝 아티스트가 팝 아티스트가 세계를 이끌고 있고, 대중가수가 되기 위해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로부터 역차별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라고.   하지만 이런 때는 이 시대에 처음 있어 왔던 건 아니다. 이미 19세기 무렵부터 있어 왔다. 저자는 그것의 답을 민화에서 찾고 있다.
민화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한다. 그 민화를 그리는 사람을 서민화가라고 하는데, 짐작하듯 서민화가는 어떤 권위에 구애 받지 않고 어떤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전통으로 굳어진 관습을 넘나들며, 그 형식을 재구성해 왔다고 한다. 고로 민화는 자유고, 흥취며, 풍자며 해학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익살스런 김홍도의 <서당> 그림도 민화다.  그밖에  신윤복을 비롯한 풍속화가들의 작품이 민화에 속한다.  

이책은 민화에 대한 책인만큼 그림을 많이 수록해 놓고 있는데, 민화라고 해도 작가들마다 그 필치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고급스럽진 않고, 약간은 조악한듯도 하다. 그래서 어찌보면 뭔가를 베끼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주류에서 비껴 나갔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래서 친근감 있기도 하고, 어찌보면 고급문화를 조롱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모든 서민화가들이 그런 필치의 그림을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떤 건 나름 정교하면서도 강렬하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1층의 붉은색 바탕에 하얀호랑이의 그림이 그것인데(209~210p),  이름하여 <사람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란 작품이다. 이것은 현존하고 있는 민화를 그리는 서공임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현대 작가고 그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이 풍부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제목이 그래서 그런가? 무언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 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개해 놓은 작품들은 대체로 익살스럽다. 호랑이를 주제로한 그림들을 보면서, 세상에 호랑이를 이만큼 익살스럽게 그릴 수 있는 민족도 드물거란 생각이 든다. 용을 좋아했던 우리나라 옛 사람들의 심성이 고스란히 작품속에 베어나오기도 한다. 질펀하고 에로틱한 작품도 작품도 있다. 이것 역시 우리나라를 따라 올 작가들이 있을까 싶다. 또한 시대를 거스를 수 없어서일까? 불교적 농도도 때로 짙어 보인다.   

민화라고 하여 반드시 일상생활과 밀접했던 것마는 아니다. 반상의 구별없이 학문을 숭상했던 우리나라는 민화에도 그것들이 나타나 다양한 책거리 그림이 나타나고 있었다. 책거리는 일종의 책과 관련된 정물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책이 가지런히 꽂힌 서가를 병풍으로 만들어 방의 분위기를 더하니 나름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뿌리 깊은 나무>의 드라마에 세종(한석규 분)이 사람들과 만나고 업무를 보는 방에 놓인 병풍이 바로 그것이다. 이건 여타의 조선을 배경으로한 드라마엔 나오지 않았던 소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보면서 이 드라마 새삼 제대로 만드는구나 싶어 반가웠다. 또한 이 책거리에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 후기작품도 있으니, 하여간 우리나라는 알아줘야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킥킥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좋은 구경 뒤에도 나름 아쉬움은 남는다. 이렇게 우리나라 민화와 작품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어서 좋긴하지만, 이런 건 작품 중심이 아닌 그 그림을 그린 화가를 중심으로 꾸며졌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어차피 우리는 조선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오래된 것은 다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류의 것이든 비주류의 것이든 말이다.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화단은 무엇이며 그 가운데 민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안다면 좋지 않았을까? 작품마다 작가가 누군지,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작품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하긴, 저자도 한계였는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몇몇의 조선시대 화가를 제외해 놓고는 나머지 작품엔 누구의 작품이라고 밝혀 놓지도 못했다. 그만큼 당시의 무명화가들은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저 좋을대로 작품활동을 했을 것이다. 그저 쌀 한 됫박, 막걸리 한 병 값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주류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은 잡스럽다고 폄훼도 했겠지. 그러나 당시에 귀한 대접을 받았 건, 천한 대접을 받았 건 세월 지나면 잡스러운 것도 귀한 대접을 받을 때가 온다. 내가 오늘 본 그림이 세월지나 어떤 대접을 받을지 좀 더 깊은 안목으로 봐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그림 보는 안목도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미술에 관련된 책을 그리 많이 봐온 건 아니지만, 봐온 것들고 차별성이 없어 조금은 아쉽다. 어디선가 본듯한 구성이 아쉬운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그림을 보는 건 언제나 친근하고 반갑다. 한번쯤 봐 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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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1-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가도 같은 그림은
그림 그리던 '급/신분 낮은 사람'들이
양반 앞에서
양반이 시키는 대로 그려야 해서
나온 그림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림 그리던 사람이라면
굳이 책가도 같은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오늘날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자연에서 '나와 같은 급/신분인 농사꾼과 고기잡이'들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민화와 얽힌 글은
아직까지 '조자용'이라는 분이 쓴 글을
넘어서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나중에 한 번 헌책방에서
조자용 님 옛 글을 찾아서 읽어 보셔요~

stella.K 2012-01-06 13:00   좋아요 0 | URL
조자용이라...그렇군요. 기회되면 한번 찾아보죠.
고맙습니다.^^
 
도가니 - Silence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황동혁
주연 : 공유, 김현수(2011)

 

이 영화는 상업영화다 

좀 늦은감도 없지않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 한편이 갖는 위력은 대단해서, 자애학원에 대한 법적 심판이 가해지고, 그곳에 있던 장애 아동들도 다른 학교에 배치가 되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평일 한낮이어서일까? 극장안은 한산한 것이 웬지 지금은 사람의 관심으로부터 조금은 밀려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는 좀 우울할 수도 있다고 아침 조조로는 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던데, 그렇지 않아도 영화는 어느 때 보아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니 우울하기 보다는 소태를 씹은 것마냥 쓰다. 무엇보다 의구심이 드는 건, 왜 지금에서야 이 문제가 수면위로 뜬 것인가 싶다.
2005년의 일이다. 이것이 공지영이란 작가에 의해 알려지고도 어느만큼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지영도 문학계에서는 성공하였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문제는 공유란 영화배우를 통해 올해야 비로소 반향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자그마치 6내지 7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이 나라의 법은 무엇을 했으며, 경찰은 무엇을 했을까? 지금도 장애 아동들은 여전히 폭력에 시달리며, 어디선가는 새로운 '도가니'가 쓰여지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6년 내지 7년을 아우르는 동안, 아니 그에 몇 곱절에 해당하는 세월 동안 비장애인 부모들은 자기네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안된다고 피킷 들고 시위를 해왔다. 그렇게 자신의 뱃살과 지방을 태우고 있는 동안, 이 나라의 장애 아동들은 제대로 된 시설에서 제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고, 공부 한번 편히 못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발적으로 영화 한편 보고 같이 분노해주며 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하는 개기를 마련해 줬다고 우쭐대도 되는 것인가? 한낮의 한산했던 극장안만큼 사람들의 생각속에서 점점 잊혀져 갈 것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마다 제2,제 3의 '도가니'를 찍어댈수도 없는 일 아닌가? 설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만큼 사람들이 보겠는가, 이만큼 분개할 것인가, 이만큼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 저 영화 장애인 인권 팔아서 돈벌이 한다고 오히려 욕할 것이 아닌가? 

 이 영화는 문제가 있다 

나는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영화임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권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저 사회 고발성 짙은 상업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화가 다 그렇듯 완벽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로인해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여기엔 공유라는 배우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성공이 반드시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의 좋은 선례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우선 이 영화는,  강인호(공유 분)가 무진이란 동네에 있는 한 청각장애인학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을 위한 장치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마다 이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과연 어땠길래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는 양 저러는 것일까? 문제가 있다면 그전부터 있었다는 소린데 왜 자체적으론 문제 해결을 못하고 이렇게 그곳과 연고가 없는 사람이 나타나고서야 이야기는 사작되는 걸까? 뭔가 나의 신경을 건드린다. 더구나 이 영화의 경우, 그 동네 인권센터에서 일한다는 서유진 조차 그 학교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없지 않을 텐데, 어떻게 잘 생긴 공유가 나타나자 그때야 비로소 처음 안 사실인 양 천연덕스럽게 자기 역할을 다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또 그렇다치자.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 관객들에게 겁을 주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  일부러 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해 '무진'이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동네를 보여주고, 영화는 음침한 가운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라는 정공법으로 승부를 내려고 하고 있다. 이를테면 학교장 일파는 악하고, 인호와 유진은 선해서, 선과 악의 싸움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인호는 영웅의 고독한아우라까지 지녔다. 또 이 영웅은 정의롭고 슬기롭기까지 해, 분노할 때는 분노하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피해 아이들이 직접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그것이 물론 잘못된 설정은 아닐 것이다. 응당 제대로된 선생이라면 그래야 한다. 자기 아이에게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한다고, 선생이라면 아이들 스스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교육이 아니다. 이미지다. 영화는 시종 너무 단순구도다. 물론 짧은 시간내에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경각심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것일테지만, 원래 악에는 선한면이 있고, 선에도 악한 면은 있는 법이다. 영화는 좀 더 이런 것들을 부각시키며 부조리한 면을 보여주고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공법으로 돌파하려고 하니, 주제에 대한 심각성 보다 영화 자체가 주는 거부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영화상에서 나타나는 이 이분법은 그것만이 아니다. 최근 몇년 사이의 우리나라 영화들을 보면, 기독교와 경찰에 대한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비하시키거나 희화시킨다. 물론 우리나라 기독교계와 경찰계가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영화에서까지 그렇게 비약시키는 건 권리 침해로까지도 보여질 수 있으며, 성숙하지 못한 창작 태도란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라. 교장일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양에 탈을 쓴 이리인지를. 그리고 그들을 따라 온 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뿐인가? 영화에 나오는 그 형사 아저씨는 얼마나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는가? 
과연 그렇게 보여주는 근거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교회가 그렇게 비이성 광신집단이라고 누가 말하던가? 경찰이나 검찰에 악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던가? 그렇게 말한다면 영화계는 선한가? 선해서 지난 몇년 간 기독교와 경찰을 그런 식으로 울거먹는 것인가?  
어디든 악은 존재한다. 그와 같이 어디든 선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언제나 바라는 것은 선한 영향력 악을 대항하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론이 그렇게 몰아간다고 해서 선한 기독교, 선한 경찰이 없으라는 법이 없는데 이렇게  감독이나 작가 개인적 취향을 고려해 그런 식으로 몰아간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장애자와 비장애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이분법은 또 있다. 장애자와 비장애자를 바라보는 시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공유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지만, 이 영화에선 상처가 있는 고독한 영웅으로 나온다. 왜 그가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비장애자들이 장애자들의 현실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오는 장면이 좀 많아서 그렇지 이 영화는 영웅주의를 배면에 깔고 있다. 그러면서 비장애인이 장애자를 지켜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우쭐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난 그런 시선이 우습다. 그런 식으로  몰고 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적은 있는가? 이것은 누가 누구를 지켜주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다. 왜 장애자는 비장애자의 도움만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다 어쩌다 비장애인이 장애자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심하게 말해, 모멸감에 죽고 싶기라도 하지 않을까? 
가끔 지하철을 타게 될 경우 묘한 기현상을 목격할 때가 있다. 거기엔 노약자 보호석이라는 지정좌석이 있다. 괜찮은 제도라는데는 이의가 없다. 어느 착한 비장애인은 그 자리엔 절대로 앉지 않는다. 객차안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서 잠시 앉을만도 한데 절대로 안 앉는다. 그것을 장애자가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또 그러니만큼 노약자가 일반칸에선 비장애인의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약자 보호석도 있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엉덩이를 비비고 앉을려고 하느냐? 우리도 쉬고 싶다. 이런 말 하는 사람이 과연 없을거라고 장담하는가? 혹 그렇지 않더라도 왜 장애자는 늘 앉아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때론 비장애인이더라도 피곤하다면 장애인이 양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보는 사람이나 양보 받는 사람이나 편치 않아서 그럴 생각을 안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의 선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날, 교회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본당 예배실이 지하에 있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한곳만 사용할 수 있어 응당 노약자나 장애인에게 우선 이용권이 있다(하지만 이것도 그렇게 잠정적인 사항이지 권장사항은 아니다. 필요하면 비장애인이 탔다고 뭐라하지 않는다.) 그때는 평소 때와 달리 젊은이들이 많이 예배드리는 시간대였고, 각 시간대마다 엘리베이터 봉사자가 배치되는데 그 시간대는 나이든 집사가 아닌 젊은 형제가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형제 열심이 지나쳤는지 오버를 한다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절대적으로 장애자만 이용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지, 이용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비장애자란 이유만으로 타는 사람을 저지시키고 있었다. 별로 상식적이지 않다 싶기도 하다. 장애자에게 우선 이용이란 특권을 주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해도 왜 한산할 때 비장애인은 사용할 수 없는가? 웃긴다 싶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엘리베이터 진입을 시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형제 나를 붙들고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근엄하게 "비장애인을 타실 수 없습니다." 한다. 그래서 나는 똑바로 응수해 주었다. "저 장애잡니다." 그러자 이 형제는 순간 뭐에라도 맞은 듯 나를 위 아래로 훑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안해했고, 나는 그 사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순간 멍청한 이중고로 앓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몸을 어디서 감히 위 아래로 훑으며, 장애자 비장애자를 가르는 그 상식같지도 않은 상식은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사람이 모이는 곳엔 서로의 안전을 위해 양보하는 질서의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그런 봉사요원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고. 
단지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이들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애학교의 문제는 국가가 그 의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겠는가.  

이야기는 이미지다   

영화의 논리대로라면, 장애자는 학대를 받아도 비장애인이고, 도움을 받아도 비장애인을 통해서란 논리가 성립이 된다.  사람은 비장애자이기 때문에 사악한 것이 아니다. 또 비장애자이기 때문에 정의로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악에 분노해야 하는 것은 장애자이거나 비장애자이거나 똑같아야 한다.  사실 영화는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장애자의 인권을 다뤘다기 보단 그동안 봐온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또다른 버전을 보는 것은 아닌지 싶다.  결국 최후까지 도움을 줘야하는 검사가 배신을 하므로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더라도  표면상으로는
인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권의 문제를 다룰 때 물론 거기엔 성폭력의 문제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너무 자극적이다. 어떤 이야기든 작가나 감독이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내겠지만 객관적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 과정속에 작가 자신의 해석이나 느낌, 이미지가 투영되기 마련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는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그것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반드시 고려해 봐야 한다. 이런 영화 한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대중이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 보이긴 하지만, 이후  장애 아동의 인권의 문제를 성폭력의 문제로 국한시켜 인식하게 된다면 그도 문제는 아닌가 싶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인권 영화이기 전에 엄연한 상업영화다. 소설이 원작이고, 소설 역시 스토리고 이미지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논픽션도 아니다. 이것을 영상으로 옮겼을 때 파급 효과는 배가 된다.  
성에 관한 모든 것은 다 자극적이다. 나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볼 때 성폭력이나 당하는 불쌍한 인종으로 보게될까봐 걱정이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했는데, 알다시피 이 영화는 공지영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솔직히 공지영은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작가다. 나는 그녀의 작품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외엔 읽은 것이 없으며, 그녀의 전작 <우행시>도 영화로만 접했다. 난 그녀의 작가정신은 높이사지만, 그녀의 작품은 좋아할 수가 없다.  그녀의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편파적이며 경도되어 있다. <우행시>에서는 살인자를 무조건 감상적으로만 보게 만들어 사형제도의 폐지를 간접적으로 옹호하더니, 이 영화에서는 가장 민감한 장애 아동의 인권과 폭력의 문제를 가장 거칠게 풀어냈다(물론 거기엔 영화감독도 한몫을 했다). 대중은 언제까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장애자의 인권은 어디까지 높아져야 하는가

물론 내가 앞에서 이렇게 떠들어도 역시 장애자의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아쉬운 것은 세상의 모든 장애자들이 영화에서처럼 그늘져있고 불행한 것은 아닌데, 영화이나 소설에선 그  이미지에 있어서 늘 사회의 약자고, 그늘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소수긴 해도 메이저리거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들은  왜  비장애인이 베푸는 선처대로만 살아야하며 그 조금치의 선행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자극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초두에 말했던 것처럼 장애자의 부조리한 측면을 다룬 내용이 이 사회나 비장애자들에게 장애자의 현실을 알리는데 더 설득력있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안 그렇다면 이 마이너적인 이야기를 메이저급으로 풀어내던가. 이분법에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풀어내려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오버다. 

영화의 말미에, 그 사건 이후 1년이 흐르고, 인호에게 보내는 유진의 편지 나레이터가 인상에 남는다. 비록 (어처구니 없이) 재판에 지긴했지만 아이들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고 전한다. 너무 늦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니 다행이다.
사실 이 영화는 어설프게나마(이 말이 참 어설프게 안 어울린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에 이런 말이 어울리는가? 하지만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 들으리라) 장애자의 인권을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장애자의 인권이 높아져야 한다면 어디까지 높아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건 지금으로선 상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워낙에 갈길이 머니 말이다. 그래도 상상해 볼 수는 있으리라. 적어도, 장애인도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메이저하게 영화로 만들어펼쳐 보일 수 있다면 좋아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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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2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공유가 나온 거 봤어요. 스텔라님 말씀처럼 영화는 투자자가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작품인만큼 극화될 수밖에 없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듯 대답하던데, 기사가 아닌 한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닌가 싶어요.(심지어 요즘은 공정성 빼면 시체라는 그 '기사'조차도 왜곡되죠. 저 학보사에서 신문 만들어봐서 이것도 너무 잘 알아요. 자본과 사실왜곡) 딱 하나만 인정하는 거죠. 내 힘으로는 이런 부조리를 사회로 끌어낼 수 없었을 거란 것.

저는 공지영 좋아했어요. 그녀가 후일담 문학을 내놓던, 그래도 진정성 있던 초기작들 때.^^

stella.K 2011-10-22 13:42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보는 것 같아 화가나요.
비장애자들에겐 충격일지 모르지만 장애자 보면 또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들을 생각한다면 영화를 이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무리 영화라도 디테일을 살리고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데
굉장히 편파적이잖아요.
보고나서 정말 씁쓸했습니다.
추천에 목숨거는 거 아니지만 너무 저조하네요.
나름 열심히 썼는데...ㅠㅠ

2011-10-24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5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11-11-02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저는 아직 안 봤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의견으 본뒤의 또 제 느낌은 어떨까 궁금합니다.
스텔라님의 정성 담긴 감상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널리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stella.K 2011-11-02 11:14   좋아요 0 | URL
오, 고맙습니다. 역시 루체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시는군요. 아이고, 반가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