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라던 대한이다.

누가 절기 아니랄까봐  눈 오고, 춥다.

이번 겨울은 눈이 그다지 많이 오지 않아서일까,

평소 눈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오늘 내린 눈에 새삼 너그러워진다.

그래. 그래도 겨울엔 눈이 와야 겨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또 순수하게 너그러워질 수 없는 건

오늘 내린 눈엔 다량의 미세먼지가 섞여있단다.

그래서 가급적 맞지 말라고 한다.

눈 오는 것을 순수하게 바라봐 줄 수 없음이 아쉽다.

 

이제 봄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입춘이 이제 곧 머지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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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14-01-2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종일 눈이 오다말다하네요

stella.K 2014-01-21 11:06   좋아요 0 | URL
아, 울보님! 잘 지내시죠?
그러게요. 어젠 하늘도 캄캄했어요.
마치 여름에 비 오는 것마냥.
그게 또 어는 비 오는 거였나봐요.
길 미끄럼 주의하라더군요.ㅠ

파란놀 2014-01-2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는 늘 배기가스와 공해가 넘치니
눈뿐 아니라 비도
맞으면 안 좋다고 하겠지요.
그나저나 대한이 지나가는군요.

stella.K 2014-01-21 11: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근데 누구는 또 지나친 강박이라고
비 정도는 맞아도 된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고,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해가 좀 길어졌어요.
봄이 빨리 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1-2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겨울은 미세먼지까지 감당해야 돼서
그런 게 없던 때가 그리워요.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걷는 계획을 세운 저로선
미세먼지에 신경이 쓰인답니다.
오리가 AI에 감염된 것 등...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세상입니다.

이젠 맑은 날인 것에도 감사해야 될까요?

stella.K 2014-01-25 15:0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이상한 건, 작년엔 그다지 황사니, 미세먼지니
매스컴에서 그렇게 안 떠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겨울 되면서 유난히 떠들어 대는 게
좀 수상하다 싶기도 해요. 기후 커넥션도 있다잖아요.;;
 
경계에 선 여인들 - 역사의 급류에 휩쓸린 동아시아 여성들의 수난사
야마자키 도모코 지음, 김경원 옮김 / 다사헌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나니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한지 모르겠다.

읽을 땐 이런 역사가 있었나? 놀랍다가도, 끝에가선 뭔가 불온한 생각이 들었다. 지식을 넓히기 위해 독서를 해야하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떤 책이든 자신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이 책은 나에게 좋은 책인가에 대한 물음은 한 번쯤 묻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이 책 <경계에 선 여인들>이 일본 사람이 아닌 제3국의 작가가 썼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 책이 아무리 잘 쓴 책이라 하더라도, 일본이란 나라가 우리나라에 행한 원죄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작가도 자국이 지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자국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기술하지마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어느 부분에선 너무 솔직해 혹시라도 저자가 자국의 극우파들로부터 위협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우려가 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일본의 극우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는가?

 

그럼에도 작가가 이 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각 장마다 일일이 문헌들을 수집하고 꼼꼼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 역사서라도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아 흥미로웠고, 평이하게 쓴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은 다소 한계는 있어 보인다. 제목이 그렇다고는 하나 이 책은 '아시아 여성 교류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적 배경을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라고 한정했을 때 그 범위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 한다. 어찌 여성 교류사가 태평양 전쟁 전후에만 국한될 수 있겠는가.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저자 역시 일본 편향적 시각에서 어떤 이유로든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읽다보면 처음엔 일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옹호하지 않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이는 저자가 일본을 옹호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 시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를통해 일본이 아무리 군사독재를 대내외적으로 펼쳐 나갔더라도 그 나라 국민이 모두 다 행복했던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이 아무리 조선을 신민화 했을지라도 그 나라 국민 모두가 행복했던 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했다면 권력을 가진 정치가를 포함한 상류층었겠지.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피해의식을 다소간 완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전쟁은 피해국이나 가해국이나 여성과 아동, 노인에겐 너무 가혹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제 7장의 내용을 보면서, 조선이 해방됐을 때 우리나라는 과연 일본인들에게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조선이 해방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인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매스컴에 너무 길이 들여진 나머지 우리가 일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복했는지에 대해서 알아 본 적이 없다. 그저 피해입은 사실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쇄뇌 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스컴이란 가치 중립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또한 그만큼 자국을 위한 도구도 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이렇게 썼다고 해서 누가 좌파적 성향에, 일본을 옹호하는 성향까지 보인다라고하면 그건 확실히 지나친 편집증일 것이다. 그렇게 까지는 오버하지는 말자.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처음엔 저자의 솔직한 태도에 경의감마저 들다가도, 나중엔 이거야 말로 오버 센스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자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일본이 한때는 강대국이라고 할지 모르나 우리도 강대국의 국민으로 살았다고 해서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우리도 힘들었다고 징징대는 인상을 지울 수 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난 7장이 그런데, 논의의 시작은 좋았다. 조선 기독교 남성과 기독교 일본 여성이 서로의 반려가 되어 조선의 고아들을 돌본다는 건 확실히 이념을 넘어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나온 이야기를 읽어보면 왠지 결국엔 고진감래 끝에 일본 여성이 승리한다는 뭐 다소 신파스러운 이야기로 끝을 맺는 분위기라, 다 읽고 나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뭐란 말인가? 어쨌든 끝까지 (교묘하게)일본이 잘 났다는 건가? 역사서를 역사서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런 치졸한 생각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글 처음에, 이 책을 일본인이 아닌 제3국의 사람이 썼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한편 또 드는 생각은 이 책을 달리 바라볼 수는 없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에 관해서 '제 3 장, '일본의 성노예'의 비극'을 중심으로 그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작금의 사안이 사인인만큼, 내가 저자에게 감사했던 건, (다른 장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3장을 통해 종군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줬다는 것이다. 이미 보도를 통해 접했지만, 일본의 극우파들은 미국에 있는 자유의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철퇴를 맞았다. 언제까지 그들은 역사를 망각한 척 할 건지 모르겠다. 

 

3장은 바로 왜 일본이 전쟁을 치르는데 위안부가 동원 됐어야 했는지, 이를 위해 조선과 중국 또한 제 3 국의 여성들이 어떻게 동원이 되었는지, 이들이 나중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여기엔 의외로 네덜란드 여성이 끼어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 누가, 왜 종군위안부를 설치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아마도 '군대'라는 조직은 으레 필연적으로 '창부'를 필요로 한다는 초자연적인 테제가 근저에 있는데, 이를 실현하려는 방책을 취하려 한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150p)고 했다. 이것은 또한 공창 제도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한데, 전쟁에 동원된 인력은 주로 건강한 젊은 남성이라고 했을 때, 이들이 전쟁이 없을 땐 문제가 안 되겠지만 전쟁에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풀어버릴 곳이 없으니 전쟁터에서 같이 이동할 수 있는 종군위안소가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종군위안소가 없으면 전쟁 현지에서 부녀자를 강간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이것은 엄연히 군법에 위반되는 것으로써, 적지 않은 군인이 군법을 위반하고 처벌을 받는다면 군사력이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로 종군위안소가 필요했다는 것이다(~151p).

     

과연 그럴듯한 논리이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드는 건, 정말로 종군위안소가 필요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극도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긴장감 못지 않게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위안소에 갈 시간에 잠을 더 자는 게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평화시 일본의 성도덕의 체계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문란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오히려 전쟁을 빌미로 도덕을 해이시켜 버렸던 것은 아닐까? 전쟁이 애초에 말이 안 되는데 거기에 무슨 도덕과 윤리를 찾겠는가? 그런 건 평화시에 찾는 것들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의문은, 이렇게 종군위안이 일본 군인에게만 국한 된 것인지, 세계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세례가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없을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유독 전세계에 일본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지금도 골머리를 썪히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일본의 종군위안의 문제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적인 결합'은 인류를 영속시키는 중요한 동기라는 점에서 그 관계의 근저에는 '자연'이나 '신'이 부여한 '행복'이 일본군의 강제적인 '성노예 정책'에 의해 철저하게 부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국가의 법률'을 위반한 행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지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자연법'까지도 교란시키고 모독하는 행위였다(149p)           

그러니 이것에 대해 일본이 뭐라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종군위안의 문제를 시인하는 꼴이나 다름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이 문제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보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인데, 그런 점에서 일본은 아직도 미성숙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또 따져봐야 하는 건, 그 시대 일본의 모든 군인들이 다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종군위안소를 좋아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군국주의에 소수가 존중 받아을리 만무했겠지만, 분명한 건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찬성하지 않았던 것처럼, 종군위안 역시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들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착취를 당해 대부분은 불행한 길을 갔지만, 또 몇몇은 그 지옥해서 필사의 탈출을 하는데 성공했다. 거기엔 또 종군위안부를 반대했던 군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위안부와 함께 군대를 탈출해 삶을 꾸리다가 종전을 맞이하기도 했다고 한다(물론 이건 0.1%도 안 되는 아주 운 좋은 케이스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바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해국이라고 해서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고, 피해국이라고 해서 없거나 작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은 어느 나라나 다 있을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경우를 다루긴 했지만, 일본이 가해국으로서 피해국인 한국 역시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로인해 국민의 삶을 불행으로 내몰리게 했다는 점에서 일본이 한국에게 저지른 과오에 비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를 잘못 세웠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역사가 끝임없이 가르쳐 주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국가라도 개인에겐 국가가 있어야 한다. 나라 없는 개인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역사가 또한 가르쳐 주고 있지 않는가? 이건 정말 모순이고, 부조리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일본 대사관 앞에 세울 줄만 알았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과거의 정부를 대신해서 사죄하려 했는가? 조금이나마 보상하려고 노력했는가? 묻고 싶다. 어쩌면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 보다 그들을 적극 대변해 주고, 보호해 주지 못한 우리나라 정부가 더 문제는 아닐까? 그래서 일본이 너희들도 책임지기 싫어하는 것을 우리가 왜 책임지려 하느냐며 맞받아치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책을 읽은 나의 이 글의 결론은 이것이다. 여인, 아동, 노인 등이 보호받지 못한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으며, 그 나라에 사는 남성 역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주권을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 나라는 강대국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 우리나라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좋은 나라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으면 일본 여성의 의식구조가 어떤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점만 유의한다면 이 책은 나름 읽어 볼만한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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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1-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군한테 성노예가 된 분들 역사는 '일본사람이 캐내고 보관해서 알려준 자료'가 많아요. 일본 군인으로 전쟁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던 이들이 나중에 참회록을 쓰면서 이런 사실을 많이 증언해 주기도 했습니다. 꽁꽁 숨긴 간부나 군인도 많았지만, 양심선언을 한 이들이 꽤 많아요. 그런 기록과 자료가 바탕이 되어, 오늘날처럼 이럭저럭 지난 역사를 말할 수 있기도 합니다.

정대협이 서기 앞서, 또 정대협이 선 뒤, 일본 학자와 시민들이 크게 도와주었어요. 일본 정부와 일본 시민은 '다른 차원 사람'이라고 할까요?

네덜란드와 일본은 서로 역사가 깊습니다. 하멜 같은 사람은 일본에 가려다가 그만 한국에 온 사람이지요.

일본에서 위안소를 둔 까닭은, 전쟁터에서 '성욕에 굶주린 젊은 병사'들이 적군 여성을 수없이 강간하면서 성병에 걸린 나머지, '전투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 정책은 '점령지 여성을 강간하는 것으로 문제가 다 풀리리라' 여겼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깨달아(?) 위안소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성매춘 업소' 동네를 만들어요. 한국에도 곳곳에 있잖아요. 서울에 여러 곳, 인천에 옐로우하우스, 목포에 부산에 어디에 저기에... 끝도 없이 많지요. 이런 곳이 모두 다 '위안소'와 똑같아요.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도, 다 이런 '위안소'를 만들었습니다.

stella.K 2014-01-19 15:12   좋아요 0 | URL
와우, 이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네덜란드는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그러니 우린 얼마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까?
이 분야에 대해서만도 알려고 들면 한도 없고, 끝도 없겠어요.
이 책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긴 글 고맙습니다.^^
 
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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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생각만큼 그렇게 많이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읽는다 해도 왠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선듯 손이 가지는 않았다. 

러시아 작가라야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정도일텐데, 나는 이들의 작품을 한번도 흡족한 마음으로 읽어보지 못했다. 두껍기는 왜 이리 두껍고, 관념적이기는 왜 이리 관념적인가? 그래도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꾸역꾸역 읽은 기억 밖에는 나지않는다.

때론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이렇게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남몰래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고전은 좋은 거라고 떠들었겠지. 

 

꾸준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덕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재미만을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그건 책 읽는 자의 자세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 이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나마 그것을 위해서도 책을 읽지 않은 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또 그럴 바엔 TV 드라마를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요즘 소설의 흐름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워낙에 다양해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다면, 소설은 언제부턴가 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이나 규범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대신 인간의 욕망이나 관계 또는 실존과 군상에 대해 무수히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이 책 막심 고리키의 '마부'를 읽었을 때야 비로소 러시아 문학의 위대함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위대함이란 표현이 낮간지러울까? 다른 나라의 다른 작품도 위대한 작품이 많은데 굳이 러시아 문학에 그런 형용사를 쓴다는 건 형평성에 위배되는 거라고 태클을 걸 사람이 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러시아 문학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위대함을 논할까? 그냥 러시아 문학이 내가 읽어 온 다른 문학에 비해 다른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해 두자.

 

그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러시아 문학은 신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의 도덕과 규범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의 포스트 모던한 세대에선 얼마나 고리타분한 주제인가? 하지만 그러므로 인간을 말하려 했다는 것이 러시아 문학이 지닌 강점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건 러시아 문학이 아니면 물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가 읽은 '부활'을 생각해 보고, '죄와벌'을 생각해 보라. 그런 것이 읽혀지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 책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본명을 두고도 '막심 고리키'란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극단의 고통'이라고 한다. 아, 어쩌자고 그런 이름을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 그만큼 그의 삶이 고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그의 단편들은 대체로 밝은 느낌이었고, 생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굳이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극단의 고통'이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삶이란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면, 이 책에 나오는 '파란 눈의 여인' 같은 경우, 그의 시대 러시아는 공창 제도가 아직 있던 때였나 보다. 허가만 받으면 누구든 직업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창이든, 사창이든 직업적으로 몸을 판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하층 직업군의 하나고 비난 받는다. 그것을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경찰서장을 통해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되는가? 하지만 나중엔 그 파란 눈의 여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자 하는 경찰서장의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요즘 상업주의에 밀려 사람의 몸이 성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오늘 날의 문학은 바로 이 인간의 몸과 쾌락이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에 이건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쉽게 뭐라고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물론 과연 이 시대에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쉬운 비난 보단 어려운 시대일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시선이 더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작가의 시선은 그 뒤에 나오는 '아쿨리나 할머니'에서도 같은 각도로 볼 수가 있는데, 두이야기의 교훈은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즉,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규범에 관한 물음은 표제작인 '마부'나 '환상' 같은 작품에서 잘 나와 있다다. 특히 '마부'에서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사람을 죽이고 돈을 갈취해 훗날 시장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오히려 절망하는 장면은 마치 도스토옙스크의 <죄와 벌>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직접 묻는다. '내 안에 내적 규범이 있는가, 없는가?'를. 그것을 읽는 순간 나는 뭔가에 얻어 맞은 듯 띵했다. 과연 요즘 작가들 중에 이것을 이렇게 대놓고 묻는 작가가 있었는가? 이것을 묻는 건 또 얼마나 뜬금없는가? 하지만 이 뜬금없는 세상에 오히려 더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주인공은 사람을 죽이고 그 돈으로 시장이 되겠다는 포부라도 있었지. 묻지 마 범죄가 성행하는 오늘 날의 세상에서 정말 규범이 없어진 것에 대해 인간의 사고는 마비가 된 듯하다. 이런 세상에 왜 작가는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묻지 못하는가? 작가의 사명은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잊혀진 질문에 대해 묻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주인공의 꿈을 빌어 서술되고 있다. 읽고나면 또 한 번 뒤통수를 맞는 느낌인데 그래서 이 작품은 환상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고, 과연 그 서사가 대단하다 싶다.

 

작가는 확실히 글발이 대단하다. 특히 '지난해는 자신의 생의 마지막 날...'로 시작해서 '......이미 새로운 해의 옷으로 갈아입은 지난해만이 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진리가 남았는데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꼴찌였다!'(167~173p)로 끝나는 '지난해'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 주는 가히 독특하고도 놀라운 은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더불어 '시간'이란 작품은 에세이 소설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뭔가의 웅변이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 같이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사담이긴 한데,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살았던 시대엔 러시아에도 새벽 예배가 있었나 보다. 이 새벽 예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독교 전통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에도 있었다니 새삼 놀랍기도 했다. 가끔 러시아 선교사한테서 들으면 그 나라는 신앙의 불모지처럼 전해지고 있는데 언제 다시 러시아의 부흥이 있을까?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초두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난 이 책으로 인해 러시아 문학에 한 발 다가선 것 같아 뿌듯한 느낌이었다. 나 같이 러시아 문학에 다가서는데 왠지 모를 부담이 있다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감히 권해 본다. 새해 벽두에 아주 좋은 작품으로 시작한 것 같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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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1-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하층 직업인 그 여자들한테 찾아가는 사람들,
사내들도 '최하층'인 사람들일 테지요.

stella.K 2014-01-10 11: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상한 건 창녀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면서
그 반대인 남창은 잘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저로선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뭐 그만큼 이 사회는 남자가 꽉잡고 있다는 뜻일테지만.ㅋ

카스피 2014-01-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문학을 읽기 시작하셨네요.고리키는 공산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 분으로 소련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죠.
그나저나 늦었지만 스텔라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stella.K 2014-01-10 11:29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어요, 카스피님!
카스피님이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요.
저는 막심 고리키는 이 책이 첨인데 좋아어요.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4-01-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찌된 일인지 처음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막심 고리끼,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작품부터 읽었어요. 제가 수강한 어느 문학 강의에선 그런 것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했지요.
<죄와 벌>이 그렇게 재밌는지도 처음 알 때여서 경이로웠어요.
막심 고리끼의 <나의 문학 수업>을 읽기도 했죠. 고리끼의 수준으로 글을 쓸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에세이 중에서 쉽게 쓴 에세이부터 읽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새해, 서재의 번창을 기원합니다. ^^

stella.K 2014-01-15 15:56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는 이 책 덕분에 러시아 문학이 쫌 좋아졌어요.

근데 언니, 올해도 저의 서재는 별로 번창할 것 같지 않아요.
며칠째 제 서재에 들어오면 1이었어요. 그나마 언니가 빌어주셔서 그런가요?
그나마 지금은 9네요.ㅎㅎ
 

 나는 작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내 맘대로 좋은 책을 갈무리 해 보았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내가 쓴 리뷰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책은 따로 있다. 바로 <약, 먹으면 안 된다>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 맘대로 좋은 책엔 포함시키지 않은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전혀 유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OECD 국가 중 항생제의 남용이 가장 심각한 나라는 단연 우리나라다. 비록 일본인 저자가 쓴 책이라도 확실히 이 책은 경종을 울릴만 했고, 일본의 약 남용 실태는 크게 우리나라와 다르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리뷰를 남겼을 때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이 아니었고, 특별히 책에서 항암제를 다룬 부분이 있어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을즈음 나의 오빠가 암투병을 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리뷰는 절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항암제의 유해성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아 주었다. 최근까지도 나는 댓글을 받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항암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내맘대로 좋은 책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글쎄, 약의 심각성에 대해 각성시키기엔 좋은 책이긴 하지만 또 일각에선 이 책을 비판하는 소리도 들었고, 실상 나 자신도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개기가 되긴 했지만 아주 감동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름지기 올해의 책은 감동이 다수 포함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한마디로 약의 위험성을 각성시키기엔 좋긴 하지만, 형평성을 고려해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를들면, 이 책은 진통제도 먹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데, 물론 진통제를 습관적으로 먹는 사람에겐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이 두통에 어쩌다 한 번 먹는 사람은 빨리 두통을 가라 앉히고 다음 일을 하는 것이 훌씬 낫지 않을까? 오늘 날 쏟아져 나오는 진통제는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고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런 것까지 규제를 한다면, 이 책은 좋고 나쁨을 떠나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씌여진 책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의 말대로 정부와 제약회사와 병원의 관계는 그들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니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고, 이런 책이 전해주는 나름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알아서 나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엊그제도 어느 블로거가 최근 췌장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이런 책을 진작 읽을 걸 그랬다며 통한의 글을 남겼는데 마음이 짠했다. 물론 어머니를 잃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꼭 의사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 가신 것은 아닐테고, 그 분은 담당의가 불친절 했던 것 또 그로인해 더 물어 볼 것도 물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아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지만 변변히 위로도 못해 주었다. 단지 위의 책 보단 <암에 걸린 채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책을 권해 주었다. 이 책은 내 맘대로 좋은 책 리스트에 포함시킨 책이라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 책을 권하면서, 고인이 아픈 채로 곁에 오래 남아 있는 것 보다 저 세상에서 안식할 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고인이 건강할 때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이 지금 슬퍼하는 그분께 무슨 힘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상처도 아무는 법이니 나를 빗대어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 쓰지도 못한 리뷰가 많은 사람에게 작게나마 반향을 일으켜서 나름 보람도 있었다. 좋은 글이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고, 살릴 수도 있겠구나. 작은 희망 같은 것을 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댓글을 달아 준 이들 중엔 암에 대한 통계가 잘못 됐다고 지적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세 명 중 한 명 꼴이 아니고,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고 상정할 때 백만 명, 그러니까 2% 즉 50명 중 한 명이 암에 걸린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50명 중 한 명 꼴이라면 3명 중 한 명 꼴 보다는 확실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50명 중 한 명도 과히 낫은 비율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뉴스에도 10년 사이 암환자는 2배로 들어났고, 그에 못지 않게 치료율도 높아졌다고는 하는데, 확실히 이제 이 병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의 병'은 아닌가 싶다.      

 

 

* 요즘엔 왜 이렇게 글만 썼다하면 긴 글이 되는지 모르겠다.ㅠ

한 가지 더 알릴 것이 있다면, 오늘부터 나의 옛 닉네임인 스텔라를 다시 회복한다. 왜 많은 분들이 나의 옛 이름을 더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그 이름이 싫은 것은 아니다. 이름은 그 뜻도 좋아야겠지만, 무엇보다 남이 부를 때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나의 서재를 스텔라로 하기로 했다. 착오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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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0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이 되는 건 매우 좋은 현상인 것 같아요. 글을 쓰려면 할 말이 많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축하드려요.

스텔라 님으로 돌아오신 것도 축하합니다. 2014년은 스텔라, 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네요.
추카추카추카추카추카추카..........................앞으로 백 번임. ㅋㅋ

stella.K 2014-01-03 12:05   좋아요 0 | URL
ㅎㅎ 진작 고칠 걸 그랬나요? 언니가 이렇게 반가워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원용 나의 현대사 1 - 엑소더스 강원용 나의 현대사 1
강원용 지음 / 한길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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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운이 좋았다. 처음으로 가 본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은. 

독서를 계획적으로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닥치는대로 읽는 주변도 못 된다. 그런데 이 책 1권과 2권을 발견한 순간 날 데려가라고 아우성 치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래 전 나는 이 책을 읽어 보겠노라고 찜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목도 이것이 아니었다. <빈들에서>란 제목으로 3권으로 나왔었다. 그것을 언제 또 제목을 바꿔 5권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은 현재 알라딘에선 품절로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찜해놨던 책을 찾는 이 없어 품절이 될 때까지 나는 이 책에 참으로 무심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중고 서점에서 산 꼴이라니.

 

변명을 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자 현대사 증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알다시피 역사는 그다지 만만한 분야가 아니다. 현대사는 더 더욱. 더구나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와 내가 느끼는 현대사가 같지가 않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의 범위란, 해방전후로부터 시작해서 저자가 죽기 전까지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386 세대다. 현대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적어도 그때를 이해할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안목이 너무 없었다고  해야하려나? 나의 현대사란 고작 민주화 운동과 최루탄 뭐 이런 것이 전분데, 저자의 세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는 것일까? 요즘엔 그나마 없던 역사에 실눈만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니 이 책의 아우성도 들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가을부터 읽기 시작해서 아주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1권을 마쳤다.  1권을 다 마친 나의 느낌은, 이 책은 한마디로 상당히 흥미롭다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사가 쓴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게 뭐 그리 대수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교과서처럼 그냥 기술을 하기 위한 거라면 재미없을지 모르겠다. 목사가 썼기에 일반의 싯점이 아닌 기독교적 관점에서 썼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느냐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기록은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리 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객관성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새삼 읽으면서 깨닫는 건, 기독교 목사면서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함께 한다는 것이 흔한가 일인가 싶기도 하다. 나만해도 최루탄이 터지면 도망하기 바빴지, 왜 최루탄을 쏘는가? 왜 화염병을 던지는가 알기 위해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다.

 

그렇게 나는 늘 아웃사이더를 자처했었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게 있으니 굳이 나를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와 다른 사람에 끌려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에게 없는 면을 누군가 가지고 있으면 알고 싶고, 닮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역사의 내용 보단 저자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했다. 저자에겐 분명 내가 갖고 있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웅변을 잘했다는 것과 상당한 리더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강직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나에겐 없는 것으로서, 저자는 비록 평생 수고로움과 고통속에 살았겠지만, 반면 꽤 값지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얼핏 TV에 나온 저자를 본 것도 같다. 책에도 보면 그의 사진이 나와 있다. 눈썹이 진하고 눈매가 매서운 것이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강직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볼 수가 있다. 

  

특히 저자는 모태신앙이 아닌, 인생 중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철저하게 신앙을 시켜온 사람으로 그것은 마치 손양원 목사님을 보는 것도 같았다. 손양원 목사도 강직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의 시대나 저자의 시대가 같기도 할 것이다. 단지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그날부터 한 번도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흔들림이 없었는데, 저자는 딱 한 번 신앙에 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옥고를 치렀을 때인데, 그 고문이 너무 견디기 괴로워 '인간성이 상실되고 인간이 없는 이곳에 신은 있는가'란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던진 선량한 사람들이 단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하느냐를 고민하게 된다. 또한 그는 자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한다.

 

 '어차피 죽게 될 바엔 이런 생지옥에서 고생을 더하다 죽을 필요가 있을까, 또 이렇게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구차하게 연명하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일본놈들에게 치욕스런 꼴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이 육체를 버리는 게 현명한 길이 아닐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선 자살를 죄로 규정하지만 '추하게 죽느니 깨끗한 자살이 낫지' 않겠느냐는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 시련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ㅅ에 맡기고 만약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후부터 죽는 날까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169~171의 내용). 

 

사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범접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만, 저자는 이런 실존적인 질문을 했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사실 어찌보면 세상은 답을 달 수 있는 것 보단 답을 달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때는 선택하고, 다짐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삶이 그를 말하고,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강직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마는 아니다. 예를들면, 그는 이북 출신으로서 자신의 신앙 때문에 아버지를 북에 남겨 놓아야 했던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이 없는 아버지는 명리나 사주를 따르는 전형적인 유교의 사람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사는 곳이 전쟁이 일어나면 위험한 곳이 될 것 같아 이사하려는 것을 그가 말려 결국 그 자신만 월남을 한 채 부자간의 생이별을 자초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선택이 낳은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때문에 평생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았고, 실제로 이북에 아버지를 두고 월남했기 때문에 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또한 저자가 평생 그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타고나다시피한 웅변 실력과 그 특유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그는 웅변을 통해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키는지를 알았던 것 같다. 그가 당시의 시국 상황을 역설할 때마다 사람들이 운집했고 열광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는 탁월한 웅변가였고, 또 그것으로 그는 당대 유명한 정계인사들과 교계인사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다.

          

사실 자서전을 읽는 것의 묘미는, 글쓴이가 당대 어떤 활약을 했는가와 함께 어떤 사람과 교류했는가를 아는 것일게다. 그의 리더십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 당대 거물급 인사들과의 교류는 당연했을 것이다. 특히 이승만과 여운형에 관한 기술이 눈에 띄는데, 이승만은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 새로운 것은 없어 보인다. 단지 자서전인만큼 조금 더 적나라하다고 할까? 그런데 비해 여운형에 관한 기술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긍정적 이다. 솔직히 나는 여운형에 관해서는 그 이름만 아는 정도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잘 몰랐다.  

 

무엇보다 저자는 여운형이 잘 생겼다고 했다. 심지어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출한 인제라고까지 했다. 그는 민족 문제라면 우익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유럽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고를 견지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열린 인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눈박이가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보았다. 빨갱이의 눈 아니면 극우파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화합을 모색하려면 다른 점은 다르게 보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눈과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여운형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외눈박이 소인배들이 어지럽게 설쳐대는 그 시대에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죄익 외눈박이들도 그를 껄끄러워했고, 우익 외눈박이들도 불편해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하고 세계 속의 한국이 될 경우 과거 인물 속에서 지도자 모델을 굳이 찾으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여운형이 그 모델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345p)

 

 이 대목은 확실히 우리가 되새겨 봄직하다. 지금은 그나마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긴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흑백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회색논리에 대해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문득, 그게 어찌보면 마녀사냥에 좋아서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흑에서건 백에서건, 좌파든 우파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남의 일이나 거대담론에는 통크게 나오지만, 그게 내 이익과 관련이 있고, 섬세한 부분에선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중도파에 대해서는 못 견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 흑백논리라는 것도 좌파 아니면 우파에서 이름 짓기 좋은 말인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들어 나는 부쩍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해 관심이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와 맞물려 있으며 개화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 관심에 저자가 소개하는 여운형이 있으니 언젠가 꼭 한 번은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런 시각이 없지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목사가 정치한다고 엄청 욕을 많이 먹었을거란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편견은 아닐까? 옛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현실참여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참여했다고 비판하면 언제부터 기독교는 점잖은 종교가 되어버린 걸까? 언제부턴가 기독교안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나뉘었다. 그것 역시 시각과 사고의 차이일 텐데, 기독교건 비기독교건지간에 다른 생각, 다른 의견 때문에 서로 싸우고, 비판하는 일은 가급적 안했으면 좋겠다. 그 모든 게 나라를 위한 거라면 말이다.

 

1권은 '우리 세대는 모두 죄인'이란 제목으로, 선대가 하나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통한의 글을 남기고 일단 끝을 맺는다. 과연 그에 대한 고백이 절절하다. 저자가 이런 고민을 한다면, 우리 세대의 사람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낳은 아들, 딸들이 이제 성인의 나이로 서서히 진입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겨 주려했는가를 반성할 때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통일의 시대가 곧 도래할 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통일의 시대에 우리는 하나된 조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북한의 세력이 약화가 되었다고 해서 통일이 될 거라는 건 너무 단세포적 생각은 아닐까? 북한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고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롭고도 더 강력한 빅브라더가 등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된 조국이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단군이래 하나된 조국이었던 때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선대로부터 그들이 지나 온 한 세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 같이 살지 못할 것이고,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을 정치인들을 비롯한 어느 특정인에게만 맞기는 것은 시민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대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전철을 밟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을 따르고, 어떤 것을 따르면 안되는지를 역사라는 언덕에 기대어 서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두에도 얘기했지만, 가끔 검색을 해 보면 품절이나 절판됐다고 하는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난데, 언젠가도 그런 글을 썼지만, 신간에 밀려 이런 책들이 묻혀지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독자가 찾건, 찾지 않건 좋은 책은 오래도록 그 명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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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2-3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운형이라는 분은, 저도 책과 기록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지만, 이분을 비판하는 사람 쪽에서조차 훌륭한 됨됨이를 깎아내리지 못해요. 무엇보다도, 이분 여운형 님은 '사상'으로 사람을 따지지 않은 대목을 눈여겨보아야지 싶어요. 오직 '사람'을 보고 '사람'이 함께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으려고 애썼구나 싶어요.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들은 '불쌍한' 사람이지요.

남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가해자이면서 스스로 불쌍한 삶으로 치닫는 바보라고 할까요.

앞으로도 틈틈이 헌책방 다니시면서 재미난 책 만나 보셔요~

stella.K 2014-01-01 18:25   좋아요 0 | URL
새해 첫날이어요. 좋은 독서 계획 있으신가요?
늘 열심히 사시는 님 뵈면 참 존경스러워요.
저는 점점 책이 좋아지는데 많이는 못 읽겠고 고민이네요.ㅎㅎ
그래도 올해도 열심히 달려 볼게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4-01-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나는 부쩍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해 관심이 많아졌다."
- 관심 있는 한 분야를 깊게 파 보라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좋은 공부가 되니까요.
저도 이번 해엔 그렇게 해 보려고 하거든요.
한 작가의 책 모두를 보는 것도 좋을 듯해요.

"좋은 책은 오래도록 그 명맥을 유지..."
-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신간만 중시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새해엔 좋은 책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책에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여운형 등,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죠.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억울하게 평가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죠.

새해가 시작되는 첫 날이네요. 좋은 글 많이 쓰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stella.K 2014-01-01 18:31   좋아요 0 | URL
전작주의 좋죠!

저도 알려지지 않는 좋은 책 있으면 대대적으로 알려 볼려구요.
그런데 요즘 저의 서재 조회수가 한 자리 수를 유지할 때가 많아서
되려나 모르겠어요. 한창 잘 나갈 때 세 자리 유지도 했었는데...
열심히 안 되네요.

고맙습니다. 언니도 좋은 글 많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