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나의 현대사 1 - 엑소더스 강원용 나의 현대사 1
강원용 지음 / 한길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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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운이 좋았다. 처음으로 가 본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은. 

독서를 계획적으로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닥치는대로 읽는 주변도 못 된다. 그런데 이 책 1권과 2권을 발견한 순간 날 데려가라고 아우성 치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래 전 나는 이 책을 읽어 보겠노라고 찜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목도 이것이 아니었다. <빈들에서>란 제목으로 3권으로 나왔었다. 그것을 언제 또 제목을 바꿔 5권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은 현재 알라딘에선 품절로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찜해놨던 책을 찾는 이 없어 품절이 될 때까지 나는 이 책에 참으로 무심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중고 서점에서 산 꼴이라니.

 

변명을 하자면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자 현대사 증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알다시피 역사는 그다지 만만한 분야가 아니다. 현대사는 더 더욱. 더구나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와 내가 느끼는 현대사가 같지가 않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의 범위란, 해방전후로부터 시작해서 저자가 죽기 전까지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386 세대다. 현대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적어도 그때를 이해할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안목이 너무 없었다고  해야하려나? 나의 현대사란 고작 민주화 운동과 최루탄 뭐 이런 것이 전분데, 저자의 세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는 것일까? 요즘엔 그나마 없던 역사에 실눈만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니 이 책의 아우성도 들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가을부터 읽기 시작해서 아주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1권을 마쳤다.  1권을 다 마친 나의 느낌은, 이 책은 한마디로 상당히 흥미롭다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사가 쓴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게 뭐 그리 대수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교과서처럼 그냥 기술을 하기 위한 거라면 재미없을지 모르겠다. 목사가 썼기에 일반의 싯점이 아닌 기독교적 관점에서 썼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느냐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기록은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리 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객관성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새삼 읽으면서 깨닫는 건, 기독교 목사면서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함께 한다는 것이 흔한가 일인가 싶기도 하다. 나만해도 최루탄이 터지면 도망하기 바빴지, 왜 최루탄을 쏘는가? 왜 화염병을 던지는가 알기 위해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다.

 

그렇게 나는 늘 아웃사이더를 자처했었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게 있으니 굳이 나를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와 다른 사람에 끌려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에게 없는 면을 누군가 가지고 있으면 알고 싶고, 닮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역사의 내용 보단 저자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했다. 저자에겐 분명 내가 갖고 있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웅변을 잘했다는 것과 상당한 리더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강직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나에겐 없는 것으로서, 저자는 비록 평생 수고로움과 고통속에 살았겠지만, 반면 꽤 값지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얼핏 TV에 나온 저자를 본 것도 같다. 책에도 보면 그의 사진이 나와 있다. 눈썹이 진하고 눈매가 매서운 것이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강직한 성격을 가졌는지를 볼 수가 있다. 

  

특히 저자는 모태신앙이 아닌, 인생 중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철저하게 신앙을 시켜온 사람으로 그것은 마치 손양원 목사님을 보는 것도 같았다. 손양원 목사도 강직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의 시대나 저자의 시대가 같기도 할 것이다. 단지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그날부터 한 번도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흔들림이 없었는데, 저자는 딱 한 번 신앙에 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옥고를 치렀을 때인데, 그 고문이 너무 견디기 괴로워 '인간성이 상실되고 인간이 없는 이곳에 신은 있는가'란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 민족을 위해 한 몸을 던진 선량한 사람들이 단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하느냐를 고민하게 된다. 또한 그는 자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한다.

 

 '어차피 죽게 될 바엔 이런 생지옥에서 고생을 더하다 죽을 필요가 있을까, 또 이렇게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구차하게 연명하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일본놈들에게 치욕스런 꼴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이 육체를 버리는 게 현명한 길이 아닐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선 자살를 죄로 규정하지만 '추하게 죽느니 깨끗한 자살이 낫지' 않겠느냐는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 시련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ㅅ에 맡기고 만약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후부터 죽는 날까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169~171의 내용). 

 

사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범접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만, 저자는 이런 실존적인 질문을 했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사실 어찌보면 세상은 답을 달 수 있는 것 보단 답을 달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때는 선택하고, 다짐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삶이 그를 말하고,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강직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마는 아니다. 예를들면, 그는 이북 출신으로서 자신의 신앙 때문에 아버지를 북에 남겨 놓아야 했던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이 없는 아버지는 명리나 사주를 따르는 전형적인 유교의 사람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사는 곳이 전쟁이 일어나면 위험한 곳이 될 것 같아 이사하려는 것을 그가 말려 결국 그 자신만 월남을 한 채 부자간의 생이별을 자초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선택이 낳은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때문에 평생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았고, 실제로 이북에 아버지를 두고 월남했기 때문에 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또한 저자가 평생 그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타고나다시피한 웅변 실력과 그 특유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그는 웅변을 통해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키는지를 알았던 것 같다. 그가 당시의 시국 상황을 역설할 때마다 사람들이 운집했고 열광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는 탁월한 웅변가였고, 또 그것으로 그는 당대 유명한 정계인사들과 교계인사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다.

          

사실 자서전을 읽는 것의 묘미는, 글쓴이가 당대 어떤 활약을 했는가와 함께 어떤 사람과 교류했는가를 아는 것일게다. 그의 리더십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 당대 거물급 인사들과의 교류는 당연했을 것이다. 특히 이승만과 여운형에 관한 기술이 눈에 띄는데, 이승만은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 새로운 것은 없어 보인다. 단지 자서전인만큼 조금 더 적나라하다고 할까? 그런데 비해 여운형에 관한 기술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긍정적 이다. 솔직히 나는 여운형에 관해서는 그 이름만 아는 정도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잘 몰랐다.  

 

무엇보다 저자는 여운형이 잘 생겼다고 했다. 심지어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출한 인제라고까지 했다. 그는 민족 문제라면 우익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유럽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고를 견지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열린 인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눈박이가 되어 사람과 세상을 보았다. 빨갱이의 눈 아니면 극우파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화합을 모색하려면 다른 점은 다르게 보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열린 눈과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여운형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외눈박이 소인배들이 어지럽게 설쳐대는 그 시대에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죄익 외눈박이들도 그를 껄끄러워했고, 우익 외눈박이들도 불편해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하고 세계 속의 한국이 될 경우 과거 인물 속에서 지도자 모델을 굳이 찾으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여운형이 그 모델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345p)

 

 이 대목은 확실히 우리가 되새겨 봄직하다. 지금은 그나마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긴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흑백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회색논리에 대해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문득, 그게 어찌보면 마녀사냥에 좋아서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흑에서건 백에서건, 좌파든 우파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남의 일이나 거대담론에는 통크게 나오지만, 그게 내 이익과 관련이 있고, 섬세한 부분에선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중도파에 대해서는 못 견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 흑백논리라는 것도 좌파 아니면 우파에서 이름 짓기 좋은 말인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들어 나는 부쩍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해 관심이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와 맞물려 있으며 개화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 관심에 저자가 소개하는 여운형이 있으니 언젠가 꼭 한 번은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런 시각이 없지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목사가 정치한다고 엄청 욕을 많이 먹었을거란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편견은 아닐까? 옛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현실참여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참여했다고 비판하면 언제부터 기독교는 점잖은 종교가 되어버린 걸까? 언제부턴가 기독교안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나뉘었다. 그것 역시 시각과 사고의 차이일 텐데, 기독교건 비기독교건지간에 다른 생각, 다른 의견 때문에 서로 싸우고, 비판하는 일은 가급적 안했으면 좋겠다. 그 모든 게 나라를 위한 거라면 말이다.

 

1권은 '우리 세대는 모두 죄인'이란 제목으로, 선대가 하나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통한의 글을 남기고 일단 끝을 맺는다. 과연 그에 대한 고백이 절절하다. 저자가 이런 고민을 한다면, 우리 세대의 사람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낳은 아들, 딸들이 이제 성인의 나이로 서서히 진입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겨 주려했는가를 반성할 때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통일의 시대가 곧 도래할 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통일의 시대에 우리는 하나된 조국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북한의 세력이 약화가 되었다고 해서 통일이 될 거라는 건 너무 단세포적 생각은 아닐까? 북한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고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롭고도 더 강력한 빅브라더가 등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된 조국이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단군이래 하나된 조국이었던 때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선대로부터 그들이 지나 온 한 세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 같이 살지 못할 것이고,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을 정치인들을 비롯한 어느 특정인에게만 맞기는 것은 시민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대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전철을 밟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을 따르고, 어떤 것을 따르면 안되는지를 역사라는 언덕에 기대어 서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두에도 얘기했지만, 가끔 검색을 해 보면 품절이나 절판됐다고 하는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난데, 언젠가도 그런 글을 썼지만, 신간에 밀려 이런 책들이 묻혀지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독자가 찾건, 찾지 않건 좋은 책은 오래도록 그 명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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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3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운형이라는 분은, 저도 책과 기록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지만, 이분을 비판하는 사람 쪽에서조차 훌륭한 됨됨이를 깎아내리지 못해요. 무엇보다도, 이분 여운형 님은 '사상'으로 사람을 따지지 않은 대목을 눈여겨보아야지 싶어요. 오직 '사람'을 보고 '사람'이 함께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으려고 애썼구나 싶어요.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들은 '불쌍한' 사람이지요.

남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가해자이면서 스스로 불쌍한 삶으로 치닫는 바보라고 할까요.

앞으로도 틈틈이 헌책방 다니시면서 재미난 책 만나 보셔요~

stella.K 2014-01-01 18:25   좋아요 0 | URL
새해 첫날이어요. 좋은 독서 계획 있으신가요?
늘 열심히 사시는 님 뵈면 참 존경스러워요.
저는 점점 책이 좋아지는데 많이는 못 읽겠고 고민이네요.ㅎㅎ
그래도 올해도 열심히 달려 볼게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4-01-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나는 부쩍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해 관심이 많아졌다."
- 관심 있는 한 분야를 깊게 파 보라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좋은 공부가 되니까요.
저도 이번 해엔 그렇게 해 보려고 하거든요.
한 작가의 책 모두를 보는 것도 좋을 듯해요.

"좋은 책은 오래도록 그 명맥을 유지..."
-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신간만 중시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새해엔 좋은 책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책에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여운형 등,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죠.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억울하게 평가되는 사람이 없어야 하죠.

새해가 시작되는 첫 날이네요. 좋은 글 많이 쓰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stella.K 2014-01-01 18:31   좋아요 0 | URL
전작주의 좋죠!

저도 알려지지 않는 좋은 책 있으면 대대적으로 알려 볼려구요.
그런데 요즘 저의 서재 조회수가 한 자리 수를 유지할 때가 많아서
되려나 모르겠어요. 한창 잘 나갈 때 세 자리 유지도 했었는데...
열심히 안 되네요.

고맙습니다. 언니도 좋은 글 많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