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구설수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인해 일파만파 줄소환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조 전 부사장의 10살 어린 조 모 전무가 일을 수습하고자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는 것이 또 구설수다. 

 

이 사실을 보도한 방송 기자는 이제 이 사건은 좀 그만 보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됐다며 양해를 구하고 문제의 조 전무가 올렸다는 글을 씹었다.

 

우선 그 글이 앞뒤 문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조 전무의 의도는 이번 '땅콩 회항' 사건은 우리 회사의 부덕의 소치며 자신부터 먼저 엎드려 사과 드린다 뭐 이런 뜻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 씨 일가가 아직도 문제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정말 그런 것 같다.

 

일견 조 전무의 입장에선 자신도 회사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이 문제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건 사실이니 언니를 대신하여 사과한다 뭐 그런 입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진정성이 없다는 것인데 조 씨 일가의 잘못에 왜 회사를 끌어들여 사과를 하느냐 그건 경영인의 올바른 자세는 아니라는 것이다. 뭐 그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이게 계속적으로 보도가 되는 것을 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왜 계속 보도가 되는 걸까? 옛날 같으면 이 보도 방식을 어떻게 했을까? 그냥 회사와 조씨 일가를 뭉뚱그려, 그렇게 머리 숙여 사과 했으니 기대해 보겠다며 덤덤하게 보도하고 끝내진 않았을까? 그런 보도 방식이 기자 개인의 취향이라고만 한정지을 수 있을까?  계속 씹어대는 것을 보면 뭔가 조씨 일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갑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대신 짓밟아 주겠다는 그런 뜻일까?  아니면 그들을 희생양 삼아 통진당 해산의 여파를 잠재울 요량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이 있긴 하다.

조 전 부사장 보다 10살이 어려 31세란다. 그 나이에 벌써 대기업 전무라니! 27인가 때 처음 들어와서 파격적인 인사로 그 나이에 전무란다. 부모 잘 만나고 볼 일이다 싶기도 하지만 과연 그녀가 우리나라 31세의 직장인들의 평균적인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런 의구심이 일기는 한다.  

 

기업의 족벌체제야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이제 기업의 족벌 체제는 이제 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뭐 능력 위주의 채용이니 인사니 떠들면서도 아직도 기업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양산하는 것이 아닌가?

 

귀한 몸 진흙탕을 굴러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기껏 언니의 십자가를 같이 나눠 지으려다 더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귀한 자식일수록 강하게 키우라고 했는데 조 씨 일가가 어떤 식으로 자식을 키웠을지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혹시 21세기가 다 지나가기 전에 없어져야할 사어 중 하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는 건 아닐지 심히 걱정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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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은 대중의 비난이 향하는 대상을 발견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요. 하이에나처럼. 이런 모습이 무섭기도 해요. 어떻게든 특종거리를 찾아내서 신문이나 방송에 자기 이름을 내건 보도문을 내려는 모습을 보면요. 땅콩 부사장의 행동을 동정하고 싶지 않지만, 간혹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마녀사냥식으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어요. 이런 언론의 공격에 재벌에 대해 반감을 가진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됩니다. 이렇다보니 정작 다른 뉴스는 잊고 말죠. 그래서 이런 사건이 터지면 대중들은 의심해요. 정부가 대중이 알아서는 안 될 뉴스를 조용히 묻히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죠.

stella.K 2014-12-24 12:07   좋아요 0 | URL
그래. 확실히 그런 메카니즘이 있어.
그래서 기자들이 욕을 먹기도 하는데 대중들도 이 부분에선 좀 똑똑해질
필요가 있는데 우리나라가 갑한테 당한 세월이 너무 오래돼
아마 우리가 늙어도 변화되긴 힘들 것 같기도 해.ㅠ

야클 2014-12-2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비행기에서 땅콩 달라고하면 그렇게 친절하다고 하네요. 물론 봉지 안
뜯고 주지만요. 조아무개씨 덕분이겠죠? ㅎㅎ

stella.K 2014-12-24 12:10   좋아요 0 | URL
이른바 조씨 땅콩 저도 요즘 먹고 있는데 뭐
맛이 나쁘진 않아요. 그 땅콩 가급적 빨리 먹어야 하기 때문에
뜯자마자 먹는 거라고 하긴 하더라구요. 접시까지 갈 것 없이.ㅋㅋ

마립간 2014-12-24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의 하이에나와 같은 습성은 본성에 가깝지만, 그것을 허락하는 환경은 정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재벌의 집단적 반발을 고려한 속도 조절이나 반작용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고요.

정치와 재벌의 불편한 동행이라고 할까요.

stella.K 2014-12-24 12:13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조현아가 이런 일은 또 처음 당해 보는가 봅니다.
완전 얼어있던데. 동정표를 얻으려는 건지...
구속영장 집행되는 모양인데 그렇더라도 또 뭔가의 편법이 있겠죠.
한화 회장처럼.ㅎㅎ

마립간 2014-12-24 12:35   좋아요 0 | URL
저는 TV를 보지 못해, 신문의 사진만 보고 연출이 상당히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안해나 다른 알라디너의 의견은 조 부사장이 많이 ˝쫄았다`고 하던대요. 평생 甲의 위치에서만 있다가 처음으로 乙의 위치에 섰을 것이라고.

stella.K 2014-12-24 13:46   좋아요 0 | URL
에이, 그 정도 가지고 을의 위치에 섰다고는 말 못하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면 모를까...
그냥 된홍역치렀다고 생각하겠죠.
이거 지나가면 또 언제 그랬냐는 게 언론과 대중의 속성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잊을만 하면 또 나오고.
이젠 놀랄 것도 없긴 해요.
단지 저는 갑들이 갑으로서의 제값을 해야하는데
이런 일로 자꾸 구설수에 오른다는 게 씁쓸한거죠.
정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21세기 안에 사어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ㅠ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소설가의 이런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가처럼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직업이 또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은 소설 쓰기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자기 고백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지 않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런 책은, 작가가 되는 것은 인생을 사는 끔찍한 방법이며,  빈곤과 무명생활, 고독 말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폴 오스터가 아무리 뜯어 말려도, 나는 나만의 언어로 나의 이야기를 완성시킬 책임과 권리가 있다고  담대히 외칠 수 있을만큼 약발이 있다. 

 

이젠 소설로 밥벌어 먹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 한 권쯤 쓰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 아직 젊은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연수 작가가 그 이름을 올렸다.

 

 

한 가지 일을 20년이나 했다면...

 

김연수 작가가 아직 젊은 작가라고 하지만 그가 소설을 쓴 세월이 벌써 20년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을 20년이나 했다면 그 일에 좀 할 말이 많겠는가? 김연수 작가도 그랬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유머러스하면서도, 나름 묵직하고 글자 하나 하나에 공이 들어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솔직히 '김연수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 확실히 재밌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연수 작가가 뭔지 모르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소설 쓰기에 관해 알고, 듣고, 본 바를 전복시키는 김연수 작가 특유의 사고 방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린 흔히 소설을 쓰고자 할 때 먼저 플롯을 정하고 써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김연수 작가는 오히려 플롯을 모르고 쓰라고 충고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고는 결론은, 완벽한 풀롯을 짜면 짤수록 그 소설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09p~). 그런데 그 얘기가 논리적으로 보나 설득력으로 보나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 어디쯤 가면 소설가더러 조삼모사하라고도 한다(본문 '욕망의 말에 불타지 않는 방법은 조삼모사뿐'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조삼모사가 얼마나 사특한(?) 단어며 태도인지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에게 조삼모사라니. 그런데 그 또한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그럴 듯 하다. 

 

또한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알고 있는데 저자는 다상량 즉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도 한다. 그건나도 동의하는 바다. 생각만 많이 했다고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난 지금쯤 거의 100권이 넘는 책을 썼을 것이다. 100 가지의 생각보다 한 가지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 더 작가답다.

 

게다가 핍진성은 또 어떤가? 작가는 진실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솔직히 난 이런 단어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이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견해, 다른 의견은 이 책 곳곳에 나타난다. 이쯤되면 김연수 작가는 소설을 신봉(?)하는 세계에선 새로운 교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작가의 생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비슷비슷하고 뭔가 범주화된 생각들속에 김연수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은 단연 빛이난다. 또한 어느 부분은 정말로 동의 하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드보일드 형의 소설가도 있고, 자멸파 형의 소설가도  소설을

  다 쓰고 나면 자신이 황희 정승 스타일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중략)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이해 없이 소설가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 (57~58쪽)

나는 김연수 작가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 날 나의 싸부가 그렇게도 강조해마지 않던, 작가는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와 같을 것이다. 

 

어떠한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무조건 나의 관점의 옳음을 말하기 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어떤 상황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유추하고 추론해 본다. 그것은 그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옳건 그르건, 독자가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건 안하건 그건 순전히 독자들을 몫으로 돌린 채 말이다.      

 

옛 속담에도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처녀가 애를 베면 안 되는 세상에서 작가는 바로 처녀가 애를 벨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추적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황희 정승이 되어버리는 수 밖에. 

 

 

소설가의 숙명

 

그런데 이것을 전지적 싯점에서 쓴다고 해서 소설가들을 신적인 존재인 양 한다고 하는데,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조차 신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어디서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인가? 그 작가만이 그 이야기를 잘 알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단 그런 전지적 존재의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김연수 작가는,

작가는 그 시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그 시공간을 초월해서도 모르는 게 없는 존재여야만 한다. ...... 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전지적 작가에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물음에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그러므로 소설가는 앞으로 오 백 년은 더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 (243p)

그렇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숙명일 것이다.

 

어느 작가는 소설을 가리켜 잡설이라고도 했다. 그건 겸손하게 자신을 비운 성육신쯤되는 말은 아닐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뭐랄 사람 없고 믿게 만드는 힘. 이게 소설은 아닐까. 

     

그런데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하는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반드시 과거를 복기하기를 좋아하는 소설의 습성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옛날 초등학교 시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무슨 교과서에 방송국 PD인 외삼촌이 철없는 조카를 위해 조카를 주인공으로 한 대본인지 동화 한 편을 써서 조카를 깨닫게 한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그런 것처럼 소설은 가끔 "너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쓰는지도 모르겠다. 삼촌은 직접 조카를 따끔하게 야단을 치거나 조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우회적 방법을 쓰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기 전에  똑바로 살라고 외치기 위해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노가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 글이고 소설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습작이지만) 나의 소설 대부분도 그렇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소설가들은 소설로만이 항거할 수 있고 복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느 배우가 속이 상해 울면서도 연기할 때 우는 장면에서 이렇게 울어줘야지 속으로 다짐했다고 하는 것처럼, 작가 역시도 천인공노할만한 일이 있거나 매우 슬픈 일을 만나면 열심히 화내고 슬퍼하면서도 머리 한켠에선 벌써 원고지에 이 사건을 옮겨적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집으로 돌아와 자기 책상위에 앉아 깨작거리고 쓰는 것이다. 아라크네의 후예답게 말이다.    

 

또한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만이 다 일 것 같은 세상에서 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는 그 작품을 쓰게 만드는 대상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 대상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쓰거나, 그를 세상에 폭로하거나 알리기 위해 소설이란 서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 작가는 작가가 욕 먹을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소설,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가?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키는 건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흔히들 입 달린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몇 십권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는 소설로 쓰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소설가와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어쨌든 쓴다. 그러나 소설가가 아닌 사람은 말만 그렇게 하고 쓰지는 않는 사람이다. 왜 안 쓰는가? 소설 쓰는 거 생각 보다 쉽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소설가가 되는 것일까? 소설가지망생은 매번 새로 쓰고 매번 허문다. 그러느라 소설의 끝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그 소설의 끝을 보는 사람, 맨 마지막 최종 마침표를 찍는 사람만이 소설가가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소설 쓰는 거 정말 쉽지 않다. 어떤 땐 글을 쓰면서도 뭔가 알지 못하는 힘이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도록 나를 밀쳐내는 것만 같다. 여러가지 원인을 따져 볼 수가 있겠는데, 내 경우는 너무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때로 쓰기도 전에 좌절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습작에 불과한데 언제 써서 언제 세상의 빛을 보고, 언제 소설가가 되어 원고료를 손에 쥐어 보겠는가? 특히 소설 쓰기에 있어 갈길은 구만린데 난 이제 개미 걸음이다. 언제 종착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 쓰고 아예 처음부터 그런 꿈을 꾼적이 없는 사람처럼 입을 딱 닫고 만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미련이 남고, 자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여전히 그 일을 위해 뭔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어쨌든 죽기 전에 그 일을 해야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김연수 작가는 정말 친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쓰기의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할 수만 있으면 느리게 글을 쓴다' 고 했다.

 

아, 이 무슨 굿뉴스란 말인가. 괜찮은 작가라면 할 수만 있으면 미친 듯이 써서 내가 글을 쓰는지 글이 나를 쓰는지 모르겠다는 신기어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연수 작가는 마라톤 잡지인 <러너스 월드>의 편집장이었던 조 핸더슨의 LSD 달리기를 소개한다. 

 

흔히 달리기는 무조건 죽을 고생을 해 인간승리를 이루어내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LSD는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으니 다른 사람을 이기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연수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접목시킨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려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자신의 문장으로 쓰려는 것들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 (중략) 잘 쓰려하거나 많이 쓰려거나, 심지어 뭘 쓰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다.(232쪽)

 이것은 정말 글쓰기의 획기적이면서도 참신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말한 분노나 누군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서사적 방법을 쓰는 것 보다 긍정적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앞서 말한 황희 정승의 사고법의 새로운 계승이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확실히 그건 흥미롭고 새롭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글을 얼마큼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3쪽)     

이것은 확실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많이 해 보라고 말했던 어느 저자의 그것과 배치된다. 어떤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는 아닐까? 하지만 난 성격상 1등의 정신은 없으니 김연수 작가의 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김연수 작가는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어찌보면 서글픈 말이다. 심지어는 그는 소설가의 데뷔작은 검은색이어야만 한다고도 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불처럼 일어나기도 하지만 불은 곧 잦아들고 그을린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과 대조를 해 보면 다음 차기작을 쓸 때 시인은 다시 불을 찾아 나서지만 소설가는 불이 아니라 건강이나 체력을 더 신경 써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다소 엉뚱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소설가란 과정을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결과로만 얘기되어지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소설가가 그런 것이라면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경쟁을 해서 이길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업적주의형 인간이 못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소설가의 꿈을 다시 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 온 책중 나에게 가장 많은 용기와 격려를 준 책이 아닌가 싶다. 작가에게 감사하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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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2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다 해도 책 한 권 나오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서 다작하는 작가들이 대단하면서도 능력이 의심되기도 해요. 일부 작품은 읽어보면 대표작이나 베스트셀러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2% 부족한 것도 있으니까요. 심하면 평소 작가의 글답지 않은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때도 있고요.


stella.K 2014-12-23 11:5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서 김연수 작가가 <작가란 무엇인가> 추천사에서 그러지 않든,
재능에 대해서 물어 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난 그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로서 소설가는 좀 특별하게 바라봐 줘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 정말 어떤 작가든 항상 좋은 작품을 내는 건 아니거든.
그것을 인내해 주고, 기다려주면 좋은데 독자의 입장에선 그러긴
쉽지 않을 거야. 시간과 돈 대비 떨어진 작품 읽으면 화가 나잖아.
그리고 좋다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이래저래 소설가로 산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것 같아.ㅠ
 
잭나이프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뉴엘 베른하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을 칼로 찌르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얼마나 부조리한가?

사람을 찔렀으면 살인이거나 살인미수가 되고, 경찰이 오고, 구급차가 와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야 하는데 운이 좋은 건지 몽롱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친구 조차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몸이 안 좋은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주인공은 모른 척 시치미 떼고 다시 일상을 살아도 될 텐데 자신이 칼로 찌른 상대가 누군지 추적해 보기로 하고 몇번의 조회 끝에 마침내 상대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또 묘한 건 그렇게 만났음에도 서로에 대한 확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을 찔렀나요?'라든가 '댁이 나를 찌른 사람?'이냐고 되묻지도 않고 둘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즉 살인미수자와 살인당할 뻔한 사람과의 사랑과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가끔 인간은 자신을 위해한 범인을 사랑하게 되는 정신작용에 휩싸이기도 한다는데 이 두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격렬한 감정적 사랑 후에 오는 강렬한 질문, "이 사람은 왜 나를 사랑하는가?"이건 좀 어리석은 질문인 것 같긴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가장 본능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결국 주인공이 알아 낸 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건전하고 이상적인 남녀간의 사랑 같은 것으론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의 욕망의 원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인간의 욕망이란 게 그다지 건강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것을 안 순간 주인공은 사랑하는 애인이 자신을 언젠가 떠날 것을 알고, 또 떠나 보내지 않기 위해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으로 연기할 것을 다짐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이난다. 결국 사랑은 없거나 사랑의 다른 말은 욕망이란 말일 것이다.

     ​          

처음엔 참 독특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시작되고도 한동안 대사없이 주인공의 상황과 생각만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게다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같게 한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작가가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썼단다. 어쨌거나 프랑스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선 나쁘지 않은 독서경험이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고 싶어 자꾸 의심하게 만들었다. 즉 내가 지금 잘 읽고 있는지, 뭐 하나 놓치고 지나간 건 없는지. 물론 이건 나의 평소의 독서습관이긴 하다. 그리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어렵고 재미없는 책 보단 내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낄만한 책에 더 집중된다.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이 나중에 어떤 반전에 이용되는지를 되집어 보면 작가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 싶다.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읽게될 작품 같고, 더불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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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1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는데요...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니. 게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라니.
사랑에 대해 뭔가 한 수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관심 가네요.
아무래도 모르겠는 게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드라마를 보니깐,
여자를 임신까지 시켜 놓고 싫다고 도망가는 남자가 있질 않나,
미워하면서 이혼까지 한 마당에 아내에게 남자가 생기니까 질투를 하지 않나,
밉다고 서로 할퀴며 살다가도 남편이 아프기라도 하면 눈물을 빼지 않나...
도대체 사랑의 감정이란 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하면,
알 수 없는 건 인간, 이 되겠습니다.

벌써 한 해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네요. 잘 보내시길...

stella.K 2014-12-21 11:38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이 책 의외로 반전이 있어서 좋았어요.
1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인데 정말 깔끔하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 거의 대부분은
집착이고 미친상태인 것 같아요. 언니가 예로 들으신 것만 해도
보면 말이어요.ㅋ

네. 고맙습니다. 언니께서도 마무리 잘하셔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별점: ★★★☆

 

요즘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곤 하나? 더구나 실수가 아닌 간호사의 고의로 그렇게 됐단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너무 기뻐하는 게 화가나서. 그런다고 아이를 바꿔치기를 하냐? 

그런데 그 간호사 운도 좋다.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원하면 벌을 받게 할 수도 있지만 주인공 료타가 이를 취하한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이나 이슈없이 이 잘못된 운명을 긴 시간을 두고 바꿔놓는 것에 집중을 한다. 아이가 받을 충격. 부모의 마음, 바뀐 아이의 상대 부모와의 관계를 별 무리없이 담담하게 보여준다.

새삼 잘 사는데 형제가 없는 집과, 못 사는데 형제가 많은 집 어느 집이 자신이 크는데 유리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는 거기까진 다루지 않고 온전히 부모의 마음, 심리 묘사에만 집중했다. 

나중에 료타의 아내가 자신의 아인 줄만 알고 키웠던 아들 케이타가 원래의 부모에게 가고, 자신이 케이타를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장면에서 공감이 갔다. 원래 자신의 아이를 찾았음에도 좀처럼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게 괴로워도 하고. 역시 낳은 정 보다 기른 정이 더 앞서는 법일까?

조금은 지루하지만 폭풍 같은 사건을 이렇게 잔잔하게 그리기도 쉽지 않은 것 같은데, 황금종려상인가 뭔가 하는 상을 받았다. 그 연출력이 대단하다 싶다. 의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전>  ★★★☆

 

가끔 그런 사람이 있긴 하다. 샌님 같이 조신하고, 얌전해서 남이 잘 안 할 것 같은 일을 스스럼없이 해 내는 사람. 그런 사람 보면 묘하게 끌리긴 한다. 나에겐 별로 없는 재주라 그런가.

 

사전 편찬의 작업이 이렇게 지난한 작업일 줄은 이 영화를 보기 전엔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요즘 같이 인터넷 전자 사전이 있는데 종이사전이란 얼마나 가치없는 일일까? 남이 알아주건 말건 의미 있다고 생각한 그 일에 무려 17년을 바친 사나이의 이야기다.

 

그동안 어렵게 하숙집 주인 딸과 결혼을 했고, 자신과 같이 일했던 편찬진들 바뀌고 갈리는 걸 봐야했고, 자신의 상사가 죽는 것도 봐야만 했다. 그동안 새로 생긴 단어들을 편집해 넣고, 작업이 끝나는 날 파티도 한다. 참 조촐한 파티다. 

 

한 작가가 17년 동안 소설을 써서 세상에 내놨다면 역작이니 하며 추켜세울 텐데 그러기도 뭐하다. 도무지 뭐가 행복한 사전이란 말인가. 

확실히 인간의 언어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한다. 예전엔 듣보 보도 못한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가? 은어 같은 단어가 표준어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일본 영화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왜 이런 영화를 못 만드는 걸까 살짝 아쉽기도 했다.

 

오늘 뉴스를 보니 표준어 13개를 추가 시켰단다. '삐지다'(삐치다), '딴지'(딴죽), '개기다'(개개다), '허접하다'(허접스럽다) 등이 포함됐다는데 나머진 또 뭔지 모르겠다.

새삼 사전편찬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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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십결 -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열 가지 비책
마수취안 지음, 이지은 옮김 / 이다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드라마 <미생>이 재밌는 건, 주인공 장그래가 바둑의 원리를 직장이란 전쟁터에 적용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통찰한 것에 있을 것이다.

 

사실 장그래에게 바둑은 그의 전부이자 아픔이었다. 아픔이어서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거였겠지만 이미 그것이 자신을 지배해버린 이상 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니 자신이 아픔이 됐던 것이 또 다른 세계에선 새로운 안경 구실을 하게 되니 그건 장그래에겐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뭔가의 특기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화나는 일이있고, 누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장그래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왜 화를 내지 않냐고, 어떻게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처럼 참고만 있냐고 뭐라고 하지만, 그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뿐이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그에겐 묵직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난 솔직히 자기계발과 맞물린 현대 감정심리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즉 참지 말아라,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라 하는 것들 말이다. 물론 인간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구조나 인식이 바뀌어야 될 일을 그깟 감정 하나 다스렸다고 개인의 삶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는가? 물론 감정조차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어디가서 병든 나를 고치겠냐마는. 술 먹고, 교회나 사찰 가서 힐링 하는 것도 한계는 있지 않겠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나를 변화시키라고 했다. 그것이 더 빠른 길이라고. 거기에 나도 어느만큼은 동의한다. 그러나 나만 변화시키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 거기엔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전략이 수립이 되어야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는 전제 또한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기울에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나 뭐라나.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를 세울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원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이제 너무 흔하게 많이나와 있다. 한 15년 전쯤 로버트 그린의 저작물을 필두로 해서(물론 그 전에도 없진 않았겠지만 왠지 이 사람의 저작물이 가장 먼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싶다) 말이다.

 

자기계발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책은 인문학적인 요소를 접목시키고 있어 나름 좋아하긴 한다. 그런데 읽기는 녹녹치 않다. 무엇보다 중국인이 쓴 만큼 중국 그것도 춘추전국시대에 나올 법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화로 삼아 썼기 때문에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역사를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미생이 완생으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는 각자가 고민해 봐야할 일이긴 하겠지만, 이 책은 자신의 인생을 완생시킨 사람들(또는 그 반대도 있다)과 그들의 방법이 풍부한 예화와 함께 들어있어 읽어두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언제나 파이팅인 우리네 미생을 위하여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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