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연수 작가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 날 나의 싸부가 그렇게도 강조해마지 않던, 작가는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와 같을 것이다.
어떠한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무조건 나의 관점의 옳음을 말하기 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어떤 상황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유추하고 추론해 본다. 그것은 그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옳건 그르건, 독자가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건 안하건 그건 순전히 독자들을 몫으로 돌린 채 말이다.
옛 속담에도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처녀가 애를 베면 안 되는 세상에서 작가는 바로 처녀가 애를 벨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추적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황희 정승이 되어버리는 수 밖에.
소설가의 숙명
그런데 이것을 전지적 싯점에서 쓴다고 해서 소설가들을 신적인 존재인 양 한다고 하는데,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조차 신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어디서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인가? 그 작가만이 그 이야기를 잘 알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단 그런 전지적 존재의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김연수 작가는,
작가는 그 시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그 시공간을 초월해서도 모르는 게 없는 존재여야만 한다. ...... 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전지적 작가에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물음에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그러므로 소설가는 앞으로 오 백 년은 더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 (243p)
그렇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숙명일 것이다.
어느 작가는 소설을 가리켜 잡설이라고도 했다. 그건 겸손하게 자신을 비운 성육신쯤되는 말은 아닐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뭐랄 사람 없고 믿게 만드는 힘. 이게 소설은 아닐까.
그런데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하는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반드시 과거를 복기하기를 좋아하는 소설의 습성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옛날 초등학교 시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무슨 교과서에 방송국 PD인 외삼촌이 철없는 조카를 위해 조카를 주인공으로 한 대본인지 동화 한 편을 써서 조카를 깨닫게 한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그런 것처럼 소설은 가끔 "너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쓰는지도 모르겠다. 삼촌은 직접 조카를 따끔하게 야단을 치거나 조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우회적 방법을 쓰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기 전에 똑바로 살라고 외치기 위해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노가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 글이고 소설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습작이지만) 나의 소설 대부분도 그렇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소설가들은 소설로만이 항거할 수 있고 복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느 배우가 속이 상해 울면서도 연기할 때 우는 장면에서 이렇게 울어줘야지 속으로 다짐했다고 하는 것처럼, 작가 역시도 천인공노할만한 일이 있거나 매우 슬픈 일을 만나면 열심히 화내고 슬퍼하면서도 머리 한켠에선 벌써 원고지에 이 사건을 옮겨적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집으로 돌아와 자기 책상위에 앉아 깨작거리고 쓰는 것이다. 아라크네의 후예답게 말이다.
또한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만이 다 일 것 같은 세상에서 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는 그 작품을 쓰게 만드는 대상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 대상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쓰거나, 그를 세상에 폭로하거나 알리기 위해 소설이란 서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 작가는 작가가 욕 먹을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소설,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가?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키는 건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흔히들 입 달린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몇 십권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는 소설로 쓰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소설가와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어쨌든 쓴다. 그러나 소설가가 아닌 사람은 말만 그렇게 하고 쓰지는 않는 사람이다. 왜 안 쓰는가? 소설 쓰는 거 생각 보다 쉽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소설가가 되는 것일까? 소설가지망생은 매번 새로 쓰고 매번 허문다. 그러느라 소설의 끝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그 소설의 끝을 보는 사람, 맨 마지막 최종 마침표를 찍는 사람만이 소설가가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소설 쓰는 거 정말 쉽지 않다. 어떤 땐 글을 쓰면서도 뭔가 알지 못하는 힘이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도록 나를 밀쳐내는 것만 같다. 여러가지 원인을 따져 볼 수가 있겠는데, 내 경우는 너무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때로 쓰기도 전에 좌절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습작에 불과한데 언제 써서 언제 세상의 빛을 보고, 언제 소설가가 되어 원고료를 손에 쥐어 보겠는가? 특히 소설 쓰기에 있어 갈길은 구만린데 난 이제 개미 걸음이다. 언제 종착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 쓰고 아예 처음부터 그런 꿈을 꾼적이 없는 사람처럼 입을 딱 닫고 만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미련이 남고, 자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여전히 그 일을 위해 뭔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어쨌든 죽기 전에 그 일을 해야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김연수 작가는 정말 친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쓰기의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할 수만 있으면 느리게 글을 쓴다' 고 했다.
아, 이 무슨 굿뉴스란 말인가. 괜찮은 작가라면 할 수만 있으면 미친 듯이 써서 내가 글을 쓰는지 글이 나를 쓰는지 모르겠다는 신기어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연수 작가는 마라톤 잡지인 <러너스 월드>의 편집장이었던 조 핸더슨의 LSD 달리기를 소개한다.
흔히 달리기는 무조건 죽을 고생을 해 인간승리를 이루어내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LSD는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으니 다른 사람을 이기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연수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접목시킨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려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자신의 문장으로 쓰려는 것들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 (중략) 잘 쓰려하거나 많이 쓰려거나, 심지어 뭘 쓰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다.(232쪽)
이것은 정말 글쓰기의 획기적이면서도 참신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말한 분노나 누군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서사적 방법을 쓰는 것 보다 긍정적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앞서 말한 황희 정승의 사고법의 새로운 계승이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확실히 그건 흥미롭고 새롭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글을 얼마큼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3쪽)
이것은 확실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많이 해 보라고 말했던 어느 저자의 그것과 배치된다. 어떤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는 아닐까? 하지만 난 성격상 1등의 정신은 없으니 김연수 작가의 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김연수 작가는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어찌보면 서글픈 말이다. 심지어는 그는 소설가의 데뷔작은 검은색이어야만 한다고도 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불처럼 일어나기도 하지만 불은 곧 잦아들고 그을린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과 대조를 해 보면 다음 차기작을 쓸 때 시인은 다시 불을 찾아 나서지만 소설가는 불이 아니라 건강이나 체력을 더 신경 써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다소 엉뚱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소설가란 과정을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결과로만 얘기되어지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소설가가 그런 것이라면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경쟁을 해서 이길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업적주의형 인간이 못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소설가의 꿈을 다시 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 온 책중 나에게 가장 많은 용기와 격려를 준 책이 아닌가 싶다. 작가에게 감사하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