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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평점 :
이 책을 받아들면 조금은 뜨악해진다. 판형이 여느 시집처럼 되어있는데 막상 펼쳐보면 지문과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집이다. 그런데 저자인 김경주는 자신의 글을 '시극'이라고 말한다. 시극이라. 서지 분류도 애매해 이 책은 시에도 들어가 있고 희곡에도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시의 운률은 잘 모르겠고 아무리 봐도 한 편의 희곡 같다. 그런데 굳이 '시극'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장르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요즘 돌아가는 우리나라 연극계의 흐름을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 분야가 너무 안 알려져서 그런지 몰라도 저자 김경주는 벌써 십년 전부터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경주가 말하는 '시극'이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도 없다. poetic drama. 즉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하는데, 산문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의 글에 라임과 운율이 살아 있는 문학적 장르라고 한다. 쉽게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고,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에서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가 그렇다고 한다. 원래 시와 극은 하나였고, 시인은 곧 극작가였다고 말한다.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었다고.
그렇게 설명하니 이해가 갈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에 보았던 안중근의 삶을 조명한 연극 <나는 너다>란 작품도 시극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배우 윤석화가 연출을 맡았고, 탤런트 송일국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이 단순한 정보만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연극은 배우들이 구사하는 대사에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뭔가 일상어가 아닌 시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엔 대사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관객이 알아 먹겠나?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시간 내내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상당히 고급하면서도 응축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 희곡은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책 얘기는 안하고 잠시 딴 얘기를 해서 그렇긴한데,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영화, 드라마와 같은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각광받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극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나 드라마는 그 대사가 일상어와 약간의 B급 언어로 이루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드라마의 언어 수준은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혀져 있다고 한다. 우린 어느새 그것이 정석인 양 그 보다 다른 차원의 언어에 대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좀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언어가 구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와 결탁한 오염된 언어가 전부인 양 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김경주는 그동안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홍대의 클럽과 카페, 버려진 공장, 들판, 부둣가, 길거리 등 장소를 초월해 시극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가히 그의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적어도 우리는 이 카페라는 곳을 좀 더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프랑스의 카페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발전해 온 공간이 아니던가. 또한 카페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그 나라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의 카페는 프랜차이즈에 듣도 보도 못한 음료를 팔고, 음악이나 틀어주는 상업주의의 대표 공간일 뿐이다. 물론 요즘엔 카페를 조금 이색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는 곳도 없지는 않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어느 날 우연히 카페 갔다가 최소한의 무대 장치와 소수의 배우들에 의해 흘러나오는 시극의 대사를 듣는다면 그날은 그야말로 눈과 귀가 호사하는 (소위 말하는)계 탄 날은 아닐까?
하반신 대신 고무 튜브를 끼고 거리를 기어 다니며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김 씨. 눈 내리는 겨울밤, 파출소 직원은 얼어붙은 길바닥을 배회하는 김 씨를 등에 업어 파출소로 데려 오고, 파출소 직원은 김 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 시극의 주요 내용이다. 잠시 이들의 대사를 음미해 보자.
파출소 직원/ 또 뭘 보았지?
김 씨, 의자에서 내려 창가 쪽으로 기어간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김씨/ 몰래 떨어지는 눈물요.
파출소 직원/ 왜 그걸 자네 손등에 함부로 떨어뜨리고 지랄이야.
그건 집에 가져갈 수도 없잖아.
김씨/ 맞아요. 몰래 얼른 주어서 집에 가져갈 수도 없는 거죠.
파출소 직원/ 그런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아. 갈 길을 가야지. 앞으로.
김씨/ 그게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따뜻해요. 손등에 떨어지면.
파출소 직원/ 눈물 나네. 왜 바다로 기어가려고 하지?
김씨/ 배가 고파서 아가미를 열어놓고 물을 마시고 싶었어요.
파출소 직원/ 내가 업어서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자넨 눈사람이 됐을 거야. 지느러미가 있는 눈사람.
김씨/ 한 번이라도 저를 업은 사람은 절 내려놓고 모두 떠났어요.
(74~75)
시가 한 번 읽어서 그 운율와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것처럼 시극 역시 반복해서 읽고 음미해 보면 대사가 주는 의미와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부러 찾아 읽기도 해야겠지만 그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제목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이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애잔하게 읊었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미학적 코드가 숨어있다.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 허희의 평론도 눈여겨 봐 두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