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1998년도에 나왔단다. 그렇다면 나도 그 무렵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가 좀처럼 없으니 그동안 이 영화를 TV에서도 심심찮게 방영했을 것이다. 그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내가 지난 주일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무엇보다 다림(심은하)의 주차요원 복장과 주차질서 글자가 새겨진 차가 새삼스럽다. 저때만해도 저게 있었지? 지금은 없어진지 꽤 되는 것 같은데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정원(한석규)의 사진관은 또 어떻고. 사진관 다닐 일이 없어졌으니 이게 어디가면 있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문을 닫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하고 있는 곳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옛날 7,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것도 같았다. 뭔가 계속 장면이 이어질 것도 같은데 다음 장면이 나오고, 심오한 뭔가가 나올 것도 같은데 그냥 끝나버린다. 그래서 허탈하고 조금은 지루한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한 가지 건질 게 있다면 심은하의 청초한 이미지와 한석규의 숫총각 같은 서글서글함이 없었다면 뭐냐고 툴툴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삶의 나이테가 얼마 쌓이지 않아 영화를 그저 영화로만 봤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보니 그때 생각하지 못하고 ,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삼 뇌리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왜 '8월의 크리스마스'인지가 이제야 깨닫다니. 제목이 하도 근사해서 당시엔 친구에게 왜 8월의 크리스마스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겉멋든(?) 감독의 제목에 대한 은유 뭐 그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이 이렇게도 표현되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사나브로 가슴에 와 닿는다.
'썸'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싸구려 B급 언어가 아니던가?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간단해지고 명료해져서 편하긴 하다. 이 영화도 말하자면 썸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썸이 썸으로 간단히 말해질 수 있는 것인가? 영화 속 다림과 정원은 손 한 번 잡지 않았고, 그 흔한 키스조차도 하지 않았다. 요즘엔 남녀가 갈 때까지 가 놓고도 썸이라고도 한다던데 그건 확신이 없는 관계지 여전히 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남녀가 만나면 서로 자연스럽게 물드는 관계. 이런 게 좋은 것 같다. 일부러 끼워 맞추는 관계. 그래서 무슨 대학 나왔고, 어느 집 자식이고, 재산 형성은 어떤지를 따져서 만만하다 싶으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작업을 썸이라고 한다면 좀 진부해 보인다. 또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썸은 하나의 장치일 수도 있다. 사귀는 것도 사귀지 않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있다 상대에 대해 단물 다 빨아 먹고 싫어지면 발을 빼기 쉬운 지점을 확보하려고 썸을 만들지 않을까? 어느 정도 가까운 관계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싫어지면 누구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 버리기 좋은 지점을 만들기 위해 썸이란 지점을 만들지는 않는지. 차는 것이 차임을 당하는 것 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이 영화는 정원과 다림이 실제 연애를 한다면 다림의 판정패로 끝날 소지가 많은 영화다. 정원이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은유로서의 병이라면 암은 아니었을까?) 죽음이 예고돼 있기 때문에 함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딱히 정원과 다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익숙한 신파도 아니다. 그건 다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본다. 자칫 영화는 황순원의 '소나기'의 아류 또는 새로운 버전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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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번째로 본 나는 이 영화는 오히려 죽음을 앞둔 남자의 담담한 심정을 묘사한 영화는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연애와 죽음을 동시에 다루고자 했다면 죽음에 더 많은 무게를 두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그래. 사람은 어차피 죽어. 그래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버리고 싶지만 그래서 친구 앞에서 나 죽는다 하면서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붙들고 싶은 생은 뭐란 말인가? 불꺼진 방에서 정원이 삼키듯이 우는 그 짧은 장면이 허허롭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같이 가 줄 수 없는 조금 있으면 맞게될 죽음의 길. 나도 2년 전 오빠를 보냈지만 오빠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거기에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더했다면 오빠가 가는 길이 좀 더 나았을까?
영화는 산 사람이 죽을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을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고 떠날지를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사진기 사용법을 설명서도 남기고, 다림의 사진도 예쁘게 남겨두지 않던가.
함께 만나고 있는 동안은 서로에 대해 관심만 있을 뿐 사랑을 확인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정원의 예기치 못한 입원으로 더이상 만나지 못할 때 비로소 자신이 정원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다림은 알게된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수 없게 되자 분노하게 되고. 한편 그에 비해 아무도 문병을 오지 않는 쓸쓸한 정원의 병실이 대비 된다. 동생이 누구 연락할만한 사람 없냐고 묻자 없다고 말하는 정원이 분명 다림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다림에게 문병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의 욕심을 내려놓고 더 큰 욕심을 품어 본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알아도 한 사람 정도는 모르는 것. 그것이 정원에겐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을 것이다. 설혹 그 사람 마음속에 어느만큼 살아있다 잊혀진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의 영정 사진을 자신이 직접 찍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마침 내가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던 날은 방송국에서 고 유영길 촬영 감독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이 떠올라 묘한 오버랩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리메이크 되어도 좋을 영화인 것 같은데 여러모로 리메이크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필름이 좀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을 빼면 영화 전편에 흐르는 정원의 심리와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허진호 감독과 한석규만큼 잘 잡아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다시 봐도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