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 Citizen K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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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번째로 봤다.
흑백 필름이고 워낙에 오래된 영화라 지루하다고 생각해서 지
루한 감이 없지않다.
하지만 이제보니 생각보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사람들의 인터뷰로 극적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뭐가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나는 언듯 영화<파이란>이나 <불멸의 연인들>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영화사에서 불멸의 작품으로 꼽는 작품에 <시민케인>을 넣곤 한다.
그런데 새롭게안 사실은 이 영화는 당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으며
아카데미에서도 각본상 외 받은 것이 없다고 한다.(난 솔직히 9개 부문쯤 될 줄 알았다)

말에 의하면 바로 그 점이 아카데미 역사상의 몇 안되는 실수중의 하나라고 전한단.
그렇게도 유명하다던 오손 웰즈가 나오는데 감독상이나 남우 주연상 정도는 줘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날 이 작품이 위대한 걸작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뭐가 있을까?
내가 볼 땐 가장 미국적 정서를 잘 담아내면서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잘 표현해 줬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미디어로 갑부가 된 케인이 미디어에 의해 몰락해 가는 그것.


 

물론 영화적 기법으로 볼 때 탁월한 점도 많겠지만, 난 솔직히 그딴 건 잘 모르겠다.
단지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 장면을 꼽으라면, 초반에 어린 케인이 눈 오늘 날 혼자 눈장난을 하면서 놀고 있는 장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했다가 그것을 쭉 뽑아 실내로 들여오면서 케인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처리해 준 장면이 어찌보면 몽환적이기도 하고 좋았다.(그 스틸 컷이 없어 아쉽다.) 

이야기에서의 서스펜스도 잘 녹아져 있는 것 같다.
로즈버드란 상징적 물건을 통해서 약간의 미스테리적 효과도 노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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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 Lord Of The Fli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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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19년이나 됐다고 하니 나는 그 무렵 TV에서 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오래 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무인도라는 고립된 섬에서 아이들을 거의 발가벗겨 놓고 찍어서 일까?
의상비는 거의 들지 않았겠다 싶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 더 드는 생각은 인간에 대한 통찰을 여지 없이 보여준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낡아지지 않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잘 알다시피 이 영화는 199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골딩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으로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을 이제 10살을 갓넘었을 소년들의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왜 꼭 그만한 소년들을 등장시켰을까?
추측컨대 자아에 눈뜰 나이이고,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성인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선상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본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닐까?

 
무인도란 공간은 그들에게 있어 마법의 공간과 같은 곳이다.
거기서 인간의 문화성과 원시성이 대립을 한다.
문화성은 잘 교육되어지고, 자기 보단 남을 생각하며, 개인 보단 전체를 생각하는 것으로,
몇몇의 아이들이 집을 그리워 하고 몇시냐고 물어보고,
집에 있었으면 무슨 TV프로를 봤을거라며 읊조린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갈등을 겪으면서 두 파로 나뉜다.
하나는 원시파. 하나는 문화파라고나 해야할까?
당연 그런 환경에선 원시파에 아이들은 몰리고 문화파는 얼마 되지 않는다.
원시파는 현재 지금의 상황에 더 충실하고, 문화파는 이 섬에서 구출되어 나갔을 때의 미래를  상징한다.

불은 원시적 본능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아이들은 불 앞에서 놀고, 불 앞에서 권력 다툼을 하며, 불 앞에서 살인을 한다.
문화파는 상대적으로 약자의 세력이며 둘이 남았고 그나마 한 아이는 돌에 맞아 즉사를 하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소년은 원시파를 피해 사정없이 달리다가 숲속을 뛰쳐 나와 해변가 다다르고
자기네들을 구출해 줄 어느 헌병 아저씨 앞에 고꾸라졌을 때야 비로소 이 악몽이 끝났음을 감지한다.
그들의 마법은 그 헌병이 "아니,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니?"했을 때야 깨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 후에 남아있을 이야기들은 관객의 상상에 맡긴채 영화는 끝난다. 훌륭했다.
오래 전 영화를 보았을 땐 그 헌병의 마법을 깨주는 대사 하나만을 기억했는데
지금보니 영화 진행에 있어서 보여지는 에피소드들이 대단하다.
무인도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연출이 가능할까?

무인도라고 하는 공간이 주는 마법이 인간의 역할 놀이에 대한 상당한 통찰을 보여준다.
깨어났을 때 트라우마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것까지는 보여주지 않지만 충분히 짐작은 가능하게 한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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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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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다. 처음엔 시작부터 원작과 너무 달라 '그래, 형만한 아우없다고 원작에 버금가는 영화가 흔한게 아니지.'하며 내심 혀를 끌끌 찼다고나 할까? 더구나 시나리오 쓰는 사람에게 있어 가급적 피해가야 할 것이 '플래시백'이라는 것인데 이를테면 현재에 과거 얘기를 하는 것으로 교차방식을 의미한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이걸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이쯤되면 아는게 병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편견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내가 언제부터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서 봤더란 말인가? 고작 운이 좋아 이번에 처음? 또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같이 본 걸 가지고 어느새 뻐기는 건 아닐까? 그래도 난 앞으로 될 수 있는대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스토리텔링의 세계에선 원작과 영화는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니까. 이 작품만 해도  원작이 먼저 나오고 영화가 나왔다. 모르긴 해도 출판계에서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어디선가 입수하고 판형을 달리해서 재출간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난 영화를 생각할 때 원작이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닐테지만)그럴 경우 작품의 완성도가 높은 편이니까.     

영화는 생각 보다 길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했으니까. 오히려 영화를 보고나면 원작은 벤자민 버튼의 인생을 밋밋하게 또는 총론격으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약간의 스포일러도 있긴 하지만, 원작에선 벤자민 버튼의 부모가 모든 운명을 감수하고 벤자민을 키우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영화에선 엄마가 벤자민을 낳다 죽고 아버지는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자 어느 흑인의 집에 버린다는 설정이다. 어찌보면 그 설정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런데 왜 감독은 아기를 흑인의 집에 버리는 것으로 설정했을까? 백인이며 있는 사람이 아프고 괴상한 것 견뎌낼 것 같지 않으니까 오래도록 착취 당하고 고통 당했던 흑인이 모든 운명을 감수하기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오마바를 의식한 걸까?ㅎ 

아무튼 영화는 적당히 몽환적이기도 하고 또 그럴 듯하게 현실감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관객을 설득하기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브래드 피트의 연기력이다. 꼬마노인 역에서 대역을 썼는지 어땠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점점 젊어지는 쪽으로의 연기는 가히 탁월해 보인다. 그에 못지않게 상대역인 데이지 역의 케이트 블란쳇의 소녀에서 노인역도 볼만했다. 

영화는 영화답게 이들의 사랑에 무게를 싣는다. 영화에서 사랑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보겠는가? 그래서 영화와 소설이 다르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작은 사랑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데 비해 영화에서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랑은 그야말로 물결친다. 

영화는, 40이 넘은 나이에 벤자민과 데이지가 아기를 낳게 된다. 하지만 벤자민은 젊음의 정점에서 자신이 점점 아이로 변할 것을 생각한다. 자신과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자기는 겉으론 점점 어려지지만 속은 점점 노쇄해질 것이고, 딸은 어머니의 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게다가 특수한 아버지의 존재를 딸이 받아 들이지 못할거라고 생각해서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 부분이 어찌나 짠하던지. 나중에 갓난 아기가 돼서 늙은 연인의 품안에서 죽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묘한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벤자민처럼 사람이 젊을 때 더 많은 지혜와 인생을 관조하는 혜안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젊을 때 한때의 방황과 실패도 훨씬 덜할텐데... 우린 누구나 젊을 때 많은 실수와 방황을 하고 늙어서 젊은 날을 그리고하고 후회한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 우리에게 늙을 수 있다는 게? 늙지도 않으면서 과거는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저주받은 인생은 아닐런지.  

솔직히 난 처음에 주인공을 부러워 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서는 이대로 천천히 늙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괜시리 이 영화의 원작자인 피츠제럴드씨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런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준 것에 대해. 또한 영화가 끝나는 것을 보면서 원작의 의도를 헤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영화가 영화다울 수 있도록 수작을 만든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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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슬픔 , 애수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닐 조단 감독, 줄리안 무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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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질투며, 집착이며, 증오이고, 배신이며, 갈증이며, 욕망이다. 동시에 사랑은 기적이고, 선이며, 생명이고, 신께로 나가는 통로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엔 빛과 그림자가, 긍정과 부정이, 믿음과 의심, 신앙과 미신이 존재한다.

이것을 너무나 멋지게 소화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영화가 아닌가 싶다. 사랑은 불륜이며 동시에 로맨스다. 사랑해서 결혼할 수도 있지만, 사랑없이도 결혼은 한다. 그리고 후에 사랑이 온다. 거기에 사랑과 결혼의 딜렘마가 있다.

작가인 남자 주인공(랄프 파인즈? 이 사람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은 작가답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사람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걸까? 어느 날 그 친구가, 아내가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 확실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그에게 부탁한다. 마침 그는 친구의 아내가 왜 폭발 사고가 있던 날, 사랑은 같이 있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란 이해 못할 말을 남기고 떠나갔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지면 친구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 싶었고, 그는 그녀의 사랑의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왜 자신을 떠나갔는지? 왜 배반했는지? 그는 단순히 그녀가 자신이 싫어져서 그의 곁을 떠난 줄로만 알았다.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고 그 사랑의 단서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친구에겐 자신이 그 단서를 찾은 양 위장을 한다.  작가들은 흔히들 전지적 싯점에서 소설을 쓰듯, 그는 자신이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옳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작가들도 에고이스트들이니까.

하지만 사립탐정이 목격한 사실, 증거물 특히 그 탐정을 통해 그가 입수한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하고 잘못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예를들면, 폭발이 있던 날 자신이 그토록 머리에 부상을 입었는데도 그녀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잠시 기절하고 있던 사이, 그녀는 신께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살려달라고. 살려주시면 그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그대로 그는 살아났고, 그녀는 신과의 약속대로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에도 점점 더 신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요한 추적에 결국 둘은 다시 만나게 되고 결혼하게 되길 바라지만 그녀는 카톨릭 신자였다. 카톨릭의 전통과 법에 따라 그녀는 함부로 이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둘은 결국 사랑을 이루고 남편에게 친구에게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 이혼과 결혼을 이루기 전에 여자는 병을 얻고 죽고 만다.

이를테면 작가겸 화자(랄프 파인즈)는 사랑을 암울하고 욕망에 사로 잡힌 것으로 보여주는 것인 반면 사라(줄리언 무어)는 한없이 자유롭고 선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의 극한 정점은 사라의 죽음이다.

거기엔 상당한 사랑의 미학을 복선에 깔고 있으며 특히 추리극을 표방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매력이있다. 또한 작가인 화자와 보는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련된 교차 편집의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나는 이즈음 영국 영화들 또는 할리우드 영화라도 영국을 배경으로한 영화를 좋아게 됐는데, 이국적인 매력도 있긴 하지만 하나의 잘 만든 소설을 보는 것 같아 좋다. 특히 이 영화는 미장센이 뛰어나다. 작가의 상징물인 타이프라이터. 스산하고 물을 잔뜩 머금은 영국거리.(영화엔 비오는 장면이 특히 많다) 줄리안 무어의 촉촉하고도 신비스러운 매력이 잘 녹아들고 발산한다.  

특히 타이프라이터가 갖는 그 묘한 매력을 나는 끊을 수가 없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한대 들여 놓을까 생각 중이다. 요즘엔 컴퓨터의 워드 기능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일텐데...또한 이 영화는 나중에 몇번씩 봐뒀다가 습작 겸 소설로 옮겨보는 작업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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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 - [할인행사]
샤론 맥과이어 감독, 르네 젤위거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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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재미있다. 로맨틱하고, 코믹하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르네 젤위거는 어쩌면 그렇게도 짜증나는 푼수역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소화해 내던지. 그것이 주인공이 갖는 캐릭터가 아닌가.

영화는 결혼 안한 여자들이 갖는 환상이나 강박관념을 가벼운 터치로 잘 보여준다. 예를들면, '바람둥이를 조심하라.' 그러나 그것 역시 주인공을 피해 가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건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닐까? 조심하면 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등등. 사람들은 결과만 막연하게나마 알거나 씁쓸하게 안다. 전자는 경험을 안 해봤을 경우고, 후자는 해 봤을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고민을 하지. 나는 이대로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나에게도 맞는 짝은 있는 것일까 하고.

대부분의 사랑 영화가 그렇듯,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보여주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맞는 짝은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은 역시 본인들의 몫인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못 만난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남의 사람이 되있어."라고. 얼마나 서글픈 현실인가.

내가 이 영화에 관과할 수 없었던 건, 일기가 갖은 특성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일기는 나만이 아는 얘기를 독백으로 쓴다. 거기엔 누구도 볼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기에 갖는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오늘 날 인터넷 사이트나, 자기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공공연히 자신의 일기를 공개한다. 거기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아직 쑥스러워서 그런지 공개일기는 확실히 100% 공개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내가 공개할 수 있는만큼만 공개되는 것같다.

일기는 어디까지 진실을 쏟아 부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영화에서의 일기는 정말 일기라기 보단 메모나 낙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메모나 낙서 같은 일기에서도 진실할 수 없는 주인공의 심리를 포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필요없는 걸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일기는 쓸 때는 자기 자신에게(또는 위하여) 쓰지만 언젠가는 공개된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 중에라도 공개되길 바라면서 쓰고 있겠지. 개인사적 사료로서도 필요할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족적을 남기고도 싶고. 또 잘하면 문학사(안나의 일기처럼)나 미시사적 관점에서 필요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쓴 일기를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태워버리기도 하지만, 또 언젠가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게 된다고.

난 아직까지 그런 충동을 느껴 본적은 없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시 읽고 싶은 생각도 없고. 요즘엔 모아두는 건 좋은데 쌓아두는 건 왜 그리도 부담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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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그렇지만 책도 가볍게 읽기 좋더군요. 전 글을 쓰는 버릇이 안 되어 있어서 일기는 초등학교 이후로 써 본적은 없지만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즐겁죠...비록 소설이라도...전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