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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글쎄, 어떻게 보면 이들의 사랑을 원조 교제(그것도 성인 남자와 소녀간의 사랑이 아닌 성인 여자와 소년간의)쯤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들의 관음증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으며, 또 하나의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의 사랑은 제법 깊어 보인다. 여자 보다는 소년이. 어찌보면 먼저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그 사랑을 끝낼 용기도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말도 없이 여자는 소년 곁을 떠나고 소년은 당황스러워 한다. 성인과 성인끼리의 사랑도 사랑하다 헤어지면 아프고 절망스러운 법인데 채 성숙하기도 전에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자기 곁을 떠나 버렸으니. 과연 앞으로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것을 믿을 수가 있을까?
여자로서도 그 사랑을 믿기 어려운 건 당연했을 것이다. 여자가 소년을 사랑했을 땐 아직 여자로서의 매력이 남아있을 때지만 앞으로 자신은 늙어갈 것이고 소년은 매력적인 남성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이 사랑을 버텨낼 자신이 없다. 물론 한때 이들의 관계를 단단한 끈으로 연결시켜 줬던 매개가 있엇다. 그것은 소년이 읽어주는 온갖 소설들을 여자는 탐닉하듯 듣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론 격렬하고 때론 처절했던 섹스. 그리고 불안한 사랑.
그러나 그러한 단단해 보일 듯한 이러한 사랑의 매개도 그들의 불안한 사랑의 구렁을 매워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바로 소년이 여자가 문맹자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과 여자 역시 끝끝내 소년뿐 아니라 그 누구도 자신이 문맹임을 알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형에서 영원하길 바란다. 사랑이 미래의 눈을 갖는 순간 그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며 사랑은 그냥 허울 좋은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안 해 본 사람과 사랑을 해 본 사람의 차이는 별로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의 차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교묘하게도(?) 나치즘을 배경으로 하되 그것을 교묘히 뛰어넘어 나치가 종언되고 그것에 동조한 사람의 재판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소년은 성인이 되었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던 중 어느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여자를 다시 만난다. 그의 잊혀진 사랑의 아픔은 다시 건드려졌으며 그 사랑에 어쩔 수 없이 다가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자는 그 잊혀진 세월 동안 나치에 충성을 했었고 그것이 종식되자 재판대 위에 서게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사랑을 더듬는 과정에서 남자는 자신의 지난 시절의 애인이 문맹이었음을 알게되었고 재판에서 유리한 증언이 될 수 있었음에도 차마 증언자로 나설 수 없었으며 여자 역시 자신이 문맹자라는 걸 누구도 알아선 안 되겠기에 누군가의 위증을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만다.
바로 여자가 감방에 갇혀있는 그 오랜 세월동안 남자는 여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보내주는데 거기엔 여자가 좋아할만한 소설책들을 녹음한 것들이다.(아, 아날로그의 산물중 하나인 카세트 테이프를 여기서 보게되다니! 괜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익명으로 보내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여자가 모를리 없다. 사랑의 흔적은 그렇게 역사를 거슬러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을 그저 허망한 신기루로만 치부할 수 있으랴.
그것은 희망없는 여자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되는 계기가 된다. 문맹의 깨우침의 기본은 많이 듣는 것에 있음을 그녀는 도를 트는 깨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혼자 문자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여자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었을까?
하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여기서 비극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비극이란 어쩌면 희망의 외침 뒤에 오는 예고된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저 유명한 로미오가 줄리엣이 그러지 않았던가? 또한 평생 밝은 세상을 꿈꾸었던 눈먼 소경이 그의 바람대로 눈을 뜨자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눈 뜸을 저주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처럼 여자의 문맹의 깨우침이 결국 자신이 그 옛날 사랑을 배신 것에 대한 인과응보로 작용했다면 그것은 차라리 문맹을 깨우치기 전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하면 여자에게 너무 실례되는 표현일까? 수 많은 세월이 흘러 여자가 드디어 석방을 하루 앞두던 날 남자는 여자를 다시 받아들일수없었고, 여자 역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한순간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랑은 배신 당하는 것 보다 배신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일까? 그러나 그 끝은 배신 당하는 쪽 보다 배신하는 쪽이 더 참혹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 보게된다. 가장 희망적일 때 비극을 맞이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이 또한 강한 척하는 인간의 가장 나약한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처음 만난 랄프 파인즈. 당시에는 좋은 줄 몰랐는데 이 영화에선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데 비해 케이트 윈슬렛은 예전에 봤던 <타이타닉> 때문일까? 그때 보다 늙어보여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지. 이 배우도 이 영화에서처럼 가장 희망적일 때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만.)
요즘 영화가 러닝 타임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앞이 조금 지루하고 장황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 빼면 나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묵직한 영화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