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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샨 사 지음, 성귀수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문체가 좋다. 중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에 가서 7년만에 써낸 프랑스어 소설이란다. 7년 동안 죽어라고 프랑스어 공부하면 이렇게 써낼 수 있는 걸까?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소설이다. 읽고 난 느낌은 참 아련하다. 겉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 중 한 사람인 아야메를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녀를 쫒는 장교 자오의 추격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둘은 쫓고 쫓길 뿐 만나지 않는다. 단지 아야메를 쫓는 자오의 쌍안경을 통해 먼발치에 있는 그녀의 모슴을 줌으로 끌어 당기는 데서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병사 하나가 자오의 귀에다 대고 "뭘 보셨습니까?" 할 때 그는 병사를 돌아 보며, "아니, 아무 것도."라고 말하며 이 소설을 끝맺는다.

보통은 드라마 <모래시계>처럼 그런 혁명을 배경으로 했다면 뭔가 진한 감동의 러브 스토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뭐든 평온하고, 충만할 때 인간의 내면은 고여있는 법. 외부에서 요동칠 때 인간은 과격해 진다든지, 더 치열해지고 강한 인간애를 표출해 내는 법이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건, 진한 동료애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참으로 특이하게도 두 남녀 주인공이 옷깃조차 스치질 않는다. 자오는 오직 아야메의 집을 수색할 때 발견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녀의 삶을 추적할 뿐이다. 그녀의 삶을 느끼고 유추해 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행방을 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야메는 중등시절 전학 온 짝 민을 돌봐주다 서로의 우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민은 전학 올 때부터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심지어는 담임 선생에게 까지 달돌림을 받는다. 선생님은 그런 민을 아야메와 짝이 되게 한건 아야메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우정이 알려지면서 담임 선생은 둘을 갈라 놓게되고 결국 민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는 강경한 조처를 내린다. 이에 민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어느 학교에서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아야메는 학교와 사회에 강한 불만과 울분을 쌓아가게 되고 결국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로 쫓기는 신세에까지 이른다.

자오는 그런 아야메의 일기를 읽으면서 무조건 그녀를 잡아들이려 하기 보단, 과연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인가 궁금즈을 품게된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현 정권에 대한 강한 불만이 증폭되어 터져 나오는 것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 그 어느 한 순간에도 인간이 이슈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인간은 역사의 주체다. 하지만 역사학자는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객관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기에 노력해야겠지만, 작가는 그런 주체인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데 더 주력한다. 그것이 아무리 허구일망정 말이다.

작가 샨사는 참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다. 그의 문체는 깔끔하고 유려하다. 아마도 자오가 쌍안경을 통해 아야메를 발견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낼 생각을 한 것은 어떤 면에선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 내면을 끊임없는 객관적인 시야로 탐미하려고 했던  보다 열린 결말이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족을 달자면,  요즘 프랑스에선 아멜리 노통과 샨사가 문단에서 주목을 받는단다. 나 개인적으론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이전에 읽은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보다 샨사의 이 작품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솔직히 별 네 개를 주기엔 많고 세 개 주기엔 인색해 보이 작품이 이 작품이다. 세 개 반이라면 딱 좋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네 개 주는 것이 세 개 주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네 개를 준다.

* 리뷰 제목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 인용한 말인데, 책장 말미에 나오는 역자의 글도 새겨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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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1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인간 내면을 끊임없는 객관적인 시야로 탐미하려고 했던 보다 열린 결말".... 이라는 말... 읽어보지 못한 소설임에도 끄덕끄덕 동조하게 만듭니다.

stella.K 2004-12-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내가 잉크님의 추천을 봤다니...기뻐요.^^

놀자 2005-01-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몇일 전에 이 책 읽었는데..^^~

바둑두는 여자도 진짜 재미있게 봐서 샨사의 작품에 관심이가서

천안문도 봤는데 바둑두는 여자보다는 아니지만.

재미있었거든요...^^ 그 뒤로 샨사 팬! 샨사의 최신작도 보고 싶네요.

글구 리뷰 넘 멋져요~! 추천 찍고 갑니다!

1616067

 


안녕, 토토 2005-04-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제 취향이예요. 너무 노골적이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다니 멋지잖아요.. (음... 첨보는 작가인데 일단 담아둬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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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마태우스님이 주최한 번개모임에 갔을 때, 난 참 묘한 경험을 했더랬다. 그것은 일상적인 나의 이름을 두고 온라인에서 쓰는 닉네임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이것은 나만이 경험한 것은 아니고, 거기 못였던 모든 서재인들이 본명으로는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온라인 상에서의 닉네임으로 불리워져야 누가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오프 라인에서 조차 닉네임으로 불리워져야 한다는 그 사실이 익숙치 않아 서재인들 서로 어색해 하는 것이 역력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 그것에 금방 익숙해져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불렀다. 아마도 알라딘에서 나의 본명이 불리워진다면 이것 또한 꽤 어색했을 것 같다.

이름이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들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 또는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불리워지느냐에 따라 자신이 갖는 자아 정체감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 정말 이런 이름이 존재할까 싶은 이름이나, 어떻게 저런 이름을...하는 혐오스러운 이름의 소유자를 볼 때, 나는 그의 부모가 어떠한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름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인데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놀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가 작가 고골리를 좋아하고 인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바로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고골리로 불리웠던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들은 고골리란 이름을 어렸을 땐 좋아해서 그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걸 좋아했지만 커서는 그 이름이 싫어 '니킬'이라는 본래의 인도식 이름을 부여 받는다. 하지만 그러면서 늘 그렇듯 미국 내에서의 이민족으로서 겪는 자아정체의 혼란을 작가 다름의 시선으로 밀도있게 그려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이 인도인이 쓴 인도 소설이냐라고 했을 때 인도 작가가 쓴 소설은 맞지만 인도 소설이라고는 역시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에 인도인의 풍습이나 주인공의 부모가 인도를 그리워 하는 건 보여지지만 작가는 역시 인도계 미국인인 것처럼, 지극히 미국풍이란 느낌을 내내 받았다.

미국 문학을 가리켜 '거리의 문학'이라고 누군가 말을 했는데, 역시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찌보면 뿌리가 없어뵈고 또 어찌보면 그것 자체가 뿌리인지도 모르겠다. 모험과 활동성은 그려지지만 깊은 성찰의 의미는 그리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

나는 가끔 미국의 허리우드 영화와 미국 문학이 같아 보인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 영화화된 작품을 굳이 소설로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든다. 결국 미국 소설은 참 영화적이란 생각이 든다.

미국 문학을 왜 거리의 문학이라고 했을까? 거리는 머물기 위해 나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가다보면 미로를 경험하기도 하겠지. 미국인의 인생 또한 그러하리라. 미국 그것도 중심부라고하는 뉴욕이 최첨단 문화의 메카라는 것은 굳이 뉴욕을 가 보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민족으로서 주류사회에 정착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자아 정체의 혼란을 겪는다.

현대 문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성(性)인데,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여러 사람과의 섹스를 하는 과정이 나온다. 심지어는 주인공 니킬의 아내 모슈미는 결혼해서도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서 결국 결혼이 파경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대 문학에서의 담론은 역시 자이 정체성의 혼란과 성인 것 같고,  이 작품 역시 그것을 굳이 비껴가지 않고 있다.  자아의 모호성이 성의 탐닉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란 소설 제목에서 나는 나름대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뭔가 이름에 그리 값하지 못하고 미진한 아쉬움이 남는 소설인 것 같다.

인도 작가가 썼다고 해서 그나름의 독특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미국적이었다고 한다면, 작가는 그다지 소설적 모험을 즐겨하지 않던가, 아니면 떠나 온 인도를 잊고 있는 건 아닌가란 의구심도 가져본다.

그리고 이 만한 작품에 뉴욕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소설이란 수식어가 나로선 그다지 탐탁지가 않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완독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선, '뉴요커들 별것 아니네' 이거나 내가 이런 풍의 소설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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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1-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축복받은 집 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미국과 인도의 경계에 들어있는 작가의 모습이었어요. 미국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열망도 보였지만, 이국땅에서 자신의 기원을 잃고 싶지 않은 이면이 아닐까 해요. 인도를 알리고 싶은 욕구도 있겠지요... 요즘엔 장편소설을 잘 읽지 않았어요. 나중에 읽어봐야겠네요. 추천합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04-11-0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못 쓴 글인데...고마워요. 사실 리뷰 쓰고 반응 없으면 좀 민망하더라구요. 그래도 플레져님이 이 리뷰를 빛나게 해 주셨네요.

이 책 전에 판다님한테 싸게 산 거예요. 알라딘엔 참 좋은 분들 많아요. 그죠?^^

icaru 2004-12-3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려고 검색했는데~~ 님의 훌륭한 리뷰가 있었네요~~!!

이 소설...인도판 '영원한 이방인'인가봐요.. 음~!

stella.K 2004-12-3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복순 언니, 이미 한참 전에 쓴 리뷰라 이젠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님 같은 분이 계셔서 반갑군요. 근데 그리 잘 쓴 리뷰도 아닌데...작품은 그만 그만한 것 같아요. 물론 님이 읽으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찻길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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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종종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또는 부모님으로부터 6. 25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였을까? 자츰 자라면서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나는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그때 생각이 났고, 그때 우린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바로 우리 앞세대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참 재밌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순수한 사람이야기였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우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공부했고 자라난 세대다. 그 이야기를 순수한 휴머니즘으로 듣기엔 그 배후에 반공 사상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그 빨갱이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남과북이 갈라졌고,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 처럼 고생하셨어."라는 격분이 그것이다.

그리고 몇십 년만에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느끼는 약간의 낮설고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막상 읽기를 시작했을 때 금방 6. 25 때 이야기를 즐겨 듣던 어릴 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일견 반갑기도 했다.

작가 홍성원.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 것 같은데 역시 잘 모르겠다. 그의 작품 이력으로보아 아마도 그는 전쟁문학을 쓰는 작가인가 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딘지 모르게 그것을 살짝 비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호를 비롯한 네 명의 소년 소녀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서 길에서 만나 살기위해 부산으로 가는 피난 대열에서 겪에 되는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모험담이라고 하지만 치열함과 스릴 보단 휴머니즘에 더 많은 비중을 싣고 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이 작품에서는 치열한 인간 대립의 갈등구조나 이데올로기의 대립 양상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냥 잘 만든 로드무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엔 반공 드리마나 전후영화가 심심찮게 제작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엔 다분히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었다. 만일  오늘 날에 어떤 감독이 6. 25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이 <기찻길>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리만치 이 이야기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작가는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문장은 유려하지만 선이 그다지 굵지는 않다. 그리고 다분히 여성 취향의 감상도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뭔가의 아쉬움이 남는 건 무엇 때문일까? 전쟁문학이 갖는 남성적인 다소 거친 듯한 자극적인 선 굵은 환상(?)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래도 이데올로기를 양념 격으로라도 말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일까?

아뭏든, 아마도 작가는 6. 25를 이만큼이나 유려한 문장으로 다룰 수 있는 마지막 작가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토록 사는데 바빠 6. 25의 이야기를 먼 과거에 듣던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은 옛날에 우리는 선생님께 6. 25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는데, 요즘에 아이들은 선생님께 무슨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며, 실제로 선생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졌다. 교사를 하는 몇몇 아는 지인들한테 물어 봐야겠다. 별로 대답은 신통치 않겠지만...

** 이 책은 전에 브리즈님 서재 이벤트 때 받은 선물이다. 아마도 그때 당첨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책이다. 서재 이벤트가 좋은 건 바로 이런 것 같다. 당첨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것.

다시한번 브리즈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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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0-1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리뷰로군요. 추천 한 방!

stella.K 2004-10-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역시 바람구두님 밖에 없어요!! 으흑~(감격)

브리즈 2004-10-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님에게 좋은 선물이 되길 바랐었는데, 조금 아쉬우셨나 봐요.
어쨌든 홍성원은 스텔라 님 이야기대로 "6.25를 유려하게 다룰 수 있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죠. 뒤늦게 리뷰를 봤네요. ^^; 추천하고 갑니다.

stella.K 2004-10-23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니어요. 나름대로 좋은 작품이었어요. 정말 브리즈님이 아니었다면 결코 몰랐을 작가였죠. 추천 고마워요.^^
 
창랑지수 1
옌쩐 지음, 박혜원 외 옮김 / 비봉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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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알게된 건, 우연한 기회에 모 일간지 북스팀의 기자가 쓴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였다. 그 기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오늘 날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실이나 중국 사람들의 현실이 너무도 닮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후안무치, 만만디의 나라 중국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단 말인가?

이 책은 주인공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고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가를 물흐르 듯한 문체로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정말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직내에서의 비리, 알력등. 그래서 어찌보면 제목에서 보여주듯, 무슨 무협지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으면 큰 오산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글(?)답게 호흡이 길다. 주인공 지대위가 어떻게 행동하고, 기지를 발휘해서 문제해결을 했다는 서술보단, 그가 무엇을 보고,생각하고, 깨닫는가에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읽는 이로하여금,과연 이렇게 3권으로까지 구성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약간은 지루하단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게 만든다.물론 중국 원본은 두껍게 한권이거나, 보통 두께의 두 권쯤이었는지도 모르지. 원래 번역 과정에서 두께가 들어나는 것이 보통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본 것은 중국인의 본래 모습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맹자와 공자의 나라. 우리나라만큼이나 역사가 오래고 깊은 나라에서 웬지 모르게 그 나라가 가지고 있을 법한 신비는 없고, 중국도 경제 동물의 우리에 갖혀 공룡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지금 중국의 경제적 비상은 세계 어느 나라도 못 따라가리만치 위협적이다. 하지만 왠지모를 불안과 불온함이 느껴진다. 옛날에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불안한 미국을 보는 것처럼, 지금은 중국이 저리 발전이 된다고 뻐기지만 그 영광이 과연 30년이나 갈까? 물론 그렇다고 그 나라를 웃습게 볼 것만도 아니다. 한나라의 숨겨진 저력이라는 것도 무시 못하는 법이니까.

소설은, 주인공 지대위를 통해 인간이 정말로 붙잡아야할 진실은 무엇이며, 모든 진실을 은폐하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인간군상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것에 동조하고 쫓아가는 주인공의 내면 또한 놓치지 않는다.

'창랑에 물 맑으면 내 갓끈 씻으면 되고 창랑에 물 흐리면 내 발 씻으면 되지'라는 뜻의 이 책은 후안무치의 중국인의 의식을 정말 잘 대변해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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