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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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의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10년 전이었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란 책을 읽고 정말 문학의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신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못지않은 감동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람과 자신의 장애에 관한 글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 B 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거라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람에 대해 쓰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 썼다. 특히 화가 고 김전선에 대해 쓴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든다.

 

이뿐인가? 저자는 언젠가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미국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영화 <슈퍼맨> 출연 이후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쳤고 전신마비 중중 장애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고 중인데 그것을 매스컴이 너무 크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 되었다. 그때 리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무척 언짢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슈퍼맨이라면 그래요, 전 슈퍼맨이지요. 그러나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의 슈퍼맨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지요.”

 

이렇게 말하던 크리스토퍼 리브도 고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학생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저자의 친구 김윤을 회상했고 그 친구 역시 고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글은 2001년도에 쓴 것으로 참 새삼스럽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진짜 슈퍼맨이 되기 위해서,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을 계속한다(147p)고 했다. 그렇게 말하던 저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저 글을 썼을 때만해도 저자는 꽤나 비장했던 것 같다. 장애자의 몸으로 대학 교수로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암 치료를 끝낸 직후였다. 그러니 얼마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랐을까.

 

또한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듯도 하지만 저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측은지심 내지는 이상한 눈초리로 많이 봤을 것이다. 사실 저자 보다 좀 뒷 세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살아생전 모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전에 자신이 거의 암 투병 환자로 많이 알려진 게 부담스러워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에 초점을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받았는데 심히 불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로 나왔기 때문이다.

 

천형 같은 삶이라니. 누가 함부로 천형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봐도 불쾌하다 못해 무례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한 삶은 비장애인의 특권이고 불행은 장애인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런 이상한 이중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소치다. 그러자 저자는 즉각 해명에 들어간다. 저자는 자신의 장애는 천형이 아니라 축복이라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힌다.

 

첫째로 자신은 인간이라며 짐승이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또한 주위에 늘 좋은 사람만 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나는 10살 때 갑자기 오른쪽 팔 다리에 마비가 와 한 학기를 쉬고 전학한 뒤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때 은근 걱정했던 게 내가 장애가 있다고 아이들이 나와 안 놀아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또한 덧붙여 얘기하자면 나도 싫은 사람 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수평적 이해관계만 있을 뿐 장애인이어서 소외돼 본적은 없다. 그리고 세상엔 나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못지않게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세 번째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서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박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금은 좀 주춤하긴 하지만)나는 대본을 쓴 덕에 배우와 뛰어난 자질을 가진 연출을 만나고 그들과 웃고 떠들며 공연을 했다. 그것은 지금도 나의 자부심이다. 솔직히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누구는 잘난 척 한다고 하겠지만. (반면 속 썩는 것도 많다.) 그리고 끝으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중에서).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는 천운을 설명했는데 4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50가지, 100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인간관계 훈련 프로그램을 주도한 적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의 자랑 50가지를 쓰는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처음에 “50가지나요?” 하며 한숨을 쉬지만 하다보면 정말 50가지 이상으로도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 이건 장영희 교수가 글 말미에 가르쳐 준 건데 나도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렸다. “책은 아무나 내는 줄 아나? 이렇게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있어 책을 낼 수 있고 간간히 날 알아보는 독자가 선생님 책을 읽고 힘을 업었어요. 말해주는(182p)” 아직 그 경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책을 냈다. 그러므로 나도 저자와 똑같이 말하고 싶다.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저자는 무한긍정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난 새해 벽두에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행운 같이 느껴진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2019년 새해가 밝았고 어느 덧 첫 달이 지나간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무사히 살아지기를 바라며 조금은 불안하게 새해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불안은 나이가 들어도 안 없어지는 것 같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꼭 징크스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 온 패턴을 보면 안 좋은 일은 홀 수년에 일어났다. 올해가 홀수 해이다. 그래서 올해는 조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다. 저자가 대학교 2학년 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이란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보면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저자는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라고. (, 이 얼마나 무한긍정인가!)

 

그도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살아보니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나쁜 일을 만날까 봐, 나쁜 일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조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저자처럼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평소, 뼈만 추스르면 산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암이 재발했고 또 어느 날엔가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죽기엔 아까운 나이였지만 그래도 조심하며 살지 않고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았으니 여한은 없지 않을까.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나 아버지 장왕록 박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 같다.

 

문득 천국은 어떤 곳일까를 생각해 본다. 저자는 천국에 있으니 벌써 오래 전에 목발과 다리보조기는 벗어던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여전히 목발을 짚고 저자의 표현대로 여전히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조차 아무런 이물 없이 사는 곳 아닐까?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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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토프 리브는 진짜 슈퍼맨으로 살았죠 ~승마중에 낙마해서...정말 위기 가운데 빛나는 인물입니다 장영희님의 글도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9-01-31 20:3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데 본인은 그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잖아요.
그냥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죠.

장영희님은 정말 글을 너무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존경스러워요. 조금 더 오래 사시지 않고...ㅠㅠ

서니데이 2019-01-3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서 인용해주신 잡지사의 인터뷰 제목은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방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표현이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부분에 쓰인 말이 부적절한 것처럼 보여서요.
장영희 교수님은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영문학자가 된 거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상대를 이렇게 힘든 사람일거야, 하는 표현이나 시선으로 보는 건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쓰신 글을 읽으면서 따뜻하고 좋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떠나시고 벌써 10년이나 지났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님 따뜻한 밤 되세요.^^

stella.K 2019-02-01 14:50   좋아요 1 | URL
저때는 저렇게 얘기해도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순수할 거라고 해서
순백의 영혼이니 그런 표현도 서슴치 않았거든요.
장애자나 비장애자나 똑같이 평범한 사람인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게 벽이 느껴지는 거죠.
비장애자란 말도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인데
이 말도 그닥 적절한 단어는 아니죠.
천형 보단 나은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장영희 교수는 정말 아까운 분이예요.
살아계셨다면 좋은 글 많이 쓰셨을 텐데...

syo 2019-01-3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숲을 거닐다> 같은 유명한 책조차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작가의 글은 도리어 손대기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카알벨루치 2019-01-31 22:23   좋아요 1 | URL
손만 갖다 대면 되는데...터치 터치 터치 ㅋㅋㅋ

stella.K 2019-02-01 14:41   좋아요 1 | URL
스요님 지금 읽는 책 중에 훗날 내가 이런 책에
손댔었단 말야? 하는 책도 상당수 있을 거예요.
스요님 안 읽은 책을 제가 읽어서 기분이 묘하게
좋긴한데 이분 책 언제고 읽어 보세요.
감동이고 피톤치드 그 자체입니다.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4:51   좋아요 1 | URL
피톤치드 오오오~

stella.K 2019-02-01 14:58   좋아요 0 | URL
카알님, 저 이름을 바꿀까봐요. 피톤치드로.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8:03   좋아요 1 | URL
그것도 개안은데 많은이들이 스텔라님 몰라볼까바 걱정이네유 ㅋㅋㅋㅋ

2019-01-31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2-01 14:44   좋아요 1 | URL
아유, 이거 제가 먼저 인사 드려야 하는 건데
매번 먼저 받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님도 명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새해 복도 마지막 찬스로 듬북 받으시구요.^^

cyrus 2019-02-0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 있을 때 장영희 님의 글을 처음 알았어요. 그때 읽은 장영희 님의 글은 메마른 제 마음을 촉촉이 적셔둔 단비와 같았어요. 군 복무 중에 부고 소식을 듣게 돼서 정말 마음속으로 많이 슬펐어요.

stella.K 2019-02-01 16:09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그만도 벌써 10년이야. 돌아가신지가.ㅠ

그런데 너와 내가 안 지도 그쯤 되지 않나?
너 제대 얼마 안 남기고 처음 알았던 것 같은데.ㅋ

카알벨루치 2019-02-0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차 스텔라님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연휴 보내시고 맛난거 많이 드시고 오소서~^^

stella.K 2019-02-02 13:3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카알님도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궁. 고맙습니다.^^

후애(厚愛) 2019-02-0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행복한 설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9-02-02 18:13   좋아요 0 | URL
아, 후애님, 고맙습니다.
후애님도 즐겁고 행복한 설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서니데이 2019-02-0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서재는 올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설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19-02-03 11:22   좋아요 1 | URL
ㅎㅎ 괜찮은가요? 가끔씩 변화를 줘야죠.
서니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얄라알라 2019-02-1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교수님의 마지막 작품과 장영희 선생님의 글....

특히 장영희 선생님께서는 요즘 세상에, 진정 대학에서도 제자를 만들고 아끼시는 보기 드문 교수셨는데....

stella.K 2019-02-14 19:40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정말 아까운 분이시죠.
책 정말 좋더군요.^^
 
영화기자의 글쓰기 수업 -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영화 글쓰기 특강
주성철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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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자가 현재 다니고 있는 주간 <씨네21>에서 기자의 일주일이 눈에 띈다.

월요일엔 기회회의를 갖고, 수요일엔 이틀 전 그 회의 때 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주 잡지에 들어갈 글과 인터뷰 등을 확정한다. 최종 마감이 수요일 자정이나 목요일 새벽쯤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요일 오전에 인터뷰를 해야 한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이것들과 별개로 시사회장에 가야한다.

 

가장 바쁜 날을 화요일과 수요일이란다. 특히 수요일을 너무 바빠 변변한 식사를 해 본적이 없단다. 수요일 밤의 야식과 회식은 당연히 폭식으로 이어지고 체중이 늘어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저자는 월간지에서 일할 때보다 주간지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한다.(저자는 지금은 폐간된 월간지 키노에서도 기자로 일했다). 왜냐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쉴 수 있으니까.

 

물론 기자가 한가한 직업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엄청 바빠 보인다. 내가 왜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냐면 그런 와중에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이런 책을 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내기위해 저자가 참고한 책도 여러 권이다. 스티븐 킹의 <글쓰기의 유혹>은 물론이고 조지 오웰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 유시민의 책 기타 등등. 뭐 글쓰기 강의나 관련된 책을 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들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을 저자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읽고 참고했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못해 은근 화가 난다. 난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공공의 적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왜 일까?

 

이 책, 영화 기자의 글쓰기 수업이라고 해놓고 글쓰기에 관한 얘기 보단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다. 6473 정도?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정보를 얻겠다고 이 책을 읽는다면 약간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글쓰기에 관한 책은 포화 상태로 많이 나와 있다. 이 책을 들 쳐 볼 정도라면 그 전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어느 정도 섭렵하지 않았을까? 요는 나는 저자가 글쓰기에 관한 것 보다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 기자로서의 마인드 뭐 이런 얘기를 들려줘서 오히려 더 좋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문득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왜 교과대로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그건 시작 때 쬐금 가르치고 시국이나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게 얼마나 재밌고 신선했던지. 나중에 졸업하거나 수료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교수나 강사를 떠올리면 교과 매뉴얼대로 열심히 가르친 분 보단 열라 비판하고 까는 교수나 강사가 더 많이 생각난다. 말하자면 이 책에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불온서적 같은 걸로 오인하면 안 된다. 그냥 난 시크하고 건조한 저자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려했을 뿐이다.

 

사실 책 전반에 어떤 묘한 기류가 있는데 (그게 저자만의 것인지 영화 기자들 대부분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기자와 달리 시쳇말로 어떤 쌈마이 정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영화 기자는 영화계에선 일개 기자로 보고, 저널리스트 쪽에선 영화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90년 대 스크린 쿼터 때 영화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영화인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저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걸 읽는데 왜 그렇게 코웃음이 나던지. 그 위기의 순간에도 사람 차별을 하다니. 우리나라 영화계가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거나 덜 차렸구나 싶다.) 그러니 영화 기자가 된다는 게 보통의 정신이나 명예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 평은 영화 평론가가나 관객이 하는 것이고, 영화를 보게끔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건 영화 마케터가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기자는 이 둘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한때 우리나라 영화 잡지가 부흥기를 맞이하는가 싶더니 지난 2000년 대 들어서 굵직한 잡지들이 잇달아 폐간됐다. 저자만 해도 <키노>를 시작으로 <필름 2.0>을 거쳐 지금의 <씨네21>에 안착했지만, 그가 거쳐 온 잡지마다 폐간을 했다. 이제 <씨네21>만 폐간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지만 참 쓸쓸한 말이다. 그럼에도 그대 정녕 그 길을 가려는가?’ 식으로 영화 기자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나 역시도 뒤늦게 기자가 되겠다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게 저자를 더 쓸쓸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 처음에 영화 기자의 하루에 대해 썼지만 난 워낙에 저질체력이라 벌써 거기에서부터 결격사유다. 단지 난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영화의 감상기를 적곤 했는데 글에 정답이 어디 있냐며 잡글로 썼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도 뭔가 모르게 헛헛한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화 글을 잘 써 볼까 이런 생각에서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저자의 책을 읽을 자격이 조차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사가 최전선에서 총칼 들고 싸우고 있는데 무지몽매한 민초가 배 두들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차라리 영화 에세이 쓰는 법. 뭐 이런 책이었다면 더 떳떳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기자질을 하든, 에세이를 쓰든 나는 저자의 기준으로 보자면 영화 보는 자세조차 제대로 갖추질 못했다. 올 한해 내가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 건 거의 전무했던 것 같고 그만큼 영화를 VOD로 집에서 봤다는 것인데 저자는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다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난 그 알량한 집에서 보는 영화조차도 한 쾌에 본 적이 거의 없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몇 번에 걸쳐 이어보기로 본게 다수다. 그것도 밤에 불 끄고 누워서. 그 다음은 어떨지...

 

또한 영화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보라고 하는데 그것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영화를 본다. 물론 감독이 누구며, 누가 나오고, 장르 정도는 알고 보긴 하는데 이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야말로 나는 뭐하겠다고 영화를 보는지 모르겠다.ㅠㅠ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앞으로도 내가 영화를 계속 즐길 마음이 있다면 보는 자세만이라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말대로 하려다가 아예 영화 볼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래도 이 책 너무 좋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영화 <영웅본색>에 나온 주윤발이 생각난다(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는 확인하여 보라). 자신만의 단어가 있는 것도 멋지고. 무엇보다 저자가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영화 <넘버3>의 송강호의 대사처럼 배신이다. 배신.

언제고 저자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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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2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평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영화평보다는 영화를 분석하면서 까는 영화평을 쓰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해 영화평을 쓰는 일이 어려웠어요. 인상 깊은 영화 장면이 1도 생각나지 않거든요. ^^;;

stella.K 2018-12-20 18:34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런 말을 하긴 해.
영화에 대해 쓰려거든 장면이나 대사, 인물에 대해
쓰라고.
생각해 봤더니 나도 그렇게 쓴게 별로 없어.
느낌을 주로 많이 썼던 것 같아.
하지만 뭐든 다 관심이지.
잘 보고 쓰면 쓸 수 있을 거야.^^

얄라알라 2019-01-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보고 바로 주문했어요^^

stella.K 2019-01-07 14:35   좋아요 0 | URL
앗, 북사랑님도 영화 글 관심 많으신가 봐요.
이 책 좋아요. 고맙습니다.^^
 
시와 살다 - 이생진 구순 특별 서문집
이생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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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유독 시를 홀대했다. 사춘기 때 문학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그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춘기가 영원하지 않듯 시도 사춘기가 떠날 때 같이 떠나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알만한 소설가들도 그 시작은 시였다가 소설로 전향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역시 시는 인생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인가 보다고 멋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시인이 그런 시구도 읊지 않았던가, 시 한 편이 300원이라고. 하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다시 생기는 것도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최근 내가 시인에 관한 책을 읽은 것만 해도 몇 권은 된다. 이 책도 어떤 면에선 시인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구순이 넘었는데 평생 시를 써 왔고 그때마다 썼던 서문을 모은 책이다. 얼마나 열심히 시를 썼으면 서문만을 모아 책을 냈을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의 저 시에 대한 하찮다는 생각이 부끄러웠다.

 

시인은 시집만 38, 산문과 편저가 5, 공저를 5권 냈다. 그는 최근에도 시집을 냈다. 시인도 이렇게 자신이 써온 서문만으로 책을 내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이라 그럴까? 아니면 살아 온 연륜 때문일까? 서문들인데도 아폴리즘 같으면서도 상당히 서정적이다. 글이 너무 좋아선지 아니면 시인의 구순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 순간 계속 밑줄을 긋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는 워낙에 많은 서문을 써 온 터라 한 권의 자서전을 보는 것 같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 보단 왠지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에 대해 여기저기에 조금씩 흘려 놓은 것도 같다.

 

시인은 먼저 첫 시집 <산토끼> 서문에서,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지 시는 아니라고 했다. 사람 때문에 시를 희생할 수는 있어도 시 때문에 사람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없고 시만 있는 고독은 시와 함께 그 고독도 싫고, 그 고독도 시도 사람이 있는 고독이고 사람이 있는 시여야만 한다며 철학을 밝힌다. 과연 그렇다 싶다. 그 글이 아무리 명문이라 한들 사람 보다 앞서지 않는다. 읽어 줄 사람 있고 글이 있는 거지 글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글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볼 때 저자의 말은 새겨 둘만 하다.

 

<자기>라는 일곱 번째 시집 후기에선 이렇게 썼다. 살수록 허해지는 시간에 나의 시를 쓰며 남의 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읽는 일은 시에게서 버림받지 않으려는 일이다. 시에게서 버림받는 일 그 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니. 나에게서 시를 빼앗는 일 그 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겠니.

시야, 너는 참 고맙다. 너는 하늘이 만들어준 내 인생의 날개다. 너는 내 어머니가 만들어준 영원한 양식(37p)이라고 했다. 부지런히 쓰기 위해선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 것은 시도 예외는 아니다.

 

문득 이 구절을 읽는데 마음이 싸해지더라. 나는 내가 시를 버린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시가 나를 버린 거다. 지금이라도 끊임없이 찬미해 주고 사랑해 주면 시도 나를 사랑해 줄까? 하지만 그것이 어디 시만이랴.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내 인생의 날개며, 영원한 양식이라며 찬사를 보내줘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시인은 사랑꾼이다.

시인은 평생을 두고 사랑에 열중하며, 시에 있어서 사랑은 너무나도 크고 아름답고 했다(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시인의 사랑서문에서). 그러면서 <일요일에 아름다운 여자> 후기에선, 시인은 편한 길만 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길도 다녀 봐야 시에 탄력이 생긴다고 했다. 시는 재사(才思)의 기술로서가 아니라 숙명적으로 떠돌며 얻어지는 마음의 도록(圖錄)이라고 했다.

 

또한 시인은 자연과 하나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사람이지만

악착같이 시를 써서

곤충이 될 거다

풀밭에서 찌르르 우는

곤충이 될 거다

                                         -‘곤충기에서

...... 나를 확대하다 보면 어디서나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이 세상엔 내가 없다는 경지까지 축소해보자. 그때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곤충은 정말 희귀한 생존인 것이다(<개미와 베짱이>후기 61p).

 

유서를 쓰듯 쓴 시. 며칠을 살자고 울다가 떠난 매미처럼 벗어놓은 껍질이 이 시집이다. 그 껍질을 들고 매미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도 이 시집에 포함된 한 편의 시(하늘에 있는 섬 서문)라고 했다. 시란 이렇게 하찮은 것에 마음을 두고, 끊임없이 무위자연해지지 않으면 써 질 수 없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은 어때야 할까?

도시의 높은 빌딩에서 악수를 하고 나오는 젊은 비즈니스맨도 알고 보면 불청객이고 외딴섬 풀밭에 앉아 땀을 씻는 불청객이다. ......집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낯설다. 그런 낮으로 호박꽃을 본다. “호박꽃도 꽃이냐얼마나 섭섭한 말인가. 그래도 오늘 아침 호박꽃은 명랑하다. 외로운 데서 얻은 아름다움. 나는 그것으로 시를 썼다. 시집<섬마다 그리움이> 후기에 나오는 말이다.

... 남들은 모른다. 시심을 먹고사는 시인의 마음을 모른다. 조금은 가난하게 조금은 외롭게 조금은 춥게 살아야 시심이 생기는 시인의 마음을 모른다(‘거문도후기)고 했다. 이 외로움이 아니면 하찮아 그냥 지나쳐 버릴 것도 다시보고 새롭게 보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시심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인가?

서른여섯 번째 시집 <섬 사람들>에서, 정월 초하루 00, 보신각종이 울리는 순간 어린 학생처럼 일기장을 꺼내 무엇인가 쓰고 싶다. 앞으로 365, 이 많은 시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를 쓰겠다는 다짐. ...... 시 때문에 내가 살아나는 것이다. 시는 생존의 기록, 나를 만나게 하는 기록, 그것이 시를 쓰는 재미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했다. 삶의 질곡까지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시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살아보고 이런 말을 남긴다.

나이 90이 되니 알 것 같다

살아서 행복하다는 것과

살아서 고맙다는 것을

그리고 보니 이제 철이 드나보다

이런 결말에 결론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기엔 조건이 있다

첫째 건강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90이 되어도 제 밥그릇은 제 손으로 챙겨야 한다는 것과

셋째 밥 먹듯이 시를 써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제정신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

......

그 사람이 시를 쓰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리라 믿지만 그렇게 살라는 강요는 아니다 시인은 언제나 부족한 자리에서 만족해왔으니까(‘무연고서문에서)

나는 애초에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과연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외로움과 고독을 발견했고 그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며 시를 썼겠구나 싶다. 그리고 저 문장을 만났을 때 뭔가 쓸쓸하지만 꽉 차 있고, 꽉 차 있지만 쓸쓸했다. 과연 뭔가에 뜻을 품은 사람은 저래야겠구나 싶다.

 

스물다섯이 되면 어떻게 사나 싶은 때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너무 나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중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이 자신은 빨리 늙고 싶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나 보다 3살 위였을 뿐이다. 생각해 봤더니 그때 내가 정말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나이든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스물다섯 그 나이 보다 훨씬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건, 젊었을 때는 중년을 감히 가늠하지 못했다. 젊음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이든 나를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덧 중년이 되고 보니 노년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적인 노년의 삶을 보는 것도 같다. 노년은 인생의 저주가 아니다. 노년을 감사하게 살면 그건 오히려 선물이다. 시를 사랑해야지, 시인처럼 살아야지 싶다. 고독을 응시하며 순간순간 치밀어 오를지도 모르는 노욕을 지그시 누르며 시인처럼 늙어야지 한다 

 

덧붙이자면, 시인이 처음 시집을 내기 시작한 건 1955년부터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어도 우리가 시인의 책을 접할 수 있는 건 반도 채되지 않는다. 이 기회에 절판된 책들이 다시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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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2-1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작의 수를 보니 대단한 분이시군요.

˝나이 90이 되니 알 것 같다
살아서 행복하다는 것과
살아서 고맙다는 것을˝ - 저는 몸 건강하고 돈 걱정 없고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90까지는 안 됐지만 연로한 친정어머니를 보며 살아서 그런지 아직 몸 쌩쌩한 게 감사히 생각되더라고요. 산책하면서도 느낍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제가 너무 늙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당~~ㅋ

stella.K 2018-12-15 14:42   좋아요 0 | URL
언니는 늘 긍정 갑이시잖아요.ㅎㅎ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 보다 조금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2018-12-14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5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8-12-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stella.K 2018-12-15 14:48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님도 행복한 주말되시길...^^

청계 2018-12-22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대로입니다.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이 책이 발매되기 전 티저북을 읽었다. 가끔 출판사에선 홍보용으로 티저북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그 책의 매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을 사 보기 전에 맛보기용으로는 꽤 괜찮은 방법 같다.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든다. 얼핏 보면 미국이나 영국스럽긴 하다만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작가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먼나라 이웃나라로선 그게 그것 아닌가?ㅋ

 

단편 모음집이고 표제작이 그러한지라 받은 티저북도 동일한 제목의 작품인 줄 알았더니 수록된 작품중 '자식들은 안 보내'이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 읽었다. 잘쓴 작품이긴 한데 단편이라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으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처음 접해 보는 것 같다.(노벨 문학상 작품은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앨리스 먼로는 문체가 좋다기 보단 묘사가 좋은 작가는 아닐까 싶다. 

 

문체가 좋았다면 기억하고 싶고, 밑줄치고 싶은 문장이 있었을텐데 딱히 그런 건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해를 돕고자 친 문장이 간혹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대가스럽긴 하다.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풍경 묘사나 상황,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꽉찬 느낌이고,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내용도 흔히 겪을 수 있는 결혼한 사람들의 부조리한 면들을 그럴싸하게 다뤘다. 송곳같이 날카롭고 비판적으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작가의 노련한 글 솜씨는 이렇다할 갈등이나 사건없이 어느새 주인공 폴린을 이혼녀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이혼녀라는 것도 상대적 개념 아닌가? 돌싱 또는 독신녀라고 표현해야 적절한 표현은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폴린은 결혼 생활을 하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잠시 동거를 했지만 맨끝에 보면 그와도 헤어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혼한 전 남편은 폴린에게 얘들이 아니라 자식들은 안 보낸다고 단호히 말한다. 즉 아이들은 전 아내 폴린에게 보내지 않겠다는 거다. 폴린은 이것에 대해 판자로 세게 얻어 맞은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이혼했다는 것을 가장 뼈져리게 느끼는 게 바로 이 지점은 아닐까 싶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작가가 보수적인 경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서양 사람들이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이거야 말로 조금은 놀라운 표현은 아닌가 싶다. 이혼한 사람이라면 자녀 양육을 누가 맡던지간에 자식을 맡지 않은 전 배우자에게 일정 기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고, 그것에 쿨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혼이 하도 잦은 사회라 이혼하고도 전 배우자와 친구처럼 잘 지낸다는 말도 들었는데 역시 사람 마음은 동서양이 똑같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냥 친구처럼 잘 지내려고 할 뿐 한때 같이 산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오히려 쿨한 쪽은 폴린의 두 아이다. 옛날 같으면 자신들을 포기한 엄마에 대해 분노를 가질 법도 한데 엄마는 그저 엄마의 인생을 선택했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 들이고 있지 않는가? 물론 거기엔 어떠한 비난도 없지만 대신 사랑이나 끈끈한 유대 관계는 없다. 그게 아쉬운 요소긴 한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떠한 선택에 결과고 감수해야할 부분이지. 

 

이혼한 가정의 쿨한 풍경은 바로 이런 것일게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받아 들일 건 받아들이고, 봉합할 건 봉합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래도 작가가 보수적이건, 서양 사회가 의외로 보수적인데가 있건 간에 이왕 보수적인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면 그래도 이혼만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다. 이혼해서 홀로 남겨진 삶도 별로 행복해 보이진 않으니까. 물론 행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불행을 막기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결혼 생활을 하다 잠시 외도할 수 있는 건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책임이 남자쪽에 있던, 여자쪽에 있던 말이다. 왜 남자는 외도를 해도 되고, 여자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기에 딜레마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차이 때문에 여자가 외도를 하면 아예 이혼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작가의 글은 섬세하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땐 다소 지루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다시 읽게되면 정말 많은 것들은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언제고 작가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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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5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5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조폭 - 시인은 왜 조폭이 되었나?
김율도 지음 / 율도국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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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오랫동안 읽어 온 사람으로서 책을 보는 안목이 나름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준이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항상 적중하는 건 아니다내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는 책의 장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것이 그 책의 선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쯤 모르는 출판사가 있을까그런데도 이것에 위배되는 조악한 책들이 나온다.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더라도 가끔은 나의 이런 기준을 빗나가 주는 책이 있기를 은연중 바래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라고 항상 내 생각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열 중 한 둘은 틀려줘야 겸손할 수도 있고, 또 그런 책이 정말로 있어 준다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의 기를 좀 살려주고, “이 책 보기엔 이래봬도 내용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대신 외쳐주는 의기를 부려보고 싶었다이 책이 그런 책이길 나는 바라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인터넷상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판단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저런 책이 실제로 보면 의외로 만듦새가 좋을 수 있고, 설혹 만듦새가 후져도 내용까지 나쁠 거라고 속단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게 이 책에 후한 점수부터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어느 시인의 뜨거웠던 삶에 관한 자서전 내지는 고백록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사춘기 이후로 시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시인의 자서전 아닌가? 난 본래 그런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단은 읽어 보자 했다. 제목도 다소 엉뚱하지만 이 둘을 함께 놓은 저자의 뜻을 알고 싶기도 했고, (난 그런 장르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우리가 갱스터 무비를 보는 건 갱스터가 갱스터이기만 하면 재미없을 것이다의외의 모습이나 그들의 똥폼 잡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것처럼 조폭이 시인이라면 그것도 멋있어 보이긴 한다. 물론 이 책의 경우 조폭이 먼저가 아니라 시인이 먼저지만

 

저자도 서문에 그렇게 썼지만, 시인과 조폭의 공통점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솔직히 난 이 책에 매료되기도 했는데, 시를 처음 접한 이후 시를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아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시를 신앙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마치 시가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해 보인다. 그야말로 시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전폐했다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내가 시인은 정말 이렇게 살까?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가진 의문이기도 했다. 저자는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모조리 외우고, 뭔가에 빙의되듯 떠오르는 시구를 받아 적는다. , 시인은 정녕 이렇게 해서 되는 걸까? 살짝 부럽기도 했다.  

 

조폭이 됐던 것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아니다. 지면상 그냥 운명이라고 해 두자. 내가 볼 때 시인과 조폭이 같다기 보단 그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있어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인 것 같다자신의 선택이 뭐든 지간에 갈등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운명이 그러하다면 결코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또한 조폭이긴 하지만 윤락녀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있어 성매매 금지법에 관해서도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자신의 애송시를 이자 암송 시 몇 구절을 삽입해 문장의 격을 높였다. 읽고 있노라면 영화를 보는 것도 같고, 누구든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할 것만 같다그만큼 인물 묘사가 강렬하다

 

난 이게 저자의 자전 소설에 가까운 에세이라고 생각하는데(장르가 명확하지 않다), 시를 써 와서일까? 300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명징하게 담아내다니 과연 이야기 솜씨가 일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에 가면 뭐 하나가 딱 걸린다. 그것은 작가가 몸소 겪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단면을 얘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리나라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저격당한 사건의 내용이었다. ? 그런 일이 있었어의아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해 이건 저자 자신의 이야기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읽었기 때문이다.

 

오죽 의아스러우면 저자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 실화냐고. 무슨 근거를 가지고 이렇게 쓰는 거냐, 독자를 희롱하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내용은 무슨 쌍팔년도 느와르를 연상시킨다. 뭐 그것까지는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가 저격을 당했다는 것은 도저히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거야 말로 허위 사실 유포 아닌가?

 

그러다 문득 서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아 맞추면서 읽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저자가 치는 뻥에 나는 넘어간 셈이고, 자신은 그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도 읽혀지는데, 허탈하다기 보단 왜 끝까지 사실과 진실을 견지하지 못했던 걸까 불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서문 첫 문장은 이제 때가 됐다며 30년 동안 묵혀왔던 이야기를 한다는 비장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란 문장에서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 책을 한국소설이라고 분류했는데, 이건 소설의 형식을 완전히 갖춘 것도 아니다. 물론 자전 소설이라고 우긴다면 그래 좋다. 그렇게 봐주자.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저자도 글 깨나 쓰는 사람 같은데 글은 정직해야 한다는 것쯤 배우고 들어갔을 것 아닌가? 어디서 진실과 허구란 말장난으로  독자를 후려칠 생각부터 하는지 지금까지 써 온 글이 아깝지도 않은가 거기에 상상력의 극대화 뭐 이런 말로 자신의 글을 정당화라도 하고 싶은가 싶다. 

 

이왕 말이 나와서 말인데, 최근 우리나라 작가들 글을 쓴답시고, 소설인지 수필인지 모를 글들을 양산하고 있다. 처음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쓰는 글에 번지수도 확실히 정하지 못하면서 무슨 탈장르를 선언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고, 뭐 그것도 작가의 표현의 자유라고 치자. 적어도 자신이 쓰는 글에 진실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이 책 읽은 지 며칠 됐는데 감동 보다는 아직도 뭔가 속았다는 느낌에 불쾌한 느낌이 쉬 떨쳐지지 않는다. 허구를 얘기하고도 마지막 한 문장이 그것을 상쇄시키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내내 진실을 얘기하다가도 한 가지 뻔한 거짓말이 책을 망쳐놓은 경우가 있다. 이 책은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책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앞서 얘기한 독자로서의 의기. 즉 다소 보기엔 이래봬도 내용은 정말 좋은 책이라는 의기를 부려보고 싶은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라며 혀마저 끌끌 차게 만든다. 어떻기에 그렇게까지 말하느냐고? 처음 받아든 순간 쌍팔년도 무슨 중고등 학교 교지를 연상케 한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인 관계로 요즘 교지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독자로서 이런 책을 읽었단 말이다. 소설적 허구란 게 그런 게 아닌데 저자가 과연 이걸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안 그랬다면 다음 판에선 좀 나은 옷을 입고 나오지 않을까? 요즘 인터넷 서점마다 리커버가 유행이던데잘하면 리커버로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저자는 어쩌자고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렸던 걸까? 그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하듯, 우리나라 책도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또 모르지. 괜찮은 표지로 나왔더라면 나의 이 마음도 다소는 이성을 유지했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지면을 통해 모든 출판사에 말하고 싶다. 표지에 신경 써라. 책이 되어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마라. 독자에게 욕을 들어도 싼 책은 아예 제작부터 하지 마라. 표지가 후진 책은 누구에게 권하지도 못한다. 독자는 그런 마음이 있다. 내가 읽는 책이 누군가의 눈에 띄었으면. 그래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뭔데 라고 질문 받고 싶어 한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마지막까지 진실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래도 괜찮겠지 하는 호기가 결국 30년 인생 이야기를 스스로 깎아 먹은 건 아닌지안타까운 마음에 쓴 소리 좀 했다. 불쾌했다면 용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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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11-26 18:06   좋아요 1 | URL
에이, 좋은 게 좋은 거려니 하면 안 되죠.
물론 제가 너무 잘 봤다가 실망해서 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건 장편소설도 아니라니까요.
문제는 문제라고 꼭 집어야 해요.
작품은 독자가 완성한다 잖아요.
안타깝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