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호스피스 의사가 먼저 떠난 이들에게 받은 인생 수업
김여환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책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는가?

 

언제 였을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 온 건.

올초였던 것 같기도 하다. 작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인연이 아닌 듯도하여 넘겨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지, 기어이 내 이름으로 배달이 됐다. 그래서 인연인가 싶어 읽으려 했지만 결국 또 읽지 못했다. 다른 책에 밀려서이기도 했지만, 그땐 내가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그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증상이라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병원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혹시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별 궁리를 다하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니 읽을 수도 없었다.

사실 난 그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나의 죽음을 가족들, 특별히 엄마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고, 엄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우스운 건, 그 무렵 동생이 내 방에 있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디지털로 바꿔줬다. 나야 진작에 IP TV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 TV에 대한 욕심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물론 바꾸면 좋았겠지.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좋았다. 그런데 돈 쓰기 좋아하는 동생이 자기 TV를 바꾸면서 누나 방의 TV를 바꿔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 마치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 보고 나오는 사람처럼 내 방의 TV를 바꿔서 시원하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 생각지도 않은 디지털 TV가 생겨서 좋긴 했지만, 내가 과연 이 TV를 몇 번이나 보고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뭔가 모를 연민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책이 눈에 들어왔겠는가? 이 책은 호스피스에 관한 책으로써, 아직 건강한 사람이 임종을 맞이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뭐 대충 그런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렇게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의외로 죽지 않고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살고 있고 있었다. 독일 격언에,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 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더니 죽음이 나를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내 몸이 겪고 있었던 것은 뭘까? 살면서 다른 가족들은 끄덕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데, 나만 두어번 가족을 놀래키며 병원 신세를 졌던 경력이 있었기에 이번에야말로 그냥 안 넘어 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봄이 돼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건 그냥 갱년기 증상 같은 걸꺼예요."라고해서 얼마나 허무하던지. 그랬다. 그때 내 몸이 안 좋았던 건 갱년기 증상의 해프닝 같은 거였다. 

그렇게 나는 차츰 나아갈 무렵, 오빠가 생각지도 않게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약도 없을 거라던 나의 증상은, 암 선고를 받은 후 오빠의 약을 사러 동네 약국을 뒤지다시피해서 겨우 구입한 그 약국에서(그 약은 일반 약국에선 잘 안 팔고 대학병원 근처의 약국에서나 파는 것이었다) 그냥 기대하지 않고 증상을 말하다 마침 맞는 약이 있는 것을 알고 사 먹고 나았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동안 나는 왜 내 죽음의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우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고, 가슴을 쓸어내릴 사이도 없었다. 당장 그리도 건강했던 오빠가 죽게 생겼는데 그깟 몸이 좋아졌다고 좋아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오빠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맞바꾼 것처럼도 느껴졌다. 하긴, 그런 생각은 누구든지 한다. 특히 나의 엄마는 오빠의 암 선고를 받은 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입버릇처럼,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 건데 왜 먼저 갔느냐"며 깊은 한숨을 쉬곤하니까. 물론 이건 엄마에겐 하나도 나을 것이 없지만, 나는 오빠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내가 대신 아팠으면 했다.

그렇게도 건강한 오빠가 이렇게 빨리 허물어져 갈거라곤 생각도 못햇다. 올해 막 새해가 밝았을 때 제손으로 달력을 바꿔 달면서 올해가 자기 생의 마지막 해가 될 거라고 오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 사는 게 참 만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재미없는 불행한 만화 말이다. 그러던 중에도 난 이 책을 어떻게든 읽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내 이 책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가 죽어 간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도 기적적으로 낫지 않을까란 기대가 없지 않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차마 죽음을 놓고 기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만도 아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린 그저 살리는 의무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책을 읽을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읽으면 슬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책의 앞부분을 보면,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과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면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두려워하며 죽는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 처음엔 분노하고,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중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된 죽음을 맞이 한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것을 읽고 맞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오빠가 암 선고를 받기 전에 읽었기 때문에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오빠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충격인데 본인은 얼마나 충격이 될까? 그렇지 않아도 별거 아니려니, 아니 별거 아니길 바라면서 여러 검사를 거치는 동안 오빠의 얼굴엔 근심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런 얼굴에 대고, 전이된 췌장암 말기며, 짧으면 6개월이고, 길면 1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빠가 평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상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애틋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오빠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오빠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은 아닐까?     

그때 오빠에게 암 선고를 했던 의사는, 가족이 환자에게 직접 말하기가 어려울테니 자기가 얘기하겠노라고 해서 다소 안심했고,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그 의사와 환자간에 병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 의사는 환자인 오빠에게 대충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가 암에 걸리면 의사는 가족들을 따로 불러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준다. 이때 의사들은 가족들에게 어줍찮은 기대를 갖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좋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해 냉정하게 얘기하는 거지만, 듣고 있으면 사람 고치는 의사라면서 어쩌면 저렇게 인정머리 없이 얘기를 할까 야속하기도 하고 저승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족은 뭔가 희망의 끈을 잡고 싶어 의사에게 유도질문을 한다. 그러면 의사도 사람이니 한 마디 정도는 진심은 아니지만 완곡하면서도 위로삼아 희망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1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기적을 얘기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가족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희망 또한 상대적으로 크고,  깊게 갖는 것이다. 가족도 이럴진대 환자는 어떻겠는가?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걸 안 건, 오빠가 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작은 엄마가 문병을 오셨을 때 알았다. 대화하다 오빠는, 자신은 암이 아니며 암의 전단계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린 정말 가슴이 무너졌고, 그 의사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우리에겐 대신 말해 주겠다고 말해 놓고, 오빠는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인가가? 물론 그 의사는 오빠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거라고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실을 다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그때가 되면 더 화나지 않을까? 너무 늦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오빠는 기운이 없어 화를 낼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를 노렸던 걸까? 이 부분에서 신뢰할 수 없다면 환자는 죽는 것도 억울한데 우롱 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물론 그 의사도 완곡한 표현을 쓴다는 게 그런 결과를 낳은 거겠지만, 확실히 그 점은 환자나 보호자나 정말 유감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말했던대로 이젠 대학 의학 교육에도 의사가 환자에게 이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 들이는 5단계를 말했다. 즉 부정의 단계에서 분노의 단계로, 타협에서 우울로 그리고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은 어떠할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임산부가 죽을 것 같은 고통속에 아이를 낳고도 또 다시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이 죽음을 목도한 사람도 그러지 싶다. 22년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은 나는 그 당시는 세상이 꺼질 듯한 슬픔 속에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고나니 그도 덤덤해 졌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는 계신 듯, 안 계신 듯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리다 최근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새삼 나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번은 죽음을 목도했고, 사별의 슬픔을 겪어 봤으니 이번엔 덜 슬프고,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마치 처음 사별을 당하는 것처럼. 그러니 노인들은 어떠할까? 그만큼 사람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기도 했겠지만, 사별을 경험하고 살았을 것이다. 사별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참 못 견딜 일이다 싶다. 그래도 생은 늘 삶의 편이었기에 그런 회로와 구조를 가졌기에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망각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려 명을 재촉할 것이다. 

 

부정의 단계를 경험하는 건 죽어가는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다. 의사는 이미 오빠가 곧 죽을 것을 예견했지만, 우리는 부정했다. 그것은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한 것도 같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삶도 성숙해야하듯,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은 환자가 건강했을 때 신앙과 먼 삶을 살았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음을 갖게하기 위한 거라면 더 더욱 그럴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삶이 성숙하고, 신앙도 성숙하다면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불로장생만이 인간의 복인 양 사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게 된다. 환자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줘야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는 언젠가 병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물어었다. "내가 살겠냐?"고. 건강했던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밀려왔을 것이다. 그런 오빠에게 내가 뭐라 말해 줄 수 있었을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 병을 대하는 환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때는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이기 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였을 때는 "오빠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죽어도 천국이야.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라고 말해 주었다. 오빠는 그 순간만큼은 눈을 밝게 빛냈던 것 같다. 나는 그 눈빛이 말하는 걸 안다. 그건 오빠가 신앙의 힘으로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죽어도 천국에 있을 거란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땐 이미 오빠가 통증으로 육체의 힘을 다 쓰고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협 또한 죽어가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도 똑같은 단계를 거친다. 특히 자신이 믿는 신께. 차라리 날 데려가시라고, 또는 주께서 명하시는 일 무엇이든 하겠으니 그를 낫게 해 달라고. 타협도 하고, 간청도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속에 고난이 언제 끝이날까를 교차 반복하면서 환자와 함께 간다.

사실 엄마는 오빠의 임종을 보지 않았다. 오빠가 숨이 끊어지기 하루내지 이틀을 앞두고 엄마는 많이 힘들어 했다. 하지만 임종 당일 날 엄마는 의외로 침착했고, 담담했다. 그전까지는 불안과 슬픔속에 있었지만, 그날의 당신의 기도는 차분했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순명의 기도를 했다. 그 기도 소리를 듣는 나의 마음은 더 없이 슬펐지만, 그날 저녁 난 내 동생이 전해 준 오빠의 임종 소식을 엄마에게 한결 편하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전했던 오빠의 임종 소식에 엄마는 울었지만, 생각 보다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엄마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단계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죽음을 수용하지만, 살아 있는 가족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단계를 너무 도식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어느만큼은 타당성이 있기에 우린 이렇게 해서라도 죽음을 객관화 시켜보는 것이다. 물론 오빠는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죽어갔지만, 난 오빠가 평소의 성격답게 의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받아 들였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저자가 책에도 다뤘지만, 몇 해 전까지만해도 행복 전도사를 자처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너무도 커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고통이 끔찍해 스스로 죽음으로 피해버리는 사람이 한 해에도 엄청난 숫자를 헤아린다.

실제로 난 이 이야기를 듣고 혹시 오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오빠의 방에서 발견한 맥가이버 칼과 제도용 칼을 손이 안 닫는 곳으로 치워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오빠는 죽을 때 죽더라도 살기 최선을 다 했고, 종국엔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 들였다. 난 그것이 고맙다 못해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다ㅋ).

그리고 우리 역시 죽음을 꼭 불행한 것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연장시키는 삶은 또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그쯤해서 그의 생명을 거둬가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했다. 

물론 나의 오빠가 아직도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에 죽은 것은 너무도 아쉽지만, 오빠는 죽을 때 세상에 미련 같은 건 남겨놓지 않았으니 깨끗한 죽음이었다. 나는 이 점도 오빠에게 감사한다. 저자는, "해탈은 힘든 삶을 의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비롯된다고,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흔적도 없이 우리를 삼킬 때까지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말고 그저 살아야 한다(140p)"

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에게 남의 삶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얘기하는 불완전하다. 오히려 죽음의 견지에서 얘기해야 맞는 것 같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하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것이 한 둘인가? 탁아 시설도 부족하고, 노인 요양 시설도 부족하며, 미혼모 보호 시설도 부족하고, 청소년 보호 시설도 부족하다. 거기에 하다 더 생각해 봐야할 것은 호스피스 시설을 갖춘 병원이나 그것을 전담하는 병원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해서 새삼 놀랐던 건, 오빠가 입원한 병원은 우리나라 굴지의 종합대학 병원이다. 하지만 따로 호스피스 병동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초기엔 오빠가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이 짧았지만, 점점 말기로 갈수록 오빠는 퇴원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렇다고 마냥 병원에 있을수만은 없어서 요양병원을 알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병원측에서도 필요하면 연계된 요양병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동생이 발품 팔아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설이 형편없는 노인 요양 병원이거나,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쌌다.  

그러던 중 형부를 통해 책에도 소개된 '갈바리 병원'이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병원이 그냥 요양병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인간은 보다 존엄하게 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카톨릭 재단에서 만든 국내 거의 유일한 호스피스 병원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성숙하지 못한 것처럼 호스피스 역시 아직도 생소한 분야처럼 느껴져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엔 오빠에게 호스피스 병원이란 걸 숨기고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호스피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이 책은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저자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책에 보면,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임종실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인명은 제천이었던지 곧 돌아가실 것 같아도 또 쉬 돌아가시지 않더란다. 그러자 가족들이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물론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만, 그게 정말로 화를 내야할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우린 호스피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얼마 전부터 요양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언니는, 그곳에 있다보면 별의 별 일을 다 보게 된다고 한다. 정말 뉴스에 나올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고 한다. 실제로 요양 생활을 했던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면 돌아가시는 거라며 아무도 와 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할머니가 젊었을 때 자식들에게 뭔가 흠잡힐 일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 줄 재산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니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할머니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보내드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식이고,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사는 것만을 가르치고, 죽는 것에 관해서는 교육 받지 못한 폐해는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화장터 하나 세우는 일에도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결국 마지막에 가야할 곳이 그곳이 될 텐데도 말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이제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임을 환기시킨다. 죽음도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는 길이 두렵거나 쓸쓸하지마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에서의 거대한 벌레로 변했던 주인공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타인의 현재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 사회봉사의 거대한 치유력만이 카프카가 경고한 인간 소외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마지막에 몬스터로 변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구원해 준다. 

그때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부디 행복한 몬스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84p)"라고 썼다. 이 말은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볼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시간 6개월...   

 

이 책은 주로 말기암 환자를 다루고 있다.   

언젠가 나는 나카무라 진이치와 콘도 마콘도가 공저한 <암에 걸린채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유럽은 암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암으로 죽는 것에 만족하며 다행으로 여긴다고 해서 좀 놀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쪽 지역의 사람들의 인생관이 동양 사람들의 그것과 많이 다른가 보다.

물론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비명횡사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 아무런 준비없이 마지막을 맞는다는 건 얼마나 허무한가? 그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적지않은 충격일 것이다. 그런데 비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말기암 환자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그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플까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 저자는 참지 말라고 한다. 옛날에나 고통을 참느라 고생이었지 지금은 약이 좋아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암 자체보다 진통제로 인해 명을 제촉하거나 중독될까 봐 겁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거듭 강조해서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더 존엄하게 살다 죽고 싶다면 진통제를 쓰라고 조언한다. 이건 정말 참고할만 하다. 

실제로 나의 오빠는 전이된 췌장암이었다. 의사들도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한 놈이라고 했다. 다른 암도 고통스럽겠지만 췌장암은 특히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물론 난 오빠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같은 췌장암 환자 쳐놓고 비교적 고통이 덜했다고도 전한다. 그게 기도 덕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적절히 약을 잘 써서도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소화 하면서 남은 기간을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를 생각해 볼만 할 것 같다. 물론 살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그 시간들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 <버킷리스트>란 영화를 본 게 기억이 난다. 죽음을 앞두고 두 주인공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 하나 실천하고 죽는다는, 나름 꽤 의미있고 감동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난 가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꼭 오빠와 함께 보냈던 생애 마지막6개월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해 본다. 사실 난 오빠와 그다지 잘 지냈던 남매지간은 못 된다. 하지만 암 선고를 받고 6개월 간은 오빠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 간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서툴렀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오빠를 너무 쓸쓸하게 보낸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난 솔직히 오빠의 임종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도 더 더욱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해도 그 보내는 과정은 만족할 수가 없다.

다시 오빠가 암 선고를 받았던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것이 꼭 한 번이듯, 죽는 것도 꼭 한 번이다. 이것을 돌이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난 그와 어떻게 남은 기간을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 살리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전전긍긍해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라며, 그것에 만족해 하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오빠를 기리는 마음으로 늦게나마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었을 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비껴가거나, 당해야할 사별의 슬픔이 감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좀 더 성숙한 자제를 갖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말미에 저자가 추천하는 웰다잉 10계명도 음미해 볼만하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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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0-0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에도 긴 글인데, 글 쓰신 님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저의 아버지도 진통제를 많이 쓰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존엄하기 위해서 진통제가 필요한 거, 맞는 것 같아요.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란다는 것, 음미해 볼 만하네요.
삶에 대해서만 공부할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부 - 죽음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하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아무래도 부모님이 가장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지금 위로차? 친정에 간답니다. ^^

많이 배워 갑니다. ^^

stella.K 2013-10-01 14:48   좋아요 0 | URL
아, 미안해요. 저도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ㅠ
사실 이 리뷰 쓰는데 2주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보통은 앉은 자리에서 쓰게 되는데
이건 전에 반쯤 쓰고, 임시저장으로 하고 나머지를 또 이날 썼지요.
게을러서 이기도 했겠지만 왠지 좀 더 정리가 필요한 것 같더라구요.
쓰면서도 언니 생각 많이 했어요.ㅠ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네. 언니도 어머니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또 뵈어요.^^

 
항아리 어른이 읽는 동화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오빠 떠난 빈방에 남겨졌던 한 권의 책

 

원래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아니었다. 드물지만 어느 순간 무슨 책인가 뒤적거리다 결국 끝까지 읽고야마는 책이 있지 않는가? 나에겐 이 책이 그랬다.

 

오빠가 지난 달(정확히는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또 뭐가 급하다고 오빠의 유품을 그리도 빨리 정리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봤자 평소 입던 옷가지들과 일상 잡동사니들이 전분데 그 가운데 책도 대여섯 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책들은 어디 가고 남은 두어 권 중 하나로 남겨진 책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오빠가 떠난 후, 나는 낮이면 주로 그 방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독서를 하곤 했다. 빈방을 비워 두는 것도 뭐하고, 무엇보다 오빠 방은 볕이 잘 들어 어두 컴컴해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야하는 내 방을 생각하면 전기 요금도 아낄 겸 나는 그 방에서 밀린 독서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었던 책은 읽어 줄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나 다소 지루한 감이 있는 그래서 손에 들고 있기도 뭐하고 때려치우기도 뭐한 그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 기분도 전환할 겸 이 책을 펼쳐들게 된게 결국 읽고 있던 책 보다 먼저 읽고 만 것이다. 

 

하긴, 그러리만치 빠져버린 탓도 있지만, 책 두께가 얇야 읽는데 부담이 없던 이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지닌 힘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 어떤 책 보다 세다.   

 

동화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사실 저자가 문학계에 알아 줄만한 시인이고, 제목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게으른 나의 독서에 밀려 나온지는 꽤 되었으면서도 감히 읽을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오빠가 떠난 후에야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잠깐 읽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책 표지 왼쪽 맨 꼭대기에 조그만 글씨로 '어른이 읽는 동화'라고 씌여 있다. 역시 동화는 아름답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아름답다란 말은 너무 판에 밖힌 말이다. 차라리 '동화는 힘이 세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후 동화는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렸을 땐 독서에 관심이 없었던터라 대표적인 동화외엔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이 읽는 동화도 있으니 동화를 어린이만 읽는 건 이제 시대착오다. 사실 동화만큼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책을 읽으니 저자는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잘 꽤뚫고 그것을 잘도 엮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대상을 의인화하는 상상력이 탁월하다. 동화의 미덕은 인간이 지녀야할 가치에 대해 교훈적이면서도 재밌게 잘 풀어놨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웬만한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 보다 낫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자가 시인인만큼 시를 짓는 마음으로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었을 것이다. 특히 첫번에 나오는 '항아리'나 '선인장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읽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러나 동화는...

 

그런데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동화는 감동스럽다기 보단 뭔가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들었고 이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잣나무 한 그루가 동서남북으로 가지를 뻗고 살고 있는데,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의 가지는 길기도 하거니와 잣 열매를 잘 맺는데 비해, 북쪽의 가지는 길이도 짧고 열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쪽의 가지가 북쪽의 가지를 업신여기다 못해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북쪽의 가지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쪽의 가지는 북쪽의 가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런 남쪽 가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여름 날 태풍이 불어 그만 북쪽 가지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남쪽의 가지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북쪽의 가지가 없어지고 보니 몸이 기울어져 보기가 흉할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열매도 많이 맺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잣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쪽 가지는 그제야 북쪽 가지가 있어야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지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일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워낙에 불경기니 모든 사람들이 다 음지에 있는 것만 같아도 분명 양지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건 분명 알든지 모르던지 음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아 순간 교만한 생각이 들 수 있고, 그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크게 보면 자신에게 이득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서로 상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그리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리도 마음이 쓰리고 먹먹해졌던 것일까?

 

나와 오빠의 관계는 세상에서 말하는 '둘도 없는 오누이'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오빠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적잖이 무시당한 탓에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오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현격하게 말 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가족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아니 차라리 가족들에게 자기 표현하는 것을 서툴러 했다고 해 두자. 난 그런 오빠를 답답해 하다못해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오해와 원망, 미움과 갈등이 없지 않았던터라 내가 오빠를 싫어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내 나도 가인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나마 오빠 생애에 있어서 죽기 마지막 6개월이 어떻게 보면 가족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행복하지는 않아도 다행스런 기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 한켠이 허전하다 못해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걸 상실감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왜 우린 살아있을 때 오누이의 정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영영 이별해야 했던 것일까? 미워하는 가족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더니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동기간이란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이 동화가 특별하게 와닿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가지의 마음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리고 동화는 그런 인간을 먼저 훈계하고, 교훈한다. 이것이 동화의 힘일 것이다.

 

책 읽는 마음

 

 니나 상코비치는 언니를 암으로 잃고 그 상실감을 독서로 채워 <혼자 책 읽는 시간>이란 책을 냈다. 독서가 정말 가족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 잃은 상실감을 채워주며 치료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나 자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책의 부제처럼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독서하는 행위에 대해선 동의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늘 독서에 대해서만큼은 부채감을 안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나는 그 이유를 거기에 두고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어 볼 참이다. 그래서도 오빠 떠난 빈방에 들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책을 발견했을 때는 맛있는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것과 똑같은 심리상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빨리 하던 일을 마쳐놓고 책 읽기에 돌입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현대화된 세상에서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될거라고 우려의 소리를 높이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책을 읽고, 찾는 한 그러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적어도 이런 좋은 동화를 찾아 읽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말하곤 했다. 특히 동화는 확실히 그래왔던 것 같다. 동화가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빠는 과연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살아생전 오빠의 성정으로 봐선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책을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출한 성격으로 봐 읽지 안을 책은 살 리가 없으니 다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읽었냐고 쉽게 물어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곳도 아니니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정말 멀어도 한참 멀다 싶다. 책도 언제 샀는 지 조금은 누렇게 빛이 바래있다. 

 

새삼 이 책에 대한 인연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의 방에 무슨 책이 있는 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빠가 세상을 떠나서야 볼 수 있었으니 마치 오빠가 마지막 떠나면서 나에게 편지대신 남겨준 것 같아 읽는내내 뭉클했다. 난 아무래도 또 오빠 떠난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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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힌트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저자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뭔가 문학계에서는 굵직한 작가일 것 같지만,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다가 이번에 이 책으로 인연을 맺었다. 

 

글쎄, 날씨가 더워서일까? 아니면 책이 주는 장중함 때문일까? 난 사실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했다. 하긴, 그 책을 말하는데 있어서 꼭 그 책을 다 읽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좋겠지만, 피에르 바야르(그의 저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들어)처럼 책은 꼭 다 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가급적 다 읽고 얘기하는 것이 좋기는 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로서 저자에게나, 번역자에게나 심지어는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붙들고 앉아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지연시킬 것인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읽는 중에는 하지 말아야할 이유나 법은 없다. 물론 책 중에는 나름 잘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김이 빠지는 그런 책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산문집이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저자의 사유를 전하는 책이기 때문에 읽다기 김이 빠지는 반전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었다. 그것은 글 하나 하나에 대한 제목이 동사형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독특했지만, 그에 대한 사유의 깊이 또한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산문집에 그다지 마음이 없었다. 개인의 생각(그것이 아무리 유명한 작가여도)을 '산문'이란 이름하에 '짓꺼리는' 정도인데 뭐 그리 대단할까 싶어 그리 마음을 두지 않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산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산문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단지 나는 여타 작가들의 산문집을 읽으면 생각이 맑아지고, 감염된 듯 생각이 깊어지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작가에 대해 일종의 쾌감 내지는 동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종종 산문집을 읽는다.

 

하지만 이츠키 히로유키의 이 책은 내가 이제까지 읽는 산문집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작가 개인의 산문을 누구와 비교한다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하지만, 이런 산문이 전에도 있었는가 싶게 깊이가 있다. 물론 또 그만큼 책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산문을 이 더운 여름 날 이렇게 어렵게(?) 읽어야 하다니 한심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전에 내가 읽었던 산문들은 이 정도의 깊이를 요하지는 않았거든. 한마디로 된통 당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어찌보면 산문이라기 보단 '인생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작가는 인생론을 쓰는 것을 꺼려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 '삶의 힌트'란 다소 은유적으로 비껴 간 것일까? 

 

읽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저자의 어법이 있다. '...한 것은 아닐까요?'라며 우리의 지금까지의 고정관념 같은 생각에 도전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침묵은 금이라 했는데 과연 침묵이 금 맞느냐고, 누구는 오히려 많은 말을 하라고 했다며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는 글들이 각 장마다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득과 논리가 때론 작가의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와 유장한 느낌마저도 든다. 그러면서 왜 나는 지금까지 저자의 책을 읽을 기회를 유보해 온 것일까? 급후회가 들 정도다. 아무리 문학계의 아이돌을 우논하며 젊은 작가들의 문체의 독특함과 새로움을 띄우는 경향이 있다지만, 오래된 작가의 문장의 유려함과 깊이를 과연 그들이 따라 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학은 인간의 삶과 비례에서 발달해 온 산물이기 때문에. 

 

지금은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잠 못 드는 열대의 밤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정도 밤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면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을 생각이다. 그리고 올해 나의 완독리스트에 이 책을 꼭 올릴 것이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생각이다. 이 책, 한 마디로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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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 없는 당신에게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임정재 옮김 / 타커스(끌레마)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혜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내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M 본부에서 하는 <여왕의 교실>이다. 처음엔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 봐야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사실 제목에서 느끼는 것은 대충,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상에 들뜬 선생님이 아이들을 신사와 숙녀로 만드는 다소 트렌디한 드라마는 아닐까 싶기도 했고, 아니면 학교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드라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기심 반, 의심 반 하는 드라마가 어딘가 모르게 좀 독특한데가 있어 이내 보게 만든다. 그것은 무엇보다 6학년에 부임한 마여진 선생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이 마여진 선생은 여느 선생과는 다르다. 전혀 웃을 줄 모르며, 무엇 때문인지 한 여름에도 우중충한 옷을 목까지 감아 오르도록 입고, 아이들에겐 혹독하게 공부만 시키는 선생님이다. 같은 동료 선생님에게도 어찌나 야멸찬지 도무지 빈 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차별과 냉대를 일삼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일부러 싸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배울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왕싸가지' 선생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선생님의 또 다른 점은, 아이들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 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아이들을 위기에서 건져 준다는 것이다. 마치 짱가처럼. 거기엔 또 남다른 촉수가 있는데, 그녀는 늘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마여진 선생은 현실에선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캐릭터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진짜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는데 있다. 그녀는 어쩌면 부도덕을 통해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의 집단 심리를 이용해 아주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초부터 인기 많은 좋은 선생이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반 전체를 쥐고 흔드는 악인이 되기를 자처했으며, 그 가운데 아이들의 이기적인 심리를 여지 없이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이런 이기적인 힘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를 은연 중 가르쳐 주는 것도 같다.  

 

이렇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보통의 (초등학교)선생님이라면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다가 또 적당히 야단치다가 상급학교로 올려보내는 것이 다가 아닌가? 아이들 가운데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지 모른다. 눈높이 교육이라고 해서 친구 같은 선생이 되야한다는 묘한 강박에 사로잡혀 적당히 아이들 비휘나 맞춰주고, 아이들 편에서 아이들을 변호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런 것과 전혀 다른 마여진 선생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지를 안다면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반기를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가르치기엔 안 그래도 상급학교에 올라 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현실이 녹녹치 않음을 알텐데 그걸 굳이 6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할 것이다. 아이면 아이답게 꿈을 꾸게 만들고, 도덕적 인간이 되라고 적당히 훈계하면 그만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엔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권리를 선생들 스스로가 방기하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긴 오늘날의 교사가 지식 전수 외에 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보면 결과적으로는 선생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오죽 나쁜 선생님으로 찍혔으면 '마녀 선생'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하지만 그런 선생님 덕분에 조금만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불평만 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 솔직히 6학년이면 초등학교로선 최고학년이고, 자신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란 다소의 자만한 생각도 있으리라.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선생님이 아니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어리광만 부리고, 불평만 한다면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평안함 속에서는 발전이 없으며, 문제와 고난을 헤쳐나가야 발전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렇게 하는 마녀 선생님의 의도가 뭐냐고. 또한 그것은 선생님을 잘 만나고 동시에 잘못 만난 덕분에 그들의 지혜는 일취월장하며, 그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아이들로 성장한다. 지혜는 그런 것이며, 그렇게 오는 것일게다.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숨겨두고 싶은 책은 있다                  

 

책은 함께 그 지식을 공유하자고 있는 것일게다. 그래서 어떤 책은 소문이 났으면 하고 바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책만큼은 혼자만 알고 있으면 하는 책이 반드시 있다. 사실 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때 미치도록 책을 좋아해(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책을 마구 사 들였던 적이 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 비싼 책은 못 사고, 어디서 책을 싸게 판다(물론 헌책은 아니고)하면 그 앞을 그냥 못 지나고 꼭 두서너 권씩 산 적이 있다. 이렇게 그 좌판에서 우연히 그의 책을 발견하고 가방에 다른 책과 함께 휩쓸어 담았나 보다. 그책의 이름은 '세상을 사는 소중한 지혜(아이템북스 간)'였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책을 사놓고 한동안 읽을 생각을 못했다(아니 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내가 그런 책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그렇게 다시 내 손에 들려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의 시집 만큼이나 낱장에 글씨는 몇 자 박힌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또 언제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난 결코 활자중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도 글자가 대체로 촘촘히 박힌 책들을 좋아 했기에 나는 이 책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지닌 위력를 모르지는 않는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누군가? 17세기 중세시대 수도사이면서 철학자가 아닌가? 뒤늦게 무슨 생각에선지 그의 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줄을 쫙쫙 쳐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그런 책이 무섭지 않은가? 반드시 활자가 촘촘히 박힌 책이라고 해서 좋은 책은 아닐 수 있다. 그런 것처럼 활자는 듬성듬성 하다고 우습게 볼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위력은 그런 책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처럼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이책을 읽었을까? 후회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책은 정말이지 나만 알고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드는 생각은 이런 책에 대한 세상의 홀대였다. 당시의 출판 가격도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더구나 읽는 사람이 없어서 폐기처분되기 전에 덤핑으로 단 몇 천원에 팔리고 있었으니 정말 좋은 책을 알아 보는 안목이 이렇게도 없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하긴 그래서도 많은 사람이 못 알아 봤을테니 나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일까? 그리고 한참 후에 이책 보게 되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그라시안의 책을 읽고 지혜에 눈을 뜨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면 나는 언제 지혜를 뽐내 보겠는가? 그래서 그의 책은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문장     

 

사실 그의 문장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성경의 또 다른 잠언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하루에 한 장씩만 꾸준히 읽어가면 지혜로워진다는 성경의 잠언 말이다. 그런 것처럼 그의 책도 가까운 곳에 두고 거듭 읽어 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잠언은 도덕과 윤리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보단 사는 방법 또는 처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처럼 그라시안의 책도 그런 책이었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기 보다 뭔가 통찰적이고 때론 서늘하며, 교활한 느낌마저도 든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을 보고도 그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운을 몰고 온다' 중에서(105p) 

 

또는,

현명한 사람은 바보보다는 적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역사상에는 적이 가지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해서 엄청난 어려움을 해결하고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아첨이 증오심 보다 위험하다. 상대의 증오심은 자신의 결함을 고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만 아첨은 결함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의 증오심을 거울삼아 행동한다. 이는 상대의 애정을 거울삼아 행동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혜로운 태도이다.

                                                                    '경쟁상대에게 배워라'(117p) 중에서

과연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롭지 않은가? 자신의 주위에 이렇게 은밀하며 우아하기까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난 그라시안의 책을 손 가까이 두려했고, 나만이 아는 책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혜는 어리석음에서 가치가 있고, 빛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당신에게'라니. 신랄하기까지 하다. 이 제목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 서두에서 말했던 '여왕의 교실'에 나오는 그렇고 그런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흔히 우리 주위에서 보는 선생님들이다. 차라리 그런 선생님 보단 확실히 나쁜 선생님이 더 나을 듯 싶다. 마여진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휴머니스트도 못 되면서 현실감각도 없지 않은가? 아마도 '너무나 인간적'이란 말은 휴머니스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편하고 좋은 게 좋은 범인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제목은 그라시안이 직접 지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출판사나 편집자의 꼼수 같기는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그라시안의 초기작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책은 '영웅'이나 '완전한 신사' '신탁' 같이 몇 글자 안으로 떨어지는 제목이 대부분이다.  

 

세상은 꿈을 가진 자의 것이라고 마치 꿈동산인 양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상은 꿈동산은 아니다. 어찌보면 세상은 그저 실험의 장이고, 혹독한 현실의 장이다. 물론 세상을 사노라면 때론 꿈과 비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좋은 스승이나 멘토를 만나기도 해야겠지만 그런 사람의 위험은 외골수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매스컴과 광고나 교육은 꿈을 이루라고 자극만 하는지 모르겠다. 전문인 우논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전문인이 되라고 하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게 꿈이 있고, 전문인이 대우 받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거기에도 모종의 음모가 있는 지 누가 알겠는가? 단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 주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지혜를 쌓으라고 말한다면 너무 책장수 같은 소리일까?

 

책은 적용 가능해야 한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도 좋은 책이긴 하지만, 곱씹게 되고 적용 가능한 책이 더 좋은 책은 아닐까? 그런 책은 읽다보면 좀 뜨끔하게 만드는 구절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다 마지막 쳅터인 5장 '가장 중요한 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라'에서 주로 뜨끔한 느낌을 많이했다. 그중 '완성되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마라'란 글에서는 한 방 제대로 먹은 기분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요리하는 과정을 본다면 식욕이 반감되거나 오히려 불쾌감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거장들은 모두 시작 단계에 있는 작품을 좀처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이러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자연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자신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232p)    

예전에 대본 쓰는 일을 했을 때 나는 주로 초고나 재고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을 하다 보면 나의 원래 대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렇게 저렇게 재단된 작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굳이 애써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대충의 얼개만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채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되면 작가로서의 책임의식도 약화되고, 어느 틈엔가 초라해진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나는 다시 대본 쓰는 일을 했는데 여전히 예전의 태도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그럴 때 한 사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조롱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고, 또 한 사람에게선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많음을 알고 음흉한 눈빛을 애써 감추는 것을 보았다. 전자는 나와 잘 아는 사이었고, 후자는 뭐든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시작 단계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이책을 보고야 비로소 알았다니! 어느 바닥을 구르던 거기엔 꼭 나를 이용해 먹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성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복수'란 말에 나는 심하게 동의한다.

 

사실 그라시안의 책을 읽으면 궁금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는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원에만 있다고 해서 시야가 좁은 인간이 되란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넓고도 깊어 어디서 과연 이런 문장을 길어 올렸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슬픈 건 이런 조언을 해 줄 스승이 우리 주위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 할 것도 아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 않은가? 옛 성현은 그러한 삶을 살아보고, 공부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고 똑똑하지 못하다면 이 책을 거듭해서 읽고, 심지어는 외워두고 삶에서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읽은 그라시안의 이책은 역시 많은 사람이 읽지 말았으면 좋겠는지는 잘 모르겠다. 쓰다보니 의외로 많은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와 읽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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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망현 內望顯 - 의사와 기자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김철중의 메디컬 소시올로지
김철중 지음 / Mid(엠아이디)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 의료는 건강한가?' 이책에 대한 리뷰의 제목을 저리 정해봤다. 아프면 찾아 가는 곳이 병원인데 의료가 건강한지를 묻고 있다니. 약간은 아이러니 한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년 사이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자평 반, 타평 반 하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다. 특히 위암을 포함한 몇 가지 암은 거의 탑이어서 (물론 돈 있는 사람들에 국한 된 이야기지만)원정 치료 받으러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있다. 

 

그전까지 병원에 웬만해서 가지 않았던 내가 올초 암 환자의 가족이 되면서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병원에 다닌 것만으로는 거의 13년만의 일이고,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된 것은 22년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병원을 내집 드나들듯 한다지만 이렇게 병원을 드물게 다녔던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어느 정돈지 실감하기는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책을 읽으니 그때가 생각이 난다. 바로 그 13년 전, 뜻하지 않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한 눈에 보아도 오래된 병원이란 외양 못지 않게 헤지고 바랜 환자복을 보고 좀 놀랐다. 무엇보다 거긴 주로 몸이 작은 환자만 받아 왔는지 환자복이 하나 같이 내 몸에 맞지 않아 그나마 윗도리만 환자복을 입고 아랫도리는 집에서 공수해 온 엄마의 꽃분홍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책의 저자는 '환자복을 입으면 김태희도 처량해 보인다(92p~)'는 글에서 환자복에 관해 지적했는데, 환자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병원의 환자복은 어쩌면 하나 같이 그렇고 그런지. 부자 병원이든, 가난한 병원이든 똑같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죄수복과 함께 가장 멋없는 옷이 아닐까 한다. 만일 병원의 환자복이 기능면에서나 패션면에서나 나아진다면 환자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이참에 환자복의 사복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저자는 김태희도 환자복을 입으면 처량하다고 했는데, 글의 의도는 알겠지만 제목은 그다지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김태희는 김태희다. 김태희가 환자 역할 한 번 안 맡아 봤으려고? 환자복 입혀 놨다고 그 아우라가 어디 안 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환자가 김태희만 같아도 좋을 걸?

 

솔직히 22년만에 암 환자의 가족이 되었을 때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22년 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참 어렸다. 그리고 병수발을 직접적으로 안 했기 때문에 그저 아픈 아버지만을 안타까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되고 병원에 자주 드나드는 신세가 되면서 병원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암 치료가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졌나? 좀 놀랐었다. 무엇보다 22년 전엔 무조건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살아서 나오던지, 죽어서 나오던지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통원치료를 원칙으로 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정말 좋다고 생각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환자가 됐다는 심적 부담도 큰데 교도소나 다를 바 없는 병원에서 언제까지고 있어야 한다면 숨막혀 못 살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약이 좋아져서 예전처럼 머리 빠지고, 토하고 하는 일도 없다고 햇다. 무엇보다 그 약은 나라에서 95%를 지원해 주고 있어서 환자 본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환자가 마루타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 생체실험에서 성공한다면 계속 그것을 쓰겠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면 기존에 써 왔던 약을 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의료보험 혜택은 받을 수가 없고, 한 번 맞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며, 머리 빠지고, 구토하는 등의 부작용을 환자가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22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22년 전 나의 아버지는 한 달 반만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은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길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22년 동안 의학은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대해 병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현재 내 가족이 겪고 있는 암은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하다는 췌장암을 앓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걸려서 뭔가 모를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암을 두고 '고약하다'는 표현을 쓴 건 병원의 의사였다. 그렇다면 환자가 그 병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덜 고약하며 희망은 있는 것인가? 유독 그 췌장암에 그런 표현을 쓴다면 다른 여타의 암을 앓고 있는 환자는 어찌 생각할까? 듣기에 따라선 자기네들을 너무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 세상의 모든 암은 다 고통스러운데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냐고 항의하지 않을까? 또한 의사가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치료가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라도 잘못돼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방어적 표현이란 걸 알 수가 있다. '그러게 누가 그런 고약한 병에 걸리래?'하는. 그리고 처음 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의 관례라며 검사의 검사를 거듭해 왔던 병원의 과잉 검사("이왕이면 MRI 하나 찍으시죠" 인센티브로 도배된 병원, 160p)를 생각하면 욕이 나올 지경이다. 외국에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CT 촬영은 잘 하지 않는다는데 성한 사람도 아닌 환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촬영을 종용하면 그 환자가 언제 그 병을 떨치고 일어날까? 

 

그만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나의 가족이 입원한 병원은 무슨 병원이라 이름만대도 알만한 대학병원이다. 모르는 사이 같은 병원이 여기 저기 세워졌다.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분에 나는 그 병원 지하 1층에 있는 구내 식당을 드나들곤 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보면 그 병원이 처음 생겼던 때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발전사를 사진으로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구한말 미국의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세웠다던 병원. 그가 한국에 왔을 땐 병자를 낫게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눈부신 발전이 있기까지 인술은 어디 가고 자본주의 논리에 갇혀 저렇게 발전해 왔겠지 생각하면 그 사진들이 그다지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 무엇보다 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컨베이어벨트의 짐짝 다루듯 하는 걸 보면 현대 병원의 공룡화를 의식한 저자의 목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대학병원은 왜 공룡이 되었나'174p).

 

사실 나는 제 3자지만 환자 본인이 병원에 대해 느끼는 것은 더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치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병원을 더 이상 못 믿겠다고 했던 건 환자였으니까. 환자와 치료자 간에 믿음이 있어야 치료 효과가 좋아진다는 건 상식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의사가 자신을 어떻게 치료하나 지켜보고 느껴야 했던 환자가 나중에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확실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학 전공이라면 적어도 소위 우리나라에 난다 긴다하는 수재들이 하는 공부일텐데 확실히 머리가 좋다는 것과 사람 간의 신뢰를 쌓는 문제는 별개인가 보다. '쓸만한 치료법이 있어도 입 다무는 의사들. 177p'을 읽다보면 정말 나의 가족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입다무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가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알고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확실히 현대 의료는 사람을 치료하고 고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특히 '"당신, 암 걸렸다"는 소식 잘 전하기,137p'를 읽다보면, 아직도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그날 이 소식을 가족인 우리 중 아무도 환자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건 두고 두고 가슴 에이는 아품으로 남는다. 마치 가족의 의무를 방기한 것만 같고, 가족이 아닌 담당 레지던트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환자 본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보호자로서 가족이 암에 걸렸다는데 그저 하늘이 노래져 그 정신 챙기기도 바빴다. 어떻게 그 엄청난 소식을 가족이 직접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린 그 레지던트에게 나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보호자 보단 의사가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보호자가 뭘 알아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은 그랬을 때 환자의 반응은 참으로 여러 가지란다. 그래서 요즘엔 의학교육에 의사들이 '나쁜 소식 잘 전하기'를 교육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환자와 가족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다음 대책을 잘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는데,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에게 이 나쁜 소식을 최초로 알린 그 레지던트는 나름 전하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작 환자에게는 끝까지 사실을 확실하게는 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암으로 가기 전 단계로 알고 있었다니 말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난 '이건 또 뭐지?' 했다. 모르긴 해도 그 레지던트는 처음엔 넌지시 운만 띄었던 것 같고, 나중에 치료가 진행이 되면서 눈치를 챌 수 있도록 했던 것도 같다. 또 실제로 그 레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과로 전출을 갔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중에 느껴야 하는 실망감은 배가가 된다.        

          

이렇게 난 지난 몇 달 동안 병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하나 둘씩 쌓아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에 암에 관한 책들을 읽어 가면서 암에 대한 대표적 3가지 치료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대하면서 그것은 더욱 배가가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회복된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암 치료가 새로 또는 재발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집 환자가 천운으로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면 이 비판은 다소 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그런 행운은 우리에게 주워지지 않았기에 나는 아직도 병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겠다. 이럴 때 이책은 병원과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 다행이고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특히 저자는 독자의 알 권리를 나름 잘 충족해 줬다고 생각한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수준이 짐승적일 것만 같은 세상에, 이혼한 전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 준 여자가 있다는 건 이책이 아니면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전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그 특유의 모성이 그런 결단을 낳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설대위라는 의료 선교사가 있어 당시 할수만 있으면 유학만 가려고 했던 우리나라 의학도들에게 그렇다면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겠느냐고 했던 것도 저자가 아니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문제 많고 탈도 많은 의료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20세기에 의학이 싸웠던 것이 흡연이었다면, 21세기는 나트륨과의 전쟁이라고 했을 때 그 최전선에 있는 것도 병원이고 보면 확실히 우리의 의료는 국민 건강의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의료 평론가란 직업이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의사생활을 10년쯤 하다 때려 치우고 기자의 길로 들어 섰단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 중독자여서 매일 3시간씩 신문을 읽어 제꼈다고 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사의 의학 담당 기자가 되게 했다. 그가 기자가 되었을 시절엔 의학 담당 기자들은 의학 상식 같은 것만을 단신으로 내보내는 정도로 소극적인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파헤치고 전달하려는 일에 몸바쳐 일했고 보다시피 내망현(내시경, 망원경, 현미경)이라는 책을 펴냈다. 어찌보면 다소 흥미 위주로 소제목을 잡은 것도 같은데 저자 특유의 우리나라 의료 사회 병리를 잘 집어내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읽고 난 느낌은 아무리 우리나라 의학계가 선진국 수준 못지 않다고 해도 의료 현실은 아직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그런 것 같다. 계속 의료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국민 개개인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할 거라는 것. 이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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