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어른이 읽는 동화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오빠 떠난 빈방에 남겨졌던 한 권의 책

 

원래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아니었다. 드물지만 어느 순간 무슨 책인가 뒤적거리다 결국 끝까지 읽고야마는 책이 있지 않는가? 나에겐 이 책이 그랬다.

 

오빠가 지난 달(정확히는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또 뭐가 급하다고 오빠의 유품을 그리도 빨리 정리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봤자 평소 입던 옷가지들과 일상 잡동사니들이 전분데 그 가운데 책도 대여섯 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책들은 어디 가고 남은 두어 권 중 하나로 남겨진 책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오빠가 떠난 후, 나는 낮이면 주로 그 방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독서를 하곤 했다. 빈방을 비워 두는 것도 뭐하고, 무엇보다 오빠 방은 볕이 잘 들어 어두 컴컴해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야하는 내 방을 생각하면 전기 요금도 아낄 겸 나는 그 방에서 밀린 독서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었던 책은 읽어 줄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나 다소 지루한 감이 있는 그래서 손에 들고 있기도 뭐하고 때려치우기도 뭐한 그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 기분도 전환할 겸 이 책을 펼쳐들게 된게 결국 읽고 있던 책 보다 먼저 읽고 만 것이다. 

 

하긴, 그러리만치 빠져버린 탓도 있지만, 책 두께가 얇야 읽는데 부담이 없던 이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지닌 힘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 어떤 책 보다 세다.   

 

동화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사실 저자가 문학계에 알아 줄만한 시인이고, 제목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게으른 나의 독서에 밀려 나온지는 꽤 되었으면서도 감히 읽을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오빠가 떠난 후에야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잠깐 읽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책 표지 왼쪽 맨 꼭대기에 조그만 글씨로 '어른이 읽는 동화'라고 씌여 있다. 역시 동화는 아름답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아름답다란 말은 너무 판에 밖힌 말이다. 차라리 '동화는 힘이 세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후 동화는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렸을 땐 독서에 관심이 없었던터라 대표적인 동화외엔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이 읽는 동화도 있으니 동화를 어린이만 읽는 건 이제 시대착오다. 사실 동화만큼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책을 읽으니 저자는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잘 꽤뚫고 그것을 잘도 엮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대상을 의인화하는 상상력이 탁월하다. 동화의 미덕은 인간이 지녀야할 가치에 대해 교훈적이면서도 재밌게 잘 풀어놨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웬만한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 보다 낫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자가 시인인만큼 시를 짓는 마음으로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었을 것이다. 특히 첫번에 나오는 '항아리'나 '선인장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읽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러나 동화는...

 

그런데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동화는 감동스럽다기 보단 뭔가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들었고 이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잣나무 한 그루가 동서남북으로 가지를 뻗고 살고 있는데,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의 가지는 길기도 하거니와 잣 열매를 잘 맺는데 비해, 북쪽의 가지는 길이도 짧고 열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쪽의 가지가 북쪽의 가지를 업신여기다 못해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북쪽의 가지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쪽의 가지는 북쪽의 가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런 남쪽 가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여름 날 태풍이 불어 그만 북쪽 가지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남쪽의 가지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북쪽의 가지가 없어지고 보니 몸이 기울어져 보기가 흉할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열매도 많이 맺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잣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쪽 가지는 그제야 북쪽 가지가 있어야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지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일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워낙에 불경기니 모든 사람들이 다 음지에 있는 것만 같아도 분명 양지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건 분명 알든지 모르던지 음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아 순간 교만한 생각이 들 수 있고, 그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크게 보면 자신에게 이득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서로 상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그리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리도 마음이 쓰리고 먹먹해졌던 것일까?

 

나와 오빠의 관계는 세상에서 말하는 '둘도 없는 오누이'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오빠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적잖이 무시당한 탓에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오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현격하게 말 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가족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아니 차라리 가족들에게 자기 표현하는 것을 서툴러 했다고 해 두자. 난 그런 오빠를 답답해 하다못해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오해와 원망, 미움과 갈등이 없지 않았던터라 내가 오빠를 싫어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내 나도 가인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나마 오빠 생애에 있어서 죽기 마지막 6개월이 어떻게 보면 가족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행복하지는 않아도 다행스런 기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 한켠이 허전하다 못해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걸 상실감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왜 우린 살아있을 때 오누이의 정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영영 이별해야 했던 것일까? 미워하는 가족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더니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동기간이란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이 동화가 특별하게 와닿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가지의 마음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리고 동화는 그런 인간을 먼저 훈계하고, 교훈한다. 이것이 동화의 힘일 것이다.

 

책 읽는 마음

 

 니나 상코비치는 언니를 암으로 잃고 그 상실감을 독서로 채워 <혼자 책 읽는 시간>이란 책을 냈다. 독서가 정말 가족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 잃은 상실감을 채워주며 치료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나 자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책의 부제처럼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독서하는 행위에 대해선 동의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늘 독서에 대해서만큼은 부채감을 안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나는 그 이유를 거기에 두고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어 볼 참이다. 그래서도 오빠 떠난 빈방에 들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책을 발견했을 때는 맛있는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것과 똑같은 심리상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빨리 하던 일을 마쳐놓고 책 읽기에 돌입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현대화된 세상에서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될거라고 우려의 소리를 높이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책을 읽고, 찾는 한 그러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적어도 이런 좋은 동화를 찾아 읽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말하곤 했다. 특히 동화는 확실히 그래왔던 것 같다. 동화가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빠는 과연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살아생전 오빠의 성정으로 봐선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책을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출한 성격으로 봐 읽지 안을 책은 살 리가 없으니 다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읽었냐고 쉽게 물어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곳도 아니니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정말 멀어도 한참 멀다 싶다. 책도 언제 샀는 지 조금은 누렇게 빛이 바래있다. 

 

새삼 이 책에 대한 인연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의 방에 무슨 책이 있는 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빠가 세상을 떠나서야 볼 수 있었으니 마치 오빠가 마지막 떠나면서 나에게 편지대신 남겨준 것 같아 읽는내내 뭉클했다. 난 아무래도 또 오빠 떠난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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