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호스피스 의사가 먼저 떠난 이들에게 받은 인생 수업
김여환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책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는가?

 

언제 였을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 온 건.

올초였던 것 같기도 하다. 작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인연이 아닌 듯도하여 넘겨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지, 기어이 내 이름으로 배달이 됐다. 그래서 인연인가 싶어 읽으려 했지만 결국 또 읽지 못했다. 다른 책에 밀려서이기도 했지만, 그땐 내가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그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증상이라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병원에 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혹시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별 궁리를 다하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니 읽을 수도 없었다.

사실 난 그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오늘 살다 내일 죽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나의 죽음을 가족들, 특별히 엄마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고, 엄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우스운 건, 그 무렵 동생이 내 방에 있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디지털로 바꿔줬다. 나야 진작에 IP TV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 TV에 대한 욕심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물론 바꾸면 좋았겠지.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좋았다. 그런데 돈 쓰기 좋아하는 동생이 자기 TV를 바꾸면서 누나 방의 TV를 바꿔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 마치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 보고 나오는 사람처럼 내 방의 TV를 바꿔서 시원하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 생각지도 않은 디지털 TV가 생겨서 좋긴 했지만, 내가 과연 이 TV를 몇 번이나 보고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뭔가 모를 연민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책이 눈에 들어왔겠는가? 이 책은 호스피스에 관한 책으로써, 아직 건강한 사람이 임종을 맞이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뭐 대충 그런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렇게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의외로 죽지 않고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살고 있고 있었다. 독일 격언에,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 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더니 죽음이 나를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내 몸이 겪고 있었던 것은 뭘까? 살면서 다른 가족들은 끄덕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데, 나만 두어번 가족을 놀래키며 병원 신세를 졌던 경력이 있었기에 이번에야말로 그냥 안 넘어 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봄이 돼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건 그냥 갱년기 증상 같은 걸꺼예요."라고해서 얼마나 허무하던지. 그랬다. 그때 내 몸이 안 좋았던 건 갱년기 증상의 해프닝 같은 거였다. 

그렇게 나는 차츰 나아갈 무렵, 오빠가 생각지도 않게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약도 없을 거라던 나의 증상은, 암 선고를 받은 후 오빠의 약을 사러 동네 약국을 뒤지다시피해서 겨우 구입한 그 약국에서(그 약은 일반 약국에선 잘 안 팔고 대학병원 근처의 약국에서나 파는 것이었다) 그냥 기대하지 않고 증상을 말하다 마침 맞는 약이 있는 것을 알고 사 먹고 나았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동안 나는 왜 내 죽음의 소설을 쓰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우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고, 가슴을 쓸어내릴 사이도 없었다. 당장 그리도 건강했던 오빠가 죽게 생겼는데 그깟 몸이 좋아졌다고 좋아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오빠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맞바꾼 것처럼도 느껴졌다. 하긴, 그런 생각은 누구든지 한다. 특히 나의 엄마는 오빠의 암 선고를 받은 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입버릇처럼,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 건데 왜 먼저 갔느냐"며 깊은 한숨을 쉬곤하니까. 물론 이건 엄마에겐 하나도 나을 것이 없지만, 나는 오빠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내가 대신 아팠으면 했다.

그렇게도 건강한 오빠가 이렇게 빨리 허물어져 갈거라곤 생각도 못햇다. 올해 막 새해가 밝았을 때 제손으로 달력을 바꿔 달면서 올해가 자기 생의 마지막 해가 될 거라고 오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 사는 게 참 만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재미없는 불행한 만화 말이다. 그러던 중에도 난 이 책을 어떻게든 읽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내 이 책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가 죽어 간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도 기적적으로 낫지 않을까란 기대가 없지 않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차마 죽음을 놓고 기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어서만도 아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린 그저 살리는 의무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책을 읽을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읽으면 슬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책의 앞부분을 보면, 환자에게 죽음을 알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룬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과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면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두려워하며 죽는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 처음엔 분노하고,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중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된 죽음을 맞이 한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것을 읽고 맞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오빠가 암 선고를 받기 전에 읽었기 때문에 동의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오빠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충격인데 본인은 얼마나 충격이 될까? 그렇지 않아도 별거 아니려니, 아니 별거 아니길 바라면서 여러 검사를 거치는 동안 오빠의 얼굴엔 근심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런 얼굴에 대고, 전이된 췌장암 말기며, 짧으면 6개월이고, 길면 1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빠가 평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상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애틋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오빠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오빠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은 아닐까?     

그때 오빠에게 암 선고를 했던 의사는, 가족이 환자에게 직접 말하기가 어려울테니 자기가 얘기하겠노라고 해서 다소 안심했고,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그 의사와 환자간에 병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 의사는 환자인 오빠에게 대충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가 암에 걸리면 의사는 가족들을 따로 불러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준다. 이때 의사들은 가족들에게 어줍찮은 기대를 갖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좋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해 냉정하게 얘기하는 거지만, 듣고 있으면 사람 고치는 의사라면서 어쩌면 저렇게 인정머리 없이 얘기를 할까 야속하기도 하고 저승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가족은 뭔가 희망의 끈을 잡고 싶어 의사에게 유도질문을 한다. 그러면 의사도 사람이니 한 마디 정도는 진심은 아니지만 완곡하면서도 위로삼아 희망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1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기적을 얘기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가족은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희망 또한 상대적으로 크고,  깊게 갖는 것이다. 가족도 이럴진대 환자는 어떻겠는가?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걸 안 건, 오빠가 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작은 엄마가 문병을 오셨을 때 알았다. 대화하다 오빠는, 자신은 암이 아니며 암의 전단계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린 정말 가슴이 무너졌고, 그 의사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우리에겐 대신 말해 주겠다고 말해 놓고, 오빠는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인가가? 물론 그 의사는 오빠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거라고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실을 다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그때가 되면 더 화나지 않을까? 너무 늦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오빠는 기운이 없어 화를 낼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를 노렸던 걸까? 이 부분에서 신뢰할 수 없다면 환자는 죽는 것도 억울한데 우롱 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물론 그 의사도 완곡한 표현을 쓴다는 게 그런 결과를 낳은 거겠지만, 확실히 그 점은 환자나 보호자나 정말 유감스런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말했던대로 이젠 대학 의학 교육에도 의사가 환자에게 이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 들이는 5단계를 말했다. 즉 부정의 단계에서 분노의 단계로, 타협에서 우울로 그리고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은 어떠할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임산부가 죽을 것 같은 고통속에 아이를 낳고도 또 다시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이 죽음을 목도한 사람도 그러지 싶다. 22년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은 나는 그 당시는 세상이 꺼질 듯한 슬픔 속에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고나니 그도 덤덤해 졌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는 계신 듯, 안 계신 듯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그리다 최근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새삼 나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번은 죽음을 목도했고, 사별의 슬픔을 겪어 봤으니 이번엔 덜 슬프고,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마치 처음 사별을 당하는 것처럼. 그러니 노인들은 어떠할까? 그만큼 사람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기도 했겠지만, 사별을 경험하고 살았을 것이다. 사별은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참 못 견딜 일이다 싶다. 그래도 생은 늘 삶의 편이었기에 그런 회로와 구조를 가졌기에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망각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려 명을 재촉할 것이다. 

 

부정의 단계를 경험하는 건 죽어가는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다. 의사는 이미 오빠가 곧 죽을 것을 예견했지만, 우리는 부정했다. 그것은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한 것도 같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삶도 성숙해야하듯,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은 환자가 건강했을 때 신앙과 먼 삶을 살았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음을 갖게하기 위한 거라면 더 더욱 그럴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삶이 성숙하고, 신앙도 성숙하다면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불로장생만이 인간의 복인 양 사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게 된다. 환자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줘야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는 언젠가 병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물어었다. "내가 살겠냐?"고. 건강했던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밀려왔을 것이다. 그런 오빠에게 내가 뭐라 말해 줄 수 있었을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 병을 대하는 환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때는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이기 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오빠가 신앙을 받아 들였을 때는 "오빠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죽어도 천국이야.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라고 말해 주었다. 오빠는 그 순간만큼은 눈을 밝게 빛냈던 것 같다. 나는 그 눈빛이 말하는 걸 안다. 그건 오빠가 신앙의 힘으로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죽어도 천국에 있을 거란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땐 이미 오빠가 통증으로 육체의 힘을 다 쓰고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협 또한 죽어가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도 똑같은 단계를 거친다. 특히 자신이 믿는 신께. 차라리 날 데려가시라고, 또는 주께서 명하시는 일 무엇이든 하겠으니 그를 낫게 해 달라고. 타협도 하고, 간청도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속에 고난이 언제 끝이날까를 교차 반복하면서 환자와 함께 간다.

사실 엄마는 오빠의 임종을 보지 않았다. 오빠가 숨이 끊어지기 하루내지 이틀을 앞두고 엄마는 많이 힘들어 했다. 하지만 임종 당일 날 엄마는 의외로 침착했고, 담담했다. 그전까지는 불안과 슬픔속에 있었지만, 그날의 당신의 기도는 차분했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순명의 기도를 했다. 그 기도 소리를 듣는 나의 마음은 더 없이 슬펐지만, 그날 저녁 난 내 동생이 전해 준 오빠의 임종 소식을 엄마에게 한결 편하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전했던 오빠의 임종 소식에 엄마는 울었지만, 생각 보다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엄마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단계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죽음을 수용하지만, 살아 있는 가족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단계를 너무 도식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어느만큼은 타당성이 있기에 우린 이렇게 해서라도 죽음을 객관화 시켜보는 것이다. 물론 오빠는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죽어갔지만, 난 오빠가 평소의 성격답게 의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받아 들였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저자가 책에도 다뤘지만, 몇 해 전까지만해도 행복 전도사를 자처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너무도 커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고통이 끔찍해 스스로 죽음으로 피해버리는 사람이 한 해에도 엄청난 숫자를 헤아린다.

실제로 난 이 이야기를 듣고 혹시 오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오빠의 방에서 발견한 맥가이버 칼과 제도용 칼을 손이 안 닫는 곳으로 치워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오빠는 죽을 때 죽더라도 살기 최선을 다 했고, 종국엔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 들였다. 난 그것이 고맙다 못해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다ㅋ).

그리고 우리 역시 죽음을 꼭 불행한 것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연장시키는 삶은 또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그쯤해서 그의 생명을 거둬가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했다. 

물론 나의 오빠가 아직도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에 죽은 것은 너무도 아쉽지만, 오빠는 죽을 때 세상에 미련 같은 건 남겨놓지 않았으니 깨끗한 죽음이었다. 나는 이 점도 오빠에게 감사한다. 저자는, "해탈은 힘든 삶을 의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비롯된다고,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흔적도 없이 우리를 삼킬 때까지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말고 그저 살아야 한다(140p)"

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에게 남의 삶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얘기하는 불완전하다. 오히려 죽음의 견지에서 얘기해야 맞는 것 같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하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것이 한 둘인가? 탁아 시설도 부족하고, 노인 요양 시설도 부족하며, 미혼모 보호 시설도 부족하고, 청소년 보호 시설도 부족하다. 거기에 하다 더 생각해 봐야할 것은 호스피스 시설을 갖춘 병원이나 그것을 전담하는 병원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해서 새삼 놀랐던 건, 오빠가 입원한 병원은 우리나라 굴지의 종합대학 병원이다. 하지만 따로 호스피스 병동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초기엔 오빠가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이 짧았지만, 점점 말기로 갈수록 오빠는 퇴원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렇다고 마냥 병원에 있을수만은 없어서 요양병원을 알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병원측에서도 필요하면 연계된 요양병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동생이 발품 팔아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설이 형편없는 노인 요양 병원이거나,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쌌다.  

그러던 중 형부를 통해 책에도 소개된 '갈바리 병원'이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병원이 그냥 요양병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인간은 보다 존엄하게 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카톨릭 재단에서 만든 국내 거의 유일한 호스피스 병원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성숙하지 못한 것처럼 호스피스 역시 아직도 생소한 분야처럼 느껴져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엔 오빠에게 호스피스 병원이란 걸 숨기고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호스피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이 책은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저자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책에 보면,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임종실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인명은 제천이었던지 곧 돌아가실 것 같아도 또 쉬 돌아가시지 않더란다. 그러자 가족들이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물론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만, 그게 정말로 화를 내야할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우린 호스피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얼마 전부터 요양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언니는, 그곳에 있다보면 별의 별 일을 다 보게 된다고 한다. 정말 뉴스에 나올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고 한다. 실제로 요양 생활을 했던 어떤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면 돌아가시는 거라며 아무도 와 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할머니가 젊었을 때 자식들에게 뭔가 흠잡힐 일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 줄 재산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니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할머니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보내드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식이고,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사는 것만을 가르치고, 죽는 것에 관해서는 교육 받지 못한 폐해는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화장터 하나 세우는 일에도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결국 마지막에 가야할 곳이 그곳이 될 텐데도 말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이제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임을 환기시킨다. 죽음도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는 길이 두렵거나 쓸쓸하지마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에서의 거대한 벌레로 변했던 주인공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타인의 현재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 사회봉사의 거대한 치유력만이 카프카가 경고한 인간 소외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마지막에 몬스터로 변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구원해 준다. 

그때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부디 행복한 몬스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84p)"라고 썼다. 이 말은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볼 말인 것 같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시간 6개월...   

 

이 책은 주로 말기암 환자를 다루고 있다.   

언젠가 나는 나카무라 진이치와 콘도 마콘도가 공저한 <암에 걸린채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유럽은 암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암으로 죽는 것에 만족하며 다행으로 여긴다고 해서 좀 놀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쪽 지역의 사람들의 인생관이 동양 사람들의 그것과 많이 다른가 보다.

물론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비명횡사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 아무런 준비없이 마지막을 맞는다는 건 얼마나 허무한가? 그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적지않은 충격일 것이다. 그런데 비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말기암 환자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그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플까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 저자는 참지 말라고 한다. 옛날에나 고통을 참느라 고생이었지 지금은 약이 좋아 생각만큼 고통스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암 자체보다 진통제로 인해 명을 제촉하거나 중독될까 봐 겁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거듭 강조해서 말하기를, 조금이라도 더 존엄하게 살다 죽고 싶다면 진통제를 쓰라고 조언한다. 이건 정말 참고할만 하다. 

실제로 나의 오빠는 전이된 췌장암이었다. 의사들도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한 놈이라고 했다. 다른 암도 고통스럽겠지만 췌장암은 특히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물론 난 오빠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같은 췌장암 환자 쳐놓고 비교적 고통이 덜했다고도 전한다. 그게 기도 덕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적절히 약을 잘 써서도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소화 하면서 남은 기간을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를 생각해 볼만 할 것 같다. 물론 살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그 시간들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 <버킷리스트>란 영화를 본 게 기억이 난다. 죽음을 앞두고 두 주인공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 하나 실천하고 죽는다는, 나름 꽤 의미있고 감동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난 가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꼭 오빠와 함께 보냈던 생애 마지막6개월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해 본다. 사실 난 오빠와 그다지 잘 지냈던 남매지간은 못 된다. 하지만 암 선고를 받고 6개월 간은 오빠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 간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서툴렀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오빠를 너무 쓸쓸하게 보낸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난 솔직히 오빠의 임종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도 더 더욱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해도 그 보내는 과정은 만족할 수가 없다.

다시 오빠가 암 선고를 받았던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것이 꼭 한 번이듯, 죽는 것도 꼭 한 번이다. 이것을 돌이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난 그와 어떻게 남은 기간을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 살리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전전긍긍해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라며, 그것에 만족해 하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오빠를 기리는 마음으로 늦게나마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었을 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비껴가거나, 당해야할 사별의 슬픔이 감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좀 더 성숙한 자제를 갖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말미에 저자가 추천하는 웰다잉 10계명도 음미해 볼만하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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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0-0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에도 긴 글인데, 글 쓰신 님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저의 아버지도 진통제를 많이 쓰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존엄하기 위해서 진통제가 필요한 거, 맞는 것 같아요.

유럽 사람들은 암으로 죽기를 바란다는 것, 음미해 볼 만하네요.
삶에 대해서만 공부할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부 - 죽음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하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아무래도 부모님이 가장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지금 위로차? 친정에 간답니다. ^^

많이 배워 갑니다. ^^

stella.K 2013-10-01 14:48   좋아요 0 | URL
아, 미안해요. 저도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ㅠ
사실 이 리뷰 쓰는데 2주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보통은 앉은 자리에서 쓰게 되는데
이건 전에 반쯤 쓰고, 임시저장으로 하고 나머지를 또 이날 썼지요.
게을러서 이기도 했겠지만 왠지 좀 더 정리가 필요한 것 같더라구요.
쓰면서도 언니 생각 많이 했어요.ㅠ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네. 언니도 어머니 많이 위로해 드리세요.
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