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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망현 內望顯 - 의사와 기자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김철중의 메디컬 소시올로지
김철중 지음 / Mid(엠아이디)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 의료는 건강한가?' 이책에 대한 리뷰의 제목을 저리 정해봤다. 아프면 찾아 가는 곳이 병원인데 의료가 건강한지를 묻고 있다니. 약간은 아이러니 한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년 사이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자평 반, 타평 반 하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다. 특히 위암을 포함한 몇 가지 암은 거의 탑이어서 (물론 돈 있는 사람들에 국한 된 이야기지만)원정 치료 받으러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있다.
그전까지 병원에 웬만해서 가지 않았던 내가 올초 암 환자의 가족이 되면서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병원에 다닌 것만으로는 거의 13년만의 일이고,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된 것은 22년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병원을 내집 드나들듯 한다지만 이렇게 병원을 드물게 다녔던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어느 정돈지 실감하기는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책을 읽으니 그때가 생각이 난다. 바로 그 13년 전, 뜻하지 않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한 눈에 보아도 오래된 병원이란 외양 못지 않게 헤지고 바랜 환자복을 보고 좀 놀랐다. 무엇보다 거긴 주로 몸이 작은 환자만 받아 왔는지 환자복이 하나 같이 내 몸에 맞지 않아 그나마 윗도리만 환자복을 입고 아랫도리는 집에서 공수해 온 엄마의 꽃분홍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책의 저자는 '환자복을 입으면 김태희도 처량해 보인다(92p~)'는 글에서 환자복에 관해 지적했는데, 환자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병원의 환자복은 어쩌면 하나 같이 그렇고 그런지. 부자 병원이든, 가난한 병원이든 똑같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죄수복과 함께 가장 멋없는 옷이 아닐까 한다. 만일 병원의 환자복이 기능면에서나 패션면에서나 나아진다면 환자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이참에 환자복의 사복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저자는 김태희도 환자복을 입으면 처량하다고 했는데, 글의 의도는 알겠지만 제목은 그다지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김태희는 김태희다. 김태희가 환자 역할 한 번 안 맡아 봤으려고? 환자복 입혀 놨다고 그 아우라가 어디 안 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환자가 김태희만 같아도 좋을 걸?
솔직히 22년만에 암 환자의 가족이 되었을 때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22년 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참 어렸다. 그리고 병수발을 직접적으로 안 했기 때문에 그저 아픈 아버지만을 안타까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되고 병원에 자주 드나드는 신세가 되면서 병원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암 치료가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졌나? 좀 놀랐었다. 무엇보다 22년 전엔 무조건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살아서 나오던지, 죽어서 나오던지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통원치료를 원칙으로 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정말 좋다고 생각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환자가 됐다는 심적 부담도 큰데 교도소나 다를 바 없는 병원에서 언제까지고 있어야 한다면 숨막혀 못 살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약이 좋아져서 예전처럼 머리 빠지고, 토하고 하는 일도 없다고 햇다. 무엇보다 그 약은 나라에서 95%를 지원해 주고 있어서 환자 본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환자가 마루타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 생체실험에서 성공한다면 계속 그것을 쓰겠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면 기존에 써 왔던 약을 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의료보험 혜택은 받을 수가 없고, 한 번 맞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며, 머리 빠지고, 구토하는 등의 부작용을 환자가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22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22년 전 나의 아버지는 한 달 반만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은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길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22년 동안 의학은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대해 병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현재 내 가족이 겪고 있는 암은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하다는 췌장암을 앓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걸려서 뭔가 모를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암을 두고 '고약하다'는 표현을 쓴 건 병원의 의사였다. 그렇다면 환자가 그 병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덜 고약하며 희망은 있는 것인가? 유독 그 췌장암에 그런 표현을 쓴다면 다른 여타의 암을 앓고 있는 환자는 어찌 생각할까? 듣기에 따라선 자기네들을 너무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 세상의 모든 암은 다 고통스러운데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냐고 항의하지 않을까? 또한 의사가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치료가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라도 잘못돼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방어적 표현이란 걸 알 수가 있다. '그러게 누가 그런 고약한 병에 걸리래?'하는. 그리고 처음 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의 관례라며 검사의 검사를 거듭해 왔던 병원의 과잉 검사("이왕이면 MRI 하나 찍으시죠" 인센티브로 도배된 병원, 160p)를 생각하면 욕이 나올 지경이다. 외국에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CT 촬영은 잘 하지 않는다는데 성한 사람도 아닌 환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촬영을 종용하면 그 환자가 언제 그 병을 떨치고 일어날까?
그만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나의 가족이 입원한 병원은 무슨 병원이라 이름만대도 알만한 대학병원이다. 모르는 사이 같은 병원이 여기 저기 세워졌다.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분에 나는 그 병원 지하 1층에 있는 구내 식당을 드나들곤 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보면 그 병원이 처음 생겼던 때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발전사를 사진으로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구한말 미국의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세웠다던 병원. 그가 한국에 왔을 땐 병자를 낫게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눈부신 발전이 있기까지 인술은 어디 가고 자본주의 논리에 갇혀 저렇게 발전해 왔겠지 생각하면 그 사진들이 그다지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 무엇보다 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컨베이어벨트의 짐짝 다루듯 하는 걸 보면 현대 병원의 공룡화를 의식한 저자의 목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대학병원은 왜 공룡이 되었나'174p).
사실 나는 제 3자지만 환자 본인이 병원에 대해 느끼는 것은 더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치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병원을 더 이상 못 믿겠다고 했던 건 환자였으니까. 환자와 치료자 간에 믿음이 있어야 치료 효과가 좋아진다는 건 상식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의사가 자신을 어떻게 치료하나 지켜보고 느껴야 했던 환자가 나중에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확실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학 전공이라면 적어도 소위 우리나라에 난다 긴다하는 수재들이 하는 공부일텐데 확실히 머리가 좋다는 것과 사람 간의 신뢰를 쌓는 문제는 별개인가 보다. '쓸만한 치료법이 있어도 입 다무는 의사들. 177p'을 읽다보면 정말 나의 가족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입다무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가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알고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확실히 현대 의료는 사람을 치료하고 고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특히 '"당신, 암 걸렸다"는 소식 잘 전하기,137p'를 읽다보면, 아직도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그날 이 소식을 가족인 우리 중 아무도 환자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건 두고 두고 가슴 에이는 아품으로 남는다. 마치 가족의 의무를 방기한 것만 같고, 가족이 아닌 담당 레지던트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환자 본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보호자로서 가족이 암에 걸렸다는데 그저 하늘이 노래져 그 정신 챙기기도 바빴다. 어떻게 그 엄청난 소식을 가족이 직접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린 그 레지던트에게 나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보호자 보단 의사가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보호자가 뭘 알아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은 그랬을 때 환자의 반응은 참으로 여러 가지란다. 그래서 요즘엔 의학교육에 의사들이 '나쁜 소식 잘 전하기'를 교육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환자와 가족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다음 대책을 잘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는데,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에게 이 나쁜 소식을 최초로 알린 그 레지던트는 나름 전하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작 환자에게는 끝까지 사실을 확실하게는 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암으로 가기 전 단계로 알고 있었다니 말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난 '이건 또 뭐지?' 했다. 모르긴 해도 그 레지던트는 처음엔 넌지시 운만 띄었던 것 같고, 나중에 치료가 진행이 되면서 눈치를 챌 수 있도록 했던 것도 같다. 또 실제로 그 레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과로 전출을 갔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중에 느껴야 하는 실망감은 배가가 된다.
이렇게 난 지난 몇 달 동안 병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하나 둘씩 쌓아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에 암에 관한 책들을 읽어 가면서 암에 대한 대표적 3가지 치료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대하면서 그것은 더욱 배가가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회복된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암 치료가 새로 또는 재발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집 환자가 천운으로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면 이 비판은 다소 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그런 행운은 우리에게 주워지지 않았기에 나는 아직도 병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겠다. 이럴 때 이책은 병원과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 다행이고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특히 저자는 독자의 알 권리를 나름 잘 충족해 줬다고 생각한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수준이 짐승적일 것만 같은 세상에, 이혼한 전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 준 여자가 있다는 건 이책이 아니면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전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그 특유의 모성이 그런 결단을 낳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설대위라는 의료 선교사가 있어 당시 할수만 있으면 유학만 가려고 했던 우리나라 의학도들에게 그렇다면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겠느냐고 했던 것도 저자가 아니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문제 많고 탈도 많은 의료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20세기에 의학이 싸웠던 것이 흡연이었다면, 21세기는 나트륨과의 전쟁이라고 했을 때 그 최전선에 있는 것도 병원이고 보면 확실히 우리의 의료는 국민 건강의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의료 평론가란 직업이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의사생활을 10년쯤 하다 때려 치우고 기자의 길로 들어 섰단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 중독자여서 매일 3시간씩 신문을 읽어 제꼈다고 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사의 의학 담당 기자가 되게 했다. 그가 기자가 되었을 시절엔 의학 담당 기자들은 의학 상식 같은 것만을 단신으로 내보내는 정도로 소극적인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파헤치고 전달하려는 일에 몸바쳐 일했고 보다시피 내망현(내시경, 망원경, 현미경)이라는 책을 펴냈다. 어찌보면 다소 흥미 위주로 소제목을 잡은 것도 같은데 저자 특유의 우리나라 의료 사회 병리를 잘 집어내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읽고 난 느낌은 아무리 우리나라 의학계가 선진국 수준 못지 않다고 해도 의료 현실은 아직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그런 것 같다. 계속 의료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국민 개개인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할 거라는 것. 이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