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 없는 당신에게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임정재 옮김 / 타커스(끌레마)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혜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내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M 본부에서 하는 <여왕의 교실>이다. 처음엔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 봐야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사실 제목에서 느끼는 것은 대충,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상에 들뜬 선생님이 아이들을 신사와 숙녀로 만드는 다소 트렌디한 드라마는 아닐까 싶기도 했고, 아니면 학교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드라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기심 반, 의심 반 하는 드라마가 어딘가 모르게 좀 독특한데가 있어 이내 보게 만든다. 그것은 무엇보다 6학년에 부임한 마여진 선생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이 마여진 선생은 여느 선생과는 다르다. 전혀 웃을 줄 모르며, 무엇 때문인지 한 여름에도 우중충한 옷을 목까지 감아 오르도록 입고, 아이들에겐 혹독하게 공부만 시키는 선생님이다. 같은 동료 선생님에게도 어찌나 야멸찬지 도무지 빈 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차별과 냉대를 일삼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일부러 싸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배울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왕싸가지' 선생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선생님의 또 다른 점은, 아이들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 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아이들을 위기에서 건져 준다는 것이다. 마치 짱가처럼. 거기엔 또 남다른 촉수가 있는데, 그녀는 늘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마여진 선생은 현실에선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캐릭터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진짜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는데 있다. 그녀는 어쩌면 부도덕을 통해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의 집단 심리를 이용해 아주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초부터 인기 많은 좋은 선생이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반 전체를 쥐고 흔드는 악인이 되기를 자처했으며, 그 가운데 아이들의 이기적인 심리를 여지 없이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이런 이기적인 힘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를 은연 중 가르쳐 주는 것도 같다.  

 

이렇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보통의 (초등학교)선생님이라면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다가 또 적당히 야단치다가 상급학교로 올려보내는 것이 다가 아닌가? 아이들 가운데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지 모른다. 눈높이 교육이라고 해서 친구 같은 선생이 되야한다는 묘한 강박에 사로잡혀 적당히 아이들 비휘나 맞춰주고, 아이들 편에서 아이들을 변호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런 것과 전혀 다른 마여진 선생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지를 안다면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반기를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가르치기엔 안 그래도 상급학교에 올라 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현실이 녹녹치 않음을 알텐데 그걸 굳이 6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할 것이다. 아이면 아이답게 꿈을 꾸게 만들고, 도덕적 인간이 되라고 적당히 훈계하면 그만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엔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권리를 선생들 스스로가 방기하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긴 오늘날의 교사가 지식 전수 외에 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보면 결과적으로는 선생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오죽 나쁜 선생님으로 찍혔으면 '마녀 선생'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하지만 그런 선생님 덕분에 조금만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불평만 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 솔직히 6학년이면 초등학교로선 최고학년이고, 자신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란 다소의 자만한 생각도 있으리라.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선생님이 아니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어리광만 부리고, 불평만 한다면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평안함 속에서는 발전이 없으며, 문제와 고난을 헤쳐나가야 발전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렇게 하는 마녀 선생님의 의도가 뭐냐고. 또한 그것은 선생님을 잘 만나고 동시에 잘못 만난 덕분에 그들의 지혜는 일취월장하며, 그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아이들로 성장한다. 지혜는 그런 것이며, 그렇게 오는 것일게다.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숨겨두고 싶은 책은 있다                  

 

책은 함께 그 지식을 공유하자고 있는 것일게다. 그래서 어떤 책은 소문이 났으면 하고 바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책만큼은 혼자만 알고 있으면 하는 책이 반드시 있다. 사실 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때 미치도록 책을 좋아해(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책을 마구 사 들였던 적이 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 비싼 책은 못 사고, 어디서 책을 싸게 판다(물론 헌책은 아니고)하면 그 앞을 그냥 못 지나고 꼭 두서너 권씩 산 적이 있다. 이렇게 그 좌판에서 우연히 그의 책을 발견하고 가방에 다른 책과 함께 휩쓸어 담았나 보다. 그책의 이름은 '세상을 사는 소중한 지혜(아이템북스 간)'였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책을 사놓고 한동안 읽을 생각을 못했다(아니 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내가 그런 책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그렇게 다시 내 손에 들려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의 시집 만큼이나 낱장에 글씨는 몇 자 박힌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또 언제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난 결코 활자중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도 글자가 대체로 촘촘히 박힌 책들을 좋아 했기에 나는 이 책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지닌 위력를 모르지는 않는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누군가? 17세기 중세시대 수도사이면서 철학자가 아닌가? 뒤늦게 무슨 생각에선지 그의 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줄을 쫙쫙 쳐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그런 책이 무섭지 않은가? 반드시 활자가 촘촘히 박힌 책이라고 해서 좋은 책은 아닐 수 있다. 그런 것처럼 활자는 듬성듬성 하다고 우습게 볼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위력은 그런 책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처럼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이책을 읽었을까? 후회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책은 정말이지 나만 알고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드는 생각은 이런 책에 대한 세상의 홀대였다. 당시의 출판 가격도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더구나 읽는 사람이 없어서 폐기처분되기 전에 덤핑으로 단 몇 천원에 팔리고 있었으니 정말 좋은 책을 알아 보는 안목이 이렇게도 없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하긴 그래서도 많은 사람이 못 알아 봤을테니 나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일까? 그리고 한참 후에 이책 보게 되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그라시안의 책을 읽고 지혜에 눈을 뜨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면 나는 언제 지혜를 뽐내 보겠는가? 그래서 그의 책은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문장     

 

사실 그의 문장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성경의 또 다른 잠언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하루에 한 장씩만 꾸준히 읽어가면 지혜로워진다는 성경의 잠언 말이다. 그런 것처럼 그의 책도 가까운 곳에 두고 거듭 읽어 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잠언은 도덕과 윤리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보단 사는 방법 또는 처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처럼 그라시안의 책도 그런 책이었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기 보다 뭔가 통찰적이고 때론 서늘하며, 교활한 느낌마저도 든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을 보고도 그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운을 몰고 온다' 중에서(105p) 

 

또는,

현명한 사람은 바보보다는 적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역사상에는 적이 가지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해서 엄청난 어려움을 해결하고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아첨이 증오심 보다 위험하다. 상대의 증오심은 자신의 결함을 고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만 아첨은 결함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의 증오심을 거울삼아 행동한다. 이는 상대의 애정을 거울삼아 행동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혜로운 태도이다.

                                                                    '경쟁상대에게 배워라'(117p) 중에서

과연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롭지 않은가? 자신의 주위에 이렇게 은밀하며 우아하기까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난 그라시안의 책을 손 가까이 두려했고, 나만이 아는 책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혜는 어리석음에서 가치가 있고, 빛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당신에게'라니. 신랄하기까지 하다. 이 제목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 서두에서 말했던 '여왕의 교실'에 나오는 그렇고 그런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흔히 우리 주위에서 보는 선생님들이다. 차라리 그런 선생님 보단 확실히 나쁜 선생님이 더 나을 듯 싶다. 마여진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휴머니스트도 못 되면서 현실감각도 없지 않은가? 아마도 '너무나 인간적'이란 말은 휴머니스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편하고 좋은 게 좋은 범인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제목은 그라시안이 직접 지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출판사나 편집자의 꼼수 같기는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그라시안의 초기작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책은 '영웅'이나 '완전한 신사' '신탁' 같이 몇 글자 안으로 떨어지는 제목이 대부분이다.  

 

세상은 꿈을 가진 자의 것이라고 마치 꿈동산인 양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상은 꿈동산은 아니다. 어찌보면 세상은 그저 실험의 장이고, 혹독한 현실의 장이다. 물론 세상을 사노라면 때론 꿈과 비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좋은 스승이나 멘토를 만나기도 해야겠지만 그런 사람의 위험은 외골수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매스컴과 광고나 교육은 꿈을 이루라고 자극만 하는지 모르겠다. 전문인 우논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전문인이 되라고 하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게 꿈이 있고, 전문인이 대우 받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거기에도 모종의 음모가 있는 지 누가 알겠는가? 단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 주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지혜를 쌓으라고 말한다면 너무 책장수 같은 소리일까?

 

책은 적용 가능해야 한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도 좋은 책이긴 하지만, 곱씹게 되고 적용 가능한 책이 더 좋은 책은 아닐까? 그런 책은 읽다보면 좀 뜨끔하게 만드는 구절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다 마지막 쳅터인 5장 '가장 중요한 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라'에서 주로 뜨끔한 느낌을 많이했다. 그중 '완성되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마라'란 글에서는 한 방 제대로 먹은 기분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요리하는 과정을 본다면 식욕이 반감되거나 오히려 불쾌감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거장들은 모두 시작 단계에 있는 작품을 좀처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이러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자연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자신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232p)    

예전에 대본 쓰는 일을 했을 때 나는 주로 초고나 재고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을 하다 보면 나의 원래 대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렇게 저렇게 재단된 작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굳이 애써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대충의 얼개만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채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되면 작가로서의 책임의식도 약화되고, 어느 틈엔가 초라해진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나는 다시 대본 쓰는 일을 했는데 여전히 예전의 태도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그럴 때 한 사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조롱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고, 또 한 사람에게선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많음을 알고 음흉한 눈빛을 애써 감추는 것을 보았다. 전자는 나와 잘 아는 사이었고, 후자는 뭐든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시작 단계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이책을 보고야 비로소 알았다니! 어느 바닥을 구르던 거기엔 꼭 나를 이용해 먹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성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복수'란 말에 나는 심하게 동의한다.

 

사실 그라시안의 책을 읽으면 궁금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는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원에만 있다고 해서 시야가 좁은 인간이 되란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넓고도 깊어 어디서 과연 이런 문장을 길어 올렸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슬픈 건 이런 조언을 해 줄 스승이 우리 주위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 할 것도 아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 않은가? 옛 성현은 그러한 삶을 살아보고, 공부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고 똑똑하지 못하다면 이 책을 거듭해서 읽고, 심지어는 외워두고 삶에서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읽은 그라시안의 이책은 역시 많은 사람이 읽지 말았으면 좋겠는지는 잘 모르겠다. 쓰다보니 의외로 많은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와 읽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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