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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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가의 이런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가처럼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직업이 또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은 소설 쓰기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자기 고백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지 않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런 책은, 작가가 되는 것은 인생을 사는 끔찍한 방법이며,  빈곤과 무명생활, 고독 말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폴 오스터가 아무리 뜯어 말려도, 나는 나만의 언어로 나의 이야기를 완성시킬 책임과 권리가 있다고  담대히 외칠 수 있을만큼 약발이 있다. 

 

이젠 소설로 밥벌어 먹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 한 권쯤 쓰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 아직 젊은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연수 작가가 그 이름을 올렸다.

 

 

한 가지 일을 20년이나 했다면...

 

김연수 작가가 아직 젊은 작가라고 하지만 그가 소설을 쓴 세월이 벌써 20년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을 20년이나 했다면 그 일에 좀 할 말이 많겠는가? 김연수 작가도 그랬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유머러스하면서도, 나름 묵직하고 글자 하나 하나에 공이 들어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솔직히 '김연수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 확실히 재밌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연수 작가가 뭔지 모르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소설 쓰기에 관해 알고, 듣고, 본 바를 전복시키는 김연수 작가 특유의 사고 방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린 흔히 소설을 쓰고자 할 때 먼저 플롯을 정하고 써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김연수 작가는 오히려 플롯을 모르고 쓰라고 충고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고는 결론은, 완벽한 풀롯을 짜면 짤수록 그 소설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09p~). 그런데 그 얘기가 논리적으로 보나 설득력으로 보나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 어디쯤 가면 소설가더러 조삼모사하라고도 한다(본문 '욕망의 말에 불타지 않는 방법은 조삼모사뿐'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조삼모사가 얼마나 사특한(?) 단어며 태도인지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에게 조삼모사라니. 그런데 그 또한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그럴 듯 하다. 

 

또한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알고 있는데 저자는 다상량 즉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도 한다. 그건나도 동의하는 바다. 생각만 많이 했다고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난 지금쯤 거의 100권이 넘는 책을 썼을 것이다. 100 가지의 생각보다 한 가지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 더 작가답다.

 

게다가 핍진성은 또 어떤가? 작가는 진실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솔직히 난 이런 단어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이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견해, 다른 의견은 이 책 곳곳에 나타난다. 이쯤되면 김연수 작가는 소설을 신봉(?)하는 세계에선 새로운 교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작가의 생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비슷비슷하고 뭔가 범주화된 생각들속에 김연수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은 단연 빛이난다. 또한 어느 부분은 정말로 동의 하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드보일드 형의 소설가도 있고, 자멸파 형의 소설가도  소설을

  다 쓰고 나면 자신이 황희 정승 스타일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중략)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이해 없이 소설가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 (57~58쪽)

나는 김연수 작가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 날 나의 싸부가 그렇게도 강조해마지 않던, 작가는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와 같을 것이다. 

 

어떠한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무조건 나의 관점의 옳음을 말하기 보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어떤 상황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유추하고 추론해 본다. 그것은 그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옳건 그르건, 독자가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건 안하건 그건 순전히 독자들을 몫으로 돌린 채 말이다.      

 

옛 속담에도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처녀가 애를 베면 안 되는 세상에서 작가는 바로 처녀가 애를 벨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추적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황희 정승이 되어버리는 수 밖에. 

 

 

소설가의 숙명

 

그런데 이것을 전지적 싯점에서 쓴다고 해서 소설가들을 신적인 존재인 양 한다고 하는데,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조차 신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어디서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인가? 그 작가만이 그 이야기를 잘 알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단 그런 전지적 존재의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김연수 작가는,

작가는 그 시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그 시공간을 초월해서도 모르는 게 없는 존재여야만 한다. ...... 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전지적 작가에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물음에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그러므로 소설가는 앞으로 오 백 년은 더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 (243p)

그렇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숙명일 것이다.

 

어느 작가는 소설을 가리켜 잡설이라고도 했다. 그건 겸손하게 자신을 비운 성육신쯤되는 말은 아닐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뭐랄 사람 없고 믿게 만드는 힘. 이게 소설은 아닐까. 

     

그런데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하는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반드시 과거를 복기하기를 좋아하는 소설의 습성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옛날 초등학교 시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무슨 교과서에 방송국 PD인 외삼촌이 철없는 조카를 위해 조카를 주인공으로 한 대본인지 동화 한 편을 써서 조카를 깨닫게 한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그런 것처럼 소설은 가끔 "너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쓰는지도 모르겠다. 삼촌은 직접 조카를 따끔하게 야단을 치거나 조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우회적 방법을 쓰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기 전에  똑바로 살라고 외치기 위해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노가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이 글이고 소설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습작이지만) 나의 소설 대부분도 그렇다. 왜 그런가? 그것은 소설가들은 소설로만이 항거할 수 있고 복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어느 배우가 속이 상해 울면서도 연기할 때 우는 장면에서 이렇게 울어줘야지 속으로 다짐했다고 하는 것처럼, 작가 역시도 천인공노할만한 일이 있거나 매우 슬픈 일을 만나면 열심히 화내고 슬퍼하면서도 머리 한켠에선 벌써 원고지에 이 사건을 옮겨적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집으로 돌아와 자기 책상위에 앉아 깨작거리고 쓰는 것이다. 아라크네의 후예답게 말이다.    

 

또한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만이 다 일 것 같은 세상에서 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는 그 작품을 쓰게 만드는 대상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 대상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쓰거나, 그를 세상에 폭로하거나 알리기 위해 소설이란 서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 작가는 작가가 욕 먹을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소설,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가?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키는 건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흔히들 입 달린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몇 십권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는 소설로 쓰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소설가와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어쨌든 쓴다. 그러나 소설가가 아닌 사람은 말만 그렇게 하고 쓰지는 않는 사람이다. 왜 안 쓰는가? 소설 쓰는 거 생각 보다 쉽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소설가가 되는 것일까? 소설가지망생은 매번 새로 쓰고 매번 허문다. 그러느라 소설의 끝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그 소설의 끝을 보는 사람, 맨 마지막 최종 마침표를 찍는 사람만이 소설가가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소설 쓰는 거 정말 쉽지 않다. 어떤 땐 글을 쓰면서도 뭔가 알지 못하는 힘이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도록 나를 밀쳐내는 것만 같다. 여러가지 원인을 따져 볼 수가 있겠는데, 내 경우는 너무 잘 쓰려고 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때로 쓰기도 전에 좌절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습작에 불과한데 언제 써서 언제 세상의 빛을 보고, 언제 소설가가 되어 원고료를 손에 쥐어 보겠는가? 특히 소설 쓰기에 있어 갈길은 구만린데 난 이제 개미 걸음이다. 언제 종착점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 쓰고 아예 처음부터 그런 꿈을 꾼적이 없는 사람처럼 입을 딱 닫고 만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미련이 남고, 자신이 의식하든 안 하든 여전히 그 일을 위해 뭔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어쨌든 죽기 전에 그 일을 해야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김연수 작가는 정말 친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쓰기의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할 수만 있으면 느리게 글을 쓴다' 고 했다.

 

아, 이 무슨 굿뉴스란 말인가. 괜찮은 작가라면 할 수만 있으면 미친 듯이 써서 내가 글을 쓰는지 글이 나를 쓰는지 모르겠다는 신기어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연수 작가는 마라톤 잡지인 <러너스 월드>의 편집장이었던 조 핸더슨의 LSD 달리기를 소개한다. 

 

흔히 달리기는 무조건 죽을 고생을 해 인간승리를 이루어내는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LSD는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으니 다른 사람을 이기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연수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접목시킨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려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자신의 문장으로 쓰려는 것들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 (중략) 잘 쓰려하거나 많이 쓰려거나, 심지어 뭘 쓰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자신이 잘 몰랐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흥미롭고,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뜻밖의 기쁨이다. 날마다 이 재미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다.(232쪽)

 이것은 정말 글쓰기의 획기적이면서도 참신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말한 분노나 누군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서사적 방법을 쓰는 것 보다 긍정적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앞서 말한 황희 정승의 사고법의 새로운 계승이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확실히 그건 흥미롭고 새롭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글을 얼마큼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3쪽)     

이것은 확실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무조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많이 해 보라고 말했던 어느 저자의 그것과 배치된다. 어떤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는 아닐까? 하지만 난 성격상 1등의 정신은 없으니 김연수 작가의 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김연수 작가는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어찌보면 서글픈 말이다. 심지어는 그는 소설가의 데뷔작은 검은색이어야만 한다고도 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불처럼 일어나기도 하지만 불은 곧 잦아들고 그을린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과 대조를 해 보면 다음 차기작을 쓸 때 시인은 다시 불을 찾아 나서지만 소설가는 불이 아니라 건강이나 체력을 더 신경 써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니 다소 엉뚱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소설가란 과정을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결과로만 얘기되어지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소설가가 그런 것이라면 이건 딱 내 스타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경쟁을 해서 이길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업적주의형 인간이 못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소설가의 꿈을 다시 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 온 책중 나에게 가장 많은 용기와 격려를 준 책이 아닌가 싶다. 작가에게 감사하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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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2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다 해도 책 한 권 나오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서 다작하는 작가들이 대단하면서도 능력이 의심되기도 해요. 일부 작품은 읽어보면 대표작이나 베스트셀러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2% 부족한 것도 있으니까요. 심하면 평소 작가의 글답지 않은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때도 있고요.


stella.K 2014-12-23 11:5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서 김연수 작가가 <작가란 무엇인가> 추천사에서 그러지 않든,
재능에 대해서 물어 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난 그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로서 소설가는 좀 특별하게 바라봐 줘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 정말 어떤 작가든 항상 좋은 작품을 내는 건 아니거든.
그것을 인내해 주고, 기다려주면 좋은데 독자의 입장에선 그러긴
쉽지 않을 거야. 시간과 돈 대비 떨어진 작품 읽으면 화가 나잖아.
그리고 좋다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이래저래 소설가로 산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것 같아.ㅠ
 
위기십결 -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열 가지 비책
마수취안 지음, 이지은 옮김 / 이다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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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이 재밌는 건, 주인공 장그래가 바둑의 원리를 직장이란 전쟁터에 적용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통찰한 것에 있을 것이다.

 

사실 장그래에게 바둑은 그의 전부이자 아픔이었다. 아픔이어서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거였겠지만 이미 그것이 자신을 지배해버린 이상 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니 자신이 아픔이 됐던 것이 또 다른 세계에선 새로운 안경 구실을 하게 되니 그건 장그래에겐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뭔가의 특기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화나는 일이있고, 누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장그래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왜 화를 내지 않냐고, 어떻게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처럼 참고만 있냐고 뭐라고 하지만, 그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뿐이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그에겐 묵직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난 솔직히 자기계발과 맞물린 현대 감정심리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즉 참지 말아라,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라 하는 것들 말이다. 물론 인간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구조나 인식이 바뀌어야 될 일을 그깟 감정 하나 다스렸다고 개인의 삶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는가? 물론 감정조차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어디가서 병든 나를 고치겠냐마는. 술 먹고, 교회나 사찰 가서 힐링 하는 것도 한계는 있지 않겠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나를 변화시키라고 했다. 그것이 더 빠른 길이라고. 거기에 나도 어느만큼은 동의한다. 그러나 나만 변화시키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 거기엔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전략이 수립이 되어야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는 전제 또한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기울에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나 뭐라나. 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를 세울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원리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이제 너무 흔하게 많이나와 있다. 한 15년 전쯤 로버트 그린의 저작물을 필두로 해서(물론 그 전에도 없진 않았겠지만 왠지 이 사람의 저작물이 가장 먼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싶다) 말이다.

 

자기계발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책은 인문학적인 요소를 접목시키고 있어 나름 좋아하긴 한다. 그런데 읽기는 녹녹치 않다. 무엇보다 중국인이 쓴 만큼 중국 그것도 춘추전국시대에 나올 법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화로 삼아 썼기 때문에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역사를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미생이 완생으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는 각자가 고민해 봐야할 일이긴 하겠지만, 이 책은 자신의 인생을 완생시킨 사람들(또는 그 반대도 있다)과 그들의 방법이 풍부한 예화와 함께 들어있어 읽어두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언제나 파이팅인 우리네 미생을 위하여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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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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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아련하다.

나 역시 서울에서 나고 지금까지 서울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 한 번도 서울을 주재로한 제법한 글 한 편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어느 때 한 번 서울을 구석구석 다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생색은 낼 수는 있다. 숨겨진 곳이 있을지 몰라도 사대문 안의 대표적인 곳은 한 번 이상은 다 다녀보진 않았을까?

그런데 또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을 정말로 가 보기는 한 걸까 의문스럽다. 다 거쳐가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거길 잠깐 있다 온 것일뿐 그곳을 느끼고, 온전히 돌아다녀 보고, 꼼꼼히 관찰하고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앉아서 잠깐 음미하는 정도가 다는 아니었을까.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의 모든 작품의 배경은 파리라고 했다. 그런데 확실히 파리 사람들은 남다른 예술적 취향이 있는 것 같다.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의 거리'도 나는 그냥 작가의 은유적 제목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파리에 있는 어느 거리의 이름이란다.


그런데 또 알고 봤더니 우리나라도 그 비슷한 시도가 있지 싶다. 이를테면, 가로수길이니 소나무 길이니 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옛적의 동 이름을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낯설기도 하거니와 프랑스의 그것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모자란다. 그렇다고 내가 프랑스 찬양주의자라고 오산하면 안 된다. 내가 프랑스를 좀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그 나라는 그 나라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단지 그런 프랑스 사람들이 조금은 남다랐다는 것뿐. 그러던 차에 마침 읽었던 책이 이 책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여서 김에 든 생각이었을 뿐이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이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이 책의 표제작이었다. '오후 세 시, 학림다방' 그리고 그것은 전혜린을 다룬 글이기도 했다. 누구든 전혜린을 안타깝고, 아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전혜린이 안타깝고 아련하다면, 기형도도 그렇고, 박경리와 박완서도 또 멀리는 윤동주도 다 같은 한 마음이 든다. (윤동주는 그렇다해도)어쩌면 그리도 동시대 그것도 서울이란 공간에서 나거나 살았고 나 역시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존재가 무색해진다.

인간이 어차피 한 번 살다가 죽는 거라지만 이렇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만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밤에 파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클럽에서 한꺼번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또 얼마만한 행운이랴. 아마 나 같은 사람은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소 황당한 영화 보다 꼼꼼히 쓴 작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이야기가 더 현실적이긴 하다. 그것도 서울이란 공간을 작가가 재해석 했는데 글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렇게 읽으니 서울이란 공간이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나날이 화려해진다는 건 그만큼 자본주의의 때를 덧입고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해야 하고, 또 그만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가는 것을 차갑게 지켜봐야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런 서울이 있었음을 자각하게 해 주는 작가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학림다방을 나도 아주 오래 전에 간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로 어디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도 그곳의 지명을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라고 하면 어떨까?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기억하고, 전혜린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이책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이 서울을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런데 부제에 '산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산보는 산책의 일본식 표현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산책이 합당한 표기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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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1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보가 산책과 같은 말이지만, 일본어식 표현인 것은 맞아요. 서울에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구역이 꽤 많던데요. 제가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서울에 구경할만한 곳이 많은 것 같아요. 정작 서울에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모르거나 시큰둥하게 여기지만요.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벤야민처럼 서울 아무 곳이나 걸어 다니고 싶어요.

stella.K 2014-12-13 11:3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출판사가 의식을 한 건지 안한 건지...
너네 동네도 숨겨진 곳이 많을 텐데 말야.
나는 세련된 도시 미관을 자랑하는 곳도 싫다곤 할 수 없지만
북촌이나 종로, 광화문 같은 옛스러운데가 좋더라.
나도 서울 아무 곳이나 걸어봤으면 좋겠는데 마음만 그런다.
다리도 안 좋고 무엇보다 귀차니스트라...ㅋ
 
재미있는 법률여행 3 - 형법 재미있는 법률여행 시리즈 3
한기찬 지음 / 김영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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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법 없이도 산다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간혹 있긴 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뭐 그만큼 착하게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긴 하겠지만 이 말도 뒤집어 보면 그 사회의 법 체계가 발달이 안 됐거나, 법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는 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의 반대 말이 악이 아니라 무지라고도 했다. 그러니 이제 어디가서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참 법에 대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뭐 그것을 몰라도 사는데 별로 불편함을 못 느끼니 그럴만도 하다. 또한 법은 법관이나 알면 되는 것이지 일반인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어려워 법전 같은 건 읽을 수도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법전에나 갇혀 있을 법한 법들을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3권은 형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총 5권으로써 법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했다. 새삼 그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주 재밌는 건 아니다. 법에 대한 핵심만 간략히 다루어서 다소 건조하고 여전히 재미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루한 건 또 아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 줄만 하긴 하겠지만, 어디 책이 재밌는 것만 읽어야 책인가?

 

살다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 이런 책 한 번쯤 읽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다는 그 일이 알고 보면 법에서 다룰 법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예측 가능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우리가 잘 몰랐다는 것뿐.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자랑도 아닐 것이다.

 

요즘엔 법이 착해져서 무료법률도 많이 생겼고, 생판 모르고 가도 맞춤형으로 상담도 잘 해주는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우리나라 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 무르다는 것이 또한 중론이기도 하다. 특히 성 관련한 범죄나 아동 학대법 같은 건 구형량이 선진국에 비하면 높지 않다는데, 한편 역지사지 인정으로 풀 일도 예민하게 받아들여 법에 너무 의지하려고 한다는 말도 있으니 뭐든 중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쳅터의 길이가 길지 않아 아무대나 손길 닿는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다. 법은 반드시 죄를 벌하기 위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 함께 서로에게 피해 줌이 없이 잘 살자고 있는 것이다. 읽다 보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조금 눈이 열리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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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 -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나를 잡아준 책들 인문낙서 1
홍정 지음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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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처음을 보니, 저자가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었는가가 기술되어 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사고사와 함께 동생의 자살이 저자로 하여금 철학을 하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저자에게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그것은 저자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으며 축사로 침잠해 들어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확실히 인간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깊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도 오래 전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또 얼마 전 오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내 삶 또한 진지해지고, 겸허해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천수를 누릴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날 나의 아버지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실 거라고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버지는 또 그럴 수는 있어도 설마 나와 같은 세대를 살았던 오빠는 그렇게 빨리 허망하게 가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한다는 건 저자나 저자의 책을 읽었던 나나 당시로는 충격이고 아픔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과제로 남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과제 말이다. 

 

그 문제에 답을 달아 보고자 저자는 축사로 들어갔다. 축사라면 가축을 가두는 건물 같은 것을 의미할 텐데 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불편하고 외따로 떨어진 곳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저자에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책을 읽으니 문득 왜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는지 새삼 알 것도 같다. 

 

개나 돼지는 짐승이고 죽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죽으면 흔적이 남는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삶의 흔적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물어지지 않는다면 그 영혼이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인간이 겪는 고난이나 고통이 인간의 삶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고난이 철학을 하게 했겠지만, 나는 원래부터 의지했던 기독교 신앙이 깊어짐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저자가 철학에 나름 깊이 천착한 흔적이 역력하긴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제가 '인생의 힘든 고비에서 나를 잡아준 책들'이라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게 사유는 깊지만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어 보인다. 

 

책은, 어차피 인간은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으니 고난이 닥쳤을 때 피해가지 말고 맞닥트려 보라고 권면하는 책 같다. 이 책에 소개된 몇 백 년을 견딘 고전의 저자들도 그 고난을 피해가지 않고 맞닥트리므로 그러한 위대한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렇게도 어려워마지 않았던 니체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 것도 적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좀 독특하다. 고백적 철학 개론서쯤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읽기엔 녹록치는 않다. 하긴 철학이 원래 녹록한 학문은 아니지 않는가. 철학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이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읽을 생각하지 말고 조금씩 잘근잘근 씹듯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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