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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이 참 아련하다.
나 역시 서울에서 나고 지금까지 서울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 한 번도 서울을 주재로한 제법한 글 한 편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어느 때 한 번 서울을 구석구석 다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생색은 낼 수는 있다. 숨겨진 곳이 있을지 몰라도 사대문 안의 대표적인 곳은 한 번 이상은 다 다녀보진 않았을까?
그런데 또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을 정말로 가 보기는 한 걸까 의문스럽다. 다 거쳐가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거길 잠깐 있다 온 것일뿐 그곳을 느끼고, 온전히 돌아다녀 보고, 꼼꼼히 관찰하고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앉아서 잠깐 음미하는 정도가 다는 아니었을까.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의 모든 작품의 배경은 파리라고 했다. 그런데 확실히 파리 사람들은 남다른 예술적 취향이 있는 것 같다.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의 거리'도 나는 그냥 작가의 은유적 제목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파리에 있는 어느 거리의 이름이란다.
그런데 또 알고 봤더니 우리나라도 그 비슷한 시도가 있지 싶다. 이를테면, 가로수길이니 소나무 길이니 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옛적의 동 이름을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낯설기도 하거니와 프랑스의 그것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모자란다. 그렇다고 내가 프랑스 찬양주의자라고 오산하면 안 된다. 내가 프랑스를 좀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그 나라는 그 나라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단지 그런 프랑스 사람들이 조금은 남다랐다는 것뿐. 그러던 차에 마침 읽었던 책이 이 책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여서 김에 든 생각이었을 뿐이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이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이 책의 표제작이었다. '오후 세 시, 학림다방' 그리고 그것은 전혜린을 다룬 글이기도 했다. 누구든 전혜린을 안타깝고, 아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전혜린이 안타깝고 아련하다면, 기형도도 그렇고, 박경리와 박완서도 또 멀리는 윤동주도 다 같은 한 마음이 든다. (윤동주는 그렇다해도)어쩌면 그리도 동시대 그것도 서울이란 공간에서 나거나 살았고 나 역시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존재가 무색해진다.
인간이 어차피 한 번 살다가 죽는 거라지만 이렇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만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밤에 파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클럽에서 한꺼번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또 얼마만한 행운이랴. 아마 나 같은 사람은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소 황당한 영화 보다 꼼꼼히 쓴 작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이야기가 더 현실적이긴 하다. 그것도 서울이란 공간을 작가가 재해석 했는데 글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렇게 읽으니 서울이란 공간이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나날이 화려해진다는 건 그만큼 자본주의의 때를 덧입고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해야 하고, 또 그만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가는 것을 차갑게 지켜봐야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런 서울이 있었음을 자각하게 해 주는 작가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학림다방을 나도 아주 오래 전에 간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로 어디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도 그곳의 지명을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라고 하면 어떨까?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기억하고, 전혜린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이책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이 서울을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런데 부제에 '산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산보는 산책의 일본식 표현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산책이 합당한 표기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