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화가 좀 나 있었다. 작년 말, 내가 고객으로 있는 통신사에서 새 상품을 소개 받았는데 들을 땐 혹해서 가입을 하겠노라고 했는데 그러려면 기존에 가입한 상품을 해지하고 다시 등록 해야 한단다. 그러면서 내 주민등록 뒤의 6자리를 가려서 사진으로 찍어 전송해 달라는데 원래 기계치에다 사진 찍는 건 영 젬병이라 자꾸 다시 찍어 보내 달란다. 사진 못 찍는 사람은 새로운 상품에 가입도 못하는 건가? 화도 나고 그동안 사진 찍는 것에 신경을 너무 쓴 나머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아무리 서비스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그들의 상술에 놀아 날 필요가 있을까 결국 나는 새 상품의 등록을 취소하고 기존의 상품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나중에 문제 생길까 봐 기존 상품 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냐고 재차 확인까지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런 일이 있는지 한 달이 좀 지났을까? 어제 문자 한 통을 받았는데 주민등록증 등록번호 뒷자리를 가리고 사진을 찍어 보내 달란다. 결국 나는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지만 일단 찍어 보내달라니 몇 번을 찍어 그중 제일 괜찮다 싶은 두 장을 골라 보내주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제는 퇴근 후라 연락이 없었고, 오늘 다시 찍어 보내 달라는 문자가 왔다. 역시 곱게 넘어갈 일이 아니구나 싶어 일단 다시 찍어 보내주면서 이것 이상으로 잘 찍을 것 같지 않으니 양해 바란다며, 사진 못 찍는 사람을 위해 다른 방법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그러면 팩스로 보내 달란다. 순간 난 참았던 화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집에 팩스가 있을 리 없고, 보내려면 이 추운 날 문방구를 가야 한다. 그런데 그 문자 뒤에 달려 온 문자가 더 걸작이다. 번거로우실 것 같아 처음부터 말씀 안 드렸다고. 참고로 그 전화기 목소리 주인공은 한 달 전 가입과 취소 과정에서 익히 들었던 목소리다. 그러니까 내가 사진 문제로 옥신각신 했던 사람이란 것이다. 아무튼 난 문자로 이러지 말고 전화하라고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전화가 왔고 그 다음부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단지 그 전화에서 내가 알아 낸 것은 여기는 대리점이고 본사로 전화해 기존 상품을 다시 사용하겠다고 하란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진작 가르쳐 줄 일이지 일을 뭐 이런 식으로 하나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식거리며 알겠다고 하곤 본사로 전화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곳의 전화 받는 안내양들은 상냥하지만 사무적이라 정감이 없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젊은 여성이 내 전화를 받았고, 신원확인을 위해 생년월일을 물어 본다. 나는 생각 없이 생년과 월일을 가르쳐 줬는데 그게 또 하필 오늘 1월 10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 없이 가르쳐 준 건 이게 나의 진짜 생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마다 챙기는 생일은 따로 있고 이건 내가 혹시 100일도 못 넘기고 죽지 않을까 싶어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미룬 호적상 생일이었던 것.
어쨌든 그걸 가르쳐 주자 일은 의외로 금방 처리가 됐다. 처리하는데 드는 시간은 5분이 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러면 되는 걸 어쩌자고 그 대리점 여직원은 그렇게 일처리를 하려했는지. 자기도 기분 나쁘고 나도 기분 나쁘고.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 안내양이 나를 붙든다.
“고객님, 아직 전화 끊지 말아주십시오. 오늘이 마침 생신이신데 제가 생일 축하 노래 불러드리겠습니다.”
순간 난 툭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한 것을 겨우 참고,
“아유, 됐습니다.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안됩니다. 제가 짧게 불러 드리겠으니 잠시만 들어주십시오.”
그 아가씨 고집이 센 건지 아니면 오전 시간이라 여유를 부려 보는 건지 기어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나는 하도 낯간지러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들었는데 노래를 듣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조금 전의 불쾌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르는 사이 함박웃음을 짓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나는 좀 짓궂겠지만 그녀도 감정 노동자인 만큼 이런 것도 교육 받고 하는 건가 싶어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라며 자신이 부르고 싶어 부른 거란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리구요,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지금까지 000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곤 우린 전화를 끊었다. 하긴 그녀가 내가 그렇게 물어 봤다고 해서 순순히 진실을 말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난 그저 그녀의 행동이 다소 놀랍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으며,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아까 대리점 여직원에 언성을 높인 게 일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나 자신이었다.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인상을 쓰며 불쾌감에 사로잡혀 있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그런 것에 헤헤거리며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건지 과연 감정의 천국과 지옥은 한 장의 종이 뒤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