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흥미롭기는 하다. 주로 특정 분야에 대한 공부 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들이 많다. 특히 '소설가의 공부'라니. 내가 좋아하는 단어 두 개가 하나로 묶여있다. ㅋ 요즘 책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면 저렴한 것도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책을 받고 보니 좀 가볍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루이스 라무르는 우리나라엔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책 제목이라고 해도 의심이 많은 나로선 일단 읽어보고 별로다 싶으면 소장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재밌다. 미국에선 꽤 저명한 작가인가 본데 우리나라엔 이 책 외엔 번역된 것이 없다는 게 왠지 세계 10위 안에 드는 출판 강국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작가가 읽어 온 책 목록 중 우리나라에도 출판된 책과 겹치는 경우가 별로 많지가 않다. 읽으면서 여러모로 좌절을 안겨 준다. 특히 저자의 지식욕, 독서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이 작가는 주로 역사 소설과 미국의 서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집안이 워낙에 책을 좋아해 어려서부터 늘 책을 가까이하고 살기도 하고.
얼핏 우리나라의 장정일과 황석영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다.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다기보단) 정복했다고나 할까. 또한 작가의 지적 탐험은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셔 셔 셔... 무한대로 뻗어 나간다. 그게 꼭 황석영을 닮은 듯도 하다. 이 책은 그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육체노동을 하고, 틈만 나면 책을 읽던가 소설(습작)을 썼다고 한다. 사실 작가가 되는 몇 가지 공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거절과 탈락을 밥 먹듯 하는 거다. 그렇게 책을 엄청나게 읽었다면 루이스 라무르는 왠지 이 공식은 뛰어넘었을 것 같은데 알짜 없이 이 과정을 거쳐 작가가 된다.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이 되지 않은 때라 원고를 꼭 우편을 통해 출판사에 보내곤 했다. 요즘도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랬다고 하니 좀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그보단 출판사의 거절을 당했다는 것이 더 짠하게 느껴진다. 나 같으면 두어 번 도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포기했을 것 같은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놓고 곧바로 그다음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런 은근과 끈기는 확실히 귀감이 될만하고, 어쩌면 그는 정식 작가가 되기 전부터 그런 식으로 작가의 태도를 견지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라무르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읽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독서는 가히 높은 경지에 올랐고, 그는 무슨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 말미에 '독자의 잘못'에 관해 지적하기도 했다. 그게 좀 눈에 띄어 여기 정리해 옮겨 본다.
첫 번째로, 세상엔 정말 보석 같은 단편소설들이 많은데 그것을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아쉬워했다. 특히 단편소설을 쓰는 일을 보석을 세공하는 일과 같다고 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단편을 읽었으며 또한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왜 좋은 책을 읽을 기회들을 스스로 빼앗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그렇게만 보면 미국이란 나라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책을 안 읽는 나라는 아닌가 싶기도 하다.(설마!) 무엇보다 우리나라와 좀 묘하게 반대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대체로 책을 읽지 않고, 읽는다면 장편보다는 단편을 선호하지 않는가.
그 의혹을 뒷받침하듯, 무엇을 읽던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는 책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오래된 책을 읽지 않는 한 새 책을 읽을 권리도 없다고 하는데, 그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요즘 책만 읽지 말고 고전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역시 고전을 읽지 않고 독서를 감히 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무수한 책이 계속 출판되다 보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옛날 책이 너무 많다고 아쉬워했다. 즉 오래된 새 책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아는 고전은 극히 일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사라져갔던 걸까. 우리는 고전과 베스트셀러만 기억할 뿐 그 중간에 낀 책 들이나 아니면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라져간 책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출판사나 서점은 독자가 그런 책을 잊지 않도록 기억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라무르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도서관은 엘리트를 위한 수도원이 아니며 보통 사람을 위한 곳으로,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있는 부를 제대로 이용하지 할 줄 모르는 것이라며 그것 또한 독자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도서관 한 곳이 문을 닫는 건 한 도시의 몰락과 맞먹는 거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도서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엇이 대신 차지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당장은 나와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건 문자를 발명했고, 그것을 읽을 줄 안다는 거 아닌가. 무지가 인류에게 초래할 걸 생각하면 도서관은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중요한 공공장소는 아닐까. (공공화장실과 더불어. ㅋ)
그런 점에서 나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이건 또 온전히 독자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도 독자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여러 방편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면, 회원증이나 열람증만 만들어 주지 말고 마일리지 제도 같은 것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또는 아이들의 학교 시간표에 일주일에 한 시간은 꼭 도서관을 들렸다 학교에 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성적에 반영시켜보는 건 어떨까. 어쨌든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저자가 지적하지 않은 독자의 잘못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책을 귀하게 다룰 줄 모르는 잘못이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 또한 귀하게 다룬다. 하지만 보라. 이 책은 369에서 370 페이지가 뜯겨있다. 이것을 뒤늦게 알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