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 - 무시하기엔 너무 친근하고 함께하기엔 너무 야생적인 동물들의 사생활
사이 몽고메리.엘리자베스 M. 토마스 지음, 김문주 옮김 / 홍익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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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M. 토마스를 소설 『세상의 모든 딸들』로 처음 만났고, 한국에서는 생뚱맞게 『슬픈 칼라하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 The Old Way 』 덕분에 더 가까워졌다. 내게 그녀는, 칼라하리 프로젝트가 한창이던 1950년대에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지낸 행운의 인류학자이다. 그런데 위키피디아 및 출판계에서 그녀를 "동물" 전문 작가로 강조하기에 의아했다.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원제: Tamed & Untamed)』을 읽고 나서야 수긍한다. 이처럼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시라면! 



엘리자베스 M. 토마스는 자신만큼이나 동물을 사랑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사이 몽고메리와 만나서 단박에 친구가 된 이후, 함께 책까지 내었다. 바로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인데, 읽다 보면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나와는 꿈에서라도 친해지기 어렵겠구나를 절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나는 햇볕 쨍한 날 보도블록까지 진출한 지렁이를 화단 흙으로 옮겨주기는 하지만, 보도블록 위 비둘기를 보면 두려워서(솔직히 혐오스러워서) 걸음을 멈춘다. 동물원을 자주 찾는 편이지만 '파충류관'에는 여간해서 발길 향하지 않는다. 평소 우호적으로 대해온 이웃사촌이 기르던 동물을 더 이상 기르기 싫다고 집 밖으로 방출했음을 알고 난 후, 엘리자베스 M. 토마스가 그녀를 차갑게 대했다는 일화를 읽고 든 생각이다. 엘리자베스 M. 토마스는 나처럼 동물에 편견 심한 부류를 '인간중심주의'에 찌들었다 볼 수 있듯, 내게는 사이 몽고메리나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동물 사랑을 시늉이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두 작가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게는 수행불가의 영역이므로.


Sy Montgomery (좌) & Elizabeth M. Thomas (우) // 사진 Steve Curwood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M. 토마스는 자신의 반려묘가 기절시킨 쥐를 냉장고 밑에서 발견하자 그 쥐를 길들이기로 마음 먹고 쥐에게 쉴 곳과 먹이, 나아가 친구 되자는 "호의"까지 제공한다. 자신의 애창곡 "The Lion Sleeps Tonight"에 맞춰 춤도 유황앵무 'Snowball'과 추고 반려견과 "짖음 이중창"을 부르기도 한다. 18,000여 마리 뱀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옷소매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뱀에게 "환영해 주니 영광"이라며 고마워한다.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지행일치격 동물사랑은 경탄스럽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녀가 4차원 별세계 사람이라는 확신을 준 에피소드도 있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온 곰에게 "돌아가라고 부탁하자 (곰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리기도 했다"(220쪽)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곰이 부탁을 들어주었다니!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는 여러 대목에서 유발 하라리의 『 Sapiens 』를 떠올리게 했다. 두 책 모두 인간은 그 종, Homo Sapiens만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오만을 범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동물 역시 감정, 지능, 고통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인간이) 무관심하다고 개탄한다. 동물에게는 'she'나 'he'가 아닌, 'It'만 주어로 쓴다는 영문법 책을 생각해보라! 또한 인간에게는 '(학습, 언어, 공감 등등) 능력'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인간 아닌 동물에게는 '본능'이라는 표현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해 버리지 않는가!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에 많은 경이로운 예가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벌새의 심장 박동이 1분 최대 1,500회에 이르며 하루 평균 1,500 송이 꽃에 들린다는 예가 가장 인상 깊다. 21시간 동안 쉬지 않고 대양 위를 나는 벌새의 최고 속도는 작은 몸집 대비 환산해보면 우주왕복선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처럼 경이롭고 아름다운 동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그저 길들이려고만 들거나, 최악의 경우 학대한다. 나는 엘리자베스 M. 토마스나 사이 몽고메리가 최근 나온" 태국관광 코끼리 학대" 관련 기사를 읽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분노했을지 가히 상상되었다. 

사이 몽고메리와 엘리자베스 M. 토마스는 "Avengers"영화에 등장하는 헤로인들, 즉 파괴된 것들을 복구, 회복시키려는 소수의 전사같다.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야생동물을 돕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연을 마구 훼손하기 때문이다."(241)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을 읽고 나면, 예전과 동물을 보는 눈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독수리가 "머리 위를 나는 호랑이"(171쪽)로, 벌새는 "깃털에 싸인 거품"(175쪽)로, 대왕문어는 "다정하고 친근한 그녀"(324쪽)으로 다가올지도......덕분에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동물로서의 인간이 다른 동물을 어떻게 더 이해하고 서로 길들이거나 길들이지 않으며 공존'할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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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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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신간 들어오자마자, 동네 도서관에 대출 예약을 걸어 놓았는데 히야! 3달을 기다려서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 불과 석 달 만에 책표지가 누덕해졌다. 얼굴 뾰루지 솟는 데는 무심해도 책 너덜거리는 데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나로서는 일단 촉이 솟지만, 꾹꾹 누른다. 그만큼 김훈 작가님을 알아 모시는 애독자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생각으로.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다. 

[연필로 쓰기] 첫 페이지



故 올리버 색스, 故 이윤기, 故 장영희, 내촌목공소 김민식, 그리고 김훈, 내가 책 읽다가 흠뻑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들은 우연일까? 세상 살아오신 날들이 많거나 이미 세상을 뜨신 분들이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이들이 연륜에서 나온 사색의 힘을 보여주는 나이여서가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여 이분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릇"이라는 작은 단어에 담을 수 없도록 정신은 높게 활공하는 데도 참으로 스스로 낮추시니 그 겸손함을 흠모하는 것 같다.


정작, 김 훈 선생님 소설을 안 읽었다. 『공터에서』가 유일하고 산문집도 『라면을 끓이며』만 읽었다, 어쩌다 온라인 신문 기사에 기고하신 글들은 찬찬히 읽었다. 그런데도 이 분을 감히 알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그래서 나는 김훈 작가가 무척 좋아진다. 좋아지는 이 마음을 어쩌기 어렵다. 1948년에 태어나 역사의 질곡을 보고 겪고 살아오신 어르신으로서도 좋고,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서도 존경스럽다. 감기 걸려 소아과 병원을 찾는 어린애를 살뜰히 살피는 젊은 엄마를 어여삐 보는 그 마음, '날 잡아봐라' 하듯 21세기형 춘향몽룡 놀이하는 젊은이들의 연애놀음에 흐뭇해하시는 그 마음도 고맙다.


『연필로 쓰기』를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 울컥, 눈물이 솟구쳤는데

이건 김 훈 작가님만이 부릴 수 있는 요술이다. 작가가 걸었던 남한산성, 일산 호수공원, 멀찌감치서 바라본 건져올려진 세월호, 작가가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수집했던 할매들, 상갓집의 친구들, 함께 만나고 본 것 같은 시간감이 느껴진다.


지난주 최대 수확이었던 올리버 색스 교수의 에세이집 『모든 것은 그 자리에』에서도 느꼈지만, 겸손하고 큰 분들이 어느 선에 오르면 다음 세대의 정신적 안녕을 걱정하시나 보다. 임종으로 향해 가던 병상에서도 올리버 색스 교수는 스마트폰 좀비가 되는 요즘 사람들을 가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김훈 선생님도 마찬가지이다. 페이지 곳곳에서 동물성을 잃어가는 전자회로 부품이 되어가는 젊은 사람들, 어린이들을 안타까워한다.


일흔이 넘으셨으니 이제 '할아버지' 소리가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분은 대신 살아 있는 순간순간 감각을 최대한 누리고 감사해한다. 오이지의 씹히는 맛, 자전거 라이드 길가에서 들이키는 냉면육수의 숭고함, 우륵과 황병기 선생님이 올려다보았을 별 밭 아래서의 겸허함, 감각으로 넘친다.

삶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덕분에 보는 것 같다.

고마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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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사이드 업 Wow 그래픽노블
제니퍼 L. 홀름 지음, 매튜 홀름 그림, 조고은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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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unny Side Up』 이라. 노란 스마일리(Smiley) 아이콘 닮은 달걀요리가 떠오른다. 왠지 쾌할한 캐릭터가 '밝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겠거니 싶었다. 추측이 반쯤만 맞았다. 주인공 'Sunny'는 어리버리 미완의 어설픔이 되레 사랑스러워 보이는 소녀이지만 마음에 어두운 고민을 감추고 있으니까. 


https://www.bookbugkalamazoo.com/event/meet-jennifer-matthew-holm-kpl


뉴 베리 상(Newbery Honor Winning)을 세 번이나 수상한 제니퍼 홀름의 그래픽 노블 첫 페이지를, 그녀의 친남동생 매튜 홀름은 하강하는 비행기 그림으로 꽉 채웠다. 플로리다 주, 웨스트팜 비치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소녀가 내린다. 마중나온 할아버지는 가슴팍 높이까지 자란 손녀, "Sunny"를 "큰 아기"라고 부르신다.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하며 환대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밝은데, 정작 'Sunny'의 표정은 뚱하기만 하다. 하긴, '55세 이상을 위한 은퇴자 마을'에서 거의 유일한 '10代'이니 친구들과 파자마파티 할 때의 표정이 나올리가 있나.


 

『Sunny Side Up』은 은퇴촌 방문객인 10대 소녀 'Sunny'의 느리게 가는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무슨 연유인지 가족과 따로 혼자 플로리다를 방문해서는 시간이 가도 여전히 풀이 죽어 있고 언뜻 언뜻 우울해지는 'Sunny'. 은퇴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고양이를 찾아 드리고 받은 용돈으로 만화책 사서 읽을 때만 반짝 신나는 표정을 짓지만 Sunny의 얼굴은 순간 순간 어두워진다. '작은 소녀에게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느덧 소녀를 좋아하게 된 독자는 'Sunny'를 걱정하고 보듬어주고 싶어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Sunny Side Up』에도 스포일러가 있다. 초등학교 교실, 의자에 앉아 있는 'Sunny'의 뒤편으로 긴 그림자가 보인다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야겠다.



 『Sunny Side Up』을 읽으며 어린 시절, 특히 감수성 예민했던 중학생 때 자주 일기장에 적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시련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온다. 감당할 길이 있다." 그런데 그 시절 내가 말했던 시련이란, 결국 성장기에 급증하는 몸무게나 선행학습해야했던 미적분의 난해함에 지나지 않았다니 이제와 생각하면 작은 시련일 수 밖에. 하늘이 꺼질 듯이 무거운 숨을 내쉬는 'Sunny'의 고민도 결국 3년, 5년, 50년 후에는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로 남을 터이니.......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그래픽 노블, 특별히 자극적인 에피소드나 드라마틱한 줄거리도 없는데 마음에 남는다. 나의 이야기, 누군가가 겪었던 고민의 지나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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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경영 - 상 - 상위 1%를 위한 글로벌 교섭문화 백서
신성대 지음 / 동문선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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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쪽인, 들고 읽다가는 손목을 시큰거리게 하는 두툼한 책을 킬킬, 큭큭거리며 다 읽었는데 왠걸, 마지막 문줄에 "하권에서 계속"!

와우! 알고보니 『품격경영』은 "상," "하" 두 권으로 같은 날 출간된 책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쓴 신성대라는 도대체 어떤 분? 고양이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검색해보니, "동문선" 출판사 대표이자 "전통무예연구가"에,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 컨설턴트"이기까지 하다. 2018년 국정감사에서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품격 매너 강연도 했다.

최근 몇년간 의전 싸구려 네임펜, 구겨진 태극기, 무개념 사적 취향의 브로치 등이 신문 기사 소재로 등장하던데 이 분 덕분이구나! 신성대 대표는 청와대측, 언론에 꾸준히 자신의 주장을 어필해왔다한다. "대한민국 국격을 나타내는 대통령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핸드백 들고 정상회담 소파에 앉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잠옷 연상시키는 분홍색 캐주얼을 정장이라며 입고 순방외교 가시면 아니됩니다"라고.


읽다보면, 계속 빵빵 터지는 사례들이 줄지어 소개되어 킬킬거리다가도 뜨끄해진다. 나 역시 비웃음 당할만한 (글로벌) 매너 흑역사 꽤 길게 늘어지는 거 아닌가싶어서. 저자 신성대는 누구 눈치 보지 않는지 박근혜 전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에 문재인 대통령 내외까지 격하고도 신랄하게 지적한다. 사심에서가 아니라, 국격 높여주시라는 충언으로. 특히나 이렇게 콕 집어 지적당하지 않는 이상,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글로벌 에티켓들 정리해보자.

일반인보다도 특히 상위 1%에게 격하게 요구되는 (글로벌) 매너는



1. eye contact!

2. 협상, 대화시 몸짓 언어!

3. 테이블 매너! 특히 건배할 때 굴욕 굽신 자세는 NO!

4. 격식에 맞는 옷차림!

5. 놀 줄 알고, 문화 코드를 적절히 활용한 사교법!

6. 표정관리! 특히 "입 앙당물기" 사절!





Question] 서울지하철 광고판에 실린 "서울여자대학교 정시모집" 광고 이미지에서 '글로벌 매너' 정석에 어긋나는 부분을 찾아보면?



Question] 백안관 오찬 회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측과 오바마 대통령 측 신체 언어의 큰 차이는?


신성대 저자는 566쪽 곳곳에서 "~~하면 아웃(out)," "어글리 코리안"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가 하는 지적에 뜨끔하지 않을 매너짱 "한국인"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건배 제의하면 자연스레 허리가 굽신거려지고, 직위고하 떠나서 놀 자리에서는 우아하게 소셜댄스로 사교하는 여유를 아는 인사도 많지 않으니까. 예상했듯 신성대 저자에게 "왜 우리가 서구의 매너를 따라야만 하는가?"의 질문이 떨어지더라. 저자는 "글로벌 매너니까, 서양에서 온 거니까."라는 식으로 답하는데, 몰라서 "out"되는 것보다 잘 체화해서 "꿩 먹고 알 먹고"의 전략 삼는 게 좋겠다. 적어도 부제를 통해서도 강조하는 상위 1%(누굴까?)의 글로벌 무대 누빌 분들은......99%는 당장 (글로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생존 매너부터 익히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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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딸들 2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홍익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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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고통이 느슨해지면 죽은 듯이 잠에 빠지고, 그러다 새로운 통증의 파도가 밀려오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중략)... 다시 통증이 찾아왔고, 나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턱턱 막히는 숨을 참으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멀리서 순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얇고 노란 초승달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순록의 달(Reindeer Moon)'이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 2편 332~333쪽.

한국에서는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타이틀로 출판되어, 특히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많이 읽힌 소설의 클라이맥스 대목이다. 원제 『 Riendeer Moon 』에 등장한 초승달 아래, 홀로 아기를 낳는 주인공 야난의 고독과 생존본능은 처절하다 못해 비장하다. 저 독백을 조아리던 한 사람, 여성, 초산 중인 10대 소녀, 야난의 숨은 천천히 멈추었다. 그녀의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야난은 그렇게 죽어갔고, 아기는 태어났다.





벚꽃 만개한 4월의 환한 대낮,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눈물을 어찌 억제할까. 『세상의 모든 딸들』을 읽으며 콧날이 시큰해지다 뜨거운 눈물의 강둑이 몇 번이나 터지려는 걸 어찌 막으랴.

K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다. 그녀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짧은 혼절과 진통 주기를 반복하면서 내내 "칼라하리 사막의 니사도, 나의 어머니도, 그의 어머니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렇게 생명을 낳았어."를 되뇌며 감격스러워했다고 한다. '진통이 어마어마하다던데 그런 낭만적 생각을? 에라!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꿀꺽 삼켰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야난이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아기를 낳는 그 장면에서 바로 K가 전해준 그 '짧은 잠과 진통의 반복' 대목이 등장했다. '소설이 아니었구나. 경외했던 것이구나. K는 야난, 아니 생명을 낳고 지켜온 이 땅의 그 모든 어머니들에게 감격했기에 진통을 감사해하며 견뎠구나.



『세상의 모든 딸들』은 20,000년전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매머드, 여우, 늑대, 호랑이, 순록, 하이에나가 등장하고 파카(기능성 방한 아웃도어가 아니라, Inuit언어에 등장하는 가죽옷의 이름이다)를 입은 수렵채집 부족들이 등장한다. 원서로는 393쪽, 번역판으로는700쪽에 이르며 무려 2만년 전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21세기 넷플리스 SF마냥 빠른 전개와 생동감 있는 묘사로 쓰여진 건 작가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인생이력과 관련 있다. 그녀는 부시맨(San族) 탐사대였던 아버지를 따라 20대에(1950~1956) 칼라하리 사막에서 지내며 그 곳 사람들과 자연물, 동물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인류학자로서 그녀는 이 경험에 기반해 『The Old Way』, 『The Harmless People』 등을 썼다. 부시맨이 따뜻한 지역의 수렵채집민이라면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묘사한 수렵채집민들은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를 견뎌내야하는 지역 사람들인데, 많은 부분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부시맨의 생활양식, 종교의례, 약혼과 결혼, 선물 교환의 규칙 등을 반영해서 상상해냈다.


예를 들어, 이 가계도만 보아도 약혼과 결혼으로서 집단의 연망이 어떻게 맺어지고 유지되는지 이것이 혹독한 환경에서의 생존에 어떤 잇점을 가져오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좁은 사회, 면대면 관계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상상한 20000년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체면, 윗 어른에 대한 공경, 서열짓기보다는 공동체성, 공동육아, 연대 등의 정서와 가치가 발달했다. 주인공 야난은 이 사회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에 비한다면 더 충동적이고, 자기주장과 고집이 세고, 독립적이다.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때린 남편 티무에게 발끈해서 바로 이혼을 선언하고, 어린 여동생 메리와 함께 집단을 떠나 홀로 이동하는 길을 택한 에피소드가 야난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야난은 어쩌면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생존에의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고난과 마주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동생도 살아 남긴다.

엘리자베스 토마스는 페미니즘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1980년, 90년대에 학술서가 아닌 소설로서 여성의 존엄과 특히 어머니로서의 거룩함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사람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거란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나처럼 이렇게 살았어. 호랑이를 따르는 까마귀처럼 남편을 따르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법이란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야난, 언젠가는 너도 어머니가 되겠지. 세상의 모든 딸들이 결국엔 이 세상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처럼......너는 티무의 아내로, 메리는 화이트 폭스의 아내로...



스마트폰이나 족보가 없던 20000년 전, 사람들은 피부 냄새와 음성으로 서로를 식별하고 이야기의 타래에 엮어 이름을 기억하고, 황홀경에 이르는 춤을 추어 천상의 존재와 소통하고 자신의 육체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마블에서 이야기하는 다중 유니버스가 아니어도, 이들은 원초적 생명력과 상상력의 힘으로 이 불가해한 우주의 거룩함을 만난다.『세상의 모든 딸들 』을 꼭 여성, 어머니의 시각에서만 읽으려하지 말고 인간의 위대함, 그 거룩한 생존력과 상상력의 측면에서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인류학자이자 휴머니스트로서 엘리자베스 토마스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를 비단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란 육체성으로 살지만 나는, 너는, 우리는(심지어는 늑대와 순록까지도) 연결되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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