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
조성일 지음, 박지영 그림 / 팩토리나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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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



『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책 제목이 과거형의 문장이기에, 이미 제목만으로 그 톤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지나 보니, 그게 사랑이었더라. 헤어지고나니, 더 잘 사랑할 수 있었겠더라"의 톤이라고 짐작하며 첫 페이지를 펼쳐씁니다. 이 아기자기하게 예쁜 책을 쓴 이는 조성일. 『차라리 우리 헤어질까』로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사랑을 받았다는 문구를 보니, 전작을 쓸 때는 열애중이었나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 는 헤어지고 난 후의 아픔, 사랑을 추억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반해서요. 

'피뜨겁고 뺨 복사꽃같이 부드럽고 혈색 좋은 젊은 날의 사랑, 누가 안 하나? 누군들 책으로 엮어낼 이야기가 없을까?'하는 독자의 반응을 미리 읽기라도 하듯, 저자 조성일은  『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 을 자기 연애담에 함몰해 쓰지 않았다고 "책을 내며"에서 밝힙니다.  "구체적인 상황보다 모호한 상황으로 열린 결말을 만들어서, 그 글에 각자(독자)의 경험을 넣어 완성하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1쪽)"하여 "묘하게 독자의 글이 되는 느낌을 주고 싶어 (2쪽)" 썼는데 "(독자는) 어떻게 하면 사랑의 정체기에서 벗어날지 고민하면서 각자 자신만의 답을 찾"(3쪽) 바란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랑에서의 각자 "답찾기"는 독자의 몫인 셈이고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땔거리 삼아, 독자 각자가 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태우며 불의 형상을 각자 만들고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지요. 뭐, 제게는 꽤 어려운 과제이긴 합니다만.....태울 원료도, 태울 의지도 딱히 없어 작가가 보여준 사랑궤적을 따가가 보는 식으로 리뷰를 전개하려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로 사랑을 했다 을 서술형으로 거칠게 말하면, "내가 널 좋아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널 (너가 나 좋아한 것 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아. 그만큼 넌 사랑스러웠어. 그런데 내 뜨거운 사랑이 되레 독이 되어 네가 삼키기 힘들어했나봐. 헤어지고 나니, 이제서야 보여. 그래도 우리 사랑 너무 아름다웠지 않니? 난 여전히 네가 그리워"의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좁은 해석으로는 그렇게 보였으나, 사랑 이야기야 워낙 줄기가 갈리는 해석을 낳을테니, 개인의 해석이라 한정해둡시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헤어지니 "
내일 눈 뜨기가 두렵다 / 그냥 이 모든 게 장난이면 좋겠" (17쪽)을 정도로 실연의 고통이 큽니다. 실연의 고통은 삶의 물결이 흘러가는데도 다시 저자를 찾아와 자꾸 과거 회귀하게 합니다. "지겨울 때도 됐는데, 그만할 때가 맞는데"(105쪽)라며 머리로는 정리하면서도 자꾸 헤어진 이를 생각하고 궁금해합니다. "우리는 이미 1년 반 전에 헤어졌는데 말야"(105)

"여기 진짜 맛있다."

"어떻게 또 찾았어?"

"매일 취향 저격이네."

"역시 센스 있다니까." 

.

"혼자 오셨어요? 같은 걸로 드릴게요. 오늘은 늦으시나 봐요. 언제 오세요?"

.

"여기 계산해주세요."



 

 - 조성일 "단골 손님" (134쪽) 



저자는 위에 전문을 소개한 "단골 손님"에서처럼 헤어진 여자친구랑 늘 찾던 맛집을 혼자 찾아 처연함을 안주 삼기도 하고, "누구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너처럼 성장통을 겪게 하진 않더라 (233쪽)" 며 사랑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성장했음을 돌아봅니다. 조성일 작가와 경험의 공감대가 많은 이들에게는 한 줄 한 줄, 일기장 들킨 기분으로 읽게 되는 글일테고, 경제신문 페이지를 한장한장 탐독하며 일상의 메모에서 형용사를 지워나가는 이들이 읽는다면 괴리감을 느낄 글이겠지요. 직접 읽고 확인해보세요. 

아 참, 일러스트레이터 '박지영' 님의 화사하면서 부드러운 일러스트레이션은 사랑경험의 편차가 어떻듯 모든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줄 책 속, 보너스 선물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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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이혼 2
모모세 시노부 지음, 추지나 옮김, 사카모토 유지 원작 / 박하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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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이혼

 

 

 

한국의 김수현 작가 위상일까? 사카모토 유지는 일본에서 제 76회 드라마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받은 <최고의 이혼> 시나리오 원작자라고 한다. 이 드라마가 최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덕분에 친절한 한국어 번역으로 소개받을 수 있었다. 박하출판사에서 발 빠르게, <최고의 이혼> 2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해주었으니까. 1, 2편 다 하면 총 500여 페이지 분량의 소설이지만 치밀한 묘사보다는 통통 튀는 대사 중심이기에 무척 빨리 읽을 수 있다. 각본을 원작으로 소설화한 작품의 약점이자 매력인 듯.

 

 

드라마 문법에 익숙한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최고의 이혼은 달달한 로맨스 소설이기에 결코 주인공들이 각자의 길을 모색하며 이혼 도장을 흔쾌히 찍고 내게 놔두지 않는다. 되레, 이혼을 계기로 서로를 얼마나 애틋하게 갈망하는지를 깨달아 다시 신혼으로 돌아가게 설정한다. 주인공 유카와 마쓰오의 밀당만으로는 양념이 약하다. 그래서 그들과 커플로 밀당하며 연애의 타래를 복잡하게 얽게 하도록 또 다른 문제적 커플을 등장시킨다. 그 커플의 아카리는 마쓰오의 전 애인인데, 아카리의 현 애인은 타고난 바람둥이로 유카와도 탈 뻔한다. 일본인 특유의 예의바른 거리두기를 유지해오다가도 어느 순간 존대법을 버리고 반말을 주고받으며, 아슬아슬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일본 드라마의 특징일까? 주인공 캐릭터 네 명 모두, 태연자약한 척하다가 한순간에 욕망과 셈법을 훤히 드러내며 판을 흔드는 공통점이 우연의 일치인지, 일본 드라마의 문법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두 커플을 자칫 짝을 바꾸어, 바람날 뻔하나 건전 드라마답게 얌전하게 원래 짝을 찾아 해피엔딩 한다. 이혼했던 유카와 마쓰오는 다시 혼인서류를 내고 공식 부부가 되고, 류와 아카리도 배속의 아기 덕분에 끈끈하게 다시 맺어진다 

 

<최고의 이혼>은 일본에서 인기를 끈 후, 한국에 상륙한 셈인데 두 나라 시청자들에게 거부감 적은 결혼, 이혼의 문법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느껴질까? 궁금해진다. 예를 들어, 1편에서 이미 이혼 서류로써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유카와 마쓰오는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 쇼윈도 부부 생활을 지속한다. 유카의 경우는 시할머니를 실망하게 하거나 병환 중인 친정아버지께 누가 될까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더 들어가 보자. 이혼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유카의 시할머니는 손주와 손주며느리의 결정이 경솔하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유카의 시아버지는 남의 집 소중한 딸을 이렇게 만들었다며아들 마쓰오에게  버럭 화를 내고, 유카의 친정아버지 역시 제멋대로인 딸 때문에 미안하다며 사위에게 사과한다. 으흠…… 이어서, 직접 화법으로 결혼은 너희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닌 두 가족, 즉 집안끼리의 인연이라는 문법을 강조한다. 미혼이 아닌 주체적 비혼이 증가하는 추세의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이런 문법이 어색하게 느껴질 날이 올까? 결혼과 이혼의 문법은 앞으로 어떻게 어떤 속도로 바뀌어갈까?  <최고의 이혼>을 읽고 나니 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길다면 꽤나 긴 <최고의 이혼> 1,2편 전부 읽고 나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사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것. “콩나물 따위는 (전골 냄비 속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익는다는 듯이 내버려두다사랑과 존중 받고 싶다면서 정작 상대를 콩나물 취급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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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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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올해만 3권째 읽었다. 오찬호 박사의 책을. 사회학자가 쓴 책이지만, 대중( 중에서도 아마도 20대 청춘, 중에서도 아마도 대학생)을 겨냥한 문장이기에 술술 읽힌다. 지금은 몰락과 상승의 극 줄타기하며 아슬하지만 한 때 "사이다" 별명을 지녔던 그 정치인처럼 "톡톡톡" 쏘는 맛이 매섭고, 솔직하기로도 아슬하슬하게 솔직하다. 그래서 대학에서 많이 읽히나 보다. 검색하면 곧바로 뜨는게 "독후감"들이다.  어제 읽는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도 오찬호 박사가 몇 페이지나 할애해서 베베 꼬는 대목에 "독후감"이 등장한다. 기껏 불러서 100분이나 강의 시켜놓고 강사료는 커녕, 대학생들 "독후감"을 들이밀기에 열받아서 지하철 쓰레기통에 읽지도 않고 버렸다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와 『진격의 대학교』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세상에 거저 없다" 12년째 전국을 돌며 시간강사를 한다며, 자조 반 역자부심 반의 어조로 자신을 소개하는 오찬호 박사. 그가 대학을 전국구로 옮겨다니며 하루 3건 강의 뛰는 날이면, 점심 먹을 시간 없어서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지만 결국 그렇게 해서 만난 수많은 20대 청춘. 대학생들. 게다가 그는 차갑게 거리 두는 선생님이 아닌가보다. 술로 친해지고, 과제를 내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적극 소통하려는 좋은 선생님이기에 그 많은 제자들로부터 엄청난 소스를 얻었다.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한 에세이와 종강 뒤풀이 술자리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위 두 서적에 상당한 소스를 제공했으니. "세상에 거저 없다" 

그런데 혹자는 비판한단다. 오찬호 박사의 "사이다 발언"은 시원하면서도 날이 섰지만 대안이 없다고. 그래서 대안을 내놓고자 쓴 책이 바로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이 책에서는 수강생들의 이야기보다 생활인으로서의 오찬호, 12년차 대학강사이자, 점점 유명세를 타는 저술가로서의 오찬호의 이야기를 훨씬 많이 한다. 여전히 엄청 쎄게 비판하고, 쏘아대고, "그건 아니지~~!"라고 용감하게 발언한다. 

3권쯤 읽으니 오찬호 박사의 세상 보는 스타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한 번 물면 놓지 않으리라. 무척 부지런하고, 스스로에게 떳떳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세상을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는. 

그 지점을  넘어선 사회학이 그에겐 어떤 것일까? 나는 여전히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가 사회고발서로 주효하지, 오찬호 박사가 서문에서 호기롭게 이야기한것처럼 대안으로서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나저나, 강연료를 동의도 없이 미지급 하는 K대 교수나 오찬호 박사더러 "시시껄렁한 책이나 쓴다"고 대놓고 폄하하는 L교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표정을 지엇을까. 뜨끔은 했겠지. 오찬호 박사 화끈하게 뒤끝 털어내시는 분이구나!  두 다리만 건너면 K대 교수나 L 교수, 좁은 사회학계에서 바로 알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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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완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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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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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때 푹 빠져 읽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역자이자 『하얀전쟁』을 비롯한 많은 책을 내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적 허영 때문에 막상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진 않았다. 이미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그리스 로마 신화 쯤이야 초등, 중등, 고등, 대딩, 계속 번역판을 달리해서 읽어오지 않았던가? 이미 아는 이야기일텐데......하는 꽤나 건방진 생각.

*
그런데 주말 도서관에 들렸다가 우연히 서가에서 한 권 남은 책은 하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5권이었기에 신화해설가로서의 이윤기와의 만남은 더욱 강렬했다. 선생님은 53세의 나이에 어려운, 그러나 왠지 필연이었을 결단을 내렸다. 바로

그렇다. 나도 나의 흑해를 건너자! 나도 나의 쉼플레가데스(충돌하는 섬)를 지나자! 나도 금양모피를 수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14쪽) 

이 결심 후, 그리스를 일주일간 탐색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준비 작업에 돌입해 카메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여행계획을 구체적으로 짜서 아내와 함께 다시 그리스로 떠났다고 한다. 하얀 대리석 신전 기둥 떄문에 제대로 눈 뜨기도 어려운 아크로 폴리스를 배경으로 찍은 50대의 이윤기 선생님이나, 그보다 더 나중에 찍었을 사진 속에서나 이윤기 선생님은 신화 속 영웅처럼 남다른 포스를 풍긴다. 참 사람이 커 보인다. 멋져 보이신다. '들어가는 말'에 무려 24장(사진 페이지 포함)을 할애하면서 그가 진정 젊은이들이자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명심하자.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 신화적인 영웅들의 어깨에 무등을 타면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다. 내가 영웅 신화를 쓰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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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어가는 말"을 곱씹어 거듭 읽었다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본전은 이미 빼고도 남은 셈. 문학가이자 신화탐험가인 인간 이윤기를 느낄 수 있는 진솔한 장이다. 그 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이윤기식 담대하면서 발랄한 유머감각 - 옛날 한 옛날, 그러니까 힘센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일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는 대목에서 책 읽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멋진 비주얼 자료 등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줄 거리가 엄청나다. 5권을 읽고, 이 시리즈의 팬이 되어버렸다. 5권 먼저 읽고 1,2,3,4 내리 읽는 역순 여행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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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맺음말은 이윤기 선생님이 아닌 그 자제분이 썼다. 영웅은 단명한다? 이윤기 선생님께서는 향년 63세에 영면하셨다. 너무나 아쉽다.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읽은 한 권의 책이 날 이틀째 요동케 한다. 튼튼한 뱃사람으로 생을 살고 싶은데, 나는 나의 파도가 무엇인지나 파악하고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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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2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권만 빼고 나머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1, 2, 3권은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산 것이라서 표지가 지금 나온 것과 달라요. ^^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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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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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는 누구꺼?”

나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를 열었다. 여태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소설을 위해 빈 워드 창을 띄웠다. 나는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내가 한 일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작은 뇌가 달린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쓴다, 는 말은 이런 때를 위해 예비된 말이었다. ("옥수수와 나,"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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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처럼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읽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다니......『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던가? 왠지 친숙한데 지인들이 김영하의 소설을 읽고 이야기해주어서 인가. 그래서 일부러 찾아 읽은 단편소설집, 『오직 두 사람』.

최근, "실제 쓰는, 실제 출간하는 작가"의 창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면의 노력이 어떠할지 자꾸 상상하는지라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역시 감탄하며 읽었다. 다 읽고나서 "작가의 말"을 참고해보니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이 집필 순이 아니었다. 작가가 칠 년 동안 쓴 일곱 편의 중단편을 (편집자 혹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순서 배열을 달리한것인데, 그 중 난 맨 앞에 실린 "오직 두 사람"이 인상깊었다. 아빠와의 관계가 독특한 40대 미혼 여성이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스타일로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이해했다. 순서상 두번 째 중편인 "아이를 찾습니다" 역시 가족 내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아이 실종 이후 파괴된 과정 아이를 되찾았어도 봉합되지 않는 가정을 그린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비극 이후 집필한 지라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269쪽).

그 외 5편의 단편 역시 흥미로우면서도 직업 작가로서의 작가의 인간관계의 폭과 경험의 틀거리를 짐작하게 해주는 소재가 많았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지인 혹은 '등장인물 1,2,3'으로 출판업계 종사자 및 작가가 참 많이도 나온다. 동시에 '신들린 듯, 글이 써지는 환상을 김영하처럼 유명하고 성공한 작가도 꿈꾸는 구나'하는 걸 알았다. 수록된 일곱 편 중 가장 먼저 쓴 작품이라는 "옥수수와 나"에는, 생면부지의 아름다운 여성과 묻지마 관계를 갇힌 공간에서 윤리의식 제로의 상태로 즐기면서도 미친 듯이 글을 뿜어내는 작가가 등장한다. ^^

그렇구나, 그런 환상, 가져봐도 괜찮은 거구나. 환상 너머 실제 손가락 움직인다면,가져봐도 게으른 거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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