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읽기] 가상 공간의 닉넴으로만 서로 인지하지만, 기꺼이 '책 친구'가 된 이웃님과 함께 읽기로 꼽은 첫 책이 [장애의 역사]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에 매혹된(?) 독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김승섭 교수가 지적인 냉철함뿐 아니라 정서적인 헌신까지 담아 번역해낸 책이 바로 [장애의 역사].
- [빼어난 번역] 보통 옮긴이의 말은 책 뒤편에 실린다. 동아시아 출판사는 저자 킴 닐슨 Kim. E. Nielson의 서문 앞에 무려 7페이지에 걸쳐 "옮긴이의 말"부터 배치하는 선택을 했다. 사회역학이라는 비대중적 분야로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7)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2018)으로 옮긴이와 신뢰관계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 보다는, 김승섭 교수의 글이 다 그러하지만, "옮긴이의 말" 자체가 점잖으나 격렬한 선언문처럼 독자의 뇌리를 강타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제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를 한국 독자에게 소개해주는 김승섭 교수의 번역노동은 그 자체가 침묵을 깨는 참여 행위. 2019년 5월 즈음 시작한 번역을 일 년 넘게 끌어갔던 김승섭 교수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하나 고심하며 선택하면서 번역자 자신의 '비장애인 중심주의'를 성찰한다. 예를 들어, 'deafness'를 '청각장애' 대신 '농'으로, 'blindness'를 '시각장애' 대신 '맹'으로 바꿔 쓰기 까지 김승섭 교수는 충분한 고민을 하였다.
- [초벌 번역 알바를 기말고사 대신 시켰던 교수] 김승섭 교수의 빼어난, 혼이 담긴 번역문을 읽자니 한 교수가 생각난다. 본인이 번역 계약한 책의 초벌번역을 수강생들에게 N분의 1로 나눠 맡기고는, 그것으로 기말고사를 대체한 학점을 주었던 분. 머리가 굵은 선배들은 그 짓이 무슨 짓인지 알기에 욕하면서 번역파일을 넘겼는데, 순진했던 신입생들은 하늘같은 교수님이 시키시니 수업과는 상관도 없는 짓을 했던. 그 분 성함으로 검색하면 책들이 뜨지만, 번역의 성실성을 믿지 않음. 김승섭 교수의 극성실한 프로페셔널리즘과 대비해 자신을 기억해내는 수강생이 있다는 것을 알면 뜨끔하실려나!

오른쪽 이미지 Ann Magill, / CC0
인간의 다양한 언어를 인간 정신성의 루브르 박물관에 비유한다. 그러한 수사법에 혹하는 내 자신이 정작 책 표지를 온건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아니, 최소한 궁금해한 적이라도 있는가? [장애의 역사] 표지에는 "장애자부심 disability pride" 을 뜻하는 점자가 새겨져 있다. 책 다 읽은 후에 발견했다. 이 역시, '활자 중독'을 명함의 한 문구인양 내밀지만 정작 생명의 존엄, 다양성을 포용하는 면에서 반쪽짜리 세계관을 지닌 아둔함을 반영한다. [장애의 역사]는 관심의 편향성과 자기중심성을 콕콕 집어 반성하게 해주는 "질문 덩어리"이다. 실제 저자이자 역사학자 킴 닐슨 역시 [장애의 역사] 집필 목적 중 하나로 "장애의 역사에 대해 대답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데 집중(28)"하여 연구가 필요한 지점을 짚어주는 것으로 제시한다. 또 다른 목적은 "장애를 분석 도구로 활용해 미국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이 과정에서 "장애가 어떻게 인종, 젠더, 계급, 성적지향과 얽혀 있는지 (27)" 를 보이고자 한다.
이 개척자적 작업의 결과를 독자에게 풀어놓기 이전에, 저자 킴 닐슨은 개인적 삶이 자신의 연구주제와 어떻게 얽혀왔는지를 고백한다(이 책의 계약서에 서명한 후, 당시 10대였던 딸이 갑자기 '장애 여성'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백인 박사학위 소지자에 남성 배우자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이 (암묵적으로 누릴 수 있고 누려온) 특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학자들의 작업에 무지한 나로서는 킴 닐슨의 이런 낮은 자세와 접근법에 큰 감명을 받았다.

[장애의 역사] 1장은 역사적 사료에 기초해서 1492년 이전 북미토착민의 몸관념을 살피는 흥미로운 작업에 할애한다. 동양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추측되는데, 1492년 이전 북미 토착민 공동체에서는 오늘 날 '장애disability' 에 해당하는 개념어는 찾기 어렵다. 적어도 문헌에 기초해 살펴보았을 때, 토착민들은 몸의 다양성에 훨씬 융통적인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장애를 단지 신체적 증상이 아닌 공동체 내 사회적 관계에 따라서 정의하기도 했다. 물론 킴 닐슨이 옛 토착민 사회를 낭만화하려는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의 장애에 해당하는 정신적, 신체적 증상이 있을 경우 삶이 더 가혹할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중요한 점은 신체의 다양성에 대해 사회적 낙인을 찍지 않았다는 점이다.

Nuremberg chronicles - Omens / Hartmann Schedel (1440-1514)/CC0
2장에서는 북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능력있는 몸'으로서 적절한 신체와 정신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을 탐색한다. 2장은 "장애가 어떻게 인종, 젠더, 계급, 성적지향과 얽혀 있는지 (27)" 를 보이려는 저자의 의도를 특히나 잘 드러내는 챕터이다. 가난한 자, 아픈 자(유럽인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희생자들), 그리고 '반체제적'이라 규정된 여성들이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은' 구성원으로 어떻게 다중 차별받는지를 보여준다. '괴물출산 monstrous birth' 역시 새로운 마녀사냥의 고문기술과도 같이,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여성들을 이중 주변화했다.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몸을 가진 아가의 출산은 그 잉태자의 도덕적 타락과 죄를 상징하는 물화된 증거였으니. 1637년 진행되었다는 앤 허친슨의 이단재판에서 "악마적 출산(*오늘날 '포상기태 hydatidiform mole'이라는 진단명을 가진 질병)"이 중대한 이단의 증거였다는 것이 그 한 사례이다.

by anonymous / 1789 / CC0
저자 킴 닐슨은 [장애의 역사] 집필 과정에서 깊이 조사한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깊은 우울을 겪었다고 서문에서 고백한다. 특히 3장 "가여운 이들은 바다로 던져졌다 The Miserable Wretches were then thrown into the sea"을 집필하면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했던 후기 식민지 시기(1700~1776) 미국에서 노예는 그 자체로 장애인이었다. (입에 올리기 불경스럽지만),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정품"과 "폐품"으로 '인간보다 낮은 존재' 범주 내에서 재분류되었을 뿐. 보험금을 노린 노예상인들은 소위 상품가치가 떨어진 노예들을 배 밖으로 내어 던져 상어밥이 되게 했다. "폐품노예 refused slaves"에게 돌봄은 어림 없는 사치였다. 반면, 장애를 가진 유럽인의 후손들은 주로 그 가족들이, 여의치 않은 경우 공동체가 돌봄 책무를 나눴다.

4장부터는 장애가 미국 사회에서 "수사적, 법적, 사회적 범주로 굳어지는 과정(28)"을 보여준다. 미국 민주주의를 실현해줄 투표가능한 모범 시민과 그렇지 못한 열등한 존재를 가르는 공적인 거름망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 1840년 인구조사 census 에서는 몸에 대한 질문- 정신이상과 백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질문-이 추가되었다. 닐 킴슨은 이토록 장애가 마치 검증가능한 객관적 범주인양 구축되는 데 '과학적 인종주의'나 '의료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여기까지가 "함께 읽기 첫 모임 읽기 분량"!
5장부터는 추석 이후에 리뷰 올릴게요! 좋은 책 함께 읽어 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