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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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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소설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언젠가는 쓰여져야 할 소설이었다. 주인공 K의 현상을 보니 문득 '게슈탈트 붕괴현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너무나 익숙하게 여겼던 단어를 계속 발음하면, 갑자기 그 단어가 생소한 단어로 여겨지는 현상. K가 겪은 것은 이런 현상과 유사하게 보인다. 

 소설은 단 3일 동안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그러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K의 의식과 기억이 계속 과거를 붙들고 있다. 지난 금요일, 과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이 K를 혼란스럽게 한다. 애용하던 스킨 'Y'의 상표가 하루 아침에 'V'로 바뀌어 있고, 어젯밤 '전야제'를 즐겼던 아내는 죽은 시체와 다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딸의 강아지가 자신의 다리를 물고 그 때문에 달려온 딸 역시 낯선 존재로 여겨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심각한 문제를 제시하며 시작된다. 마치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심판』과도 같은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첫 문장부터, 보충 설명도 없이 사건의 주요 피해자가 된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에 흉측한 벌레가 되었고, 『심판』의 주인공 요제프 K 역시 '어느 날' 체포되었다. 그레고르가 왜 벌레가 되어야 했으며, 요제프 K가 어째서 체포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해주지도 않은 채. 그리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 근본적인 이유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은 '부조리'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인호의 소설은 다르다. 작가는 분명히 K의 현상에 대해 이유를 밝혀야 했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부조리가 아니라 혼돈이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K는 여정을 시작한다. 지난 금요일 핸드폰을 잃어버린 K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때만 해도 자신이 핸드폰을 찾기라도 하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핸드폰의 발견자인 '을'을 만나 핸드폰을 되찾아도 그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만약 K가 지난밤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이 모든 사건은 해결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 시간 반의 기억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K가 겪는 '낯섬'과 '낯익음'의 모호한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 무언가가 본질적으로 틀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아지가 자신을 물었을 때부터 비롯된다. 강아지는 주인을 낯익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낯선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있을 때 무는 것이다. 즉, 강아지가 K를 무는 행위는 K가 낯선 사람이며, 또 다른 K가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K가 영화관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기 쉽지만, 최인호 작가는 은연 중에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소설의 문체를 봐도 그렇다. K가 본 영화의 원작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에는 '?'나 '!' 같은 '과격한' 표현이 없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즉, 소설은 매우 담담하게 그러나 매우 절실하게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문체를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이다. 또한, 내용에서도 그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멀고, 오직 의사의 아내만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이것 역시 그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주인공 K도 세상 사람들 중 유일한 존재로, '도플갱어'가 존재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이 합체하는.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이 책은 카프카의 문체 역시 모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물의 이름이 없다는 것, K라는 '이름 아닌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심판』에 등장하는 요제프 'K'가 곧 '카프카'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듯이, 주인공 K는 곧 한국의 중년 남자 전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상징이 존재하여서 김연수 작가가 그런 말을 자신 있게 한 것일까? 

 결국 소설의 결말은 두 명의 K가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장면은 하나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한 남자 K의 짧은 여정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뫼비우스의 띠'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겉만 보는 것 같지만 서서히 안을 파고들어가는 띠.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 고리. 안이 낯익다가도 낯설게 되며, 밖이 낯설다가도 낯익게 되는 미지의 띠. 그것 말고 어떤 것이 이 낯익고도 낯선 여정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이 소설은 POWER ON 으로 시작하여 POWER OFF 로 끝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호한 여정은, K의 정체가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오직 '봉'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을 수 있으리라. 아직 그 띠를 끊지 못한 이 소설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될 것인가?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최인호는 이 소설에서 많은 것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K조차 분명하지 않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오직 하나, 분명한 것은 7시에 자명종이 필사적으로 울린다는 것뿐이다. 그것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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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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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장을 펼쳤을 때, 나는 매우 흥미로웠다. 먼저 ‘유진과 유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연인의 만남을 책이 말하고 있었다. 이금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이 떠올랐다. 단지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두 번째 이유는 유진의 살인이다. 스스로 “나는 당신의 써번트예요”라고 말한 여자 아이를 보고 유진은 왠지 모를 살인 충동을 느끼게 된다. 죽이고 싶은 욕망의 원천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유진은 칼을 들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이야기가 진의 이야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진의 묘사 이후, 이야기는 이야나의 턴으로 바뀐다. 섬(구체적인 장소도 제시되지 않은)의 드라이버인 이야나의 이야기는 개를 치어 죽인 것으로 시작된다. 실수로 로드킬 한 것이 계속 그의 머릿속의 의식을 채운다. 나는 이것이 인상적이었다. 대체 개를 죽인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까? 도마뱀 데위는 또 무엇인가? 그의 애인이었던 수니는?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를 질책했다(아쉬웠던 점은 이야나의 이야기가 완전하게 끝맺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침내 모든 게 흔들린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곧 물의 절벽이 많은 것을 삼킨다. 섬은 사라졌고, 이제 그곳은 혼란에 가득찬 폐허로 전락했다. 무너진 건물들, 퉁퉁 불어가는 시체들,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들..….. 이야나의 친구 만 역시 소중히 여겼던 의붓어머니가 죽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인들,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낸 이들은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러나 재앙은 어떤 면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제공하는 법이다. 재앙은 진과 이야나를 다시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유진과 유진을 다시 만나게 했다. 물의 절벽은 많은 것들을 휩쓸어갔지만, 그 중에는 우리의 추악함 역시 있었을 것이다. 모든 재앙은 극복할 수 있다는 그 간절한 희망,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이 이빨 안에 담겨 있었다.

 소설의 첫 부분,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주로 ‘작은 이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빨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것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의 상징을 ‘기억’으로 보고 싶다. 힐러의 말, 그래. 그것이었다. “문이 열리면 당신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해야만 할 것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우게 될 겁니다.”

 삶의 맛은 이빨로 느껴야 한다. 삶의 맛은 개인에 따라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피 터질 정도로 맵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삶을 맛보든, 결코 그 삶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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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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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타이거'라니? 

 신간평가단 홈페이지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다.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지만, 이 소설은 당최 본 적이 없다. 내가 4월 달에 주목 신간 페이퍼를 썼다고 했지만, 『문타이거』라는 제목의 책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편집자의 눈에 띄였고, 또 일종의 개정판을 내는 꼴이니 수긍하고 읽기로 했다. 

 제목이 꽤나 심오하면서도 단순하다. 직역하면 '달호랑이', 우리말로는 '모기향'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기향? 불에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연기를 내는 신비한 도구. 마침내 모든 것이 재가 될 때에는 한 치의 여운 없이 모두 날아가버리는 그것. 왜 페넬로피 라이블리라는 작가가 '모기향'을 제목으로 삼았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그 해답을 책 속에서 얻어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문타이거가 주된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타이거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각인되면서 서서히 작가가 '문타이거'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소설의 첫문장에서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적어도, 처음에는 이 소설이 재미없다고 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 그녀가 말한다. 그러자 간호사가 말한다. "어머나, 세상에." 임종을 눈앞에 둔 늙은 노파가, 아무리 예전에 역사가라고 한들 어떻게 세계의 역사를 쓸 수 있겠는가? 아마 간호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아가 묘사하는 역사란 그런 연대기적인 역사도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세계의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역사는 마치 모기향처럼 어느 한 중심을 기준으로 주변에서 계속 순회한다. 결코 수평선으로 타들어가지 않는다. 세계의 역사와 그녀 자신의 역사가 모기향처럼 원을 그리며 순회하며, 서서히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식. 그것이 바로 『문타이거』의 방식, 모기향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심이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기향의 크기에 비하면, 중심의 크기는 매우 작은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기향이 소용돌이치며 타 들어가도 그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온화해지고 짙은 연기를 낸다. 역자는 모기향의 중심에 있는 것이 클라우다아와 전쟁 때 만난 병사 톰 서던과의 로맨스라고 주장한다. 아니, 주장이라기보다 실제로 그렇다. 이 소설에는 클라우디아 외에도 그녀의 친오빠 고든, 남편 재스퍼, 갑작스럽게 그녀의 손에 맡겨진 폴란드 교수의 아들 라솔로, 친딸 리사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톰 서던은 소설의 초두에 잠깐 등장하고 세계의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녀의 역사에서는 그가 영원히 살아있다. 

 사실 나도 이 소설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메모의 공간이 너무나 부족해서, 글씨 간의 여백이 조금 뺵뺵해서, 주석이 미주라서, 이런 외부적 핑계들과 클라우디아의 잡담식 역사가 너무 진부해서, 라는 내부적 핑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 그녀 자신의 역사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내 역사를 다른 사람이 침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미 결정된 운명은 멈출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고. 이게 바로 역사라고, 이게 바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결국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재스퍼의 편지, 그리고 그의 전사 소식(16장). 어떻게 나의 역사와 클라우디아의 역사가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역사에 충실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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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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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어려울 때 소원에 의지하는 법이다. 사람은 만족할 때에는 결코 소원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그 욕망들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보통 사람들이다. 그래서 '알라딘의 요술 램프'나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민중의 '신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달과 게』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아이들이 소라게를 태움으로써 원하는 소원을 빌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여러 러 번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소라게를 태운다고 해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작가도 알고 있다. 단지 아이들이 자신의 어려움과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회피 수단'이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이끄는 사람은 두 명이다. 신이치 도네와 하루야 도미나가. 그리고 좀 더 덧붙여 표현하면 소녀 나루미가 있다. 『달과 게』는 이 세 아이의 행동과 심리를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아이들은 각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특히 하루야는 아버지의 폭력과 괴롭힘에서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한편, 신이치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 아이들이 '회피 수단'으로 삼은 '소원 빌기'의 방법은 간단하다. 바다에서 소라게를 잡아 산에 있는 바위 구덩이에 그것들을 넣고, 소원을 빌고 싶을 때 한 마리를 꺼내어 불로 지져 소라게가 껍질에서 튀어나올 때 그 게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이룰 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우정을 깊이 나누게 된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소원 빌기가 그들의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소원을 빌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상처를 씻어주라는 소원을 빌 수가 없었다. 결국 점차 서로가 갈등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서로의 소원이 대비되어 신이치가 다치게 되기까지 이른다. 

 바로 그 때가 소설의 절정이며, 모든 갈등 해결의 끝이다. 소라게를 태우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알지 못했지만 소원이 아니라 만남과 대화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되자 서로를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야말로 이들이 의지해야 할 존재였다. 비록 통하는 언어가 다르고(사투리의 차이), 성격과 행동이 다르더라도. 왜냐하면 친구는 그런 것까지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깨달았다. 소원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라는 걸. 신이치도 쇼조의 죽음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도, 하루야도, 나루미도 충분히 성장했으리라 믿는다. 

 

 "친구는 신기하게도 질리지가 않지. 어른이 되어 이틀이고 사흘이고 계속해서 만나면 바로 싫어지지만, 어릴 적에 만나는 친구는 그렇지 않아. 그건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쇼조가 아랫입술을 내밀고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신이치는 뭐라고도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서 멀어졌다. 

 "그런 친구는 소중히 대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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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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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삶이 운명대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은 인정하기도 싫을 뿐만이 아니라, 그럴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생명들이 죽어가고, 태어나고,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운명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갈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모두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진다면, 그 일은 신만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신은 결코 나에게 운명을 정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사명을 믿을 뿐이다. 

  

 하지만 『7년의 밤』은 참으로 운명론적인 소설이다. 7년의 시간, 아니 등장인물의 모든 이야기가 세령호와 등대마을이라는 가상의 무대에서 운명대로 흐르는 것 같았다. 사실 '운명대로' 흐른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한국 문단의 아마존"이라고 불리는 작가 정유정의 문장은 마치 운명의 시간처럼 거침없이 흘러간다.  

 모든 사건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건은 작가가 정해놓은 인물의 삶, '운명'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것은 모든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가는 한 작품 안에서 '신'과 같다. 작품 안에 작가가 개입하든, 그렇지 않든 작가는 한 작품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운명에 따라 사건을 진행시켰다. 

 

 "사마귀가 다리를 들어 길을 막는다고 불도저가 설까(p.18)." 인간은 아무리 운명에 저항하려고 해도, 결국 운명에 따라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녀가 주장하는 전형적인 운명론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까웠다. 소설을 들여다보면, 인물들이 운명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작가의 펜을 따라갔기 때문이었다. 아니, 운명에 저항하는 것, 또는 순응하는 것도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에게 때론 감미로운 산들바람을 보내고 때론 따뜻한 태양빛을 선사하며, 때론 삶의 계곡에 '불행'이라는 질풍을 불어넣고 일상을 뒤흔든다. 결국 운명에 대해 나쁘게도 생각하지 말고, 좋게도 생각하지도 말자. 운명은 인간처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존재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인 나를 알아야 하듯이, 운명을 알아야 한다.

 

 "바다를 모르는 자가 바다를 얕본다. 바다를 얕보는 자, 바다에 데기 마련이었다(p.31)." 이 문장에서 바다를 운명이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좋은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현수, 은주,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처럼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나에게 정해지지 않은 운명에 대해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으니까. 

 "운명이 변화구를 던진 밤, 나는 그것을 날려버리는 타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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