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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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슈디에 대한 무지막지한 소문을 들은 바 있다. 어렵고 지루하다는 뒷말.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광대 샬리마르>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끔찍한’ 명성과 달리 루슈디는 위트가 넘치는 박학다식한 수다쟁이였다.

그럼에도 <광대 샬리마르>를 읽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렵고 까다로웠다. 그럴 만한 이유가 두 가지.

1. 우선 이 작품은 카슈미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슈미르라고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 접경에 위치한 고원으로. 이 지역을 두고 지금도 두 나라는 분쟁을 버리고 있다는데...!!! 무식한 독자가 아는 건 여기까지. 이런 일천한 지식으로 이 작품을 무작정 읽다보니 답답할 수 밖에. 작품을 즐기는 것보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문화와 정치, 역사에 대해 학습하기에 급급했다.

2. 등장인물들의 이름들!!! 힌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뒤 섞인 이 지역에 사는 카슈미르인들은 그야말로 낯설기 그지없는 길고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마저 지들 맘대로 바꾸고, 하나 더 만들고 그런다. 아아... 복잡하여라~.

이렇게 카슈미르를 둘러싼 난관만 극복하면, 이 작품은 제법 재미있다. <광대 샬리마르>는 수다스럽지만 시적이고, 지적이지만 동시에 선정적이기도 하다. 가령 가족과 고향사람들에게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주인공 부니가 친구에게 전하는 이런 말은 정말 아름답다.

   
  “죽은 사람이라도 눈보라를 피할 곳은 얻을 수 있으려나. 아니면 얼어 죽어야 하는 건가. 죽은 사람도 먹고 마실 것을 얻을 수 있나, 아니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다시 죽어야 하나. 난 지금 죽은 사람이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니야. 그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죽은 사람이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닫힌 귀에 부딪혀 떨어지는지.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면 누군가가 위로를 해줄지, 회개한다면 용서를 해줄지. 죽은 사람은 언제나 단죄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구원받을 수도 있는지,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눈보라 속에서 대답을 듣기에는 너무 버거운 질문들이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겠지. 그러니까 지금은 이것만을 묻기로 하겠어. 죽은 사람도 따뜻한 곳에 누울 수 있는지, 아니면 삽을 찾아 자기 무덤을 파야 하는지.” (p.359~360)
 
   

그런데 <광대 샬리마르>에는 이런 아름다운 문장보다 냉소적인 조롱이 더 많이 보인다. 루슈디가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미국과 인도 정부, 이슬람 무장단체 등이다. 루슈디의 입장에서 본 그들은 카슈미르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한 공모자들일 뿐이다. 카슈미르 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힌두든 이슬람이든 서로를 존중하며 이웃으로 살았다. 마치 그 옛날 예루살렘이나, 보스니아처럼. 늘 그렇듯,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짓밟은 것은, 종교주의와 민족주의의 탈을 뒤집어 쓴 권력을 손에 쥔 정치인이다.

   
  “하지만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아.” 아니스 노만이 동생에게 말했다. “대가 없는 낙원은 죽은 사람으로 가득 찬 동화에나 나오는 곳이라고. 산 자의 세상인 이곳에서는 자유도 돈을 치러야 해. 모금을 해야만 한다고.” (p.404)  
   

아... 그러고 보니 이들을 파괴한 또 하나의 괴물이 있구나. 다름 아닌 끔찍한 자본주의, 슬픈 현실이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루슈디의 대표작 <악마의 시>를 읽지 않았지만, <광대 샬리마르>을 읽고 나니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냉소와 조롱을 무기로 정치적 풍자와 현학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은 작품이 아닐까? 여기에 현실과 환타지를 오가는 설정이 양념으로 가미되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조금 골치 아프긴 하지만 루슈디의 지적인 수다가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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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6-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데 읽으셨군요.사실 카슈미르가 분쟁지역이라는 것만 알아도 대단한 거죠.예전에 다큐멘타리를 봤는데 골짜기 아래에 사는 사람들 머리 위로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의 포탄이 날아다닌다고 하더라구요.

lazydevil 2010-06-02 10:20   좋아요 0 | URL
노에이자이트님 반갑습니다^^
이 작품 덕분에 캬슈미르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혔습니다. 캬슈미르, 참 아름다운 고원이라고 하던데 아직도 비극이 계속되니 안타깝네요.

이매지 2010-06-0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일단은 읽어보려고 하는데, 시작이 어렵네요^^;
레이지데빌님 리뷰를 읽으니 용기를 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lazydevil 2010-06-07 10:06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반갑습니다~
길고 조금 부담스럽지만 재미있는 책이에요. 작가가 워낙 글을 재미있게 쓰더라구요^^
 
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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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은 <동물농장>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비범한 문제의식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우화로 끌어내린 오웰의 능력은 참으로 탁월하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전달하는 섬뜩한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마치 잘 만든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충격적이다. 나폴레옹이 두 발로 걷다니!
 
<동물농장>과 <1984>는 함께 읽어야한다. 둘은 쌍둥이 같은 소설이니까. <동물농장>은 <1984>의 어린이 버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1984>는 <동물농장>의 SF 버전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자신이 읽은 세상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했고, <1984>에서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해 증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동물농장>이라는 풍자적 ‘명제’를 <1984>에서 이론의 틀을 제시하는 한편  ‘동물농장’의 지배자 나폴레옹이 두 발로 걷게 된 이후의 세상(빅 브라더의 국가)까지 보여준다. 이렇게 ‘동물농장/빅 브라더의 국가’는 완성된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동물농장>과 <1984>를 함께 묶지 않았다. <동물농장>과 함께 실린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오웰이 죽기 전 완성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오웰이 작가로서 이력을 처음 시작한 시기에 출간된 이 작품과 <동물농장>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작품 자체를 즐기면 된다. 룰룰라라~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동물농장>이나 <1984>와 달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들리지 않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따라지 인생, 즉 하류인생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는 이 작품을 르포타주라 해야 할 지, 소설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주인공 ‘나’(그래 오웰 자신이라고 치자!)가 겪는 파리와 런던의 삶은 가히 충격적이다. 가난의 무게는 오웰을 굶어 죽기 직전까지 짓누른다. 또한 운좋게 생긴 일자리는 살인적인 중노동을 요구한다. 굶거나 죽도록 일하거나! 모두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버텨내야할 것들이다.

달리 말하면 돈벌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요령껏 굶으며 버텨야하고, 굶지 않기 위해 죽도록 힘든 일을 해야한다. 어느 것이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최소치마저 보장되지 않는다. 이런 최악의 상황은 오웰이 파리 생활을 접고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더욱 비참해진다. 거리로 내몰린 부랑자가 된 것. 그러니까 파리의 생활이 ‘오웰의 도시빈민 체험’이라면. 런던 편은 ‘오웰의 노숙 일기’다.

이렇게 비참한 이야기가 구구절절 사실적으로 펼쳐지는데도, 이 작품을 읽는 것은 즐겁고 유쾌하다. 1930년대 파리와 런던의 도시빈민을 바라보는 오웰의 눈이 따스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들이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끈끈한 무기, 즉 초월적인 긍정과 여유, 온정에 감화된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작가와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파리와 런더의 따라지 인생>은 밝고 유쾌하며, 즐겁다.

<동물농장>, 떠오른 생각

-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 <동물농장>은 꽤나 깜찍한 유머를 담고 있어 수시로 낄낄거리며 읽었다. 가령 양들이 외치는 구호, “두 발은 나쁘고, 네발은 좋다!”가 반복될 때마다 날선 풍자가 읽히는데, 다른 한편으로 귀엽고 깜찍한 동화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털이 몽실몽실한 양들이 몰려다니며, “두 발은 나쁘고, 네 발은 좋다!”를 외치는 그림이라니!! 암말 몰리가 분홍색 리본에 집착하고, 각설탕에 환장하는 모습은 또 어떻구! 오웰은 각 동물들의 습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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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5-3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 농장 일종의 우화같지만 인간 세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이지요^^

lazydevil 2010-06-01 11:0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어찌나 날카로운지 자꾸 우리가 아는 인물들을 겹쳐 읽게 만들어요.
낼 지방선거... (솔직히 좀 귀찮지만...ㅋㅋ) 투표해야겠습니다.^^;;

느린산책 2010-06-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데빌님처럼 장르를 넘나들며 책을 즐기고 싶어욧~~!!

동물농장, 1984, 걸리버여행기..모두 수업에서 뜯어살피는 방법으로 먼저 접했네요..수업에서는 복서의 죽음에 대해 다루었어요. 복서의 죽음이 나폴레옹의 권력 유지를 위한 여론조작, 대중선동, 정보차단때문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대중들의 결여된 비판적 자세였다는..어쩜 그리 지금과 똑같은 거인지~젠장

lazydevil 2010-06-01 11:08   좋아요 0 | URL
걸리버 여행기는 아직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는데.. 언제 살펴봐야겠네요^^

오웰의 통찰력이 지금도 유효한 건, 아마 세상이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정치하는 넘들은 항상 똑같더라는...ㅠㅜ
그래도 낼 투표할려구요~~ㅡ.ㅡ
 
리틀 시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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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할리우드는 필름 누아르의 시대이다. 존 휴스턴의 <몰타의 매>(1941)를 시작으로 할리우드는 팜므파탈, 욕망, 음모와 배신, 도시의 뒷골목을 키워드로 한 필름 누아르가 쏟아진다. 1930년대를 풍미하던 갱스터는 몰락했고, 새로운 유형의 범죄영화 필름 누아르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1년작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는 필름 누아르 시대의  마지막 걸작이다. 이 즈음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컬러 영화시대에 접어든다. 흑백영화일 때만이 그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필름 누아르(검은 영화!)는 서서히 마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챈들러는 <호수의 여인>을 발표한 후 6년간 할리우드로 외유했다. 그리고 발표한 것이 1949년작 <리틀 시스터>. 하드보일드 소설은 필름 누아르의 모태나 다름없다. 이점을 생각하며 필름 누아르의 쇠락과 필립 말로의 지친 모습은 의미심장하게 호응한다.

서른여덟 살이 된 사립탐정 필립 말로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환멸뿐이다.

   
  난 투명인간이었다. 얼굴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개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도 당기지 않았다. 심지어 술조차 당기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바닥에 구겨져서 버려진, 철 지난 달력 종이였다. (p.308)  
   

이렇게 의기소침한 말로의 모습은 뜻밖이다. 그간 이죽거리며 자기를 비하하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참으로 애처롭기까지 한데 같은 페이지에 이런 넋두리도 이어진다.

   
  전화는 울리고 울리고 또 울렸다. 아홉 번 이 정도면 많이 울렸어, 말로.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네가 전화하면 아무도 집에 없다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누구에게 전화할 거야? 어디 네 목소리 듣고 싶어 하는 친구 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p.308)  
   

기형도의 시집에나 어울릴 자조적인 혼잣말을 필립 말로가 내뱉다니? 무엇이 그를 이토록 지치고 힘겹게 만들었을까?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는 것은 즐겁고도 고단하다. 즐겁다는 것은 챈들러의 도저한 문체를 만나는 것을 말하고, 고단하다는 것은 독특한 문체와 복잡한 플롯을 번역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쫓아야하기 때문이다. 번역은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겨울날 바닷가에서 만나는 시멘트로 만든 벤치만큼이나 불편하다.

<리틀 시스터>는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가장 더디고 힘들게 읽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모호하며 지루한 이야기를 딱딱한 번역문을 통해 쫓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고단했다. 사백 삼십여 페이지에 불과한 본문이 전화번호부처럼 두껍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놀라워라. <리틀 시스터>는 그 어떤 필립 말로 시리즈 중 짙은 여운이 남긴다. 시종일관 외로움과 환멸을 고백하는 필립 말로에게 거의 중독된 것이다. 첫 페이지로 거슬러 올라가 서른여덟 살 아저씨의 지긋지긋한 징징거림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유배지용 소설로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기나긴 이별>을 제외한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없이 <리틀 시스터>를 고를 것이다.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친절한 플롯이 한없이 지루하게 전개된다할지라도. 그만큼 <리틀 시스터>는 완성도를 초월한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챈들러, 말로 두 사람 모두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말로에게 힘내라고 격려하고 싶다. 그가 외로움이라는 어두운 방에 홀로 갇혀있을 지라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나는 벽을 따라 더듬으며 조명 스위치를 찾았다. 어디든 조명 스위치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찾아내게 되어 있다.(p329)  
   


<리틀 시스터>, 떠오른 생각

1. <리틀 시스터>에는 챈들러의 소설쓰기 비밀이 얼핏 드러난다. 중반부 말로가 리가르디 박사에게 가정A,B,C,D를 열거하며 사건의 전모를 추리하는 장면. 챈들러는(뭐 대부분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우선 사건(이야기)을 완벽하게 만들고 나서, 탐정을 사건 속에 던져 넣는다. 사건을 수사하는 말로의 동선이 곧 플롯인 것이다.

2. 말로는 늘 한발자국 늦게 등장하여 번번이 범인과 엇갈리고 만다.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처럼>처럼. 즉 말로는 사건에 거의(혹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이지만, 정작 말로의 힘은 보기와는 달리 미약하기만 하다. 애초부터 탐정은 세상(사건)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말로는 점점 지쳐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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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5-27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ㅡ 이거 완전 제스타일 일 것만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네용 ㅋㅋ
왠지 리뷰도 쓸쓸합니다. ㅜㅜ
말로의 저런 독백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서른 여덟이면 젊잖아. 말로! 기운내여!!ㅠ

그나저나 새벽에 이런 리뷰라니ㅡ 데빌님. 요즘 불면증에라도 시달리시는지^^;
전 겨우 겨우 시차적응해나가는 중입니다. ㅎㅎ

lazydevil 2010-05-27 13:19   좋아요 0 | URL
말로! 서른 여덟이면 아직 젊다네요~~~

늦은 오후 진한 커피를 마셨더니 밤까지 블링블링해서여~~ㅋㅋ
시차적응에는 광합성이 좋다는 애길 어데서 들은 것 같기도~~ 많이 먹는 거하고, 낮잠도 도움이 된다든가 그 반대라든가...ㅎㅎ
 
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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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의 붉은 구렁을>은 온다 리쿠의 재능과 한계가 동시에 엿보인다.
이 작품은 ‘삼월의 붉은 구렁을’이라는 가상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네 편의 중편 소설(총 4장)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 관한 흥미롭고 공감할 만한 이야기는 놀랄 만큼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정작 독자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각 중편들의 수준 차이다. 사실 그간 읽어본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네 편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 이 책에 실린 좋은 중편 소설도 온다 리쿠답고, 실망스러운 중편 소설도 온다 리쿠다운데, 이것이 문제다.

가상의 책 ‘삼월의 붉은 구렁을’에 대한 직접적인 에피소드가 담긴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과 제2장 ‘이즈모 야상곡’은 그야말로 대단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책 읽는 사람’의 욕망을 파고드는 작가의 야심과 개성이 작품에 잘 드러난다. ‘책 읽는 사람’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동시에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작가가 포착한 ‘책 읽는 사람’의 욕망은 가상의 책 ‘삼월의 붉은 구렁을’을 통해 재치 있게 증식하는데, 독자는 어린 시절 길고 긴 겨울밤을 수놓았던 어른들의 ‘이바구’처럼 아련한 즐거움이 피어나는 걸 지켜본다. 이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와 이야기 속 인물도 마찬가지니 가상의 책 ‘삼월의 붉은 구렁을’이 그 욕망을 얼마나 절묘하게 찔러대는지 알 수 있다. 가령,

   
  태어나서 처음 본 그림책부터 자기가 지금까지 읽은 책을 순서대로 모두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으신가요? 잡지 같은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책들이 죄다 책장 하나에 순서대로 꽂혀 있어서, 한 권 한 권 빼들고는 책장을 훌훌 넘겨보는 겁니다. ‘그래, 맞아, 이 시기에 SF에 미쳐 있었지’라든지, ‘이 무렵에는 우리 반 녀석들 모두 호시 신이치를 읽고 있었어’처럼 회상하면서요. 누구나 그런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독서 역사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할 겁니다. (p.85)  
   

위와 같은 보르헤스적인 생각은 ‘책 읽는 사람’의 보편적인 욕망과 습성을 매우 재치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실린 두 중편은 재미있다. 행복한 욕망의 노출을 추진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작품의 제3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와 제4장 ‘회전목마’은 애초의 즐거움을 깎아먹는다. 가상의 책에 얽힌 신화를 다소 억지로 연계시키고(제3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 작가의 자의식과 야심이 정제되지 않은 채 지면을 채우고 있고(제4장 ‘회전목마’), 앞선 두 장에서 구축한 신화를 지극히 사적인 욕망으로 끌어내린다.(제3장, 제4장). 이는 그만큼 제1장과 제2장에서 쌓아놓은 신화가 보편적인 욕망과 심리에 호소하고 있다는, 즉 성공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3장과 제4장이야말로 이전에 읽은 온다 리쿠의 작품과 가장 닮아있다. 이쯤되면 독자가 품었던 괜한 기대를 원망해야할 지 작가를 원망해야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삼월의 붉은 구렁을>, 떠오른 생각들.

1.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책읽기와 식욕을 병치한 것이 재미있다. 원하는 책을 실컷 읽으며, 간간히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등장인물이 부럽다. 그러구보니 제2장 ‘아즈마 야상곡’에서도 주인공 아카네와 다카코는 밤새도록 책이야기를 하며 먹고 마시는구나! 부럽다.

2. 제1장과 제2장을 읽는 동안. 이야기는 재미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더 이상 무엇을 필요할까?

3. 제3장과 제4장을 읽은 동안. 가벼움은 이야기의 해악인가? 각 이야기마다 어울리는 최소한의 무게라는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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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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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중작가이고, 호러킹이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다작을 하는 인물이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위대한 이념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내는 것에 집착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대중 친화적 성향 때문인지 그가 쓴 작품은 늘 베스트셀러라는 딱지가 붙는다. 글을 써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작가이자, 유령이나 흡혈귀,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에게 노벨문학상 후보로조차 거론될 리 없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스티븐 킹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더라도 <돌로레스 클레이본>같은 작품이 세계문학 전집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최근 다시 출간된 중편집 <사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진부한 설정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가령 주인공 돌로레스가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유 같은 것.) 소재를 파고드는 치열함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아쉽다.(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 여자이자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성찰 같은 것.) 하지만 그의 용광로에는 순도 높은 걸작만을 걸러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고 있다. 그는 그냥 결대로 이야기들을 온전히 가려내기에도 바쁜 것이 아닐까.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으며 떠오른 또 다른 생각들.

1. 스티븐 킹은 욕을 아주 잘한다. 욕설은 그의 작품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데, 번역된 것만 보더라도 수위가 대단하다. 스티븐 킹 식으로 말하면, 기름 때 찌든 고기집 방석을 씹어 먹었는지 입이 건 인물이 매번 등장한다. 역시 번역의 문제로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욕설은 종종 캐릭터를 강화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욕설들을 원문에서 확인해보고 싶은데, 미국인들이 실생활 속에 쓰는 욕일까?

2.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개봉했을 때 페미니즘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영화도 보지 못했을 뿐더러,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스티븐 킹의 소설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하나씩 읽으며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스티븐 킹이 매우 남성적인 시선을 가진 작가라는 것.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더 놀라웠다. 시종일관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일인칭 진술로 진행되는 소설의 육성은 육십대 아줌마의 그것이었으니까!

3. 결국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TV에서 띄엄띄엄 본 걸로 기억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각색을 했더라? 이건 영화라기보다 한편의 모노드라마에 가까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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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5-1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쿤요..글고보니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모두 캐시 베이츠네요.
전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보단 스테디셀러를 좋아하는데, 데빌님의 다섯별 평점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네요..스티븐킹이란 넘 유명한 이름에 질려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lazydevil 2010-05-15 21:53   좋아요 0 | URL
이런 작품을 볼 때마다 웬만한 순수문학 작가보다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hnine 2010-05-2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영화 개봉되고나서 '페미니즘' 관련하여 봐야할 영화 리스트에 자주 등장했던 것을 기억해요. 혼자 가서 본 영화인데 기억에 가물가물하네요.
이름이 참 특이하지않나요? 돌로레스 클레이본...

lazydevil 2010-05-20 23: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름만으로 제목이 되는 개성이 있어요^^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중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많지는 않죠?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저리> <돌로레스 크레이본> 정도 인 것 같은데.. 모두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반면 호러 성향의 <캐리> <샤이닝>은 신나라하면서 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