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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스터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평점 :
1940년대 할리우드는 필름 누아르의 시대이다. 존 휴스턴의 <몰타의 매>(1941)를 시작으로 할리우드는 팜므파탈, 욕망, 음모와 배신, 도시의 뒷골목을 키워드로 한 필름 누아르가 쏟아진다. 1930년대를 풍미하던 갱스터는 몰락했고, 새로운 유형의 범죄영화 필름 누아르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1년작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는 필름 누아르 시대의 마지막 걸작이다. 이 즈음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컬러 영화시대에 접어든다. 흑백영화일 때만이 그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필름 누아르(검은 영화!)는 서서히 마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챈들러는 <호수의 여인>을 발표한 후 6년간 할리우드로 외유했다. 그리고 발표한 것이 1949년작 <리틀 시스터>. 하드보일드 소설은 필름 누아르의 모태나 다름없다. 이점을 생각하며 필름 누아르의 쇠락과 필립 말로의 지친 모습은 의미심장하게 호응한다.
서른여덟 살이 된 사립탐정 필립 말로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환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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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투명인간이었다. 얼굴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개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도 당기지 않았다. 심지어 술조차 당기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바닥에 구겨져서 버려진, 철 지난 달력 종이였다. (p.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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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의기소침한 말로의 모습은 뜻밖이다. 그간 이죽거리며 자기를 비하하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참으로 애처롭기까지 한데 같은 페이지에 이런 넋두리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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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는 울리고 울리고 또 울렸다. 아홉 번 이 정도면 많이 울렸어, 말로.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네가 전화하면 아무도 집에 없다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누구에게 전화할 거야? 어디 네 목소리 듣고 싶어 하는 친구 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p.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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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집에나 어울릴 자조적인 혼잣말을 필립 말로가 내뱉다니? 무엇이 그를 이토록 지치고 힘겹게 만들었을까?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는 것은 즐겁고도 고단하다. 즐겁다는 것은 챈들러의 도저한 문체를 만나는 것을 말하고, 고단하다는 것은 독특한 문체와 복잡한 플롯을 번역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쫓아야하기 때문이다. 번역은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겨울날 바닷가에서 만나는 시멘트로 만든 벤치만큼이나 불편하다.
<리틀 시스터>는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가장 더디고 힘들게 읽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모호하며 지루한 이야기를 딱딱한 번역문을 통해 쫓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고단했다. 사백 삼십여 페이지에 불과한 본문이 전화번호부처럼 두껍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놀라워라. <리틀 시스터>는 그 어떤 필립 말로 시리즈 중 짙은 여운이 남긴다. 시종일관 외로움과 환멸을 고백하는 필립 말로에게 거의 중독된 것이다. 첫 페이지로 거슬러 올라가 서른여덟 살 아저씨의 지긋지긋한 징징거림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유배지용 소설로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기나긴 이별>을 제외한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없이 <리틀 시스터>를 고를 것이다.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친절한 플롯이 한없이 지루하게 전개된다할지라도. 그만큼 <리틀 시스터>는 완성도를 초월한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챈들러, 말로 두 사람 모두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말로에게 힘내라고 격려하고 싶다. 그가 외로움이라는 어두운 방에 홀로 갇혀있을 지라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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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벽을 따라 더듬으며 조명 스위치를 찾았다. 어디든 조명 스위치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찾아내게 되어 있다.(p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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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스터>, 떠오른 생각
1. <리틀 시스터>에는 챈들러의 소설쓰기 비밀이 얼핏 드러난다. 중반부 말로가 리가르디 박사에게 가정A,B,C,D를 열거하며 사건의 전모를 추리하는 장면. 챈들러는(뭐 대부분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우선 사건(이야기)을 완벽하게 만들고 나서, 탐정을 사건 속에 던져 넣는다. 사건을 수사하는 말로의 동선이 곧 플롯인 것이다.
2. 말로는 늘 한발자국 늦게 등장하여 번번이 범인과 엇갈리고 만다.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처럼>처럼. 즉 말로는 사건에 거의(혹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이지만, 정작 말로의 힘은 보기와는 달리 미약하기만 하다. 애초부터 탐정은 세상(사건)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말로는 점점 지쳐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