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루슈디에 대한 무지막지한 소문을 들은 바 있다. 어렵고 지루하다는 뒷말.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광대 샬리마르>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의 ‘끔찍한’ 명성과 달리 루슈디는 위트가 넘치는 박학다식한 수다쟁이였다.
그럼에도 <광대 샬리마르>를 읽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렵고 까다로웠다. 그럴 만한 이유가 두 가지.
1. 우선 이 작품은 카슈미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슈미르라고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 접경에 위치한 고원으로. 이 지역을 두고 지금도 두 나라는 분쟁을 버리고 있다는데...!!! 무식한 독자가 아는 건 여기까지. 이런 일천한 지식으로 이 작품을 무작정 읽다보니 답답할 수 밖에. 작품을 즐기는 것보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문화와 정치, 역사에 대해 학습하기에 급급했다.
2. 등장인물들의 이름들!!! 힌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뒤 섞인 이 지역에 사는 카슈미르인들은 그야말로 낯설기 그지없는 길고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마저 지들 맘대로 바꾸고, 하나 더 만들고 그런다. 아아... 복잡하여라~.
이렇게 카슈미르를 둘러싼 난관만 극복하면, 이 작품은 제법 재미있다. <광대 샬리마르>는 수다스럽지만 시적이고, 지적이지만 동시에 선정적이기도 하다. 가령 가족과 고향사람들에게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주인공 부니가 친구에게 전하는 이런 말은 정말 아름답다.
|
|
|
|
“죽은 사람이라도 눈보라를 피할 곳은 얻을 수 있으려나. 아니면 얼어 죽어야 하는 건가. 죽은 사람도 먹고 마실 것을 얻을 수 있나, 아니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다시 죽어야 하나. 난 지금 죽은 사람이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니야. 그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죽은 사람이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닫힌 귀에 부딪혀 떨어지는지.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면 누군가가 위로를 해줄지, 회개한다면 용서를 해줄지. 죽은 사람은 언제나 단죄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구원받을 수도 있는지,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눈보라 속에서 대답을 듣기에는 너무 버거운 질문들이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겠지. 그러니까 지금은 이것만을 묻기로 하겠어. 죽은 사람도 따뜻한 곳에 누울 수 있는지, 아니면 삽을 찾아 자기 무덤을 파야 하는지.” (p.359~360)
|
|
|
|
|
그런데 <광대 샬리마르>에는 이런 아름다운 문장보다 냉소적인 조롱이 더 많이 보인다. 루슈디가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미국과 인도 정부, 이슬람 무장단체 등이다. 루슈디의 입장에서 본 그들은 카슈미르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한 공모자들일 뿐이다. 카슈미르 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힌두든 이슬람이든 서로를 존중하며 이웃으로 살았다. 마치 그 옛날 예루살렘이나, 보스니아처럼. 늘 그렇듯,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짓밟은 것은, 종교주의와 민족주의의 탈을 뒤집어 쓴 권력을 손에 쥔 정치인이다.
|
|
|
|
“하지만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아.” 아니스 노만이 동생에게 말했다. “대가 없는 낙원은 죽은 사람으로 가득 찬 동화에나 나오는 곳이라고. 산 자의 세상인 이곳에서는 자유도 돈을 치러야 해. 모금을 해야만 한다고.” (p.404) |
|
|
|
|
아... 그러고 보니 이들을 파괴한 또 하나의 괴물이 있구나. 다름 아닌 끔찍한 자본주의, 슬픈 현실이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루슈디의 대표작 <악마의 시>를 읽지 않았지만, <광대 샬리마르>을 읽고 나니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냉소와 조롱을 무기로 정치적 풍자와 현학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은 작품이 아닐까? 여기에 현실과 환타지를 오가는 설정이 양념으로 가미되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조금 골치 아프긴 하지만 루슈디의 지적인 수다가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