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주머니에 손을 콕 넣은채로 선물받은 목도리로 코까지 가리고으.. 춥다 추워를 반복하며 조심스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뒤뚱거리면서 걷는데 전화기 진동이 느껴진다. 아.. 춥다. 손빼기 귀찮아. 이러는 동안에 끊겼던 진동이 잠시후 다시 울린다. 툴툴거리며 전화기를 꺼내는데 수신번호가 모르는 번호다.
"네 따라쟁이입니다." 했더니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은 이렇게 말한다 "주머니에 손 넣고 걷다가 넘어지면 다친다니까. 여전히 그러지?"
어.. 이목소리는..C군... 같은데?
그 날도 눈이 많이 왔었다. 혼자 늦은 야근을 마치고 눈을 맞으며, 밟으며 퇴근을 하고 있었다. 얼추 집앞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전화벨이 울렸다.
- 주머니에 그렇게 손 넣고 걷다가 넘어지면 다친다
- 치, 우리 집앞에 CC TV라도 설치 한거야? 자기 집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냐?
- 누가 집이래?
그러더니 집앞에 서 있는 차 한대가 라이트를 껐다가 켰다가 한다.아직 끊지 않은 수화기에서 여전히 그가 말한다.
- 눈 오는데 내 생각도 안나든?
- 생각했어, 오면서 계속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 그럼 전화라도 하지
- 목소리 듣고 나면 더 보고 싶을까봐..
- 그럼 보러 오라고 하면 되지
- 눈길에, 밤길에 위험하니까....
당시 그 사람은 경기도 광주에, 나는 평택에 있을 때였다. 한 시간 넘는 길을 운전해 와서 두시간 넘도록 집에서 나를 기다렸다고..그날 늦은 새벽까지 함께 이야기 하던 목소리가.. 지금 내 수화기에서 들리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돌아 온거야?"
"응. 좀 됐어. 진작 연락하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하네.. 눈 오니까 생각도 나고"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그 뒤는 쓸대 없는 말들, 건강한지, 잘 지냈는지, 별일 없는지.들어도 그만이고 안들어도 그만인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말들. 첫마디를 뭐라고 할까 한참 고민하고 연습했다는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끝났다.
통화를 마치고 심란한 기분에 이어폰을 다시 꽃았는데 아.. 미치겠다. 하필이면 이노래다.
저 골목을 돌면 니가 있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살아난 행복했던 시간이 바람에 불어온 추억은 또 나를 헝클어
사랑했어 사랑해서 아프게해 정말로 미안해
저 골목을 돌아 니가 있어 준다면 말없이 그 품에 다가가서 날 안길텐데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들, 아직도 눈이 오면 내가 생각나는 사람, 내리는 눈에 용기를 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준 사람 .집앞에서 나를 기다려 주던 사람. 그런 그 사람을 기다리지 못한 나.그가 기다려 주던 골목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걷는 나. 그리고 여가수의 목소리.
왠지 먹먹해 지는 가슴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런데, 그가 거기에 서 있었다.
말도 안되는 털 모자를 눌러쓰고, 발이 반쯤 들어가다 만 내 어그부츠를 신은 채로 집앞 골목 모퉁이에서 J군이 서 있었다. "그친줄 알았는데 눈이 다시 내리길래, 버스에서 내려서 뒤뚱거리다가 넘어질까봐. 집앞에 도로가 안그래도 부실한데 너 넘어지면 도로는 어쩌니." 뭐.. 그가 뭐라고 하던 나는..말없이 그 품에 다가가서 날 안길텐데.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아주 긴 시간 샤워를 하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폈다. 이 책이 이 부분을 읽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갑자기 당신이 문앞에서 서 있었어요. 그럴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398p)

지금 J군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