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얼룩진 교과서 2
모모세 시노부 지음, 한성례 옮김, 사카모토 유지 극본 / 느낌이있는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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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의 상황이 우리나라의 상황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기시감마저 느낀다고 했는데 이 책이 출판된 년도는 - 우리나라말고 일본 - 2007년이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도에 출판되었지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무려(??) 5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시간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현재 일어지고 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중,고등학생은 아니지만 심심치 않게 뉴스로 나오는 이야기를 보거나 과거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선생들을 생각하면 일본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라고 다를 바는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책이 또한 소설의 형식이지만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을 소설로 다시 엮으며 많은 내용들이 압축되고 생략된 면이 있어 꽤 스피드하게 진행이 된다.

 

처음부터 소설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읽다보면 르뽀형식처럼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보다는 즉시 다음 내용을 이어주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 구조를 쫓아가는데 있어서는 재미가 있지만 소설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반 소설과는 좀 달라 좋게 볼 수도 있고 -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 소설처럼 세밀한 묘사가 없어 아쉬울 수도 있다.

 

한 아이의 죽음으로 벌어지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많은 것들이 감춰지고 숨겨졌고 그와 관련된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정확하게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것을 학교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가족의 문제가 먼저 내 눈에는 보였다. 제대로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부모밑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극복해 내는 아이는 부모를 통해 함께 풀어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는 것을 결국에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는다.

 

왕따 경우에도 책에서는 작정을 하고 처음부터 누군가를 헤꼬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치부를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왕따를 저지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수습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만다. 한 명의 희생자가 나오면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도 어쩌면 신기하다. 모든 것을 전가한 상태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한 아이의 죽음이 자살인가의 여부로 시작된 이야기가 왕따문제로 번지고 학급에 있는 아이들의 가족문제로까지 번지면서 직업인으로써의 선생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소명의식을 갖고 선생님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보인다. 소명보다는 직업이 먼저 일 듯 하다. 현실적으로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다만,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프로답게 자신의 일을 잘하면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선생님들도 프로답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부분이였으면 한다. 각 선생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지금 청소년들이 무섭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내용이다. 사실은. 옛 문헌에도 '요즈음 젊은것들은...'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늘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아이들은 미숙한 존재다. 자신의 기억은 포장하고 왜곡하지만 현재의 아이들은 날것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문제아이이거나 삐뚤어진 아이들은 없다고 본다. 사춘기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책적으로 힘들기에 어른들이 어느 정도 간섭보다는 판을 깔아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다.

 

이렇게 글을 쓰지만 과연 내 아이들은??? 이라는 생각이 든다.

협찬 받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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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얼룩진 교과서 1
모모세 시노부 지음, 한성례 옮김, 사카모토 유지 극본 / 느낌이있는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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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를 책으로 다시 재 구성한 작품이다. 책의 저자가 2명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을 비롯한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들의 시니라오와 각색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의 내용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내용이다.

 

예전에는 고등학생이 가장 무서웠다고 하지만 이제는 중학생이 가장 무섭다는 이야기를 한다. 고등학생들은 입시문제로 인해 더이상 감정을 폭발할 여지가 많이 사라졌지만 중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가는 문제이외에는 상대적으로 없고 갈수록 조숙해재는 사회여건상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들은 많아지고 가슴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과의 괴리로 인해 더욱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이 큰 것이 아닐까 싶다.

 

그건, 아마도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도 특별한 차이가 없을 듯 하다. 일본말로 '이지메'라고 불리고 우리나라 말로 '왕따'라고 하는 사회 현상은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이뤄지는 현상이기는 해도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외향적인 성향이 강한 서양인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밝히고 활발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반면에 우리같은 경우에 대부분 나서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말 없이 있으려고 하고 끼리 끼리 문화에 좀 더 익숙한 환경이 이러한 사회 문제를 발생시킨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중학교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학기 초에 그룹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그룹, 착한 아이들 그룹, 흔히 말하는 노는 아이들 그룹. 보통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주로 하기에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착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기도 하고 착해서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노는 아이들에 들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생기면서 이들에게 서열이 생기고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왕따를 시키는 등의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아이가 대부분 가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거다. 워낙 자존감이 없고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다보니 눈에 띄는 노는 아이들 틈에 들어가려고 하고 이 아이들은 자신과는 좀 다른 아이라 놀다보면 좀 심하게 대하고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분위기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대부분의 왕따가 그런 것은 또한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책의 출간 국가를 되돌아 보게 된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분명히 일본 소설인데 도저히 일본 소설이라고 읽혀지지 않는거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일본명이라는 것과 일본명칭들이 나와 그렇지 그 부분만 우리나라 명칭과 이름으로 변경하면 절대로 이 작품이 일본 중학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며 읽어도 아무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을 듯 하다.

 

단순하게 아이들의 행동이나 그들이 겪고 있는 일들뿐만 아니라 선생인들의 활동이나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 있자면 어떻게 이토록 우리나라와 똑같은 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꼭 일본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 판단을 갖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우리와 일본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단지,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을 읽으면서 점점 안타깝기도 하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일본을 쫓아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말이 정말로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이제, 2편으로 가서 어떤 이야기가 마저 펼쳐지며 이지메에 설명하는지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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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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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 소설속에서 윤동주 시인은 형무소에서 나가지 못하고 죽는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떤 식으로 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독해로 읽어야 할 듯 하지만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 시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글자를 알게 되고 글자를 통해 단어를 배우고 단어가 합쳐져서 문단을 읽고 문단이 뭉쳐져서 하나의 언어가 되어 한 개인의 가슴속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문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뜻이 된다. 우리에게 수 없이 보여지는 영상들과 달리 글은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영상이나 글자나 똑같이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영상보다는 글자를 읽을 때 우리의 뇌는 좀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고 글자가 의미하는 바를 그리게 된다.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흥미로운 추리가 이어진다. 윤동주 시인이 형무소에서 인체실험을 통해 죽었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윤동주 시인이 형무소에 있으면서 그 안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럴만하다는 함의안에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줄거리보다는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언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책을 읽은 사람이 변한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의미에 대해 깊게 빠고 든 것은 성격상 못했고 그저 가볍게 잠시 하게 되었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이 책이라는 매체(??)가 없고 책이라 하여도 글자라는 것을 새긴다는 현실이 녹록치 않아 거의 대부분 한 개인에게서 한 개인에게 전달되었다. 전달되는 방법은 자신이 외우고 있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외우게 한 것이다. 그렇게 외우고 외우고 외운 것들이 전달되는 과정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 또는 안하고 - 특정 개인들에게만 전수가 되며 그들이 전수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예전처럼 비밀스러운 내용들은 아직도 몇 몇 개인들에게만 구전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 내가 안다면 비밀이 아닐테니 - 알고자 하는 바를 우리들은 얻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그토록 알고자 한 바로 그 내용들이 손쉽게 산재해 있지만 보지 않으려 한다.

 

수없이 많은 주옥(??)같은 글들이 우리 곁에 언제든지 숨 쉬고 있지만 우리들은 보고도 못 본척하고 읽으려고 하지않고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알려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그럴까? 예전처럼 지금도 누군가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 하지만 책으로 글로 펴낸 - 이야기한 비밀을 읽고 생각하고 남들과는 다름 세상을 보고 삶을 살아간다. 겉으로 볼 때는 이런 진실을 알지 못한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구분도 되지 않는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겨우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알아 챌 때는 이미 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글이란 우리에게 그런 힘을 가져다 주지만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고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꼭, 고전을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 인생에 보탬이 되는 글들을 우리는 멀티미디어시대라는 현실에 갖혀 읽지 않는다. 바로, 그 멀티미디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보고 읽고 제대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일텐데 말이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가 이야기 하려는 의미를 알아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갖게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글을 제대로 읽고 그 본래의 뜻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된다. 누군가 하는 이야기에 대한 숨은 뜻을 파악하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조정할 수도 있고.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으면 소설의 내용이나 추리소설과 같이 얽히고 설힌 실타래가 하나씩 하나씩 풀려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흥미가 없고 글자와 글자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올 해 들어 여러번, 최근들어 더 자주 이유없이 자주 도스톱옙스키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여러 책을 통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고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올 해 읽은 책들이 꼭 올 해 출간된 책들만 읽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별을 스치는 바람'은 1권부터 2권 중간까지는 사실 소설적인 재미로는 그다지 썩 흥미진지하게 읽지는 않았다. 2권 중반부부터는 비밀이 풀리고 윤동주 시인이 죽음에 이르면서 조금 감정이입은 되어 몰입은 되었지만 그보다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이 책이 아니였으면 평생에 걸쳐 이만큼 많이 읽지 않았을 듯 싶고 글이라는 것에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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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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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유명한 이정명의 작품은 '별을 스치는 바람'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지는 못했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정말로 본방사수하면서 본 작품이였다. 내용이 재미있어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내용 자체가 팩션이라고 하여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허구는 어느 정도가 섞여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잘 만든 작품이라 드라마로까지 제작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새로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작품도 역시 팩션이라는 장르(??)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일제 말기에 일어난 사실을 재미있게 그려낸 추리소설이라 봤다. 한 마디로 제대로 소설의 광고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얼핏 광고문구만 보고 내린 판단이였다. 책을 집어 들어 읽으려고 하자마자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윤동주"

 

'서시'로 유명한 바로 그 윤동주이다. 그러고나서도 윤동주가 등장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만 했지 윤동주에 대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생시절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무척이나 많이 등장했다. 시라는 장르 자체가 그 당시에는 어느정도 알려질 당시였다. 한 참 '홀로서기'나 대학생들의 낙서를 묶어 시라고는 할 수 없는 시집 비슷하게도 나왔던 당시가 아마도 가장 시가 전성기가 아니였을까 한다.

 

지금은 시라는 장르 자체가 소멸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읽기도 듣기도 힘들다. 한 때는 서점의 한 공간을 당당하게 차지했지만 어느덧 시라는 책 자체가 어디 있는지도 보기 힘든 실정이다. 누군가는 SNS가 시라는 표현도 하지만 그건 시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만든 시와 단문의 글을 비교한다는 것을 말이다.

 

거르고 자르고 최대한 배제한 것이 시라면 보태고 늘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 글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주저리 주저리 이것 저것 쓰는 것은 해도 도저히 압축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정제된 글을 쓸 능력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시만이 갖고 있는 표현의 확장과 공감이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 시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시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시라는 것에 대해, 글이라는 것에 대해, 읽는 것이라는 의미에 대해, 글자라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 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단지 저항시라 유명해 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시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절제된 글자, 표현되지 않은 수 많은 의미가 행간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읽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런 윤동주가 형무소에 있을 때 벌어진 내용에 대해 팩션으로 그린 소설이다. 도입단계와 책의 중반정도까지는 윤동주가 등장을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 그저 윤동주가 인물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윤동주라는 인물에 접근하기 위한 메타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인물들이 등장을 한다.

 

소설이지만 많은 시가 나온다. 저절로 간만에 시를 많이 읽게 된다. 그것도 교과서로 읽거나 제목만 알고 있지 정확하게 차분하게 읽어 본 적이 없는 윤동주의 시가 그 의미와는 다를 수 있지만 - 이 소설은 팩션이라 - 큰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의미를 책 내용과 결부되어 읽으면서 더욱 시를 읽게 만들어 준다. 어떻게 보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목적은 달성한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윤동주라는 시인의 형무소에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읽는 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단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은 들리는 말과 보이는 글자보다 더 깊은 의미가 그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조사 하나로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고 그가 하려는 말과 글에 숨어있는 본심을 읽어낼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본인이 숨기려 해도 미묘한 단어 하나로 그 사람의 진심이 흘러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걸 제대로 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것은 꾸준히 읽고 읽어 깨달을 수도 있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윤동주와 교도관이 스기야마가 벌이는 지적 싸움에서 - 서로 말과 글로 상대방을 끌어 들이고 유혹하고 의미를 알아 채라고 외친다 -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윤동주 시인이 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덕분에 그저 재미로 읽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가지에 대해 읽으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질지 2권으로 넘어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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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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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에 맹장으로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다. 6인실에 입원을 했는데 입원을 했으니 할 일이라고는 특별히 없어 - 스마트 폰은 커녕 노트북도 드물던 시절이니 - 친구가 도서대여점을 하고 있어 책을 잔뜩 가져 오라고 해서 만화책을 보거나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입원실에 한 친구는 이제 막 20세가 되었거나 고등학생이거나 정도의 나이였는데 얼마나 활발한지 입원실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틈만 나면 나가서 인형뽑기도 했는데 거의 돈을 넣으면 뽑았다. 그런 친구를 보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너도 저렇게 좀 활발했으면 좋겠는데..'라고는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로 하셨다.

 

성격을 외향과 내향으로 딱 부러지게 구분한다면 분명히 내향적인 성격이다. 다만, 딱히 내가 내향적이라는 이유로 움추려들거나 성격에 대해 딱히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내가 내향적이라는 것이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인생의 실패자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여러가지를 살펴봐도 외향적인 면보다는 내향적인 면이 컸다. 사람들을 외향과 내향으로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것에 대해 거부는 한다. 내향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학교 때에는 첫 만남인 오리엔테이션에서 과 대표로 나가 레크레이션 사회도 보고 그로 인해 과대표를 하라는 제안도 받았고 엄청나게 잘 논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내 성향은 그런 것을 싫어하기에 거절했다.

 

올 해 나온 책 중에 읽어보고 싶다고 한 책 중에 하나가 바로 '콰이어트'였다. 그 이유는 제목 자체에 있다. 내성적인 사람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각자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하고 있는데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보였다. 우리 부모님처럼 자신의 자녀가 활발하고 적극적이고 무엇을 하든 꼬리보다는 머리가 되기를 부모들은 원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부모들도 인식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활발하지 않고 적극적이지 못하면 아쉬워하면서 그런 자녀들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과 자기 자녀들에 대해 끊임없는 변화를 결국에는 포기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낯을 가리는 스타일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것이지 일대일로 만나 이야기할 때는 그렇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강의도 하는 것을 보면 내 성격이 꼭 내향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있어도 마다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카페의 정기모임같은 모임은 부담스러운 측면이 강하다. 누구랑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어색하고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있어 참여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내가 주최하는 소규모 모임은 부담도 없고 내가 주최를 해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이야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없다. 이런 것을 볼 때 꼭 내향적이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그냥 내 성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장점, 단점을 취하며 살고 있다.

 

'콰이어트'에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이런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나라는 인간에 대해 수긍하고 긍정하고 살았지만 비밀이라고 하면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내향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맞다는 확신도 들었다. 일주일동안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않고 살아도 별 문제 없이 살고 있다. 가족을 제외하면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공을 찰 때 만나는 사람이외에는 말도 식구들이외에는 하지 않기도 하지만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울화통이나 속병이 날 정도는 아니다.

 

가끔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저 사람은 나랑 맞지 않겠다'라는 선입견을 가질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경우에 대다수가 100% 외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모임에서 시종일관 떠들고 웃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에너지가 넘칠 듯 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성공하고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어딘지 나랑은 잘 맞지 않겠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데 다 그 이유가 있었다.

 

MBTI라는 것을 하게 되면 미국은 50%나 3분의 2가 외향적으로 나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3분의 2이상이 I로 시작하는 내향적인 성질로 나온다. 그만큼 동양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내향적인 인자를 갖고 있다. 그런 내향적인 인간들중에서도 내향적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면 미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낙오자로 보일 수도 있다. 책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토의시간에 조용히 있고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왕따를 당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당사자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한다. 특히, 동양인들이 이런 면에서 사춘기시절부터 어려움을 겪고 정체성의 혼란마저 겪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본인은 내향적이지만 외향적인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향적인 연기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조용하고 푹 쉬는 모습에 결혼 후 당황하는 배우자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직업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직업으로 고통과 질병을 안게 되기도 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업무를 보며 안절부절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조용히 묵상하고 책읽고 TV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기 보다는 몇 몇 사람들을 만나 조용히 담소하면서 활력을 얻는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무조건 에너지를 충전하며 푹 쉬어야 한다. 이런 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혼생활도 힘들 수 있다. 특히, 서로 정 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는 부부일 수록. 그렇다고 정 반대의 성향이 친해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갖지 못하고 있는 성질을 서로 보완하면서 더 이상적인 팀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리더들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정열적으로 사원들을 독력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장보다 조용히 내향적인 사장들이 회사를 더 크고 멋지게 키우는 경우도 많다. 외향적인 사장이 '나를 따르라'는 스타일이라면 내향적인 사장은 '너를 믿으마' 스타일이라 꼭 외향적인 스타일이 사장으로써 적합한 성질이 아니라 기업의 업무에 따라 맞는 사장 스타일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외향적인 사장보다는 내향적인 사장들이 더 많은 경우라 한다. 들어나지 않고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속이고 있어 그렇지.

 

책을 읽다보면 자기계발이라는 열풍이 불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한 방법중에 하나이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외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 앞에서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외치고 뜨거운 불 위를 걸어가며 세상에 나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하는 일련의 운동이 결국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일임에도 유행에 따라 할 필요가 없다고 보인다.

 

우리는 마시멜론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참을성 있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이것도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혹시나 마시멜론을 먹지 않고 참은 아이들은 내향적인 아이들이고 먹은 아이들은 외향적인 아이들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실험은 다시 제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성질에 대한 - 이렇게 보면 그게 그거일듯도 하지만 - 이야기가 된다. 대체적으로 외향적인 인물들이 즉흥적이고 보이면 하는 스타일이고 내향적인 인물들이 즉시 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스타일이라 이걸 참을성 있는 아이들은 꼭 성공한다는 전제로 갈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보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뜻이 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통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 생긴다. 우리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임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신화속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성질이 있기에 이걸 잘 조절해야 한다. 거꾸로 볼 때 내향적인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 인내를 갖고 성공을 한다는 기존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 이야기가 나오지만 조건을 비슷하게 하면서 실험을 할 때는 변별성이 덜 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인정하고 활용하느냐가 오히려 관건으로 보인다. 꼭,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업조직에서 특히 개방적인 공간에서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특정 조직에서는 오히려 칸막이를 치며 개별성을 강화할 때 효율성이 높아지고 뛰어난 실적을 발휘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더구나, 상당히 인상깊었던 것은 우리가 가끔 성공한 선수들을 볼 때 아니면 지도자를 볼 때 개인적으로 의문적인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성공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어떤 선수는 지도자가 강하게 압박을 해서 성공했다고 하지만 어떤 선수는 지도자가 믿고 기다려줘서 성공을 했다고 한다. '콰이어트'를 읽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알게된다.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윽박지르고 자극을 주고 넌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심어주고 잘 하라고 타박도 하면서 벌도 주면 오히려 이에 대해 반응을 하고 '그래 까짓것 할께..할께..'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한다. 반면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는 역효과가 나고 최대한 기다리면서 잘한다고 칭찬을 하고 다독여줄 때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런 것도 모르고 지도자들이나 관리자들이 무조건 윽박을 지르면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다. 각 개인의 성질에 따라 코칭을 달리 해야만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자신의 성질에 따라 자신의 잠재력과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에 따른 노력을 해야만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윽박지르고 욕하면서 나를 자극하는 관리자한테는 오히려 반감만 생기고 더 안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그 관리자는 고정관념에 갖혀 있었다고 본다.

 

'콰이어트'는 올해 나온 책 중에 저 책은 읽어보고 싶다고 했던 몇 안되는 책중에 하나였는데 그 느낌이 맞아떨어진 책이다. 게다가 이 책은 내 삶의 방향성마저 올바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책으로 보인다.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질투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질투하는 대상이 바로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을 때 내가 질투하는 분야가 분명히 있었고 부러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코, 많은 돈이나 좋은 차를 타고 다는 것이나 멋진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였다. 높은 투자 수익률도 자랑하거나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진작에 그런 부분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고 방향을 설정했지만 이 책을 통해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콰이어트'가 TED에서 높은 청중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미국은 외향성의 천국인들이 살고 있어 본인을 자각하고 새로운 면을 알게되어 더 큰 호응을 얻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내향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라서 오히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못 된 것이 아닐까하는데 이런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자신의 삶에 자녀교육에 적용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무조건 해마다 개인적으로 뽑는 올 해의 베스트 10에 속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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