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두막하면 떠오르는 것은 목가적인 풍경과 푸근하고 인심 좋은 하얀 수염난 아저씨가 우리를 맞아주고 세상 모든 근심을 잊고 그곳에서 한가하게 머무는 이미지가 떠 오른다. 이 책의 제목이나 책 표지에 있는 그림을 보더라도 그런 이미지가 책을 읽으면서 내 뇌리에 각인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의 즐거운 경험을 반추하거나 부담없이 읽을 생각으로 집어 들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한 가족이 여행을 떠나고 더 없이 행복한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작은 사고가 생기고 그 사고가 금새 해결되면서 책에서 잠시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생각되었으나 그 후에 생각지도 못한 연쇄살인범에 의한 딸 아이의 사망이라는 사건이 생긴다. 역설적인 제목이고 추리 소설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을 먹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으려 하는 순간 책은 다시 이 모든 사건이 끝이 나고 만다. 추리 소설도 아닌 것이다. 책을 읽은 페이지는 겨우 5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이 소설은 하려고 하는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전개가 시작되면서 책의 서두에서 읽은 문구가 문듯 떠 오른다. 이 책에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 말을 읽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드디어 그 의미가 다가온다.





그저 편안한 소설이라 여겼던 책은 어느덧 종교서적으로 탈바꿈한다. 정확하게는 크리스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단순하게 특정 종교인을 위한 책이라거나 특정 종교를 알리기 위한 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건너와 앞선 문물로 여겨졌던 크리스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고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책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억지로 짜내거나 머리로 만들어 낸 우화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영으로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솔직히 읽으면서 중간에 이 책이 진정으로 보통 크리스챤들이 읽는 책이 아니라 어딘지 사이비종교 집단에서 전교목적으로 써 져 있는 책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가지면서 읽었지만 책 말미에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에 우리가 존경하거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 안심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지 모른다.





내가 느낀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누군가 권위있는 사람 - 그가 비록 영적으로 의심할 필요없어도 분명히 사람이다 - 에게 의지하여 누가 보지도 않는데 인정을 받으려는 모습이 우습지만 그것이 인간인지라 부끄러워도 받아들였는데 그런 이유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가 기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평소에 어렴풋이 느끼게 있던 것과 많이 흡사해서 좀 더 놀라고 이것이 맞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인간이 만든 제도와 체제와 정치와 경제등에 의해 잘못 왜곡되고 오역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판단이 들었다.





인간은 자유 의지라는 것을 갖고 있고 그 자유 의지에 의해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택을 내린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판단을 신의 뜻이라 여기며 신이라는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물론, 그 순간에는 그 모습이 악행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런 질물은 하는데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예수님이라면'이라고 하는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인종이든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상관없이 그 존재만으로 다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맞다'라는 망치가 내 머리를 쳤다. 분명히 내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 조건이나 성별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도 우리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 사랑을 하려고 한다. 결단코 가려서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가려서 사랑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인간이 만든 눈가리개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엄한 것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것도 내가 그 종교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성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배우게 되는데 이 개념이 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데 이 책을 읽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고 저절로 체득하게 된다. 어떨 때는 하나님, 어떨 때는 예수님, 어떨 때는 성령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 같은 모습이다.





이것도 우리 인간이 편의적으로 구분하기 편하게 만든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진정으로 내가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것의 근본을 제대로 쫓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깊은 울림을 갖게 만들었다. 원래 선데이 크리스챤이라고 스스로를 우스개소리로 이야기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날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다만, 책임과 책무를 맡게 되면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이 책에서도 사람들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보고 있다는 말을 한다.





워낙 거대한 존재라 누구는 90도 각도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정면에서 바라 본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맞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근본에 대한 것을 잊은체 인간이 어느새 만들어 버린 이미지로써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로써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여러 점에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 서두에 나온 연쇄 살인마에 의해 죽음을 당한 딸 아이로 인해 모든 것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다시 환상을 - 그 부분이 안 믿는 사람에게는 환상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지만 - 통해 자신을 다시 찾게 되고 진정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그려지고 있다. 물론, 당연히 연쇄살인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연쇄살인마에 대한 용서를 스스로 하게 된다.





실제로 용서는 남과 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 예전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본 다큐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 당한 어느 딸의 부모가 그 연쇄살인범을 용서하고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용서하자고 설득하면서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 당신이나 용서하라며 면박을 주고 그 아버지가 외국에서도 그런 살인범을 용서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연쇄살인범을 만나려 했으나 그 살인범이 자신은 죄인이라며 만나주지 않는 것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으며 나도 저럴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나도 저런 용서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이 책은 진정으로 환상으로 가득찬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찼다고 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깊은 울림을 가득하게 선사할 것이다. 나에게는 환상을 통해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굳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 책을 통해 우리 인류에 대한 깊은 사고를 만들어 준다고 본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어떠한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의 많은 리뷰가 있다는 것만을 파악한 후에 읽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많은 것을 선사했다. 오히려 알았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몰랐기 때문에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읽게되어 좋았다.




최근에 사람들을 만날 때 빈 손으로 가기 뭐할 때 그래도 내가 책을 읽는다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음료수 같은 것을 갖고 가는 것보다는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앞으로 선물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에게는 생소한 책이지만 이 책의 작가인 에밀 아자르이자 로맹 가리는 프랑스에서 무척 유명한 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지도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책을 냈고 로맹 가리라는 본인 이름으로도 책을 펴 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필명으로 낸 작품이 더 높은 인정을 받고 작품성을 받은 것에 대해 본인 스스로는 굳이 밝히지 않고 사후인지 사망직전이지 밝힌듯 하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아예 따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장기 소설은 무척이나 많이 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작가일수록 자전적 성장 소설이 꽤 많은데 그건 아마도 본인 스스로 과거에 대한 것을 털어버려야만 작가로서 갖고 있는 껍질을 깨고 새롭게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자신의 과거를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부담감도 분명히 있으리라 보인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니 자전적 소설인 경우가 많았는데 불행히도 지금까지 읽은 소설중에 이 소설 정말로 좋았다고 느낀 소설은 없었다. 그저, 그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그런 이야기를 간직 하고 있구나정도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 작품성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기존에 읽었던 자전적 소설과는 큰 차별성이나 대단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랍인 고아를 키우고 있는 유대인 노인의 이야기 정도가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다. 이 것도 어디까지나 유럽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조합이 특수하면서 특이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사람과 사람이 사는 관계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싶다. 더구나, 어린 아이를 키우며 돈을 벌고 있는데 그 아이의 출신성분은 아무 이유가 없다.





책의 주인공은 모하메드라 불리는 모모인데 실제로 책에서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로라 아줌마라고 불리우는 노인이 아닐까 싶다. 철저하게 모모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것을 책을 통해 표현되고 있지만 도저히 이제 겨우 14살 - 10살로 알고 있다가 나이가 잘못되었다고 알게 된다 -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철학과 시선을 보여준다.





읽다보면 아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보다 더 뛰어나고 현명해서 - 비록, 이 친구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볼 때 충분히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와 태어나게 해 준 부모중에 난 경험하지 못해서 정확하지 않겠지만 길러준 정이 더 크다고 본다. 까 놓고 어릴 때 부터 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면 이미 내 의식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부모라고 믿으며 살아 갈 것이라 보고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어떻게 되었든 간에 계속 봐야지만 서로 무엇인가 생긴다고 본다.





책에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모모와 로라 아줌마는 서로가 상대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친부가 나타나도 그들은 그 존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상대방을 진정한 부모자식으로 여긴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한결같이 제대로 된 인물은 없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정이 많고 - 프랑스인들이라 정과는 다른 개념이겠지만 - 세상에 대해 제대로 된 시선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외관상으로 볼 때 선입견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인물들이지만 말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되고 이렇게 글을 쓰지만 내 자신도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외관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여기서 모모가 갖게 되는 모든 지혜와 시선은 그가 만나는 어른들을 통해서이다. 그가 만나는 인물들이 겉 모습이 별로 일지라도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고,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이 세계를 몸으로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그들과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허심탄회(??)하게 만나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었다.





책의 말미에 로라아줌마를 떠나며 책은 끝맺게 되지만 최근 말로 모모 2.0이 시작되는 환경이 된다. 주변 사람들이 로라아줌마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사회통념으로 모모와 떨어지게 하려 하지만 모모와 로라아줌마는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 실제로 서로 제 정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러 많지 않다 - 자신들의 손으로 결말을 한다.




역시, 자전적 소설은 무엇인가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내 과거를 돌아봐서 어릴 적 경험으로 책을 쓸 만큼의 이야기는 없다. 누구에게나 다 자기만의 이야기는 갖고 있겠지만 들을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은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으니 남들과 같은 아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집어 들어 읽는 순간부터 끝까지 다 읽었을 때까지 이 책이 결코 소설이라는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에세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책은 소설이였다. 하긴, 이제 겨우 6살 전후 정도 된 아이가 그렇게 까지 상세한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가 어릴 때에 기억하는 순간이 사람마다 약간씩 틀린데 그 이유는 자아가 생성된 후부터 기억을 하게 된단다. 그렇게 따지면 초등학교부터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 자아를 깨닫은 것이 초등학교때부터 인 듯 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 전반적으로 흐르는 시대정신이나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표출되는 것 같다. 그 부분은 결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훗 날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에 읽는 책들이 그 당시를 묘사하거나 20세기를 묘사할 때 느끼는 템포와 현재 출판되고 있는 책들을 읽을 때 느끼는 책의 흐름이나 정서의 템포는 확실히 틀리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제인에어와 같은 소설은 그 템포가 더더욱 느려 솔직히 읽으면서 쫓아가는데 오히려 어려움을 느낀다.





이 책에 흐르는 정서는 비록 우리나라와는 조금 틀린 서양의 정서이면서 그중에서도 미국 인디어들의 정서인기는 해도 아주 옛날에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와 같은 느낌이 나지만 앵무새 죽이기가 좀 더 흥미진지하다면 이 책은 잔잔하게 흐르는 냇가의 느낌이 나서 멀리서 볼 때도 좋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여 어떤 놈들이 놀고 있는지 다 보일정도라서 차마 들어가서 놀 생각은 못하고 냇가 근처에 걸턱 앉아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고즈넉하게 보는 듯 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무척 바쁘다. 아무리 모든 것을 잊고 집에만 머무른다고 해도 TV로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검색하거나 보고, 스스로도 잠시도 멍하게 있지 못한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그렇다. 단 하루라도 멍하게 있거나 TV도 인터넷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나마 몇 박 며칠로 수련회를 가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하루 하루 시간을 보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와 차단되어 있을 뿐이지 정신없게 지내는 것은 같다. 그래서, 최근에 템플스테이와 같은 것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굳이 그렇게까지 일부러 내 시간을 외부와 차단하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현재 느끼고 현재 바라보는 만큼 세상을 보려 하고 내 자신에 대해 아는만큼 행동하려 한다. 책에 나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작은 나무'는 굳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에게 맞게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써는 도저히 적응 될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고 어두워지면 촛불을 켜 밥을 먹고 그나마도 아끼기 위해 촛불을 끈 후 장작불 근처에 모여 담소를 나눈 후에 잠을 잔다. 이렇게만 묘사하면 도시인이 내 입자에서 볼 때 너무 따분하고 성공지향적인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버티지 못할 삶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삶이 당연했고 더 가지려 하는 것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로 안분지족하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한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삶이였고 인디언들의 삶이다.





부모님들의 죽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작은나무'는 이 덕분에(??) 체로키 인디어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직접 온 몸으로 체험하고 할아버지 세대들과 교류를 통해 잊고 있었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전통을 실천하게 된다.





의도적인 묘사인지 모르겠지만 책에서 나오는 도시인들이나 종교인들은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고 남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솔직히 모른다는 전제하에 타인에 대해 배려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은 '작은 나무'의 삶과 도시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

작은 나무'나 도시인들이나 똑같이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지만 도시인들은 무조건 오늘보다 더 발전된 것을 추구하려 한다. '작은 나무'도 똑같이 더 발전된 삶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욕심이 아닐까 한다. 자연에 수긍하고 내 몸을 맡겨 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밟아서라도 내가 먼저 발전해야만 만족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 보인다.





책의 말미에 자신들의 잣대로만 남을 제단하려 했던 정치인들 - 책에서 조금이라도 나쁜 놈들은 다 정치인이라는 보통 명사로 부른다 - 이 '작은 나무'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들의 관점에 의할 때 돌보지 못하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다시 할아버니, 할머니 품에 안기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장면은 잔잔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숭고한 감정이 들면서 고개가 떨어지게 만든다.




늘 빠르게 전개되는 책을 읽고 어떻게 하든 더 벌기위해 노력하는 삶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던 과거를 추억나게 만들었다. 누구나 그런 삶을 동경한다고 하면서도 누구도 노력하지 않는다. 나 역시 책을 읽고 '그땐 그랬지'하고선 책을 덮은 후에는 다시 언제 그런 감정이나 회상에 잠겼나 싶게 다시 또 현재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슬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인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엘료 소설의 으뜸은 개인적으로 연금술사이다. 실제로 '연금술사'는 코엘료의 그 어떤 책보다 많이 팔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동화식으로 쉽게 구성되어 있고 읽으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걸 코엘료가 해 낸것이다.

 

그 이후로 코엘료가 펴 낸 대부분의 책들은 연금술사처럼 말랑 말랑하지 않고 좀 더 깊은 영혼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내부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반복되는 이런 구성은 코엘료의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 타성에 젖게 만들고 본인도 지겹다고 느꼈는지 최근에 펴 낸 '승자는 혼자다'에서는 기존의 책과는 다른 방법으로 전달하지만 핵심은 비슷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코엘료의 책은 다 읽었기 때문이다.

 

'브리다'라는 책이 작년에 나 온 것으로 기억하여 최근작이라 생각하고 책을 읽으려 했는데 출판 년도를 보니 벌써 20년이 된 책이 우리나라에서만 2010년에 출판 된 것이다. 이런 점을 알지 못했다면 코엘료가 다시 예전으로 회귀하여 책을 펴 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깐 이 책은 코엘료가 한참 자신의 순례자의 길을 통해 깨닫게 된 환상과 경험과 체험을 통해 얻게 된 그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책으로 알리는 책이다. 코엘료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각색된 인물인지 실존 인물인지 허구의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책은 소설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자신 주위에서 만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영적인 깨달음을 갖게 되는 여자를 번역으로는 마녀라고 하는데 실제로 원본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마녀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나에게 존재하는데 코엘료 책에서 나오는 마녀들은 한결같이 선지자의 이미지이다. 일반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각성하지 못한 내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연금술사에서는 주인공이 남자이지만 코엘료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자이면서 마녀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다 주변 여건이나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깨달은 후에 변화되는 모습을 그린다.

 

'브리다'에서는 소올 메이트를 찾기 위한 과정이 내용의 50%정도를 차지한다. 단순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한 내 '반쪽'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내 부족한 내면을 채워주는 사람이 바로 소올 메이트다. 분명히 그 반쪽은 꼭 이성일 필요는 없을 듯 한데 책에서는 이성으로 표현된다. 서로가 서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궤변이랄 수 있는데 결혼을 한 후에 진정한 내 반쪽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며, 그때 가서야 내 반쪽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가 자신의 남편말고 다른 남자를 아주 잠시 - 한 나절 정도 - 만나며 자신의 소올메이트로 여기고 자신은 두 명의 사람을 사랑했다고 한다는데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궤변으로 들린다.

 

감성보다는 이성이 더 앞서는 입장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한 여자내지 한 남자만 평생 죽어라 사랑한다는 것은 소설같은 곳에서는 가능한데 현실에서는 본 적이 불행히도 없다. 내 반쪽은 바로 지금 나와 같이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내 반쪽이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이해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 어떤 일이나 사람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옆에 있고 나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내가 아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나를 잘 알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나와 다름은 분명히 인식하고 나와 같지 않다는 전제하에 지내야만 한다.

 

나이를 먹어서도 금실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볼 때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갈구하며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고 경험이며 내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랑이 오히려 금방 깨지고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는 소진하게 된다.

 

'브리다'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한 명은 평생 사랑하며 같이 생활하고 잠시 만난 사랑은 마음속에 간직하며 추억으로 갖고 있다. 주이공 역시 2명의 남자를 만나 한 명은 생활인으로 사랑하고 한 명은 자신의 내면의 소올 메이트로 간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연예는 자유롭게 결혼은 지조있게와 같은 느낌이 난다.

 

코엘료의 소설을 계속 읽으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우리 인간들의 내면을 정화하고 자아를 찾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고 생각하며 신비주의라고 표현되는 어떤 종교가 많이 투영되는데 그럴수록 이제는 점점 '연금술사'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결국에는 연금술사에서 나온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복잡하고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서 말이다.

 

이 책으로 코엘료의 소설은 당분간 작별을 고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연금술사'나 다시 한 번 읽어 봐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욤 뮈소의 작품은 늘 환타지를 근간으로 현실을 이야기한다. 환타지라는 장르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타와 같이 마법이 등장하는 소설도 있지만 내공이나 축지법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무협지도 있다. 무협지는 그냥 무협지였는데 어느날부터 환타지라는 장르에 편입된 것처럼 있는 그래도의 현실세계가 아니라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환타지라는 장르를 차용했다고 생각될 만큼 환타지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라고 한다면 소설이라는 분야 자체가 환타지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자주 접하는 현실세계를 생생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작가가 가공하고 창조한 세계이다. 그 어떠한 것도 작가의 머리속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작가가 아무리 현실세계에 일어난 일들이며 장소등에 대해 사전 조사를 많이 했어도 소설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욤 뮈소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영화와 같이 빠른 스피드로 전개되는 내용과 주인공이 잃어버린 - 이것이 사랑일수도 있고, 식구일수도 있고 -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환타지적인 요소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소설의 재미를 더욱 높히기는 하지만 갈수록 반복되는 메세지를 다양하게 변주할 뿐이라는 생각에 최근 1-2권 정도는 그다지 초기에 기욤 뮈소의 작품을 읽을 때 만큼의 재미와 신선함을 선사하지 못했다.





새롭게 기욤 뮈소의 작품이 나왔는데 무척 재미있고 한국인도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굳이 없더라도 그의 전작을 다 읽었다는 사명감(??)에 이번 종이 여자도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으로 읽게 되었는데 여타의 다른 작품들이 환타지를 내 놓고 드러내지 않고 중간정도부터 환타지가 섞여 있다는 생각으로 읽게 되는데 이 책은 아예 처음부터 환타지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주인공의 소설속 여자가 현실 세계에 나와 벌어지는 내용이라니 무조건 이 책은 환타지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고 덮을 때 쯔음에 환타지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전달하자 마자 이 내용이 다시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뜻하지 않는 결말을 보여준다. 늘 그렇듯이 해피엔딩을 예상한 사람들에게 그에 맞는 결말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이 책에 나온 내용과 소재는 꽤 신선하고 색다르다. 뻔한 러브 스토리가 될 수 있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이야기처럼 어느 누가 얼마나 더 그 뻔한 내용을 재미있게 각색하고 생소하면서 신선하게 만드느냐가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충분히 책에 빠지게 만들어 준다.





비록, 소설이지만 소설에서 나온 모든 소설속의 내용은 작가의 머리속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지만 상당히 새롭게 나에게 다가왔다. 장님이 코끼리를 어느 부분을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말이다.





바로 직전 작품을 읽으면서 기욤 뮈소에 대해 실망하고 이제 이 작가의 작품은 그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종이 여자'는 다시 기욤 뮈소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다만, 책 소개에서 작품에 한국 여자가 나온다고 했는데 약간은 낚시성 광고였다. 굳이 한국 여자가 아니더라도 소설의 전개상 전혀 상관이 없어 자신의 책을 많이 읽어 준 한국사람들을 위한 배려정도가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