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추구 2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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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도 지속적인 행복도 지속적인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슬프다고 느끼면서 살아가지만 그 감정이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기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고 좋은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많다. 노력을 하면 다 이뤄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단, 노력도 하지 않고 안 된다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노력은 실패가 될지라도 경험이라는 자산으로 남아 더 발전할 수 있다.

 

비록 인생의 마지막에 행복하게 마무리를 할 수도 있고 슬프게 마무리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모여서 "그래도 참 잘 사셔는데 인생 마지막에 가서.."라고 이야기를 하거나 "참 고생 고생 하셨는데 마지막에 그래도 잘 되셔서"라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나중에 그 사람을 추억할 때 마지막 모습과 상황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은 콕 꼬집어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쉽게 제단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책의 주인공인 새라같은 경우에 소설속에 나오는 특정시기만 다뤄지고 있다. 그 시기를 행복한 시기로 볼 지 불행한 시기로 볼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 할 수도 없고 오직 본인만이 판단하겠지만 본인 조차도 그 시기에 대해 불꽃같은 사랑을 했고 자신의 재능이 꽃을 피웠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도 자신의 목숨만큼 사랑한 사람들을 먼저 보내 불행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인생 말미에 가서 과거를 추억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쁜 일도 기쁜 일도 모두 나중에는 추억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행복은 행복대로 불행은 불행대로 웃으면서 과거를 반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중에 하나이다.

 

소설속의 배경이 맥카시가 활동하던 시기라 미국의 불행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적이 아니면 아군이고 모든 걸 흑백논리로 제단하여 구분하던 시기이고 심지어 백이 되고 싶으면 주변에 있는 흑에 대해 무조건 불어야만 하던 역사적으로도 개인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워낙 불신이 팽배한 시기여서 그런지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 소설의 작가가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기에 배경으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이 출판된 것이 워낙 오래되어 작가의 초기작이라 조금은 필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는 역시 더글라스 케네디는 이야기를 잘 엮고 보여주는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거창하지도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특히, 일반 대중들이 어떤 결론을 좋아할지를 잘 알고 있고 이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영악하고 슬기롭게 척척 풀어낸다. 우연성이 최대한 배제되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 인생에 대해 - 물론 우리도 우연성이 현실에서는 많이 작용한다 - 읽으면서 저절로 집중하게 만들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더 궁금하게 만들어 읽을수록 내용에 빠져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제목인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각자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누가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불행도 누군가 억지로 입을 벌려서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다 우리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모여 그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왕이면 불행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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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추구 1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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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광고에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문구가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동물인지라 나도 모르게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지속적으로 여자의 일생의 느낌이 괜히 생긴다는 알 수 없는 편견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무려 2권이나 되는 소설이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통속소설이다. 장르소설과 작품성 있는 소설과의 차이는 모르지만 남들이 내린 구분에 의해 나도 동참을 하자면 분명히 이 소설은 로맨스 장르의 소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구분과 상관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좋으면 족한것이라 여기지만.

 

1부 내내 답답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길게 내용이 전개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사람은 미래를 기대하며 - 불행히도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 현재를 살아간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어제라고도 불리우는 과거이다.

 

과거를 어떻게 지냈는지에 따라 오늘의 나는 달라진다. 어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 내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나 일을 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한 행동과 생각에 따른 결과물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종종 과거와는 전혀 상관없고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활기칠 때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인 행동과 생각을 한다면 이 세상은 결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만 가득차면 아무 일도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가겠지만 무미건조한 세상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 발전이라는 것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늘 곤란함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 일들의 대부분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행동했을 때이다. 후회할 때도 기뻐할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감정은 우리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부분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워 모든 가치판단을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감정이 내 모든것을 지배할 때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다. 다큐같은 것을 통해 볼 때 기계도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은 감정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이 감정이입을 해서 그런 것이다. 기계 자체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다.

 

'행복의 추구'는 1부에서만 보면 한 여자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거의 드문 -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이런 사랑은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에 - 운명같은 하룻밤의 사랑을 통해 시련을 겪고 이에 대한 도피처 비슷하게 결혼을 하여 불행하게도 사랑과 정(외국에는 없는 감정이지만)을 구분하지 못해 파탄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 우연히 다시 운명같은 하룻밤의 사랑을 만나면서 1부의 내용이 끝난다. '인간은 자신도 이해 못하는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수도 있다. 책에서는 궁극적으로 좋은 의미로 쓰인다.

 

사랑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해결 할 수 없다. '그냥 좋다'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설명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조건인 것이다.

 

솔직히 책은 그다지 재미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읽지는 않았다. 후반부에 들어 여주인공이 좀 자기 자리를 잡아가며 성공이라는 것을 하면서 어느덧 감정이입이 되어 조금씩 읽을만한 순간에 끝이 난다. 책에서 나온 말처럼 이 책의 배경은 1940년대라 그 당시 여자의 삶에대해서 이해하면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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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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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생각이지만 대체로 아시아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상상력이 뛰어 난 듯 하다. 대부분 미래에 대한 상상을 영화나 글로 묘사한 이야기들을 보면 서양인들의 상상력은 꽤 세부적이고 구체적이며 있음직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비해 아시아까지는 아니고 동아시아 삼국을 볼 때 일본은 추리장르가 무척 발달한 듯 하고 우리나라는 무협장르가 판타지와 섞인 장르가 유행하고 있다. 중국쪽은 책을 많이 접하지 않아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닌 무의식과 같은 인간의 내면쪽으로 들어가면 우리나 그들이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공상과학류의 분야는 압도적으로 서양인들의 작품이 뛰어나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몇 십년전에 영화나 소설로 나왔던 것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내가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스타터스'는 표지를 보고 제목을 보고서는 언뜻 종류의 책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막연히 표지에 나온 예쁜 여자의 얼굴이 미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지금이 아닌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막연한 추측으로 읽게 되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자꾸 눈에 밟혀 읽게 되었다.

 

책에서 나온 연대는 추측이 불가능하다. 미래인 것은 확실하고 태평양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니 아마도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로 인해 미성년자들과 노인들만 살아 남았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노인들은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다. 과학의 발달로 200세까지도 자기 할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노인이다. 전쟁은 생화학 무기로 인해 공기로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신을 노약자들에게 우선 한 결과로 그렇게 된 듯 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 세계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멕시코측에서는 미국사람들의 반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을 세웠다고 하고 미국인들이 세계 여행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미국만의 특수상황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리하여 미성년들은 당연히 부모가 없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고아인체로 숨어 살거나 정부가 마련한 거처에서 살아야 한다. 운 좋은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나온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잘 살고 있는 부유층이다. 중간층의 아이들은 없고 부유한 아이들이거나 부모없는 아이들이다.

 

이로 인해 모든 활동을 노인들이 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노인들이 하고 있다.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십중팔구 좋은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행관들이 그들을 잡아 거처에 집어 넣는다. 노인들만 살고 있다고 해도 100세된 노인 정도는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나 마찬가지인 근력과 체력을 갖고 있는듯 보였다.

 

한 업체가 이런 부랑자같은 아이들을 섭외해서 노인들이 가상체험이 아닌 실제로 아이들의 몸을 빌려 행동을 할 수 있는 신기술을 발명하고 이를 근거로 돈을 번다. 아이들을 합법적으로 할 수 없으니 부랑자 아이들을 미끼로 유혹하거나 구치소 비슷한 곳에 있는 아이들을 강제 추출하여 살아있는 로봇으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루, 그 다음에는 일주일, 그 다음에는 한달내지 몇 달 단위로 아이들의 몸을 빌리고 돈을 받고 아이들은 나오는 것이였지만 영구임대(??)가 가능하여 아이들을 섭외하기 보다는 납치와 비슷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몸을 탈취해야 한다. 이런 몸을 갖게 되는 노인들은 당연히 엄청나게 부유하다. 아마도 얼핏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하겠지만 - 잠시도 아니고 10년도 넘은 기간동안이라면 그 아이는 시간의 단절을 겪게 될 것이다 - 자신의 쾌락을 위해 무시할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꿈이 장로불사인가? 단순한 장로불사가 아니라 젊은 몸을 갖고 있는 장로불사일 것이다. 노인이 되어 병치례를 하는 장로불사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나온 정신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지혜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젊은 몸만 갖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충분한 돈이 있다면 말이다.

 

한가지 의문은 원래의 몸은 마찬가지로 캡슐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신체나이는 갈수록 먹게 되어 저절로 사망에 이르게 될 수 있을텐데 그런 시점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하는 점이다. 이미 정신과 영혼인 젊은 몸으로 교체되었으니 그 몸으로 일정기간 사용하다가 다시 젊은 몸으로 교체를 하면 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한편으로는 노인들과 - 노인이라도 100세 넘은 노인들 - 미성년자들만 있다보니 완충작용을 하는 중간 나이대가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아직까지 전쟁이 난지 1년 밖에 되지 않아 미성년에서 성인이 되는 사람이 등장을 하지 않았다. 정신과 육체가 제대로 성숙된 새로운 개체가 나타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든다.

 

아님, 신 기술을 통해 아이들은 노인들의 영원불사를 위한 도구로 계속 쓰이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머지않아 더이상의 새로운 아이들이 사라지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끼리 이미 노인의 정신을 갖고 있는 젊은 육체들을 탈취하여 새롭게 취득할 것인가?

 

아님, 젊은 몸을 갖고 있는 노인들은 사랑을 하여 아이들을 낳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종족보존과 종족 번식이 등장하여 아이들을 지키려고 할 사람들이 다수 등장하게 될텐데 이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같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하튼, 책에서 나온 공간은 흥미롭고 소재와 줄거리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열린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후속편이 나올 수도 있게 만들었다. 다른 작품이 나온다면 기꺼이 볼 의향이 있다. 이 책이 작가의 첫작품이라고 한다.

 

갈수록 노인화되어가고 아이들이 사라지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중간이 사라진 미래사회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그렇게 거창하게 보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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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사냥꾼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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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존 그리샴의 이 책을 보고선 '이 사람 사망한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은 최근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 이제서야 들어온 작품인가보네.'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이상하게 이 책이 여러 곳에서 자주 내 눈에 띄웠다. 그러다보니 '그럼 한 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책을 펴 들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시드니 셀던과 존 그리샴을 혼동했다는 것을 말이다. 예전에 시드니 셀던이 엄청 유명했는데 왜 착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좀 그리샴의 작품은 타임투킬을 영화로 본 것을 비롯하여 우습게도 전부 영화로만 봤지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법정 소설이니 어느정도 재미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법정 소설은 서로 심리를 통해 내 주장이 옳고 상대방 주장이 틀리다는 내용이 전개 되는 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굳이 꼭 법정 소설이나 드라마를 골라 읽거나 보지는 않더라도 읽거나 보게 되면 기본은 한다는 생각을 갖고 읽거나 보게 된다.

 

정작 이 작품을 읽을 때 중간까지 그러한 내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다. 중간부분까지 읽어도 특별하게 긴장된 장면이나 치밀한 법정 드라마의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한 내용이 계속되고 조금은 찌질한 변호사들이 등장하여 이기지 못한 소송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거대한 제약사의 약에 탐욕에 눈 먼 사람들이 달려들어 어떻게든 단 한 푼이라도 - 그 한 푼이 백만달러이긴 하지만 - 뜯어 먹으려고 이전투구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책의 주인공을 비롯한 진영은 가난하고 힘도 없고 소송할 능력이 부족하고 거대한 로펌은 어떻게 하든 이 사건으로 한 밑천잡으려고 하고 상대방 거대제약사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자신들의 약 성능을 더 높히려고 한다.

 

큰 줄거리는 이렇지만 실제로 이 줄거리는 책에서 역설적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데이비드라는 주인공이 기계처럼 반복되는 생활 - 그래도 연봉이 후덜덜하다 - 이 지겨워서 포기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겪는 약자들의 편에서 소송을 하는 모습이 더 좋은 것은 전형적인 모습이기는 하다.

 

그래도 무려 5년이나 변호사를 했지만 단 한번도 법정 근처도 가지 않은 주인공이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 발전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성장스토리로 보는 사람들로 조금씩 조금씩 빠져 들게 만든다. 중간까지 특별하게 익사이팅한 내용없이 전개되지만 읽다보니 어느순간부터 책의 주인공과 그 친구들에게 한국적인 정이 들어버렸다.

 

굳이 다음 이야기가 딱히 궁금한 것은 아니지만 익숙하는 것의 무서움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읽다보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저절로 계속 읽게 되는 흡수력을 갖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읽고 있는 나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되지만 소설이다보니 계속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갖게 되지만 역시나 작가는 냉정하게 마무리를 하지만 다른 곳에서 주인공이 살아갈 희망을 준다.

 

'소송 사냥꾼'은 법정 소설치고는 특별한 흡인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없다. 그런데, 읽다보면 미니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계속 읽게된다.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갖고 있는 작가의 필력이 이런 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역시, 법정 드라마와 소설은 최소한 기본은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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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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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나 추리, 스릴러 소설이 아닌 다음에 대부분의 소설에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어느정도 묻어 나온다. 그런 면에서 더글라스 케니디의 작품은 전부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닐까하는 신기한 경험을 제공해준다.

 

매 작품마다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하는 이유는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대략적인 필모그래프를 읽게되는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클 것이다. 작가가 여행작가로 글을 시작했다는 것이나 미국인인데 파리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들은 나도 모르게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이야기라는 최면에 걸린다.

 

'파리 5구의 여인'은 시작은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감을 잡기 어렵다. 그 후로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전개가 된다. 그 말은 당연히 전개되어야 할 내용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조금은 다소 특이한 내용들이 소개가 된다. 좀 더 읽게 되면 중간후부터는 특별한 내용없이 반복된다는 느낌도 들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때부터 영악한 작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판타지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기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다가 환상과 꿈과 작가의 몽상중에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작품속에 살아있는 현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동시에 작품은 판타지가 된다.

 

주인공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주인공이 원하는 바 대로 모든 것들이 하나씩 진행이 된다. 단, 조건이 있다. 특정 요일, 정해진 시간동안 항상 자신을 만나로 와야 한다. 처음에는 그저 연인들의 사랑이야기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하나씩 주변 상황들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는 -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 자유와 안정적인 직업과 행복을 성취한다. 그런데, 조건은 위에 말한 것과 같다. 무조건 특정날짜와 정해진 시간에는 여인에게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인의 질투로 인해 주인공의 삶이 어그러진다.

 

이러한 삶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딱 정해진 시간에 자신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과 다른 여성을 사귈 수 없다는 점을 빼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지니가 있는 것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얻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잃는것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

 

우리가 특정 시간에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대신에 그 시간에 수 많은 다른 가능성은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단지 일주일에 딱 몇 시간만 제외하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삶을 즐기는 것이 나쁘지는 않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족쇄가 자기에게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성에 대한 갈구는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이지만 이 감정은 결혼과 동시에 봉인을 한다. 설마, 오로지 내가 결혼한 배우자만 평생 눈에 들어오고 다른 배우자는 절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자. 자식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어도 배우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봉인이 풀리는 순간 결혼은 위태로울 수 있지만 그러하기에 수시로 봉인에 시멘트를 바르는 거다.

 

내가 과연 소설속의 주인공의 상황이라면 모르겠다. 한, 10년 정도는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이후에는 그때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소설속에도 주인공이 원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딸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지켜본 후에 체념하며 순응을 한다.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으니 말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위험한 관계'를 제외하고는 다 재미있게 읽었다. '위험한 관계'는 너무 반복되고 묘사가 세밀하여 좀 지루했다. 또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이혼이야기라 지극히 통속적인 나로써는. 그 외에 작품들은 전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빅피처'가 제일 재미있었고, '모멘트'는 그 사랑이야기가 절절했고, 이번 '파리 5구의 여인'은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인생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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