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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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글을 통해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분이 이야기한 책은 '고래'였는데 내가 택한 책은 '고령화 가족'이였다. 고래를 읽고 싶었으나 있는 책이 고령화가족이라 고령화 가족을 읽게 되었다. 읽고나서 재미있었다. 그 당시에 막 박민규의 소설들도 읽으며 현대 남자 작가들의 소설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단 두명을 통한 통계의 오류일 수 있어도 의도하지 않게 주로 한국 현대소설은 여자 작가들의 소설들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 넘어 드디어 고래라는 책을 다시 집어 들어 읽게 되었다. 아마도 책의 두께때문에 계속 괜히 주저했던 것이 아닐까싶다. 두꺼우면 어딘지 모르게 기피하게 되는 심리가 있다. 후다딱 읽어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생각대로 책의 글씨도 작고 빼곡하게 적혀있어 읽는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한 장씩 읽어가며 내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꾼이라는 이야기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반에는 좀 헤매기는 했지만 - 도입부가 정말로 도입부로 소설 전체를 볼 때 중요하면서도 꼭 읽지 않아도 무방은 했다 - 도입이 지난 후부터 눈에 들어오고 이름들이 하나씩 친숙해지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내용이 사실 황당하다고 하면 황당할 수 있는 내용이다. 기승전결이 있지만 현실과 환상이 번갈아가며 교차되고 나오는 이야기들에 점점 빠져들게 만든다.

 

모든 나라에서 '고래'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래'가 어딘지 이상향이나 유토피아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모른다. 그저, 워낙 드문 존재이고 쉽게 접할 수 없어 그럴 수도 있고, '고래사냥'을 통해 새롭게 정립된 개념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책에서 고래는 초반에 일찍 등장한다. 산골에 살던 금복이가 바닷가에서 거대한 고래를 보고 마음이 설레고 뛰는 모습을 묘사하며 등장한다. 그 후에는 특별히 등장하지 않는다.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시작을 알리는 메타포로 등장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다르게 보면 딱히 그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느낌도 든다.

 

여하튼, 우리나라의 창에서 등장하는 추임새같기도 하고 마당놀이에서 뜬금없이 극이 진행되다 관객들에게 이야기하는 마당쇠나 방자같기도 하고 서커스에서 등장하는 삐에로처럼 작가가 갑자기 등장하여 극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얼씨구'하기도 하고, '그렇지'하기도 하고, '좋구나'하면서 '이런,,이런'하면서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정말 이야기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앉아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묘사가 죽인다는 것이다. 듣고 있으면 실제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엉덩이가 나도 모르게 덜썩 덜썩 거리며 일어나 점점 이야기에 빠져 들어 다음 내용을 재촉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라는 말에 꼭 당장 이야기하지 않고 뜸을 들이고 엉뚱한 이야기로 긴장을 더하는 것처럼 중간 중간마다 '이 어찌 구슬픈 이야기가 아닐쏘냐'하며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지'라며 맞장구를 치게 만들어준다.

 

고래의 내용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근대사를 관통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다. 꼭 이야기하하자면 한 여인 - 나중에는 남자로 변한다고 믿게 된다만 - 의 이야기에 번들상품으로 그 딸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곁들여진다. 그런데, 솔직히 이 소설의 내용은 끝이 없는 네버엔딩스토리가 될 만한 이야기다. 작가가 끝을 냈으니 끝이 난 것이지 마음만 먹었으면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내용이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소설같은 현실이고 소설보다 더 거짓말 같은 현실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고래'의 내용은 정말로 소설적이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뻔하고 닳고 닳은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조금 더 세련되었지만 우리가 늘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바로 그 내용이 천연덕스럽게 나온다. 심지어 예측을 하지 않아도 가나다라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스펙타클 대하역사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여인의 이야기면서도 우리나라 근대사의 성장기를 빼곰히 담고 있다. 비록, 정면에 맞서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살짝 살짝 비틀어서 말한다. 누구인지 유추하지 않아도 알게 되고 어떤 상황인지 묘사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해 그저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 그건 바로 '00의 법칙'이다. 귀찮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없이 연애의 법칙이라든지 그건 당연한 중력의 법칙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일축해 버린다. 법칙이라는 데 토를 달 수가 없다. 이를테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 그런단 말인가?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이야기꾼의 구라가 아닐 수 없다.

 

내용을 볼 때 전체적으로 조망을 하면 슬프다고 하면 슬픈 내용인데 그런 감정은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어느 재미있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나에게 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슬픈조가 되어버리면 이게 또 이야기가 재미없어 진다. 익살스럽고 위트가 넘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어버리니 허망하다는 느낌은 든다. 결국에는 전부 죽는구나. 이렇게 전부 죽어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나하는 쓸자데기 없는 생각도 한다.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전부 죽는다. 남을 등쳐 먹는 놈도 당하는 놈도 전부 죽어버린다. 예쁜 년도 미련한 년도 죽어버린다.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는 우리네 인생이다.

 

주저리 주저리 묘사가 많이 나오는 것보다는 이야기에 충실한 작품을 더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고령화 가족도 그렇고 고래도 마찬가지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깊은 내공이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건 모르겠다. 그저, 읽고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소설읽으면서 인생을 깨닫기 보다는 페이지를 넘기며 재미있는데 하는 것도 아주 좋은 독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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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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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을 무대로 하는 작품들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건 아마도 '뻐꾸기 둥지위에 날아간 새'가 아닐까 한다. 그 외에도 안젤리나 졸리가 아직 무명시절에 지금처럼 섹시코드가 없던 시절에 출연한 작품도 있다.

 

어릴 때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어딘지 무섭고 전염될 것 같은 인상이였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기 때문이였다. 용인에는 이상한 전화가 많이 온다고 했다. 그 이유가 용인에 정신병원이 있어 장난 전화가 많이 온다고 혹시 이상한 전화가 오면 용인에서 온 것이라는 괴담아닌 괴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된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전화를 무작위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병원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친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외국과 달리 정신과 치료를 받는 다는 것은 거의 커밍아웃에 해당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의 분위기가 아직도 존재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혼란을 대비하거나 스스로 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받는 정신치료가 아닌 무엇인가 엄청나게 문제가 있고 갑자기 나를 헤치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루종일 침을 흘리거나 헛소리를 해 대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누구나 정신병원에 입원될 수 있는 인자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미친 짓을 하면 병원 봉고차가 싣고 용인으로 데려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처럼 정신병원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존재다. 실제로 정신병원을 가 본적도 화면으로 본 적이 없지만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있어도.

 

정신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다 각자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는 없다. 사이코패스같은 경우에도 계기가 있거나 어떤 이유는 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태어 날 때부터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각자 경험하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은 상당히 흥미를 주는 소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작품이 나온 것은 또 아니다.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 있는 것이지만 - 본인이 인정을 하건, 주변 사람들이 인정을 하건 - 그렇지 않고 문제가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이웃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을 통해서 더 소설에서 쓰일 법한 이야기들이 많아 그런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미국에서 멀쩡한 사람이 일부러 여러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정신병원에서 다들 그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치료를 했다. 그들이 정상인이라는 것을 전혀 밝혀 내지 못했다. 한 명이 아니라 몇 명의 사람들이 - 아마도 관련 분야의 종사자로 학생들이였을 꺼다 - 여러 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에서 퇴원을 해 줄 때까지 있었다. 그 후에 이런 사례들을 발표하고 나서 병원들은 완전히 뒤집어 져서 그럴 일이 절대로 없다고 했고 다시 해 보라고 했고 그 후 몇 달 후에 병원들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발표했지만 정작 이번에는 단 한 명도 입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정신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경중이 다를 뿐이지 조금씩은 다들 문제를 갖고 있다. 스스로 치유할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치유할 수도 있고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 버틸 수도 있다. 문제가 곪고 곪아서 사회적인 문제로 결국에는 터지는 사람도 있고. 

'내 심장을 쏴라'는 바로 그런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상에서 나오는 정신병원들은 거의 대부분 병원이 이상하고 환자들이 오히려 정상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쳐서 병원에 입원한 것인지, 입원을 하고 보니 미친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이미 미쳐서 왔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말이다.

 

이수명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이 어느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겪은 경험을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전력으로 인해 아주 사소하다고 하면 사소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다시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승민이라는 사람과 만나 겪는 이야기인데 책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입원한 것이지만 책의 주인공인 이수명과 승민은 정신적으로는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의 모든 행동은 정상인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초반부에는 병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각자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할애한다.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그들이 이 병원에서 존재하는 이유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 후 승민과 이수명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그들은 환자로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들어 온 것이라서. 그런데,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거의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 어느 정도 강제적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어느정도 본인의 동의도 받기는 하지만.

 

탈출 하려는 자와 탈출을 돕는자와 탈출을 막는자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탈출은 자유를 의미하고 돕는 다는 것은 수긍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막는다는 것은 역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되지만 누가 제 정신인가에 대한 문제는 또 다시 다르다고 보인다. 물론, 책에서는 병원으로부터의 탈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딱 한 번 자신이 느꼈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주인공인 이수명은 평생 정신병원에서 입원하기로 되어 있고 본인도 퇴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가장 안전하고 모든 것을 잊고 생활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말을 듣게 되는데 이 말은 이유없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느낌을 순간 받았다. 나도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마지막에 가서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게 된다. 이수명은 자신이 그동안 왜곡하고 봉인했던 진실을 마주치고 피하려 하지 않는 순간에 정신병원에서 나갈 결심을 한다. 승민은 이미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야 할 곳으로 간다. 개인적으로 늘 진실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진실을 마주치는 것은 늘 두렵고 무서울 때가 많다.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을 오로지 순수하게 봐야 한다. 아무런 색안경도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오롯이 봐야 한다는 것은 의외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순수하게 나만 볼 수 있는 나를 본다는 것이 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볼 때 그런 것이고 내가 나를 볼 때엔 진실은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나에게 있다.

 

이 책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운명에 휩싸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썼다고 한다. 내가 쓴 리뷰는 그와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어 그런 지도 모르겠다. 난 오히려 운명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책은 가장 최신작인 7년의 밤보다는 재미가 덜했다.

 

책의 내용이 정신병원 이야기라는 것을 초반에 읽으면서 알게 되어 내용은 당연히 예상이 되었고 그 예상대로 전개가 되었다.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과 상황이 잘 묘사되고 타당성이 주워지느냐가 핵심으로 보였다. 다만, 나로부터 도망가지 말라는 책 거의 후반에 나온 대사가 읽은 후에 뇌리에 남았다. 그러다보니 책 리뷰가 그렇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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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맹자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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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하며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제목은 '소설 맹자'이다. 나는 이 책을 집으며 '소설 공자'라고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공자이야기가 처음부터 시작하여 의식의 아무런 방해없이 읽어 나가는데 어느순간부터 맹자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다시 들여다보니 공자가 아닌 맹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맹자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 수는 있지만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는 딱히 구분을 짓고 볼 필요가 없다. 내가 맹자라고 읽고 공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후대에 더 발전되어 전파한 인물이 바로 맹자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있었기에 맹자라는 사상가와 나올 수 있었지만 맹자가 없었다면 공자라는 사상가는 절대로 빛을 볼 수 없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아무리 뛰어난 1인자가 있어도 1인자를 제대로 보좌해주는 2인자가 없다면 절대로 1인자는 1인자로써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 이처럼 맹자는 스스로도 엄청난 인물이지만 공자라는 카테고리에 있을 때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공자 또한 맹자가 있었기에 공자라는 카테고리가 형성될 수 있었고.

 

인문학이 열풍이다. 서양의 다양한 철학자부터 중국의 사상가들까지. 이들이 저술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고 공부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하고 세상에 투영하면서 무엇인가 배우려고 한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은 든다. 자신이 필요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가방을 다들 들고 다녀 나도 질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갖고 다니는 것처럼 인문학탐구가 유행으로 번진다. 이렇게라도 관심을 갖게 되는 선순환구조가 된다면 분명히 좋을 것이지만.

 

이과출신이 아니라 문과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인문학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그 정신에 대해서는 자세하고도 확실히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의 이름과 전파한 사상의 핵심은 아는데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쉽게 접할 수 있고 자신들도 모르게 실 생활에서 지배당하고 있는 유교정신이 바로 공자와 맹자를 아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보자면 이 책은 소설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맹자의 평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또한, 딱히 맹자의 모든 이야기를 알려주고 그에 따른 정신에 대해 알려준다기 보다는 맹자를 위시로 비슷한 동시대의 사상가들에 대해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동양사상을 그것도 중국 동양사상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입문서적으로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단순하게 공자와 맹자에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맹자 당시에 유행했던 사상가들과 맹자가 어떤 이야기로 그들을 설복시켰는지 알려주면서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아 그런지 몰라도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혀 새롭거나 처음 듣는 내용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어디선가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다. 특히, 한자와 함께 이야기를 전해 줄 때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예전에 한자라는 과목이 있어 저절로 들은 풍월들이 있을 것이고 국어시간에도 들은 것이 있을테고 살면서 동양을 살고 있기에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렵다고 느끼기보다는. 실제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결코 쉬운 내용은 아닐것이다. 조선시대에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로 등용되기 위해서 사서오경이라는 과목을 공부해야 했는데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어렵다는 것은 피부로 느껴진다.

 

공자와 맹자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심지어 서양의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철학자와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비교하면서 설명하여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인문학 입문서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로 인문학 입문서를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통해 접근방법에 대해 아는 것이 어줍짢은 책보다는 훨씬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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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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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소설을 읽게 되면 작가가 이 소설을 만든 의도까지는 아니라도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쓰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유추를 할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 실려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작가의 경험이 묻어 나올 수 있다. 과연, 이야이가가 허구인지 작가의 경험이 실려있는지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경우도 있다.

 

장르소설이라면 작가가 연구와 조사등을 통해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큰 의심없이 받아들이지만 이와 같이 장르소설이 아닌 경우에는 저절로 이 이야기가 작가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큰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척 궁금하고 정말로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델리스파이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제목이 같이 제목을 볼 때마다 저절로 뇌 속에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정확한 건 '챠우 챠우'이지만 아마도 다들 '너의 목소리가 들려'로 기억하지 않을까 한다. 노래 가사가 주구장창 '너의 목소리가 들려'만 외쳐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으면 다시 한 번 머리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가사와 함께 음악이 나온다. 이 책에서 나온 내용과는 특별한 연관이 없겠지만 한 번 머리속에 주입된 개념이 사라지는 것은 이토록 힘든 듯 하다. 워낙 노래가 좋아 죽어라 들어 본 기억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단순하게 하자면 폭주족에 대한 내용이다. 이렇게 한 줄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을 이 책에는 경찰들이 조서를 꾸밀때 하는 것이라 한다. 상대방이 무엇이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딱 한 줄로 정리하는 것이 바로 조서를 쓰는 요령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마디로 상대방의 이야기는 중요하지도 않고 내가 정의한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 들리거나 개가 짖는 것과 같은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거다. 이건, 참 중요하다. 긍정적으로 보면 세상을 단순하고 자신의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듣고 보고 판단하면 된다. 얼마나 세상이 편안한가. 문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 정확하지는 않다만 - 갈수록 폭주족의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복절과 같은 전 날에 많은 폭주족들이 도로를 활개치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계도와 검거를 한 후인 올 해인가 작년부터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는 뉴스를 봤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 이유가 나온다.

 

당연히 책에 나온 내용이 현재 현실에서 벌어진 것들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굳이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알아 볼 필요도 없고 그저 소설은 소설로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아련하면서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이 계속 책을 읽은 후에 남아있다.

 

소설가는 시인처럼 우리나라 말이나 단어에 대해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적어본 적이 없어 그런지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단어로 함축하지 못하겠지만 책을 읽은 후에 남은 감정들이 이유없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감정은 아닌데 말이다.

 

책에 나온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뉴스 르포같은 곳에서 보기는 했어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 보다 적나라하게 와 닿았고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단 두명의 주인공들로 인해서 깨닫거나 파악하기에는 표본이 너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의 삶은 다 다른 삶인데 그걸 표본이 적다는 것으로 획일적으로 제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책에 나온 이야기들은 결코 허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제이'라는 인물이 생존한 인물인지 비슷한 아이가 있었는지 몰라도 책을 읽고 실제로 전개되는 내용들이 자세히는 몰라도 현실에서 벌어진 내용과 비슷하다는 착각을 일으켜서 저절로 읽고 있는 내용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읽게 되었다.

 

소설보다 현실이, 현실보다 소설이 어떤 쪽이 더 비참한지, 행복한지, 현실적인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수 있고 현실에 사는 사람들은 위안을 받거나 행복해 하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경험과 감정들이 소설에 나온 것보다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소설에서 벌어진 내용이 나에게는 결코 무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소설가는 그저 소설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하면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집필이유나 어떤 동기로 쓰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하다. 아무 생각없이 내용이 기발하거나 획기적인 이유만으로 소설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남은 것들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이다. 똑같은 소설을 읽고 읽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과 보는 세계관이 다르다. 심지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전혀 엉뚱한 것을 읽게되거나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건,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는 작가가 임의로 만들었어도 그 세계를 보는 사람은 다시 자신의 세계를 투영해서 읽기 때문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사실 무척 철학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지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경청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너의 목서리가 들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어와 귀밥으로 떨어져 나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빛의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읽고 좀 그냥 그래서 실망했는데 이 소설은 나에게는 맞는다. 그 이유는 모른다. 그냥 읽으니 좋고 책 전반에 흐르고 있는 감수성과 이야기 구조가 그렇다.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장소설이라 좋은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재미있다고 표현하기에는 다른 개념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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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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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내용의 소설을 어떻게 펴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어떤 곳에서 힌트를 얻고 영감을 얻어 창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생긴다. 소설가에게 창작의 제한은 없고 자신이 무엇인든 창조할 수 있는 창조자의 능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배우고 읽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창조할 수 밖에 없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더구나, 소설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와 같은 부분은 분명히 자신이 이 내용을 갖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영감이 들때 하지 않을까 하는데 그러한 구상은 평소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조금씩 자료를 모으다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쓸때부터 구체화시키고 관련된 자료를 모으면서 살을 붙히면서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고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쓰게 될 것이라 본다. 

 

'7년의 밤'에 나오는 내용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보인다. 감히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장르소설과 다른 것은 심리묘사가 아닐까 한다. 장르소설이 줄거리가 주 내용을 이루고 풀어내고 풀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면 '7년의 밤'에는 그러한 플룻은 같지만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빨려들어가게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는 당연한 과제이겠지만 각 캐릭터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쌓아 놓은 섬세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탐구해서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 그 사람에 대해 저절로 상상하게 되고 소설속에 나오는 대상자에 대해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욕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위해 얼마나 자세한 스크랩을 했는지 감탄이 나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에는 다양한 선택이 존재한다.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다. 이걸 선택하느냐 저걸 선택하느냐의 문제에서 늘 이 선택이 아닌 저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를 고민하게 되고 후회를 하기도 하고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을 하기도 한다. 대분의 사소한 선택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그 선택이라는 것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과 맞닺뜨리게 된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관과 가치관등이 투영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 전혀 상관없이 단지 선택직전에 벌어진 다양한 상황에 이끌리어 나도 모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이런 부분이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할 수 있는 한 가장이 - 물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평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과 자신만의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갖고 있다 -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하필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인물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의 두께도 상당하고 각 상황과 인물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비롯하여 각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책 가득히 펼쳐짐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책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든다. 문제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으로 답답하는 점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만을 아는 이기주의자나 순진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나 다들 사람들은 적당히 그런 면모를 갖고 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한가지 감정이나 상황에 함몰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본다.

 

이 책에 대해 작가는 - 사실 책을 읽고 책 후반부에 나오는 평론가들의 평론같은 글은 거의 읽지 않는지만 작자 자신의 '작가의 변'같은 경우에는 읽는다 - 사실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이 꼭 진실일 수 없고 진실이 꼭 사실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보이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지만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 세상은 보이는 사실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글을 읽은 후에 책 내용을 생각해보니 그런 관점으로 읽힌다.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중에는 사실이 있고 풍문이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보이는 사실은 믿는다. 자신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이비교주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보았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지만 그 사실이 진실과는 차이가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누군가를 죽인 남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 남자, 목적을 향해 달려왔지만 모든 것이 불만 불평인 여자, 보이기에는 부러워 할만한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여자, 질식할 것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이, 속으로 피폐해 가는 아이, 자신의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남자등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에만 주목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진실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이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고 우리는 그 부분을 근거로 그들에 대해 좋다 또는 나쁘다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갖고 있는 진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실제로 꼭 알 필요는 없다. 그 사실과 진실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보다 더 가깝게 다가서고 다가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많은 책이나 이야기에서 자식은 부모를 닮게 되어있다고 한다. 솔직히 실 생활에서 그러한 내용이 얼마나 적용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이를 들어가면서 나 스스로 이런 부분은 내 아버지를 닮았구나라는 점들이 눈에 보인다. 내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부모가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내 무의식에 잠기거나 각인되거나 유전되는 것을 보면 내가 현재 하는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현실이 더 소설같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한 부정할 수도 없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 내가 된다면 정말 끔찍한 악몽을 매일같이 안 꾸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보인다.

 

책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고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을 정도가 되지만 과연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자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역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만, 그러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진실이 들어나게 되었고 아마도 더이상 악몽을 꾸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모든 진실이 들어나지는 않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보여지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기보다는 그 진실을 알게 되어 편안한 밤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아직도 살아 가야 할 길이 앞에 펼쳐져 있기에 그 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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