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中庸 - 공존과 소통 그리고 인성을 세우는 진리
자사 원작, 심범섭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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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읽고 있는 책의 대다수가 서양쪽에서 넘어왔다. 번역물은 거의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넘어온 책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넘어 와 번역된 책은 잘 읽지 않는다. 편견 아닌 편견이라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책의 내용이나 정서와 가치관등이 나와 잘 맞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펴내는 일본은 우리와 정서도 비슷한데 소설류는 재미있게 읽어도 경제, 경영 서적들은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넘어온 책들은 아직은 수준미달로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서양에서 넘어온 책 위주로 읽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경제, 경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든 저자들은 미국을 위시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방대한 조사력등에서는 미국 저자들의 수준을 따라잡기 힘들정도라고 느낄 정도이기도 하다. 이들은 책 한 권을 펴 내기 위해서 10년 이라는 기간동안 연구한 결과물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어릴 때는 분명히 서양보다는 동양적인 관점의 공부를 배웠다. 한문을 통해 고사성어를 알고 익힌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한자가 무척 어려웠고 점수도 안 좋았던 반작용이 커서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합리와 이성이라는 관점으로 전 세계의 사상과 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경도된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동양에서 태어나고 체득한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다 보니 동양이나 서양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어줍찮은 판단도 한 몫했다.

 

동양은 - 우리가 인도와 이슬람까지 포함하기에는 너무 멀고 - 사서삼경이 핵심이다. 이걸 알고 있지만 정작 공부는 하지 않았고 관련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다. 늘 마음속에는 언젠가는...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결국에는 좋은 말씀인 경우가 많다는거. 또 한편으로는 한문과 함께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빗대어 이야기하면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유식해 보이고 똑똑해 보인다는 측면도 있다. 그렇게 동양 사상은 계속 머리속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고 가장 나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중용'이다. 별의별 정신을 대표하는 한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에게는 '중용'이 으뜸이다. 중용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평소에 블로그 모토이자 삶의 모토로 하고 있는 '천천히 꾸준히'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이거 억지로 갖다 붙히것처럼 보여도 내가 볼 때는 그렇다.

 

학생 시절에도 '중용'은 상당히 중요하게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서 중용은 점점 무가치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현대인에게 중용은 이도 저도 아닌 변절자나 애매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무색무취의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 하자면 화끈하게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내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것 같고 말이다.

한국인은 화끈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뜨거운 열기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잊는 것도 화끈하다. 엄청나게 잊지 못할 사건을 겪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지낸다. 그러고 나서는 또 다시 반복한다며 탄식을 한다. 큰 사건이 나면 한 동안 언론이 도배를 하지만 정작 심층 취재는 없고 모든 시간과 지면을 반복되는 말로 점차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교언영색을 한다.(한자라 좀 어려운 단어를 쓰는 듯)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불같이 타올라 누군가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모든 것을 덮으며 끝낸다. 희생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하는데 개선은 뒷짐지고 한 명을 패서 끝장 내버린 후에 가슴 후련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런 후에 다시 반복되는 사건 사고에 왜 이러냐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중용'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가 아니라 누구의 눈치도 누구의 이익도 손해도 봐주지 않고 중심을 잡고 올곧게 가는 정신 말이다. 아쉽게도 '중용'은 의외로 힘들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으로 남는 것은 막상 실천하려면 너무 힘든 포지션이다. 누군가의 편에 서야만 마음과 몸이 편하다. 흑백정신이 투철한 한국인은 '중용'은 회색분자로 여긴다. 상황에 따라 이쪽도 저쪽도 될 수 있는데 우리는 한 번 이쪽이면 잘못해도 이쪽 편을 해야 한다. 이것 큰 잘못이다.

 

책의 서두가 '중용'에 대한 개념과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 집중을 못했더니 - 이거 핑계다 - 좀 어려웠다. 정확하게 개념이 들어오지 않다보니 동양 사상은 역시나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초반이 넘어가고 나서는 어렵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 초반  50페이지까지는 어떤 책이든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그렇게 따지면 이 책도 그런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그래도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것은 어차피 무리이니 그런대로 아주 조금이라도 내게 남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사서삼경에 대한 오해 내지 편견이 있는 것은 이런 것을 해석하는 책들이 대부분 한자를 보여주고 이에 대한 해례를 해 주는데 너무 직독직역으로 하다보니 고리타분한 측면이 컸고 최근에 그나마 쉽게 풀어주는 책들이 나왔지만 얼핏 읽어보면 한자와 이에 대한 번역이 다소 뻔한 좋은 말인듯 싶어 꺼려졌다.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계속 관련 책을 뒤로 미뤘던 영향도 있었다.

 

이 책인 '중용'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개념은 '인의예지'이다. 굳이 중용이 아니더라도 사서삼경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개념이자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할 원리로 보면 된다. 이것만 지킨다면 인간사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어질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만큼 지키기 어렵고 힘들다. '인의예지'에 '신'까지 지키면 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동양에서 태어났지만 서양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인지라 말이다.

 

예전에는 유교라는 표현을 했다. 이건 잘못된 표현이다. 유학이지 유교가 될 수는 없다. 아마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때문에 유교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유교는 종교로써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중용'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든 개념이고 지키기 무척이나 곤란할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벌어지는 대부분은 '중용'만 지키면 무난하고 원한히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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