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유신론자로써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싫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익히 알고 있었기에 굳이 더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몇 권의 책을 읽고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제는 대략 감이 왔기에 그에 대한 더이상의 논증이나 증명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 오히려 시간 낭비에 속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신자로써 무신을 배척하고 무신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신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은 깨달았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처럼 믿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다. 믿으면 된다는 표현에는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필요없게 만드는 영적인 측면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증명이 되지 않고 비과학적이는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의 영역이다.


하지만, 유신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다 믿지는 않는다. 유신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엄청나게 패악무도한 일들이 버젓이 저질러지는 일들에 대해 기가 차지도 않는 심정을 갖고 있다. 또한, 너무나 말도 안되는 일을 갖고 종교라는 이름과 영적이라는 표현으로 전부 무마하는 것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 초능력을 재미삼아 보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일단, 가면 갈수록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눈에 보여도 제반사항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치부될 수 있어도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행하는 것이 논리적인 증명이나 증거를 전부 무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선에서 되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안되는 것을 그저 믿으라고 한다고 믿는 것이 과연 믿음일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현대는 과학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정확하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과학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라 할 수 있지만. 과학이 발달한 것은 모든 것을 증명하고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왜 그런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반대상황까지 감안해서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보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에 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증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과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라는 논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에 비해 비논리적인 미신과 영적인 것들은 증거가 없어도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니, 믿으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고대에부터 인류에게 벌어진 행동이다. 인류는 자신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만들어 믿음으로 대체를 한다. 워낙 알고 있는 것이 없다보니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지만 현대처럼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과거와 같은 패턴을 답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상식이라는 것이 풍부하지 못한 시절에는 지구는 평평하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걸 믿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그걸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상식이라고 표현한다.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인데 말이다. 이토록 과거와 달리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예전과는 달리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비과학적인 일들이라 지칭하는 초자연스러운 일과 초능력, 미신, 영매등등이 전부 말도 안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것들을 믿는다.


책에서는 지구의 역사가 몇 천년이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에 반하는 내용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보다는 편리하게 이해하기 쉬운 것을 믿는 편이라 몇 천년이라고 아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보니 그렇게 사람들은 믿는다고 한다. 인간은 여전히 홍적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분이 세상에 알려지고 과학으로 비밀이 풀렸다고 해도 똑같이 이성보다는 믿음을 택한다고 한다.


특히, 여러 책에서 언급한것처럼 인간이 생존하는데 중요했던 패턴을 짓는 것이 아직도 인간의 본능에 남아 우연이 반복될 때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필연이라 생각하고 신의 뜻이라 규정한다. 이를테면, 동전을 50번 던지면 확률상 25번은 앞면, 25번은 뒷면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40번이 앞 면이 나올 수 있다. 1000번을 던져도 700번이 앞면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은 확률상 반반이라 훨씬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지 않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런 확률까지는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보니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를 그때까지 알고 있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밝혀내지 못하다보니 무엇인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적이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공감대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이제 과학이 발달하여 많은 미지의 것들이 밝혀졌고 과거에 믿었던 믿음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고 증거를 찾아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믿는다. 또는 믿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은 싸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종교라는 이름과 믿음으로 벌어지고 자행되는 수많은 살인과 맹목적인 복종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 봐야 한다고 본다.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 타인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은 분명히 잘 못 된 것이고 나와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그를 핍박하고 처단하는 것은 더더욱 잘 못 된 것이라 본다. 책에서 언급처럼 종교의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의 신이란 말인가? 신이라면 완전히 다른 관점도 있어야 할텐데 말이다. 인류 최대의 히트상품이 신이라는 비아냥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와 칼 세이건이 엄청나게 자주 언급이 된다. 차라리, 그 두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실제로도 좀 더 풍부한 예화를 들어 설명하고 이해하고 읽기 쉬운 것은 칼 세이건이였고 리처드 도킨스는 너무 똑똑해서인지 읽기 쉽지는 않았다. 여하튼,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동한다면 좋겠지만 인간이라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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