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떠 오른다. 그만큼 롤리타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롤리타가 어떤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소구되고 있고 활용하고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된다. 워낙에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이미지들이 나온 세상이 되어버려 예전만큼 롤리타라는 이미지는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아도 여전히 롤리타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롤리타 신드룸'이라고 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간의 관계까지 접근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남성들이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의 본능이다. 남자는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씨를 안전하고 튼튼하게 키워줄 어린 여성을 선호한다고 한다. 롤리타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러한 학문적인 연구는 아직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 학문적인 연구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자연스럽고 좋게 보지 않는다.

 

롤리타에 나온 여성은 단순히 젊은 여성을 넘어 어린 여성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중학생 정도의 아이일 것이다. 60대 남성이 20대의 여성을 만나는 것은 꼬깝게 보고 자연스럽게 보지 않는데 40대가 10대를 만난다고 하면 이건 무조건 천일 공노할 나쁜놈이 되어버린다. 그 이유는 20대는 자신의 의지를 갖고 남성을 접근하거나 남성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지만 10대의 여성은 아직까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요와 강압에 의한 폭력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 생활에서는 그런 경우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가공의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여러 사진이나 소설이나 영화등을 포함한 곳에서는 10대의 여성이 자발적으로 나이 든 남성과 관계를 맺는다.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기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이라는 차이를 제외하면 일반 연인과 별 차이점이 없는 모습을 그려준다. 이런 영향으로 아직까지 뇌성숙(??)을 이루지 못한 남성들은 현실과 가공의 현실을 착각한다. 더구나, 자신이 얼마든지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린 아이들에게 표출해서 절대자로써 행동하게 된다.

 

어린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준 최초의 작품이 바로 '롤리타'이다. 책을 읽어보면 현대에 못된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게된다. 오로지, 단 하나 성적인 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온갖 미디어가 만들었다. 이런, 이미지에 남성들은 열린(??)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손사래를 치고 아니라고 부정해도 젊은 여성이 더 눈에 들어간다는 것이 솔직한 감정이다. 거기에 어린 여성을 훔쳐보는 시선은 남성의 본능이다. 이성으로 억누르고 도덕적인 감정으로 외면할 뿐.

 

꼭, 모든 남성이 그럴 것이라는 판단도 잘못되어 있다. 그저, 귀엽게 볼 뿐이다. '롤리타'의 남성은 단순히 어린 여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상한 감정을 지닌 삐뚫어진 남성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롤리타라는 어린 여성을 좋아한 것만이 아니라 소설에서 그가 만난 모든 여성들은 롤리타를 포함하여 평범하고 보통의 여자들은 단 한명도 없다.

 

주 메인이 롤리타이고 2명의 여자들이 추가로 더 나와 험버트와 함께 살때 어떤 여성도 익히 알려진 여성의 이미지는 없다. 험버트가 자신의 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결혼하는 여성이 있고 함께 살면서 총이 눈 앞에 있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난하는 여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험버트라는 남성이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 있는 인물을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롤리타'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전에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들어 주고 책의 내용이 자극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어준다.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 단순히 어린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논란이 엄청 되었겠지만 - 지금 클릭 한 번이면 온갖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에는 책에서 어떠한 말초적인 묘사도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은유와 아주 작은 묘사가 나오지만 그 정도는 '롤리타'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세계적인 문학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통속소설이 아닌 문학작품으로 취급받는(??) 분명한 점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원래부터 어린 여성에 대한 약간의 판타지를 갖고 있던 험버트는 롤리타를 보자마자 빠지게 된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협박한 롤리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조심하려하는데 교통사고라는 천운이 따른다. 롤리타와 단 둘이 이 세상에 남겨진다. 그것도 부녀지간이라는 묘한 관계로. 어디에 가더라도 아무런 꺼릴것이 없게 되었다. 롤리타는 결코 수동적으로 아빠라 불리는 남성에게 끌려다니거나 강압과 강요에 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오히려 리드를 한다. 애달프게 만든다. 두 사람의 관계와 나이차를 제외하면 남녀간의 연애와 비슷하다.

 

험버트라는 남성의 시선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롤리타에 대한 묘사는 너무 자세하고 애절하다. 이토록, 자세하게 이성에 대한 묘사를 하는 연애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사랑이 담긴 세세하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묘사에 감탄을 하게 된다. 롤리타에 대한 외부의 모습을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묘사하거나 그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서 사랑스러워 미치는 묘사는 얼마나 절절하게 롤리타를 사랑하고 있는지 진심이 분명히 느껴진다. 롤리타가 험버트의 의부딸이자 이제 겨우 한국나이로 만 10세가 넘었다는 점을 잊고 읽는다면 이토록 이성에 대한 사랑넘치는 묘사는 일찍히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롤리타도 결코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다. 왜 아니겠는가마는. 분명히 자신과 30살 정도의 차이가 나는 남성이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사랑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애써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모잘라 이용하고 놀리고 갖고 논다는 느낌마저 든다. 흔히 생각하는 어른 남성이 아이 여자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롤리타가 험버트를 조정하고 감정을 주물럭 주물럭 만지면서 자신에게 더욱 미치도록 만든다고 본다. 그런 이유로 비록, 험버트가 속으로 부르는 애칭이지만 '님펫'이라고 한다.

 

'님펫'은 롤리타를 부르는 말로써 작은 요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책에서는 작은 악마라는 뜻으로 쓰인다. 롤리타가 진정으로 험버트에게는 악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상관이 없을 세상 유일의 사랑이자 질투의 대상이고 세상이다. 끊임없이 롤리타를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롤리타에게 험버트는 그저 스쳐가는 남자였을 것이다. 아빠로써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남성을 알게 해 준 인물로써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른다. 

 

1부는 롤리타와 험버트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뤘다면 - 전적으로 험버트의 관점에서 - 2부는 파국을 맞이한다. 모든 관점은 롤리타를 바라보는 험버트의 관점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가지려고 했고 갖지 못했지만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를 불행하게 만든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복수를 하는데, 평생 지켜보며 복수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분명히 스스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것이라 알고 있지만 자신의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더욱 빠져든다. 금지된 사랑의 달콤함이라는 늪에 빠져 나오려고 하지도 않고 점점 빠져가는 자신을 끝까지 인정하고 나올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분명히, 롤리타는 문제적 작품이다. 롤리타의 나이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인 관념이다. 나이를 제외한다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애절하게 사랑하는 이야기다. 문학작품이라는 표피를 쓰게 된 것은 단순히 통속적인 이야기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묘사와 내면의 변화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심경을 공감할 수 있게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근거로 아동 성적 학대와 결부시켜 합리화하는 놈들은 나오지 말았으면 한다. 험버트가 분명히 이상한 놈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남성이라는 동물의 속성과 진화론적인 본능은 인정하다고 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