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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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작품 해설에 의하면 - 아직 작품 해설을 읽지는 않았다 -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인지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감흥도 오지 않았다.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어제, 오늘 갑자기 뜬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몇 백년이라는 시간을 단련되고 검증받은 작품이다. 

 

파우스트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작품해설에 나온 이야기는 분명히 사람들이 느끼고 읽은 것에서 얻은 공통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 보면 내가 읽은 파우스트는 전혀 그러하지 않게 느껴졌으니 이것은 분명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것이다.

 

파우스트를 1권과 2권으로 나눠져 있는 책으로 읽다보니 한 권씩 리뷰를 쓰게 되어 다소 구분되어 쓰게 된다는 점은 있다. 지금은 2권의 리뷰를 쓰게 되는 시간이다. 대체적으로 대하장편 드라마와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미니시리즈보다는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다. 워낙, 긴 호흡으로 드라마가 이어지다보니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을 한다.

 

주인공만 나오고 주인공의 이야기만 하게 되면 긴 호흡으로 가는 문제가 있다. 영화같은 경우에는 아예 주인공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도 있을만큼 러닝타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만큼 파우스트는 대작이라고 하면 대작이라 할 수 있어 - 당시를 생각하면 이렇게 긴 작품이 많지는 않았을테니 - 파우스트가 주인공이라도 꼭 모든 장면에 나오고 극을 이끌어 가야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파우스트가 왜 이리 등장을 하는 장면이 적느냐였다. 심지어 몇 십페이지를 넘어가도 파우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무대 어딘가에서 존재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읽기로는 그랬다. 다양하게 변신을 거듭하는 메피스토펠리스가 오히려 더 많은 장면에서 등장을 한다.

일견, 그렇게봐도 무방한 것은 파우스트와 거래를 한 메피스토펠리스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예초에 파우스트에게 거래를 제안한 메피스토펠리스가 없었다면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진행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래를 승낙한 파우스트가 없었다면 마찬가지였다. 둘의 관계는 공생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이 없었다면 존재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존재의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맞는 것인가?)

 

열심히 읽으면서 - 실제로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 잘 읽히지 않아 -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심히 보는 편이였는데 개인적으로 도대체 왜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리스와 거래를 성사시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딱히,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거래를 하여 인간의 욕망을 이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후에 많은 문학작품과 현재의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작품으로 생각되는데 그에 비하면 파우스트라는 작품에서 파우스타가 원하는 욕망은 모호하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먼저 의식주의 해결이다. 의식주가 먼저 해결되어야 그다음의 욕망이 생겨난다. 파우스트는 딱히 의식주를 갈급한 인물은 아니였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다음으로 명예, 사랑등등이 따라올 것이라 본다.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현대 문학에서는 악마와 거래하는 이유가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이다. 또는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서인데 대체적으로 명예욕을 만족하기 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이유가 많다.

 

파우스트는 딱히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가 메피스토펠리스와 거래를 한 이후에 가장 슬퍼하고 애타게 찾는 것은 사랑으로 보였다. 대부분 첫 눈에 반한 이성에게 꽂혀 사랑을 하려 하지만 매번 사랑을 얻지 못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결국에는 혼자가 된다. 매번, 메피스토펠리스의 농간에 의한 좌절을 겪는다. 이렇게 보면 파우스트는 사랑을 찾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차 있고 어느정도 의식주가 해결되는 파우스트에게 부족한 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였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봤을 때 파우스트가 딱히 명예를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상당히 높은 자리와 자산을 갖게 되었지만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바는 아니였던 듯 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을 뿐이지.

파우스트가 무엇인가를 꼭 갖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장면은 없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을 때 간절히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부분은 간절히 원하지 않아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살아가야 할 의미가 부여된다. 어김없이 슬픈 결말로 사랑이 이뤄지지 못하고 아주 짧은 추억만이 남았지만 추억이라 불릴 수 없는 회한만이 남을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투가 치뤄지고 파우스트는 일정 역할을 메피스토펠리스와 더불어 해 내는데 왜 그 장면이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그런 상황에 뛰어들어 업적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였을까? 평시에는 업적을 세워 명예를 드높힐 기회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전쟁이나 전투가 아니고는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현대는 꼭 전쟁이나 전투가 아니라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유로 전쟁이나 전투가 과거보다 덜 생기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힐 기회지만 거꾸로 볼 때 한 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는 본능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통해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현대사회에서는 풀어낼 수많은 기회가 눈꼴사나울 수 있어도 한편으로는 덕분에 인류가 보다 풍성해지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파우스트는 죽고 메피스토펠리스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죽음은 그가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와 상관없이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에 따라 후세에 대대로 그의 이름과 업적이 내려오게 된다. 한편으로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이 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전승하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지금 살아가는 존재들은 엄청난 환경을 이겨낸 승리자들이다.

 

메피스토펠리스는 당시 시대상을 볼 때 권선징악적인 요소를 마지막에 넣었어야 했을 것 같은데 현대의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를 굳이 넣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든 인간의 결정이였고 얼마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는 갈수록 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시대가 되어버린 시대상이 아닐까한다.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지만 제대로 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하려는 점이나 괴테라는 대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하게는 단 하나도 모르겠다. 남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점도 있지만 수 많은 사람들중에 나같은 생각으로 읽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랴. 작품은 작가가 쓰지만 작품의 해석은 오로지 내 몫인걸.

 

 

파우스트 1편의 리뷰 http://blog.naver.com/ljb1202/20222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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