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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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우리는 괴테라는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호칭하고 있는데 괴테의 대표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등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베르테르 효과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 볼만큼 분량이 짧지만 '파우스트'는 워낙 유명한만큼 실제로 책을 읽은 사람들은 많지 않고 그저 '파우스트'라는 제목만 알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머리속이 약간 뒤죽박죽이라 순간 '유리알 유희'가 떠오르면서 분명히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 기억되는데 떠오르지 않아 찾아보니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였다. 둘 다 독일작가라 혼동을 했던 듯 하다. 괴테는 가장 유명한 두 작품 이외에도 꽤 유명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고 살았던 당시의 평균수명에 비하면 긴 82세까지 생존을 했다.

 

단순히 괴테의 작품으로만 알고 있던 '파우스트'는 사실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다. 당시 독일지역에서 전설과 민담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괴테가 새롭게 구성하고 창작한 작품이다. 이런면에서는 세익스피어와 비슷하다. 세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 불멸의 작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모든 창작품의 영감을 주고 있지만 세익스피어도 내려오던 이야기를 했던 것과 같다.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게 되었는데 둘 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볼 때면 창작하는 사람들이 역시나 꼭 새로운 것을 하려 하기보다는 기존에 있던것을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범위에서 잘 버무리고 다듬고 새롭게 선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역량이 무척 중요한 요소이기는 해도 말이다.

더구나 파우스트를 읽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너무 친숙하고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같이 소설형식이 아니라 희곡대본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많이 사라졌다고 느끼는데 특유의 번역체라는 것이 있다. 아무래도 외국어를 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특유의 미묘한 맛을 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예전에는 그런 점이 더욱 도드라져서 분명히 국어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처럼 읽히지 않는 번역이 많았다.

 

그나마, 소설은 읽어 나가면 되기 때문에 직독직해식의 번역이라도 큰 무리가 없는데 '파우스트'와 같은 희곡 작품들은 우리나라 말로 제대로 번역되지 않다보니 작품이 공연될 때보면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으로 대사가 나온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많은데 워낙 거장의 작품인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런데 파우스트에서도 그런 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17~18세기 작품을 읽는다거나 하면 지금 쓰는 말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판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가 현재 쓰는 말과는 달라 분명히 한국말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들리는 것과 같다. 그만큼 예전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올 수 밖에 없는 요소이기는 해도 너무 우리 실생활과 동 떨어진 번역체의 대사가 갖는 이질적인 느낌은 '파우스트'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파우스트가 소설형식이 아니라 희곡형식으로 되어 있어 세부적인 묘사가 생략되다보니 읽는 사람입장에서 다소 여유를 갖고 읽게 되지만 그만큼 생략되는 세부적인 묘사는 읽는 사람이 알아서 채워넣어야 한다. 공연으로 올려졌다면 연출자의 몫이고 보이는 것을 쫓아가며 이해해야하겠지만 글로 읽는 사람들로써는 오롯이 순수한 본인의 몫일 뿐이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드라마틱하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어떤 사건들이 일어 날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던 듯 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느낀 감정이나 평론가들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설명과 평론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순수하게 내가 읽으면서 든 생각을 적으려고 하는데 먼저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 맞는가 하는 점에서 약간 의아한 측면이 있는데 그건 최근의 작품들이 워낙 드라마틱하게 악마와 계약을 통해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점을 묘사하는데 반해 파우스트는 너무 밋밋하다. '이게 끝??'이라는 심정이 들만큼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리스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이뤄진다.

거창한 점은 전혀 없고 '해 볼래?'라고 물어보니 '한번 해 볼까?'하는 식으로 이야기되는데 파우스트가 딱히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악마로 대변되는 메피스토펠리스와 계약을 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악마와 계약을 할때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얻기 위해 하지만 무엇인가 잃는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한다는 파우스트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말이다.

인생에 있어 반드시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려야하는 상황도 아니였지만 파우스트의 서두를 보고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볼 때면 파우스트는 엄청난 지식인으로 스스로 뛰어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 악마가 유혹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네가 그렇게 잘 났다는 말인가?하면서 말이다.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는 파우스트가 처음으로 생긴 감정은 사랑이다.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었는지 몰라도 불만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랑!사랑!사랑! 인류의 가장 큰 골치꺼리이자 행복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이제 원하는 것이 생겼다는 의미가 된다.

그다지 원하는 것이 없던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갑자기 원하고 바라고 욕심이 생긴다. 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버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이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사랑은 영원히 인간에게 불멸로 남는 주제이고 소재이다. 닳아도 닳지 않는 무궁무진한 무엇인가이다.

사랑이 영원하고 무엇인가 의미로 존재하려면 대부분 작품에서 사랑은 짧아야 한다. 짧은 사랑의 경험과 추억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런 인간은 어떤 쪽으로 튀어버릴지 모른다. 본인도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인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인간을 성장 또는 발전시키고 넓게 나가서 인류를 퇴보시키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는 위대한 비물질(??)이다.

파우스트 1부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리스와 계약을 하고 파우스트가 사랑을 하게 되고 불행에 빠지게 되는 여정이다. 파우스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똑똑한 인물이지만 감정에 빠지게 된다. 감정은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이게 악마의 유혹인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은 악마의 괴략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작품에서.

이제 겨우 도입부를 읽었다고 할 수 있어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2부까지 읽어야 정확하게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직까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영혼을 팔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나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현대가 워낙 당시보다 독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어지간한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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