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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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편은 http://blog.naver.com/ljb1202/191790484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첫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필립의 마지막 장면에서 짜증이 났지만 헤어지며 1편이 끝나 괜히 기쁜 상태에서 다른 책들을 읽고 다시 '인간의 굴레에서 1'를 읽게 되는데 필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상당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괜히 알고 있던 친구가 다시 등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놈의 첫 사랑은 남자를 아주 멍청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요물이다. 꼭 필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그렇다. 첫 사랑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남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남자들에게 첫 사랑은 지울 수 없는 문신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한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다시 보게 되면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 다시 새록 새록 되살아나는 상대이다.

 

나쁜 남자나 나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젊은 시절 이성에 사랑이 빠지는 대부분의 청춘남녀들의 공통점인데 책을 읽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태초의 이브와 아담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결국에는 먹는 것처럼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매력에 끌려 자신에게 심하게 막 대해도 더욱 좋아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착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평소에 하지 못하는 일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고 행동하는 이성을 볼 때 갖고 싶다는 욕망이 불꽃처럼 살아난다. 자기처럼 착한 이성에게는 오히려 고리타분함을 느끼고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다른 극에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되는 감정이 이성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에게 밀드레드는 요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립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을 인지하고 언제든지 불리하고 아쉬울 때는 어김없이 뻔뻔하게 필립을 찾는 밀드레드를 볼때마다 울화통이 터지지만 그것이 바로 청춘의 매력인가 싶기도 하다. 필립과 같은 젊은 남자에게는 내면의 매력보다는 외적인 매력이 더욱 미칠 듯이 다가올테니 말이다.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계속 옆에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첫사랑의 매력일 것이다.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고 만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제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여전히 곁에서 첫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필립의 마음은 아닐까한다. 

 

반면, 철저하게 남자의 관점이지만 - 시대상황을 볼 때 - 자신의 매력때문에 필립이 자신을 가까이 두고 있다고 믿었던 밀드레드가 온갖 유혹에도 필립이 넘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저지른 사건은 끔찍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상대방을 가만히 놔두냐는 것이다. 측은지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굴레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이다. 밀드레드가 사랑하지도 않은 필립 근처를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도 바로 돈이 없기 때문이고 필립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도 돈때문이다. 시대가 아직 자본주의라는 말이 회자되지 않았을지라도 돈은 이미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한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상류계층이나 하류 계층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여부였다. 상류계층이라도 돈이 없으면 하류계층이 되는 것이고 -의사를 준비하던 필립도 돈이 없어 노숙자 생활과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 하류계층이라도 돈이 있으면 상류계층 사람을 부리면서 살 수 있다. 

 

필립은 상류계층은 아니고 중류계층에 속했지만 특별히 돈이라는 것을 벌면서 살아 본 적은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통해 풍족하지 않지만 아쉽지 않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본인뿐만 아니라 밀드레드까지 책임지고 살았던 것이다. 진정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 돈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지만 딱히 준비를 한 적도 없고 대단히 노력을 한 적도 없었다.

 

어느덧 갖고 있는 돈은 다 떨어지고 - 인과응보에 속했다 -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필립은 맞서 싸우기 보다는 도망을 택한다. 정처없이 떠 돌아다니고 아직까지 체면이 앞서 - 이건 나랑 같다 ㅠ.ㅠ -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제대로 빌리지도 못하고 어렵사리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찾아가 다행히도 지인의 배려로 인해 맞설 용기를 갖게 되어 상점에 취직을 하게 된다.

 

늘,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논하던 필립은 눈 뜨고 일하고 피곤해서 잠에 골아 떨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인간은 그 다음을 생각하고 인식하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봉급에 정신이 멀쩡할 때에도 체력적으로 힘들어 휴식을 해야만 하는 삶이 반복될 때 인간은 단순해진다. 바로 눈 앞을 해결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숙부의 사망으로 받은 유산으로 다시 중산층으로 돌아온 필립은 무사히 의사과정을 마치는데 어려웠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존감이 커지고 당당해 진다. 젊은 시절의 불같은 사랑은 이제 느껴지지 않지만 - 그 당시 나이로 30살이면 지금의 40살은 족히 되었을테니 -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여자라 판단되는 여성에게 청혼을 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젊은 청춘 남녀들이 나쁜 남자,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때문이 아닐까 한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 앞에서 하니 끌리는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못되게 구니 오히려 이런 점이 매력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자석이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지만 다른 극끼리는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이 갖지 못한 인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런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진다. 청춘의 시기라는 것은 반항의 시기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편안것을 찾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비슷한 조건과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는 이성과 만나게 된다. 사랑이냐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후자도 결혼을 하면 중요한 것을 보면 정답은 없는 듯 하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인간이 태어난 의미에 대해서 필립이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난 이상 무엇인가 거창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중에 하나로 보인다. 내용중에 양탄자 이야기가 나온다. '페르시안 양탄자 이야기'로 꽤 유명한 듯 하다. 사람들의 해석이 있던데 내 생각에는 인간이 태어난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와 같은 문구도 있지만 인간이 태어난 의미를 찾으려 하니 대단한 것을 하려고 하고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니 이로 인해 본인 삶이 힘들어 지고 가끔은 역사가 힘들어 지기도 하다. '페르시안 양탄자'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달리 보이는 것과 같이 인생도 다르다는 표현도 하던데 그 보다 인간이 태어난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더 나에게는 정답에 가깝다. 허무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인정하고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인다.

 

그토록,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고 있어 불꽃같은 사랑을 경험했지만 필립은 우연히 결혼이라는 것을 결심하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보다 멋있고 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 다녔지만 그 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자신이 현재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을 소중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손도손하게 가정을 꾸려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에 그것이 인간이 태어난 의미로 규정할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말이다. 별 것 없는 하루 하루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보니 앞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책도 읽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조금 부담스러워 읽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의 책들을 읽는데 부담이 사라졌다. 아마도, 세계 문학 전집을 읽는 권수가 10권이 넘어가면서 예전의 글스타일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뭐, 흔히 말하는 만연체에 적응하면 되는 것이니..

 

열심히 썼던 6~7문단이 날라가서 다시 썼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쓸데없이 더 길게 필요없는 이야기를 첫번째보다 재미없게 썼다. 처음의 강렬한 감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굴레에서' 추구하는 인간들의 심리로 보인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추구말이다. 그래도, 이미 사라진 것을 어쩔 수 없어 이상으로 마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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