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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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 중 집필하는데 더 힘든 건 어떤 것일까. 둘 다 써 본적이 없어 모르겠다. 단편보다 장편이 더 힘들 듯한데 의외로 단편이 더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작가가 많다. 장편에 비해서 단편은 핵심만 정확히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런 것이 아닐듯하다. 장편은 여러 플룻이 이어지면서 다소 장황하기도 하다. 분량을 어느 정도 채워야 하니 좀 더 다양한 캐릭터를 출연시켜야 한다. 단편은 아주 단순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야 한다.

옆으로 보지 않고 짧은 시간 내에 달려가면서 기승전결이 다 이뤄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단편은 더 힘들 수 있다. 대다수 성공한 작품은 장편이다. 단편이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편으로 큰 성공을 이룬 작가다. <픽션들 : 보르헤스 전집 2>에서 작가는 시작에 앞 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것,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눠졌다. 2부보다는 1부가 더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다. 가장 큰 이유는 1부에 나온 단편은 전부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또는 어떤 책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이야기를 한다. 책 하나로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작가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위대함이 아닐까한다. 무엇보다 단편으로 대단한 작가라는 호칭을 얻는 건 쉽지 않을 듯한데 호르헤스는 얻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유식함과 풀어내는 문학적 심미 아닐까한다.

번역하는데 어려운 단어를 썼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나 작가가 쓴 글이 내포한 묘미에서 나오는 듯하다. 단편이지만 엄청나게 많은 단어가 나온다.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가 무척이나 많다. 이런 작품이 문학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소설이 사회 현상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지만 문학이 표현하는 단어의 명징함을 알려주는 도구로도 쓰인다. 단어를 사장시키지 않고 표현해서 오래도록 시간이 지나도 우리 곁에 살아남게 해주는 역할도 분명히 한다.

총 1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소설을 읽으면 초반에 적응 단계를 지나 중반부터 집중하게 되고 후반에 익숙하게 읽게 된다. 이 책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오히려 앞 부분 단편들을 좀 더 집중하며 읽었다. 첫번재와 두번째 단편이 더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것 같은 구성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가 첫번째 소설이다. 우크바르라는 단어에서 출발한다. 이 단어가 친숙하지 않은데 어디선가 발견했다.

그건 백과사전이었다. '영미백과사전이었는데 실제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02년 판을 베낀 해적판이었다. 백과사전에서 본 단어였는데 이상하게도 영미백과사전 46권을 찾을 수 없었다. 46권에서 917페이지까지 있는데 그 단어는 921페이지까지 있었던 영미백과사전에서 봤다.  해당 책은 해적판이니 이걸 정확히 어디서 따질 수도 없다. 주인공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918페이지와 920페이지에 있는 단어도 기억을 할 정도니 아니라고 따지기도 힘들다.

원본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있어야 할텐데 그도 아닌 듯하다. 우크바르라는 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걸 근거로 온갖 삼라만상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거짓인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단어를 근거로 온갖 지적 탐험을 해나간다. 이 단어가 있는 백과사전은 원본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적판이 원본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희박해도 불가능은 아니다. 그 외에도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이나 '바빌로니아의 복권'이 좀 더 흥미로웠다.

역시나 있을법한 내용을 근거로 작가의 상상력을 펼친다. 전부 그런 책이 있을 것이라는 논제를 밀어부친다. 진짜 그런 책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내가 읽고 있는 건 소설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책이 진짜로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소설이 허구다. 허구인 소설에서 나오는 어떤 내용도 현실을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가상이다. 아르헨티나 작가라 쓰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 읽는데 가장 어려운 점이다. 단어는 우리의 사상을 지배한다.

우리가 모국어로 모든 걸 생각한다. 외국어가 확실히 익숙해지려면 내 생각 자체를 해당 언어로 해야 완벽하다고 한다. 그만큼 스페인류의 언어로 된 글이라 친숙하지 않은 단어가 많다. 난 1부가 훨씬 흥미롭게 읽었는데 정작 보르헤스가 유명해진 것은 2부에 쓴 소설이 포함된 이후라고 한다. 장편보다 단편이 좀 더 내용이 짧아 읽기 편할 수 있다. 막상 <단편들>을 읽는다면 그건 소설의 분량이 아닌  내용의 깊이가 아닐까한다. 단편이 길이가 짧을뿐이지 내용은 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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